집 밖 아침 공기가 차다. 열흘 전 아들이 입대한 양구는 더 쌀쌀할 것이다. 아파트 산책로에 은행이 노란 열매를 떨궈 놓았다. 때가 차고 여물면 탐스런 열매를 맺는 것이 자연만의 이치는 아닐 것이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탄천 공원에서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있다.
주중 휴일인 한글날이라 산행을 하러 터미널에서 세종 행 버스를 탔다. 계룡산을 거의 20년 만에 다시 찾아 보기로 한 터였다. 동학사 갑사 남매탑 등 계룡산의 기억을 꺼집어내 보려 하지만 먼 발치에서 가물거린다.
정안 IC에서 빠져나온 버스는 한참 만에 세종시내로 들어서서 정부청사 정류소에 일단의 승객을 내려놓았다. 세종 시내 곳곳은 건물 올리는 공사가 한창이다. 금강 남쪽에 위치한 버스터미널로 마중나온 친구의 차에 올라 갑사로 길을 잡았다. 금강 위 다리를 건너고 터널을 지나고 산 허리를 돌아 구불구불한 이차선 아스팔트 길을 따라가다 보면 영락없이 깊숙한 산골에 들어온 느낌이다.
갑사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사하촌을 지나 매표소가 있는 일주문으로 들어섰다. 계곡을 따라 난 아름드리 나무가 울창한 좁은 길이 갑사의 사천왕문으로 인도한다. 들숨을 따라 폐부 깊숙히 들어오는 공기가 차고 상쾌하다. 내려오는 길에 갑사에 들르기로 하고 가슴 높이 담장 너머 경내를 훑어보며 등산로 입구로 들어섰다.
등산로 오른 쪽에서 흐르는 계곡의 물 소리가 청량하다. 수량이 풍부한 계곡을 따라 오르다 보면 채 10여분 만에 주 등산로 옆에 용문폭포가 비경을 내놓는다. 산등성이 너머에서 나무가지 사이로 뚫고 들어와 이마 위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 싫지 않다.
잠시 후 신흥암이 맞이한다. 호랑이 등에 앉은 인자한 얼굴의 산신령을 모신 산신각 바깥 벽을 폭포 계곡 솔 단풍나무가 어우러진 선계의 사계를 담은 벽화가 채우고 있다. 산신각 뒤로 난 길을 따라 오르면 거대한 바위처럼 보이는 자연석 천진보탑이 자리하고 있다.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곳으로 충남 문화재자료 제68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아무런 현판도 걸리지 않은 신흥암 본전은 뒷 벽면 창밖으로 보이는 천진보탑이 본존불을 대신하고 있다.
신흥암에서 금잔듸 고개로 올라가는 너덜길 옆 계곡은 고도가 높아 물이 말랐다. 일단의 젊은 산객들이 물병을 하나씩 든 채 가파른 오르막 길을 하나둘 앞질러 간다. 금잔듸 고개에서 오르막이 끝나고 능선을 휘돌아 삼불봉 고개에서 동학사 쪽에서 올라온 산객들과 스쳐 지나며 남매탑으로 난 돌계단 길을 십여 분 내려갔다. 벌레 소리가 가을 산을 채웠고 얼굴과 등은 흥건히 땀이 채웠다. 매년 한 번씩 열린다는 에어쇼의 제트기 굉음이 가끔씩 하늘을 가득 채웠다가 구름처럼 흩어진다.
남매탑 주변엔 천연색 등산복 차림 산객들로 단풍이 들었다. 산객들이 가을이 완연한 계룡산의 바람 하늘 풍광을 음미하고 어떤 산객들은 탑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기기에 여념이 없다. 남매탑 아래 상원암을 둘러보고 약수를 한모금 마셨다.
호랑이에게 도움을 준 스님과 그 호랑이가 물어다 준 처녀에 얽힌 남매탑의 전설은 다시 들어도 감동적이다. 목에 걸린 뼈다귀를 빼달라고 스님 앞에서 아가리를 벌리고 보답으로 처녀를 물어다준 호랑이는 민화 속 호랑이처럼 익살스럽고 은혜를 갚는 도리를 아니 영특하다는 생각도 든다.
삼불봉 고개로 거슬러 올라와서 숨을 고르며 잠시 앉아 휴식했다. 삼불봉 가는 계단길을 산객들이 길게 줄지어 오른다. 그 행렬 속에 섞여 힘겹게 오르다가 중간중간 뒤돌아서서 용트림하듯 꿈틀대며 내리닫는 산줄기와 시가지를 조망한다. 해발 775미터 삼불봉 정상 표지석 주변은 인증샷 찍는 산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다.
출입이 통제되고 있는 천왕봉을 비롯해서 사방을 두루 조망한 후에 삼불봉을 뒤로한다. 관음봉 가는 길 첫 봉우리에 올라서면 지나온 삼불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 산객이 칠성봉 아래 보이는 영험하다는 칠성바위를 가리키며 계룡산에는 무속인 양성 사관학교도 있다고 귀뜸한다. 우측으로 산자락 멀리 계곡에 숨어 있는 갑사도 눈에 들어온다.
무명 승복에 둥근 챙 등산모를 쓴 젊은 여승과 좁은 능선 길에 서로 비껴서서 잠시 얘기를 나눴다. 계룡산 남매탑과 동학사를 둘러볼 요량으로 경주에서 왔더란다. "혼자서 호젓하고 좋겠네요" "왜요?" "저는 말 많은 친구와 동행이라 머리가 번잡해요." 앞서 가는 친구가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호호호" 갸름한 얼굴 입가에 번지는 미소가 흡사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닮았다. 그 순한 미소에 마음 속에서 난데없이 찔끔 눈물이 나려고 한다.
관음봉이 성큼 눈앞으로 다가선 능선은 잘 다듬어진 검은 돌이 반듯하게 깔려 있어 걷기가 편하다. 좌측으로 천애절벽을 낀 암릉인 자연성능(自然城稜) 저 아래 동학사가 모습을 보인다. 족히 팔순은 돼 보이는 여성 산객 한 분이 성능 가장자리 철책에 기대어 장관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다. 답답한 서울에서 대전으로 이주했는데 같이 산행하던 친구들이 하나둘 떠나고 없지만 산을 찾는 것이 여전히 좋다고 한다.
관음봉으로 난 수 백 개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옷소매로 연신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해발 766미터 관음봉 정상에도 인증샷을 남기려는 산객들의 줄이 길게 늘어져 있다. 계룡 8경 가운데 제4경 '관음봉 한운(閑雲)'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암봉 위로 높게 펼쳐진 파란 하늘에 한송이 신비로운 꽃마냥 떠있는 구름이 가히 장관이다.
관음봉에서 연천봉 가는 길은 산객이 적고 평탄하고 아늑하다. 연천봉 고개에 서니 서늘한 바람이 맞아준다. 이 고개는 갑사로 내려가는 분기점이지만 지척인 연천봉과 그 아래 자리한 등운암을 지나칠 수가 없다. 해발 740미터 연천봉은 한낮이라 계룡 제3경 '연천봉 낙조'를 보지 못하지만 흰 구름이 피어 오른 파란 하늘과 계룡지 주변의 들판을 펼쳐 보이며 아쉬움을 달래준다.
연천봉 아래 안겨 천황봉은 바라보는 등운암에 들러 수통에 받아 둔 시원한 약수를 한 모금 마셨다. 1300여년 전에 창건된 유서 깊은 사찰이지만 아무런 단청도 없이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내려앉은 전각이 보기에 안쓰럽다. 계룡산의 여러 준봉들 가운데 가장 영험하다는 연천봉 아래 자리를 잡았지만 다른 사찰들 보다 제일 높은 곳에 있어 찾는 이가 적고 관심에서도 멀어졌을 터이다.
연천봉 고개로 돌아와서 갑사로의 하산 길에 접어 든다. 산객이 드문 너덜 계곡길은 길고도 지루하다. 한참을 내려가니 작은 계곡 물소리가 들리고 이어 두 계곡이 하나로 합쳐지며 점점 커지는 물소리와 함께 크고 작은 폭포도 보인다. 대자암으로 난 포장도로을 만나며 계곡 옆길을 탈출했다가 갑사 300미터 전에 다시 계곡 쪽으로 내려섰다. 계곡은 서운한지 발 아래 멀리서 속삭이며 갑사까지 따라온다.
다시 두 계곡이 합류하는 곳 다리를 건너 갑사로 들어서며 원점회귀 산행의 방점을 찍었다. 갑사의 약사여래입상, 관음전, 월인석보목판 전각, 삼성각, 대웅전 등을 찬찬히 둘러봤다. 3미터는 됨직해 보이는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불과 크기가 남다른 '대웅전' 현판이 인상적이다.
사천왕문에서 일주문에 이르는 긴 길을 지나 사하촌 식당에 들러 막걸리 한 병과 파전 한 접시를 시켰다. 접시를 그득 채운 버섯이 듬뿍 든 파전으로 연신 젓가락질을 하며 허기진 배를 채우고 시원한 막걸리로 마른 입을 달랬다.
"공기 좋고 풍광 좋은 곳에 사시니 신선이 따로 없네요" "어유 손님이 많어야지유"
고달픈 생업 현장을 신선놀음터로 매도했나 싶어 송구했다. 인심 좋아 보이는 식당 아주머니는 접근성 좋은 동학사 쪽과는 달리 찾는 이가 많지 않아 속이 상할 법도 하지만 얼굴엔 미소를 머금고 있다. 사하촌 가게마다 광주리를 그득 채운 호두알 만한 햇밤들과 진열대에 쌓인 온갖 산나물들이 풍요롭고 넉넉한 산촌의 가을을 말해준다.
박정자삼거리를 지나 유성터미널로 향한다. 뒤로 멀리 천황봉이 포말처럼 부서진 구름 하늘을 배경으로 실루엣을 드리우고 있다. 장군봉 능선은 햇살을 품은 구름을 이고 잘가라며 배웅하고 산행을 함께한 고마운 친구와도 터미널에서 작별했다 다음을 기약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