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지방 연합 부흥회에서 강사님께서 한 교회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상당히 큰 규모의 교회를 담임하시던 목사님 한 분이 은퇴하실 때, 개인적으로 좋아하고 아끼던 후배 목사님이 후임으로 거론되었는데, ‘오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그 목사님으로서는 섭섭할 만한데도 그 말을 따랐고, 다른 목사님이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는데, 단지 교회가 크다는 것 하나를 보고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이 안되어 암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교회가 크지만 마음 썩을 일이 많은 교회였는데, 은퇴한 목사님은 자신은 개척자라 품을 수 있었지만, 누구도 좀처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목회도 욕심이 앞서면 언제나 문제입니다.
제게 있어서 좀처럼 극복이 안되는 것이 욕심이었습니다.
갈망이 너무나 쉽게 욕심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설교도 목회도 욕심이 됩니다.
“잘해야지” 하는 마음이 지나쳐 늘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것도 욕심이 되어 상처만 주고, 교회 공동체의 변화도 속히 이루려는 욕심에 늘 발목이 잡힙니다.
산에 잣나무 가지들이 흉측하게 죽어 있는 것을 본 산 주인이 용역 회사에 문의했더니 모두 다듬는 견적이 오천불 나왔습니다. 놀란 주인은 몇 주간 사다리에 올라 손에 닿는 가지를 모두 잘랐답니다. 그리고 이제는 얼마면 되겠냐고 용역 회사에 다시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견적이 만 불로 올랐습니다. 낮은 가지에 올라서 높은가지를 잘라 내려 했는데, 이제는 특수차량을 이용해야 겨우 잘라내게 되었기 때문이랍니다.
지혜에 욕심이 묻으면 우둔함이 됩니다.
욕심은 무엇이나 추합니다.
그렇지만 욕심을 없애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도저히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욕심은 없애려고 애를 써서 없어지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더 좋은 것을 소유할 때만 욕심은 사라집니다.
제가 철원에서 군목으로 근무할 때, 평생 잊을 수 없는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제가 죽어서 하나님 앞으로 걸어가는 꿈이었습니다. 혼자 그 길을 걸어가면서 내내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아실까?” “하나님께서는 나를 반겨주실까?” 정말 두려웠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잠이 깨었습니다. 거실에 나와 무릅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다시는 제 유익을 위하여 살지 않겠습니다!”
자신의 유익만 위하여 산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너무나 생생히 경험하고 나니, ‘나의 유익을 위하여 사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전혀 어려운 일이라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기로 결단하자 모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는 일로 일한 갈등이 사라진 것입니다.
늦게서야 깨달은 지혜가 욕심을 없애려 하지 않고 주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것을 소유한 사람에게는 욕심이 사라집니다.
다윗에게 여호와가 목자시니 부족함이 없었고, 사도 바울은 주 예수님 안에 발견되기 위하여 모든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주님만이 세상 욕심, 인간 욕심에서 저를 자유하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고백할 수 있으면 욕심은 사라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