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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성탄 제 1 강 메시지 아산UBF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하여 나셨다
말씀 / 이사야 9 : 1~7
요절 / 이사야 9 :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2024 성탄말씀을 감사합니다. 말씀을 기초로 성탄의 큰 은혜가 심령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스블론 땅은 갈릴리 호수 서쪽에 위치합니다. 이곳은 해안선과 멀지 않아서 국제무역로와 가깝습니다. 납달리 땅은 갈릴리 호수 북쪽과 서북쪽에 위치합니다. 레바논 산맥 동쪽과 닿아 있습니다. 이 곳도 갈릴리 지역입니다. 두 지파의 영토는 주요 무역로인 “비아 마리스(해변의 길)”가 지나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상업,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납달리와 스블론 지역은 갈릴리 호수와 가까워 농업과 어업이 발달한 비옥한 지역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상업도 발달하고 비싼 수산물을 공급하는 어업도 할 수 있고 땅이 비옥한 곳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전쟁에서 앞장 서거나 정복전쟁을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싸울 때는 용감하게 싸운 지파들이기도 하였습니다. 사사기 5장에서 드보라는 스블론과 납달리에 대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운 지파”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스블론과 납달리는 실수와 약점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문제는 가나안 족속들을 살려둔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족속들을 살려두고 부려먹기로 함으로써 현실 이익을 택하였습니다. 지파 조상들의 현실타협의 사례는 자손들에게 계속 이어졌습니다. 접경지역 이방문화가 넘어 오는데 대하여 후손들도 타협하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스블론과 납달리에는 우상숭배 문화가 그대로 남아 영향을 미쳤습니다. 스블론과 납달리는 파도처럼 들어오는 이방 우상문화에 대하여 절대적인 자세로 물리치지 않았고 이스라엘의 방파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타협과 혼합의 땅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 유다 예루살렘과 거리가 먼 것처럼 절대신앙에 대한 자세가 희미하고 사람들의 마음도 성전에서 멀리 있었습니다.
이렇게 살았던 스블론와 납달리는 때가 되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절대신앙을 지키지 못하는 스블론과 납달리는 자신들이 분명하게 거부하지 않은 이방문화를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잔인하게 침공 당하였습니다. 이 괴로움 겪은 스블론과 납달리에 대하여 동족 이스라엘 지파들은 이해도 동정도 없었습니다. 다른 지파들이 가나안 족속들을 철저하게 진멸하고 몰아낼 때, 스블론과 납달리는 가나안족을 살려 일 시키며 실속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다른 지파들이 성전을 사모하며 절대신앙을 지키고자 힘쓸 때, 이방문화 가진 상인들을 환영하고 비위맞춰주고 상대해주며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징계 받은 스블론과 납달리는 동족들에게 ‘그래 너희들 그럴 줄 알았다’ 멸시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스블론과 납달리는 예루살렘을 사모하지 않는 모습이 마치 하나님 향한 절대신앙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멀리 하려는 오늘날 대학생 청년들을 닮았습니다. 스블론과 납달리는 무역로 이방상인들을 대상으로 장사할 것 많다고 여기며, 갈릴리 호수에서 돈 될만한 물고기 많다고 여기고 기름진 땅에서 농사할 것 많다고 여기는 모습이 놀 것 많고 세상에서 할 일 많다고 여기는 우리 시대의 청년들을 닮았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곳에서 행복을 구하는 것을 성경에서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 없이 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계획을 내가 세우는 것이 ‘타락’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이 일어난 때를 B.C 1500년 혹은 B.C 1300년 경으로 봅니다. 북이스라엘 멸망이 B.C 722년입니다. 스블론과 납달리는 하나님 명령대로 순종하여 사는 것보다 가나안 족속들을 살려두며 자기 판단에 따라 살았습니다. 스블론과 납달리는 마음을 예루살렘으로 향하기보다 적절한 계산에 따라 이방 상인들의 비위를 맞추고 이방문화를 받아들이며 살았습니다. 스블론과 납달리는 부유한 동네로 잘 사는 것 같았습니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였으며, 이방문화와 혼합된 그들의 문화는 세련되어 보였습니다. 스블론과 납달리의 신앙의 벽이 점점 낮아지고 있을 때, 그들의 단단한 성벽이 갑자기 무너졌습니다.
“전에 고통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믿음의 성벽을 세우지 않았던 스블론, 납달리에 그들을 지켜주던 성벽이 무너지면서 백성들은 미래를 설계할 수 없는 암담한 상황에 빠졌습니다. 기름진 들판을 빼앗겨 깊은 고통이 스블론과 납달리 땅에 임하였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 여긴 스블론과 납달리에 흑암이 오고 말았습니다. 동족들은 그들의 재앙에 대하여 인과응보라 하며 정죄하였습니다. 현실의 좋은 것을 많이 선택하였지만, 스블론과 납달리는 결국 멸시 대상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을 생각하기 싫어합니다. 우리의 자연스러운 마음은 내 눈에 보기 좋은 것이 진짜 좋은 것으로 보입니다. 창조주를 영화롭게 하며 살고 싶지 않은 본성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배드리고 말씀공부에 참여한다고 해서 이 본성이 저절로 물러가지 않습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경외심을 가지고 듣고 마음에 영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듣고 영접한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삶을 통하여 드리는 결단과 순종과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은 들었으면 되었다고 여깁니다. 마음에 받아들였으면 되었다고 여깁니다. 예전에 한 번 해보았으면 된 것이라 여깁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마음의 원하는대로 살 때 멸시 당하는 날을 맞이합니다. 문제는 이 멸시와 수치를 직접 겪지 않고는 후회도 없고 반성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유한하고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은데,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산 결과가 수치와 멸시라는 것을 인생의 중요한 시간을 보낸 후에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멸시의 땅이었던 스불론과 납달리, 갈릴리 땅에 기쁜 소식이 옵니다. 수치와 멸시의 스블론과 납달리를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해주신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예수님을 보내 주십니다. 예수님의 자라난 곳이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예수님의 중심 사역지가 갈릴리 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기에 스블론과 납달리, 지금의 갈릴리가 하나님에 의하여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까?
2절을 보십시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는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예수님께서 큰 빛을 비추시기 때문입니다. 지구는 태양이 발산하는 에너지의 2%를 가지고 생존해나갑니다. 물리계에서 빛은 에너지의 근원입니다. 생물계에서 빛은 생태계가 존재하게 하는 생명의 근원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보고 있다고 여기지만, 인간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흑암입니다. 세상은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지금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세상은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알지 못합니다. 북이스라엘의 문제는 앗수르의 침략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남유다가 두려워할 것도 국제정세가 아닙니다. 우리 시대의 문제도 신자유주의, 취업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이 있고, 특히 청년들이 깜깜한 어둠에 거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어둠속에서 택한 자기 선택의 열매를 자기가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 인생을 밝히는 인생의 빛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영광과 승리로 인도하는 빛의 길입니다. 20대 때, 저도 그랬고 많은 청년들이 자기의 인생은 자기가 가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30대 때, 저도 그랬고 많은 청년들이 자기의 인생은 자기가 계획하고 노력하여서 영광으로 이르는 줄 알았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각 사람의 인생을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은 겸손이었습니다. 각 사람의 인생을 기쁨과 행복과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은 많은 사람을 살리고 자기를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조직에 이익을 주고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은 희생과 헌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배우지 않은 어떤 사람도 희생을 모르고 헌신을 몰랐습니다. 왜 겸손하여야 하는가? 왜 낮아져야 하는가? 이유를 알지 못하였으며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고 여겼습니다. 겸손을 모르고 낮아짐을 모르는 사람들은 생명의 길을 깜깜하게 찾지 못하였습니다. 희생이 무엇인지 모르고 헌신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생명을 주지 못하는 엉뚱한 길을 찾아 열심히 자기 길을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보여주신 십자가와 부활을 배운 사람들에게는 빛이 임하였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환하게 생명의 길이 비취어 볼 수 있었습니다. 자기의 좋아하는 것을 부인할 줄 모르는 사람, 자기의 계획한 것을 조금도 양보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국 가장 먼저 직장을 잃었습니다. 스스로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고 스스로 자기를 높이려 한 사람들은 부끄러움으로 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영광으로 이르는 빛을 비추어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멸시받은 갈릴리 나사렛 사람이라 칭함 받으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하셨으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가장 추한 죄인이 되어 죄인들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곳으로 가셨으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게 하시고 왕의 왕, 주의 주가 되게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가야 할 길, 영광에 이르는 길, 생명에 이르는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가장 밝은 빛이십니다.
죽기를 두려워하고, 망할까 두려워하며 조금도 자기를 내려놓지 못하는 어두운 우리 인생들에게 생명의 빛으로 오신 분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우리가 주님으로 부르는 분이십니다. 저 앞 나의 앞 길에 승리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수고의 길도 갈 것입니다. 문제는 나의 앞 길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앞 저 앞에 찬란한 영광이 있다는 것을 미리 볼 수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고통도 감내할 것입니다. 문제는 나의 앞, 어느 길에 찬란한 영광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범이며 예수님이 환한 우리 인생의 빛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따라 가면 찬란한 영광,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체가 빛이시며 우리를 승리와 영광으로 인도하는 빛이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우리나라 사람이 아카데미 영화제 최고상을 받았습니다. 전세계가 우리나라 드라마를 보고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배운 우리나라 패션, 우리나라 화장을 따라합니다. 우리나라 음식을 최고라면서 먹고 전세계 처녀들이 한국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 합니다. 세상에! 빌보드 차트 음악들을 FM으로 들으며 자란 저와 같은 세대, 말론 브란도,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선망하며 자란 우리가 이런 세상이 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나라 차 판매량이 세계3위인데 수익률은 1위라니! 자동차의 나라 미국에서 우리나라 차가 독일차보다 더 많이 팔리고, 우리나라 제네시스가 도요타, 혼다보다 더 안전한 차라고 미국 부자들이 생각한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나라가 창성하면 이렇게 기분이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별로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이 모든 성과와 열매를 모든 사람이 같이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끼리 경쟁이 심하고 소득수준은 양극화 되어 있습니다. 나라는 잘 사는데 국민들 중에는 힘든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면 그 나라는 창성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시면 각 인생들도 창성합니다. 예수님을 따라 순종하여 살면 잠시 고난은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따르는 각자의 인생을 승리로 이끌어주십니다. 잠시 수고가 있고 고난은 있지만 결국 승리합니다. 예수님께서 이기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기게 하시는 승리의 주님이십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미디안의 날은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압제하였던 7년의 세월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노략질하던 미디안은 기드온과 300명 정예 용사들에 의하여 완전하게 섬멸 당하였습니다. 멍에와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고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을 다 살라지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게 하던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결을 말합니다. 미디안과 전쟁에서 전쟁을 주도한 사람들이 스블론, 납달리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큰 지파였던 에브라임을 놔두시고 스블론 납달리 사람들을 쓰셨습니다. 이 사람들로 하여금 미디안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게 하셨습니다. 저는 자문회의 가기 전에 잠깐 공부를 하면 그 내용이 자문회의 주제여서 놀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서울의 유명대학 쟁쟁한 교수들이 즐비한 회의는 저의 독무대가 됩니다. 저 혼자 압도적으로 엘리트 공직자들을 가르치는 회의가 됩니다. 이런 일이 한 두 번도 아니고 계속 됩니다. 제가 얼마나 스펙이 형편없습니까? 지난 가을 회의 때에는 장관이 궁색하게 변명을 하는 것을 보고 웃음이 나왔습니다. 제가 얼마나 시골사람입니까? 제가 얼마나 잘난 것이 없는 사람인데 이런 일이 있는가? 생각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 시골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이기게 하시고 영광스럽게 해주십니다.
6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6절 말씀에 이런 놀라운 일의 구체적인 내용과 비결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아기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아기는 힘이 없습니다. 연약합니다. 그러나 이 아기로 오시는 예수님께 권세가 있습니다. 세상만물을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세상 모든 피조물 위에 계시는 권세입니다. 이 예수님께서 비록 한 아기로 우리에게 오시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답을 주시는 놀라운 상담자이십니다. 유비가 똑똑합니까? 제갈공명이 똑똑합니까? 제갈공명이 똑똑한 것입니다. 똑똑한 것은 제갈공명인데 누가 그 덕을 봅니까? 유비와 그 아들이 덕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완벽한 지혜로 우리 죄인들을 최고의 선택, 최고의 길로 가게 해주십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가장 뛰어난 멘토이자 카운슬러이신 예수님의 말을 듣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생각, 자기 판단을 더 의지합니다. 예수님은 원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압박을 주고 긴장감과 두려움을 주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평강의 왕이십니다. Prince of Peace라고 영어성경에 기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며 주시는 예수님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우리에게 긴장과 두려움이 아니라 평화를 주십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평화가 이루어지게 하고 우리의 내면에 평화가 이루어지게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예수님의 왕권과 평강은 온세계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는 더욱 견고하여 지고 영원토록 보존합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를 영원히 세우고 보존 하시고자 열심을 내십니다. ‘열심’은 원어로 보면 ‘질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모은 주의 백성들을 원수들에게 다시는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매우 각별한 사랑과 열정을 보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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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문제, 나의 문제, 청년의 문제는 예수님께서 해결해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어두움을 몰아내고 환하게 비치는 가장 큰 빛, 생명의 빛 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억누르는 모든 압제와 억압을 풀어 주시는 우리의 참 아버지, 전능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한 아기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수치를 벗고 승리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한 아기로 오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빛을 보고 영광에 이르는 길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믿음 있는 사람, 시대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눈에는 한 아기로 오셨으나, 사실은 Wonderful Counselor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이며, 평강의 왕이십니다.
12월 25일은 예수님 탄생하신 날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날은 언제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날짜를 숨기셨습니다. 사람들이 날짜를 숭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성탄은 날짜가 아닙니다. 한 아기로 오셔서 우리를 수치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예수님을 인생의 따라야 할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오늘의 성탄입니다. 나의 주님으로 모셔들이는 것이 오늘 참된 성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최후의 승리를 믿는 청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전 청년들은 목표와 방법에서 타락한 면이 있었습니다. 586세대라 일컫는 우리세대는 자기를 위한 세속적 소유가 목표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인생 목표와 목적에서의 타락입니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자기 궁리가 많았고 자기 힘과 노력에 의지하고자 하였습니다. 과정과 방법에서의 타락입니다. 지금 청년들에게서는 새로운 양상이 있습니다. 기준에서의 타락입니다. 공평과 정의에 예민하면서도 재미있나 없나의 기준을 중시합니다. 미래 성장을 위하여 회사 일에 더 수고해달라면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일 하더라도 대단히 인격적이고 편하게 해주고 재미있는 것이 중요한 기준입니다. 성경의 요셉이 받은 연단처럼 노예대우 받거나 억울한 상황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성경의 다윗이 받은 것처럼 부당한 대우에 대하여 전혀 인내할 의사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수님을 향한 모든 부당함에 대해서 참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수님께서 느끼는 모든 억울함에 대하여 인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인내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이루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부활 승리를 얻으셨습니다.
50대가 되니 저의 친구들이나 후배들 중에 인생의 열매 맺지 못하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답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있습니다. 이 분명한 답을 듣고 배웠지만, 영접하지 않고 실생활에 받아들이지 않고 삶에 적용하지 못한 사람은 이제 돌이키기 어렵습니다. 일할 수 있는 시간, 기회의 때는 대부분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시간이 흐른 후 어떤 50대를 맞이할 것 같습니까?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한 아기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이 예수님께는 우리가 영접하고 따라야 할 권세를 가지셨습니다. 연약한 한 아기로 오셨으나, 우리 모든 인생의 구원과 빛이 되시는 예수님께 순종하고 따르는 성탄, 따르고자 결단하는 성탄, 따르기 시작하는 성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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