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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11일 추수감사주일 설교
설교본문 : 민수기 11:4-6; 18-20; 31-35
4 이스라엘 중에 섞어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18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 있었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 19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 일만 먹을 뿐 아니라 20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일 개월 간을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거하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고 함이라 하라 31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곁 이편 저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쯤에 내리게 한지라 32 백성이 일어나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진 사면에 펴 두었더라 33 고기가 아직 잇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34 그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칭하였으니 탐욕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 35 백성이 기브롯 핫다아와에서 진행하여 하세롯에 이르러 거기 거하니라
설교제목 : 기브롯 핫다아와
감사주일입니다. 감사할 일이 없다고 생각되어도 오히려 넘치는 감사로 주께 영광을 돌려야 할 사람들이 바로 우리 성도들입니다. 감사할 일이 있을 때에 감사하는 사람들은 예의와 사회적 인격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감사할 일이 없을 때에 오히려 감사할 일을 찾아서 감사하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인격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감사 조건을 찾아 감사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은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민11장의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과정에서 벌어진 가장 부끄러운 실패의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이 400년이나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 생활하던 가운데 하나님께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며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는 매일같이 기름 섞인 과자와 같은 맛있는 만나를 내려서 먹여주셨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참으로 위대한 출애굽의 역사였습니다.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당당하게 나오던 감격스런 출발과 기적적으로 홍해를 건너 승리를 얻게 하셨습니다. 시내산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열 가지 계명이 기록된 돌비까지 받았으며, 이제는 그렇게도 바라며 그리워하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눈앞에 다가왔는데 조금 더 참지 못하고 탐욕의 노예가 되어 욕심을 부리며 아우성치다가 떼죽음을 당해서 ‘욕심장이들의 무덤’이라는 참으로 부끄러운 기록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땅히 감사해야 할 이미주신 풍요로움을 백성들이 잊어버리고 오히려 원망하며 불평하는 자리에 들어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출애굽 역사 속에 기브롯 핫다아와 즉 ‘욕심장이들의 무덤’이라는 참으로 부끄러운 역사를 남기게 된 것입니다.
믿음은 진정한 감사에서 나옵니다. 진정한 감사는 신앙을 아름답게 세워줍니다. 감사주일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고 있는지를 확인하면서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1. 진정한 감사가 ‘섞여 사는 무리 때문에’ 깨어질 수 있음을 알고 조심해야 합니다.
4절, ‘이스라엘 자손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의 ‘섞여 사는 무리’는 순수한 이스라엘의 피, 정신을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닙니다. 명목상의 이스라엘 사람 즉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여러 민족을 말합니다. 출12:38을 보면, ‘중다한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라고 출애굽할 당시의 여러 잡족이 함께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섞여 사는 무리’는 출애굽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두려운 역사의 손길을 보면서 두렵고 떨려서, 일단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스라엘 족속을 따라나선 무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확실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무리를 포로 귀환 후인 느헤미야 시대에서도 봅니다. 느13:3,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몰수히 분리케 하였느리라’.
이 일의 구체적인 증거는 느13:23이하에 나옵니다. 즉 ‘그 때에 내가 또 본즉 유다 사람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는데 그 자녀가 아스돗 방언을 절반쯤은 하여도 유다 방언은 못하니 그 하는 말이 각 족속의 방언이라’는 참으로 답답한 일을 당하게 됩니다. 북방 이스라엘 사람들 즉 사마리아 사람들의 신앙이 어떠했습니까? 왕하18:33,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게 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와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신앙이니 어찌 온전한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이처럼 섞여 사는 무리는 언제든지 있을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불러내어 성결케 한 무리들의 모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진리와 거룩과 진실로써 이 세상의 다른 단체와는 분명히 다른 경계선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 모습에서 교회와 세상, 세상과 교회는 그 경계선이 점점 무너져가고 희미해져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교회인지, 사교 단체인지 어떤 때는 분별하기 어렵고. 믿는 성도 같기도 하고, 믿음이 없는 불신자 같기도 하고,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은데 세상에 대한 미련이 더 큰 것을 보기도 합니다. 한 쪽 발은 교회에 들여놓고, 또 한 발은 세상에 걸쳐놓은 모습같습니다. 이같은 것이 본문의 섞여 사는 자들과 동일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온전하지 못한 신앙의 모습이라는 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감사 생활은 반드시 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불평하는 자 옆에서 진정한 감사를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언제나 감사하면서 살고자 하는 사람 옆에 있어야, 조그마한 감사라도 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우리 연약한 인생의 모습입니다. 모든 성경의 지도자들은 이 문제를 항상 경계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고 선언합니다. 적은 무리이지만 섞여 있는 자들에게 영향을 받아 그들처럼 하는 불신앙과 불평은 금방 주위에 퍼져버린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혹시라도 우리들의 주위의 섞여사는 무리처럼 불평하는 자들이 있다면 이것을 경계하여 여기에 영향력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들의 믿음에서 나오는 감사한 삶의 모습으로 좋은 영향력을 미처 연약한자들을 온전히 세우는 자들이 되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신앙의 여정에 혹시라도 ‘탐욕스런 자들의 무덤’이라는 후회되는 과거가 기록되지 않도록 불평과 불만이 나올 만한 상황에서 조차도 이미 부어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고, 여지껏 우리의 삶을 인도해 오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어떤 상황에서든지 감사할 일을 찾아서 범사에 주께 감사하는 신실하고 온전한 신앙을 지키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2. 진정한 감사가 ‘눈앞의 이익 때문에’ 깨어질 수 있음을 알고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왜 광야에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왜 출애굽하여 광야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약속의 가나안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기 위함입니다. 이방 민족에게 종이 되어 400여 년간 살았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써 해방되어 자유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가나안을 향하여 가고 있는 중입니다. 노예로 살던 자들이 이제 자신들의 땅을 소유하게 될 소망,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독립된 나라를 가지게 된다는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아무리 눈앞의 일이 고생이 되고, 고통이 따르는 일이 있을지라도 이같은 원망과 불평과 육적인 욕심에만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백성들은 너무나도 코앞의 것밖에 모르는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꿈도, 소망도, 신앙도 없고, 단지 우선 입에 들어가는 것을 위하여서는 의리도, 소망도, 내팽개치는 탐욕스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서 진정한 감사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들을 구원하여 자유를 주시고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만나를 내려주시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보호하신 하나님 앞에 기가막힌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고 있습니다. 5절,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고 했고 또 18절,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좋은 것을 이미 주시고 복을 주시려 하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태도입니다.자유와 미래의 풍요와 풍성함보다 당장의 입에 즐거움이 좋다는 불평이고, 원망입니다. 현재 눈앞의 즐거움과 만족만 있으면 노예로 있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유와 미래의 약속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누리는 진정한 풍요로움 삶은 버려도 좋다는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니다.
물론 사람들에게는 우선 자기의 입이 중요하고, 눈앞의 현실이 중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눈앞의 이익에 집착하다보면, 가장 중요한 참자유와 진정한 풍요로움 삶 같은 것들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눈앞의 이익에 눈먼 사람의 대표로 발람 선지자를 예로 들수 있습니다 민22:31-33,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어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뇨 보라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고 했습니다. 발람이라는 사람은 돈에 눈이 멀어서 모압 왕 발락의 청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기위해서 모압 땅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압왕의 청을 거절하라고 명령했으나 모압왕이 대신들을 통해 더 많은 은금을 보내주자 물질에 눈이 멀어서 자기 나귀를 타고 모압으로 출발했습니다. 도중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들고 길에 서있었습니다. 이것을 나귀가 보고 길 옆에 밭으로 빠지고 또 담에 붙어서 가지않고 급기야는 피할 곳이 없자 땅에 엎드려 가지 않자 발람이 화가 나서 나귀를 때립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의 눈을 열어주시자 그제야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 서있는 것을 보게되고 이때 이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나귀가 볼 수 있던 주의 사자를 그는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눈앞의 이익에 눈먼 발람은 봐야 할 것을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한 ‘나귀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역시 마8장의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신 기적’ 때문에 자기들의 돼지 떼가 몰사한 것을 본 사람들이 예수로 자기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는 참으로 현실적인 요구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보다 물질이 먼저요, 한 사람의 구원과 자유보다 물질이 더 중요하고 하나님의 나라보다 세상의 재산이 먼저라는 자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더 들어본다면, 마태복음 19장 16절 이하를 보면 한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무슨 선한일을 해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이 때 주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 가며련 계명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 청년이 이 모든 것을 이미 지키며 살았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냐는 질문을 하자 마19:21-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했습니다. 하늘에서의 보화보다 땅의 있는 소유가 더 중요하다는 모습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생보다 지금 가지고 있는 많은 재물이 더 중요하다는 결정으로써 주님을 떠나갑니다. 매우 현실적 삶의 모습입니다. 주님은 이런 모습을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하게 마 19:26,‘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할수 있다는 말씀하심으로 소망을 주며 말을 마치셨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주님을 믿는 성도들입니다. 성도는 벧후3:13처럼,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를 고백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히12:2처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를 고백하는자들입니다. 히4:16처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를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은혜없이는 살수 없기에 날 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구하기 위해 그 보좌 앞에 나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잠시잠간 동안의 눈 앞에 일에 집착하면서 감사를 잃어버린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자들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모세를 보십시오. 히브리서는 그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히 11:25-26,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고백은 또한 어떻습니까? 고후4:17-18,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눈앞의 이익에 마음을 빼앗기면, 진정한 감사는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잠시 잠간 있는 일에 대하여 몸과 마음을 빼앗기면, 전혀 감사할 수 없습니다. 하늘의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며 진정한 감사를 할 수 있는 믿음과 생활과 결단을 가지시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3. 진정한 감사는 ‘회개 속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31절, ‘바람이 여호와에게로서 나와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 곁 이 편 저 편 곧 진 사방으로 각기 하룻길 되는 지면 위 두 규빗 쯤에 내리게 한지라’고 했습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는 대단한 양의 메추라기입니다. 두 규빗이면 약 90cm에서 1M쯤 되는 두께로 하룻길이니 약 40KM에 걸쳐서 내렸습니다. 즉 메추라기로서 온 지면을 덮어버린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어떤 사건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베드로를 부르실 때의 사건이 생각나게 됩니다. 눅5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4-8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라고 했습니다. 무슨 교훈을 받아야 합니까? 베드로는 그물에 가득한 고기를 볼 때에 ‘죄인이라’고 고백하면서 자신의 죄악을 주님 앞에 드러내 놓고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다는 고백’을 하면서 순종했지만, 사실상 그 마음으로는 믿을 수 없다는 생각과 주님의 능력에 대하여 완전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그저 지금까지 수고한 것, 한번도 해 본다는 생각정도로 순종한 것이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그러므로 이 잘못된 생각과 불신을 기억하면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로 고백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 엄청난 양의 메추라기를 볼 때에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자기들의 불신, 자기들의 탐욕, 자기들의 죄악을 기억하면서 그 자리에 엎드려 회개했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너무나 답답했습니다. 본문 32절, ‘백성이 일어나 종일 종야와 그 이튿날 종일토록 메추라기를 모으니 적게 모은 자도 십 호멜이라 그들이 자기를 위하여 진 사면에 펴 두었더라’고 했습니다. 한 호멜은 220리터로, 2리터짜리 페트병 100개 가량의 분량입니다. 십호멜이라 했으니 2리터짜리 페트병 1000개 정도의 분량입니다. 적게 거둔자가 이만큼을 모았다고 했으니 백성들은 이틀 동안이나 자기들이 끌어 모을 수 있는 양을 욕심 사납게 마구 모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회개와는 거리가 멀었고, 감사 찬송과는 관계가 없는 행위를 보이고 있습니다. 마땅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탐욕으로 말미암은 잘못된 간구와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보면서 온전히 회개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잠시나마 의심한 것에 대하여 완전히 회개하는 자세를 보였어야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욕심을 계속해서 부렸습니다. 이들은 감사와 회개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만약 우리가 감사 없이 신앙 생활한다면 우리에게도 ‘탐욕의 무덤’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의 생활을 돌아봐야합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걸음, 걸음마다 주님이 인도하여 주심을 믿고 담대하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기만 하면 무조건 원망부터 시작하는 것이 혹시 우리들의 모습이라면 이제 진정한 감사는 온전한 회개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께 겸손히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크신 기적과 그 큰 은혜를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잊어버리고 산다면 이것을 회개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정이 육십만명, 전체가 300만명 가량되는 거대한 인구를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일개월 간 고기를 먹일수 있는 분입니다. 이같이 위대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다면 이것을 회개해야합니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잊어버렸거니 당연하게 생각한다면 이것을 회개해야합니다. 이같이 먼저 회개할 때에 우리 심령 깊은 곳에서 감사 찬양이 시작됩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꿇고 드리는 바로 이 감사 찬양입니다. 한해를 돌아보며 주님이 허락하신 것이 가득한 올 한 해에도 주님 앞에 감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고라 자손이 노래한 시84편은 감동적인 시편입니다. 고라 자손은 레위지파였지만, 모세에게 제사장 직분을 요구하면서 대적하다가 땅이 입을 열어 250명의 족장이 한꺼번에 죽었던 가슴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고라 자손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지 못하도록 완전히 쫓아내지 아니하시고 성전 문지기로 삼으셨습니다. 이런 것에 대하여 고라 자손들은 감격적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시84:10,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저들이 눈물의 골짜기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오히려 그 때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오히려 눈물의 골짜기 같은 삶의 고통과 어려운 정황 가운데서도 기쁨의 샘을 만들고 있음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6절,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한다’고 찬양합니다. 자신들의 처지를 올바로 알고, 온전히 회개한 삶 이후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삶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진정한 감사 방법이요, 참된 신앙입니다. 섞여 사는 무리 때문에, 눈 앞의 이익 때문에, 회개하지 않음으로 진정한 감사를 놓치지 마십시오. 이런 놀라운 감사를 오늘, 아니 날마다 하나님 앞에 드리며 하나님과 친밀한 삶을 살아가는 복된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God bless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