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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49:16-18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오늘도 좀 특이한 제목입니다. 독사로 표현된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단에게 주어진 야곱의 축복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단은 라헬의 여종 빌하가 낳은 첫 번째 아들입니다.
단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또 다른 의미는 재판관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입니다.
단의 출생 배경에 대하여 우리 모두는 잘 아실 것입니다.
저도 창세기를 하면서 한번 정도 말씀 드린 것 같고요.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언니 레아는 아들 4명을 낳을 때 까지 자식을 얻지 못하였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래서 그 당시 풍습을 따라 라헬은 자기의 몸종을 통해 자식을 얻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집에서부터 몸종으로 라헬을 섬겼던 빌하를 남편에게 첩으로 줍니다.
그래서 아들을 얻고 이런 말을 합니다.
창 30: 6 “라헬이 이르되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을 단이라 하였으며”
어떻게 하시려고 나에게 아들을 주셨다고 합니까?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아들을 주셨다”
이런 말씀을 보면 라헬도 아들을 얻기 위하여 많은 기도를 드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방법이 바른 방법은 되지 못하였지만 라헬은 종의 몸을 빌려서 남편의 자식을 안았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다섯 번째 아들로 특별한 일 없이 잘 성장하여서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한 지파로 당당하게 가나안 땅의 한 지역을 얻습니다.
가나안 변경에서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한 축복중에 단지파를 향한 축복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 33:22 “단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
단은 어떤 상태의 어떤 짐승으로 묘사 하였습니까?
“바산에서 뛰어 나오는 사자 새끼”
바산은 오늘날 골란 고원입니다. 토지가 비옥하여 목축하기 좋은 장소였습니다.
그런 바산에서 뛰어 나오는 사자 새끼다, 새끼라고 하니까 어린 강아지와 같은 새끼가 연상이 되시나요? 귀여운 동물 그렇게요?
새끼로 번역된 원어는 새끼 뿐 아니라 젊은 으로도 번역할 수 있는 용어입니다.
사자 중에서도 어떤 사자요, 젊은 사자, 다른 말로는 한창 힘을 쓸 수 있는 그런 사자라는 말입니다.
동물의 왕이라고 불리우는 사자도 토지가 좋은 곳에 있는 사자가 더 힘이 좋을까요? 메마른 땅에 살고 있는 사자가 더 힘이 좋을까요? 비옥한 토지에 살고 있는 사자가 더 힘이 좋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저는 언제 동물의 왕국을 보다가 가물에 메마른 곳에 살고 있는 사자를 찰영한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초식 동물들은 식물을 따라서 이동을 하지만 맹수들은 자기 자리를 이동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시죠? 자기 구역이 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면 그곳에 있는 사자들이 가만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물의 왕이라 할지라도 가뭄으로 메마른 땅에 있는 사자는 비실이들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모세가 단을 축복할 때 단은 무엇이라고 축복하였습니까?
바산에서 그 비옥한 땅에서 먹이가 풍성한 땅에서 어슬렁 어슬렁 그렇게 나오는 사자가 아니라 어떻게 나오는 사자요? 뛰어 나오는 사자.
단 지파가 어떠하다는 말씀입니까? 용맹하고, 믿음이 있고, 강하고, 이런 긍정적인 수식어가 많이 붙을 수가 있는 그런 지파라는 말입니다.
창세기를 누가 기록하였다고 했습니까? 모세가
그럼 모세가 야곱이 단에게 한 축복도 알았을까요?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야곱이 단에게 한 축복과 전혀 다른 그런 축복을 하였습니다.
그런 것을 볼 때 가나안 변경까지 단 지파가 잘했다는 것입니까? 못했다는 것입니까?
잘하였던 지파였다, 그리고 모범적인 믿음의 모습을 보인 지파였다는 것입니다.
저주로 포장된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레위 지파에 대하여 살펴 볼 때 레위 자손이 어떻게 살았다고 했습니까?
저주가 축복이 되도록 말씀에 온전히 굴복하는 그런 삶을 살았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습니까?
단 지파도 그렇게 살았을까요? 예 그렇게 살았을 것이라고 이해가 됩니다.
어디까지는요? 가나안 변경에 까지는요?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을 때 불레셋과 국경을 마주한 지역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어떻게 살라고 한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까?
무엇처럼 살라고요? 사자처럼 살라고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요, 요한 계시록에서 열두 지파를 언급한 기록에서 우리는 단 지파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한번 확인하겠습니다.
계 7:5 “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단 지파가 보이나요? 눈을 닦고 보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보입니까? 오히려 가나안을 점령할 때 기업을 받지 못하고 흩어진 민족으로 살았던 레위 지파는 기록되어 있고요,
요셉 지파는 요셉의 아들 므낫세 지파가 들어 있어 두 지파가 되었고요.
그럼에도 단의 이름은 없습니다.
아버지의 축복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보여 집니까?
단에게 주어진 축복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창 49:16-18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무엇이라 했습니까? 재판관, 혹은 심판자.입니다.
야곱이 단에게 한 축복은 그 이름에 걸 맞는 그런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죠?
그 다음 말씀이 문제처럼 보입니다.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그리고 말굽을 물어서 탄 자를 떨어지게 하리다 하죠?
어떻게 상반된 축복을 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아마도 단 자손들은 레위 자손들처럼 조상의 저주와 같은 축복이 약이 되도록 살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어디까지는요? 가나안 변경에까지는요.
그리고 가나안에는 참여하였지만 어디는 참여하지 못한 지파가 되었나요?
하늘 가나안에는 참여하지 못한 지파가 되었다.
감이 좀 잡힙니까? 누구도 그렇게 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우리도
구원은 받았지만, 은혜의 왕국에는 참여하였지만, 하늘 변경에 까지 왔지만, 어디는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까? 영광의 하늘에는 참여할 수 없는 구원이 될 수가 있다.
제가 지난 번 언제도 그 비슷한 말씀을 드린 일이 있습니다.
열명의 문둥병을 고쳐 주셨지만 병에서는 구원을 받았지만 진짜로 구원받은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다고요.
오늘 우리는 가나안에는 참여하였지만 하늘 가나안에 제외 된 지파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무엇이 잘못이었는지를 찾아 보고 우리의 모습에서 연약하고 부족한 것들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은혜를 발견하길 바랍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단 지파는 주어진 기회를 활용하는데 실패한 지파였습니다.
단 지파 중에 아주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지 아시는 분?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삿 13: 2 “소라 땅에 단 지파의 가족 중에 마노아라 이름하는 자가 있더라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더니”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누굽니까? 예 삼손입니다.
삼손이 어느 지파 사람이라고요? 단 지파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단지파에 삼손과 같은 사람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 지파가 어디에 살고 있었다고 했습니까?
불레셋과 국경을 마주한 지역에 살고 있었다?
바산에서 뛰어 나오는 사자로 묘사된 지파를 불레셋과 국경을 마주한 지역에 살게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보시나요?
그런데 단 지파는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찾은 그 말씀 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삿 13:1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어떤 악을 행하였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떠난 결과로 사십년 동안 불레셋 사람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삼손이 태어 났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나실인을 주신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아시죠?
우리는 압니다, 성경을 통해서 전후 내용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이스라엘은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삼손이 자기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는 것에 분개를 하여서 여우 삼백마리를 잡아서 꼬리를 서로 매고 그 꼬리에 불을 붙여 불레셋 사람들의 보리 밭으로 보냅니다, 시기는 보리를 수확할 시기입니다.
그렇게 보리밭과 포도밭을 불 태우고 그것도 모자라 불레셋 사람들을 도륙하고 에담 바위라고 하는 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한 것에 분개한 불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치려고 군대를 집결 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로 올라오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에게 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삿 15:10 “유다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올라온 것은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 하는지라”
그러니 유다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삿 15:11-12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하니라 그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려고 내려왔노라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치지 아니하겠다고 내게 맹세하라 하매”
우리는 이런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이용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봅니다.
오늘날 가자 지구를 보십니까? 팔레스타인이 어떤 민족인지 아시나요?
그 옛날 불레셋 사람들의 후손들입니다.
삼손을 주신 이유는 불레셋을 멸망 시키라고 주셨는데 그러한 기회를 만들어 주셨지만 그들은 그러한 기회를 이용하지 않고 적당하게 사는데 만족한 결과 오늘날 까지 그 고통을 격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땅에 기록이 삭제 되는 지파가 되었고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기회들도 오용하지 마시고 남용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있는 불레셋을 우리가 몰아내지 못한다면 하늘에 우리의 이름들이 삭제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다른 이유 하나만 더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단 지파는 우상 숭배를 버리지 못한 지파였습니다.
삿 18:1부터 보면 단 지파는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기 위하여 땅을 찾고 있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다가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는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 갑니다.
성경 사사기 17장과 18장을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그 두장을 다 말씀 드릴 시간이 없고요.
미가는 신당을 만들고 신상을 만들어 레위인 한명을 고용하여서 가정 제사장으로 있었던 집안이었습니다.
그런 사실을 단 지파가 알고 그 집으로 들어가서 그 미가의 신상을 갈취합니다.
그리고 그 집의 제사장으로 있던 레위인을 자기 지파의 제사장으로 삼기 위하여 데리고 갑니다.
그리고 사사기 18장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삿 18:30,31 “단 자손이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고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과 그의 자손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이르렀더라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언제까지 우상 숭배자들로 살았다는 것입니까? 그 땅 백성들이 사로잡히는 날 까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이용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 있는 것 같습니까?
우상 숭배를 하면서 어떻게 바른 믿음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은 이런 말씀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우숭숭배를 하면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없다.
우리 성도님들 여러분들의 마음에 있는 우상들을 다 제거해 버리게 되길 소망합니다.
그 우상들을 제거하는 일에 실패하면은 그 우상들이 여러분들을 하늘 가는 일에 제거되도록 일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단 지파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죠?
성경은 탐심은 곧 우상 숭배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제가 자기 사랑에 대하여 한번 말씀 드렸죠? 그것도 우상 숭배라 생각하시나요?
두가지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두 가지 가운데 고민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잘 아는 성경 말씀 보겠습니다.
마 26: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런 기도를 하시고 유다가 오는 것을 보시고 피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원만 하시면 천사들이 그를 들어서 다른 장소로 옮기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사랑 대신에 아버지의 뜻을 따랐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우리도 내 생각 대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가길 바랍니다.
우리 아버지의 뜻은 우리의 완전한 구원입니다. 그렇습니까?
우리가 거슬러 가지 않는다면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하늘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다섯 번째의 아들에게 저주와 같은 축복을 하고난 다음 이런 기도를 덫붙입니다.
창 49:18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아마도 이러한 기도는 자식에 대한 소원이 담긴 기도일 것이고 자신에 대한 간절한 바램을 아뢰는 것이라 이해합니다.
우리 성도님들 하늘가기를 정말로 원하시나요?
아무리 원하여도요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기회를 거절하고 우리의 마음에 우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우릴 향한 아버지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상 다 버립시다, 우리의 생각들도 버립시다.
나의 뜻과 아버지의 뜻이 상충된다면 과감하게 나의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마음을 받아 들이게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우릴 불러 젊은 사자들로 세우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