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노래한 시인도 많고 여름의 정열과 겨울의 스산한 아픔을 토해낸 노래도 적지 않지만, 순환하는 계절의 길목을 서성이며 건너온 10월의 새벽바람만큼 시인의 넋을 홀리는 유혹도 없다. 가을은 영혼의 계절이기 때문일까? 풍족한 영혼이 아니라 가난한 영혼, 그 고독한 넋의...
가난하기에 내적 內的 충만을 갈구하고 고독하기에 절대자와의 만남을 그리워한다. 그 갈구와 그리움은 가을과 함께 터져 나온다.
가을에는 /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 김현승, ‘가을의 기도’ 全文 >
낙엽이 지는 때를 기다려 홀연히 진실의 시간이 다가온다. “새가 죽을 때에 이르면 지저귀는 소리가 슬프고,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그 말이 착하다."(鳥之將死其鳴哀 人之將死其言善) 삶의 종말에 이르면 진실을 외면하기 어려운 것이 보편적인 인간성인가 보다. 소송법의 운용에서 죽음에 임박한 사람의 진술에 높은 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이같은 보편적 인성(人性)에 바탕을 둔 원리일 터이다.
파릇한 봄의 희망과 여름의 시푸른 절정을 다 보내고 생명의 끝을 알리는 낙엽의 때에 이르면, 누구나 마음 속 깊이 묻어두었던 ‘겸허한 모국어’를 끄집어내 모처럼의 기원을 쌓아올리기 마련이다. "가을에는 / 기도하게 하소서."
겸허한 모국어... 오래도록 잃어버렸던 태(胎)의 소리, 익숙한 듯하지만 낯선 언어, 가득한 듯하면서도 허전한 음성... 거짓이 끼어들 자리도, 오만이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는 절절한 생명의 고백... 아, 사랑 말고 또 무슨 생명의 고백이 있을까.
"가을에는 / 사랑하게 하소서." 비옥한 시간을 바쳐 경작하는 가장 아름다운 열매, 그것은 아마도 사랑의 품성이 아닐까. 무엇이든 사랑 없이는 숨을 쉴 수도, 성장할 수도 없는 법이기에.
오직 한 사람을 택하는 까닭은 다른 이들을 배척하려는 뜻이 아니다. 그 한 사람 안에서 모든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 말은 쉬워도,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의 고백이 절실하려면 그 대상이 구체성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구체적 관계성이 모호한 민족애 혹은 보편적 인류애란 자칫 입에 발린 구호쯤으로 전락해 버릴지 모른다. 아니면 위선의 슬로건이거나.
“나는 온 대중을 구원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따름이다. 나는 한 번에 오직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뭇사람을 위해 헌신한 테레사 수녀의 말이다.
만인을 사랑한 예수는 이렇게 말씀했다. "네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요... 지극히 작은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마태복음 25:40,45).
한 사람 작은이로 인해 우리는 비로소 모든 생명과 연관된 상생(相生)의 자리에 이른다. 한 사람의 인격을 통해서 각자는 비로소 키엘케골처럼 '신 앞에 홀로 선 단독자'(der Einzelner)가 될 수 있으며, 그 단독자는 이제 신과 더불어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보편자가 된다.
단독자는 보편성을 부정하거나 그와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다. 도리어 보편자들 속에서 솟아난 자유혼(自由魂)이며, 그 자유를 통하여 다시금 보편의 자리에 이른다. 오직 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하여, 그 한 사람 안에서 뭇사람과 숨결을 나누기 위하여, 가을의 영혼은 마침내 아득한 초월의 문을 두드린다. "가을에는 / 호올로 있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하여
그 한 사람 안에서 모든 이들을 사랑할 수 있기 위하여
불안의 파도 굽이치고
고뇌의 격랑 일렁이는 카오스(chaos)의 바다와 순수한 향기 아득히 피어오르는
영혼의 골짜기를 지나
마침내 궁극의 시간,
어둑한 카이로스(kairos)의 광야에 다다른 시인은
그 절체절명의 마지막 기원을 토해낸다.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호올로 있는 가을... 시간에서 영원으로 돌아가는 회로(回路)이며, 온갖 은원 (恩怨)과 삶의 회한(悔恨)을 삼켜버리는 생명의 블랙홀... 그 영혼의 늪 앞에서, 비록 내 미숙한 넋일망정 감히 돈오(頓悟)의 지평을 흘낏거리며 나직이 속삭여본다. 저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 같이.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사랑하게 하소서.
나의 영혼,
호올로 있게 하소서.
[출처] <광야의 묵상>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작성자 leegadf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