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순례길 3코스(일부구간) 탐방
일시 : 2024. 1. 17(수) 08:30~15:00
참가 : 박영부 장로, 부경호 장로, 심현구 권사, 김동은 권사, 김원순 돌담연구소장
이동
08:30~09:00 애향운동장 게이트볼 주차장 출발 조수교회 도착
09:00~09:20 조수교회 출발 준비(준비운동-지도 김동은 권사)
09:20~10:00 용선달리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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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10:40 용선달리 출발 저지오름 정상도착(중간에 5분 휴식 티타임)
10:40~11:10 저청초등학교 도착(먼나누 앞에서 사진 촬영)
11:10~11:40 청수리 성결교회 도착(간식타임 및 교회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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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0~12:30 청수리 마을회관을 지나 가마오름 언저리로 산양큰엉곶 입구 도착
12:40~13:00 산양리 큰엉곶 입구 출발 조수리로 이동(콜댁시 2대로 이동)
13:00~14;20 한양동 식당에 한식뷔페( 맛집임) 점심 후 유자차까지 마시고
14:20~15:30 금악리-평화로-출발지 도착 후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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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 순례길을 걸으며 과거 목사님들이나 굥니들이 걸었던 그 길을 과거로 돌려서 걸었다. 이미 순례길 개설할 시 리본을 달았는데 훼손된 것들도 있고 나무가지가 자라서 보이지 않는 것도 도쳐 붂거나 가지를 일부 정전하기도 하면서 보수하는 시간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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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리 마을 설촌
위치 : 제주시 서쪽으로 35km 중산간에 위치하며 한경면 조수리다. 조수리는 1, 2리가 있으며 1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추정의 근거는 원제국의 동, 서아막을 설치할 때 조수리에 인근에 서아막이 있었기에 원나라 다루가치(목동) 일부가 살았을 것으로 본다는 견해이다. 아막은 말을 지키기 위한 숙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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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의하여
기록에 의한 조수리 설촌은 조선 태종 때 군현제가 실시되면서 제주목, 정의, 대정현 3읍제가 되었다. 3읍체제로 행정이 운영할 시 대정현에 가까웠지만 소속은 제주목이었다. 세종 11년(1429년) 제주출신 고득종(당시 한성부윤)이 목장설치를 임금께 건의하여 이듬해 1430년 목장을 구분하는데 10소장으로 구분하였고 조수리는 6소장에 인접한 마을이었다. 이때 조수라는 마을이 등장하는 것이 첫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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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선달리와 조수리 설촌
용선달리는 현재 저지리 수동에 속하며 조수리와 경계를 이룬다. 조선중기 이기빈(1563~1625) 제주목사의 사촌 동생인 이몽빈이 용선달리에 내려와 거주하면서부터라고 하였다. 이몽빈은 이기빈 목사보다 20여 세 아래였다. 사람 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설촌 할 때 물이다. 용선달리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물이였기에 설촌이 가능했을 것이고 비만오면 용선달리 `구멍목이`라는 구멍에서 물이 철철 넘쳐 이근까지 물바다가 될 정도로 물이 좋았고 현재까지 잘 관리하고 있다. 이몽빈은 전주이씨 제주입도 시조공이고 계성군파조가 된다. 이후 1670년 후반에 조후준(趙厚俊)이 보마이(保馬匜)왓(밭)에 살면서 가세가 확장되면서 현 한양동으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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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리 지명의 유래
조수리(造水)는 한자의 음을 빌리면 “좋은 물”이다. 조호물(造乎勿), 17세기 후반 조수촌이 등장하고 1702년 탐라순력도에는 조호수(造乎水)로 1709년 탐라지병도서에는 조호물촌(造乎勿村), 조수리는 조선시대 구우면에 속했다. 오창명 제주어 사전을 썼고 제주대 언어연구원에서 탐라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데 조수리는 한자차용으로 “좋은 물”로 이야기 한다. 부디 좋은 물이라하며 용선달리 물로 추정이 가능하다. 후자에 용선달리 물가에는 치수기념비(治水紀念碑)도 세워 있다. 조호물촌을 지역원로들이 모여 소주리라 하자는 의견(1795년)으로 오늘에 이르까지 조수리로 고쳐 부르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1820년경에는 각 씨족 대표들이 자연마을 단위로 물통을 시설하면서 조수리라고 부른다는 이들도있다. 과거에 25개 물통을 파서 사용할 만큼 물이 천국이 바로 조수리라 하겠다. 중산간 마을에 물이 귀했기 때문에 이를 극복 하는데 힘을 모았기에 좋은 물이 보유하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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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선달리 지명유래
용선달리라는 유래는 명확하지 않지만, 선달이라는 벼슬은 벼슬에 나가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단어이다. 또 용이 승천할 지형에서 왔다고도 전하고 있다. 이형상(1703) 남환박물에 용선달리가 나온다. 18세기에는 용선달리 중심으로 서쪽에 조호물촌 동남쪽에 저지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주김씨 김시권 좌수가 땅 300평을 마을에 기증하면서 물통이 6개를 판 것이 시작이라고 하였다. 김시권 치수기념비가 세워 있다. 이때가 대정 7년 1918년이다. 용선달리 인근에는 조선시대 관에서 운영하던 과원도 있었고 대장간(변모가 운영하였다고 기록)도 있었다. 대장간은 흙과 물이 좋아야 운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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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교회
한경면은 1956년 6월 1일부로 한림면이 읍으로 승격할 때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조수리에 신앙이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은 용수교회. 고산교회. 조수교회로 이어져 전해지고 있다. 1922년 문현오, 이달평, 이상선, 조남준, 홍자하씨가 두모교회 신자였다가 1932년 조수리 문성국씨 집에서 첫 기도를 시작으로 1934년 4월 29일 조수리 300번지에 초가집 3간을 매입하여 정식 예배당이 문을 열었다. 1948년 11월 4·3 초토화 작전으로 교회는 전소되고 후일 조남준(조남수 목사 사촌으로 추정)씨가 조수리 1306번지 자신의 땅 헌납하여 기와집으로 24평 교회를 건립하였다.
조수교회 건립은 조남수 목사 공이 크다하겠다. 조남수 목사 일생에 관련하여서는 파일로 올리도록함(내용이 많아서) 1971년 신자수가 늘면서 조수리 331-1번지에 교회가 신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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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리 지명의 유래
저지리 지명은 당지(堂旨)냐? 저지(楮旨)냐?
당지(堂旨) 즉 당모르(높은 언덕)인데 한경면에서 가장 산촌이고 높은 곳에 위치 하므로 당지는 아름다운 마을로 의미부여를 할 수 있고, 닥모루라 하면 닥나무(楮旨)가 많았다는 데서 전하는 말일 수도 있기에 확실한 내용은 후자 학자들이 견해로 둘 수 밖에 없다. 마을 원로들께서는 닥나무로 풀이하기보다 아름다운 마을로 표기함을 원한다는 이야기로 대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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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저지교회는 사진으로 대신하는데 사진은 2021년 발간한 저지리 향토지에서 찍었다.
조수1리 한양동에 있는 한양물
(한양식당 바로 길건너에 있는 물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