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밀양에는 <밀양아리랑>이 없다?
지난 회에 <밀양아리랑>이 ‘아랑처녀 설화’와의 배경과는 무관하여 그에 의한 역사성이 유명세에 기여한 것이 아니라, 노래 자체가 지닌 ‘卓越한 嶺南性’, 즉 음악적으로 ‘꿋꿋함’과 가사의 경상도적 ‘투박함’이 결정적 요소로 작용했다고 했다. 이를 전제로 밀양아리랑의 형성시기를 추정한다면 전자의 조선시대 형성설이 부정되고 근대에 이르러 형성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 이를 뒷받침 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하나는 전국 토속민요를 대상으로 조사한 ‘문화재관리국’의 조사에서 <밀양아리랑>은 불려졌으나 기층성이 없다는 이유로 제외 되었다는 사실이다. 주로 80년대 조사된 문화재관리국 발행 <전국민속종합보고서>가 그것인데, 여기에 밀양지역 조사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연구자들 사이에는 ‘밀양에는 <밀양아리랑>이 없다’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져 왔다. 이는 밀양지역에 이 노래의 기층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으로서 역사성이 확인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명시적으로 밀양아리랑의 존재가 확인 되는 최초의 기록물은 1926년 음반자료에서라는 사실이다. 구체적으로는 1926년 9월 26일 ‘일축조선소리반’ 광고에 박춘재 장고반주에 의해 ‘대구 김금화(金錦花)’가 부른 <밀양란란타령’(密陽卵卵打令)>이 그것이다. ‘卵卵’은 ‘아리랑’의 한자식 표현이다. 물론 아리랑의 형성시기를 반드시 명시적이 기록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밀양지역에 이 노래의 기층성이 확인 되지 않는 한 준거의 유일한 틀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26년의 음반(축음기판)계 상황은 전적으로 상업성과 유명 권번(券番)의 기녀들에 의해서 취입되었고, 그 시장성 역시 각 지역 권번을 중심으로 한 상권(商圈)에서다. 그래서 노래를 부른 김금화는 1933년 6월 대구에서 개최된 ‘조선음악대회’ 때 “남조선 <밀양아리랑타령>으로서 조선에 이름이 있는 김금화”로 소개된 권번 출신 명창이다. 당대 최고의 흥행 보증수표라는 박춘재와 영남출신 여류명창을 통한 취입, 여기에 ‘탁월한 영남성’이라는 음악적 조건은 당시의 상업적 판단에 의한 결과임은 물론 일 것이다. 이로서 본다면 <밀양아리랑>은 토속 전통민요가 아닌 1920년대 중반에 당대 최고의 상업적 판단으로 형성된 신민요 또는 유행가인 것이 된다.
세 번째는 밀양지역 문화계 원로들의 증언이다. 즉 80년대 중반 전국아리랑 지역을 답사한 김연갑에 의하면, “1920년대 밀양에서 권번을 운영하며 소문난 풍류가로 활동했던 작곡가 박시춘의 부친 박남포라는 분이 <밀양아리랑>을 짜서 음반을 냈다”라는 말을 곳곳에서 들었다고 한 사실이다. 필자 역시 답사 과정에서 “밀양아리랑은 오래된 소리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은 바 있어 이 전언(傳言)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는 근래 아리랑 연구가 심화되면서 <진도아리랑>이 1930년대 대금의 명인 진도출신 박종기가 만들었다는 주장과 <서울아리랑>이 영화감독 나운규 작사하고 작곡가 김영환이 편곡한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상황과 유사하여 주목하게 된다.
그러나 당연한 결론, 즉 <밀양아리랑>이 근대에 형성된 노래라고 해서 그 가치나 위상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밀양지역의 기층을 갖지 않은 신민요라는 사실 역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밀양아리랑>은 지역과 시대를 초월하여 국가적, 민족적 선호도를 획득한 역사적인 ‘히트 송’이기 때문이다. (영남민요연구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