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
<2001. 3. 4 성륜사 정기법회>
[3]
제법공(諸法空)도리란 것은
우리가 말로는 쉬워도 굉장히 어려운 문제란 말입니다.
우리같이 출가승이 되었어도
한 20대나 30대나 그럴 때는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이나 줄줄 모두 읽기는 읽지만
그 공도리가 그렇게 사무치게 오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차근차근 먹어지고
인생의 참 무상(無常)을 느끼고
허무(虛無)를 또 그마만치 맛을 보고 해가니까
그때는 그야말로 그 제법공도리가 그렇구나, 이렇게 느껴지고
또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현대 이 학문이란 것이 굉장히 소중하단 말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그냥 미신적(迷信的)인 것도 현대 이 과학문명이 없으면
그냥 미신인 채로 그대로 묻혀버릴 것인데
현대 자연과학이란 것은 조금도 용서가 없이
모두를 다 파헤치고 정리하고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현대과학을 공부한다고 생각할 때는
과거세에 여러 가지로 해서 잘 모르던 그런 문제 같은 것이
그 과학의 힘으로 해서 다 밝혀진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 같은 사람도
이와 같이 확신에 찬 그런 말씀을 드릴 수도 있고
여러분들도 그렇게 되셔야 만이
자기 인생에 있어서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 모든 존재의 실상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가상만 알고 참다운 실상을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항시 불안스럽단 말입니다.
불안스러워지면 그때는 비단 자기 생활에서 문제뿐만 아니라
자기 건강에도 지대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이 몸이라는 것은 하나의 상에 불과하니까
사실은 이것도 역시 허망한 거란 말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부모님한테 태어나기 전에
우리 같은 그런 모양이 있었습니까?
이 천상천하 어디에도 이런 모양은 없었단 말입니다.
과거전생에 우리가 지은 업장 따라서
금생에 그 부모님의 연(緣)에 의지해서
이런 모양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 모양이 허망한 모양이지만
내생에도 없고 또는 전생에도 없고,
금생에 자기존재에 한에서 이와 같은 모양이 있단 말입니다.
<자기 존재라는 것은 상으로 보아서는 허망무상하지만
지금 이대로 또 역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우주의 중심적 존재라 할 수 있다.>
똑같은 모양은 또 어디에도 없습니다.
비록 이것이 허망하다하더라도
과거전생에 업장에 차이가 있어놔서
또 인연의 차이 때문에 똑같은 모양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원적인 차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어느 누구나가 다 우주의 중심이 바로
즉, 자기란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수학적으로
반경(半徑)이 한도 끝도 없는
그런 하나의 원(圓)이 있다고 생각합시다.
원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원중심(圓中心)이 어디겠습니까.
도처에가 원의 중심이란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그 진리의 문(門)도 그와 똑같습니다.
이 우주가 이와 같이 그야말로 한도 끝도 없이 광대무변하지만
우주의 중심이 무슨 대통령이나 잘난 그런 천재나
그런 사람만이 중심이 아니라
나나 너나 도둑놈이나 누구나
모두가 다 우주의 중심이란 말입니다.
다시 바꾸어서 말하면
사실은 우주의 주인공입니다.
어느 누구나가 다 우주의 주인공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자기 스스로
우주의 주인공인 것을 잘 모른단 말입니다.
뭘 갖다가 밖에서 많이 보태주고
돈이 많이 있다거나 감투가 높다거나
그래야 우주의 주인공 구실을 한다고 이렇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모르면 모르는 채로
이대로 우리가 우주의 중심이란 말입니다.
불교말로 하면
나한테 현재 있는 것이 구족원만(具足圓滿)이라,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마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마음이 없는 사람이 없듯이
조그마한 티끌 속에도 역시 우리 마음은 다 들어있습니다.
조그마한 티끌 속에 있는 그런 마음과
또 우리한테 있는 그런 마음과 우주 마음이
틀리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틀리지 않는단 말입니다.
마음이란 것은 모양이 없어놔서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우주의 마음이나 또는 사람가운데 있는 마음이나
조그마한 티끌가운데 있는 마음이나 사실은 똑같습니다.
그러기에 『화엄경(華嚴經)』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이 우주의 모두가 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마음으로 돼있단 말입니다.
우리 몸도 마음으로 되고
산도 마음으로 되고
물도 마음으로 되고
어느 것이나 다 마음으로 돼 있습니다.
마음 아닌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동서철인(東西哲人)들, 성인들 모두가 다
그런 도리를 말씀했단 말입니다.
사실은 기독교의 하나님도
역시 저 하늘에 가서 무슨 신이 따로 있어가지고서
심판하고 누구를 창조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진리란 말입니다.
기독교 바이블(Bible)도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예수님도 꼭 바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창조를 했다는 것도 모두가 다
그 하나의 진리에서 나왔다는,
하나의 진리에서 유래했다는 그런 말씀을
상징적으로 창조했다고 그러는 것이지
본래 그 예수가 말한 뜻은
결국은 부처님께서 말한 뜻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보다 더 구체적이고
보다 더 궁극적인 차원이 높은 말씀을 하셨을 뿐인 것이지
그 근원적인 도리는 똑같단 말입니다.
만일 똑같은 진리를 말씀하지 않았으면
예수도 성인이 그때는 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적어도 성인이라고 한다고 생각할 때는
약간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중생의 그릇 따라서 그 표현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근원적인 도리는 똑같단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 우주를 하나로 보는 도리는 똑같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님들도
비록 우리들이 우리 중생 견해로 봐서
범부견해로 봐서는 천차만별로 이렇게 저렇게 있다하더라도
모두가 다 근원적으로 하나의 도리다,
이것을 확실히 믿으셔야 됩니다.
이것은 그 무수한 성자가
일구여출(一口如出)로 다 증명을 했고
또는 현대의 그 아주 정밀과학도 그것을 증명을 합니다.
내 몸뚱이나 또는 산이나 내나 어떤 것도
모두가 다 원자로 안 된 것이 있습니까?
다 모두가 원자가 어떻게 모였는가, 어떻게 진동하는가,
그런 걸로 해서 그것이 됐단 말입니다.
다만 그 원자는 대체로 또 어떠한 것인가,
이런 데 있어서 물질의 그 알맹이의 근원이 무엇인가
이런 것은 현대과학은 알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가하면 형이상학적인 물질이 아닌 것은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과학이란 것은 그 물질세계만 아는 것이지
물질이 아닌 저쪽 이른바 형체를 떠나보낸
정신의 세계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정신의 세계를 안다는 것은
역시 철학의 세계, 형이상학으로밖에는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록 지금 자기가 학문적으로
그런 데에 별로 관심은 없다 하더라도
그래도 하여튼 우리가 인간으로 해서
바르게 살라고 생각할 때는
바른 생활을 하려고 생각할 때는,
남을 지도하려고 생각할 때는
꼭 우리가 형이상학에 관심을 두어야 한단 말입니다.
이른바 철학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철학이 되어야 모두가 하나로 통일되고
또는 철학을 해야
이른바 영원적인 자리를 지향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철학으로 해서 바른 도리를 지향을 하고
그와 동시에 종교로 해서
그때는 우리가 체험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종교와 철학은 결국은 하나가 딱 되어야 됩니다.
이치로 봐서는 철학이요,
또는 우리 실천으로 봐서는 결국은 종교요, 말입니다.
☞ 출처 : 본정 김영동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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