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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28장 16-20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시간적으로 볼 때 처음 있었던 일은 아니었지만, 다시 말해 죽었다가 다시금 살아나는 일들이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분명 있었지만,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부활의 근간이 분명합니다. 즉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인 것입니다(고전15:20 참조). 그분의 부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들의 부활이 확실한 것입니다.
이런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하는데,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죄책을 가지고 태어나며, 바로 그 죄책 때문에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한 자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기 백성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우리가 짊어져야 할 죄책과 형벌을 우리 대신하여 짊어지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인성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죽어 장사되셨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더 이상 죄 문제로 인하여 죽음이라는 형벌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죄책이 제거되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이 주어지면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소망할 수 있는 자가 되었는데, 그런 측면에서 성도는 이 세상의 삶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보게 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승천하시기 앞서 열한 제자, 이들을 사도로 부르셨는데, 바로 그들에게 주시는 명령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내용을 만나게 됩니다. 16절과 17절을 보시면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지난주에 살펴보았지만 예수님께서 처음 자신의 부활을 보이신 인물은 제자들이 아니라 여자들이었습니다. 맨 처음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시고 그리고 나머지 여자들에게도 보이셨는데, 그들에게 이르신 말씀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제자들에게 가서 자신의 부활을 알리라는 것, 그리고 그들에게 갈릴리에서 보자는 내용입니다. 물론 마태복음은 많은 부분 그 사이의 내용을 생략하고 있지만, 어쨌든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죽은 것이 분명하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뵈옵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을 뵈옵지만, 그리고 경배까지 하지만, 그 자리에서도 아직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마태복음의 경우 생략한 내용들이 많고 또 요약적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의심하였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을 앞둔 것인지, 아니면 요한복음에서 도마의 의심을 언급하는데 바로 그런 사건을 의미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기록을 그대로 따르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에 앞서 자신의 부활을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여자들이 보았습니다. 바로 그 여자들이 증인의 역할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알렸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친히 나타나 보이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기 앞서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은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말해 인간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기 전에는 끊임없이 의심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경험을 매우 높이 삽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도 경험을 하기만 하면 그것이 곧 신앙의 틀이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결코 경험을 많이 한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경험을 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이상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출애굽 1세대입니다. 그들은 수없이 많은 이적과 기사를 보았습니다. 출애굽만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애굽의 많은 신들이 있지만 그 모든 신들보다 뛰어난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아니 그들이 섬기고 있는 신들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어떤 것도 하나님과 견줄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출애굽 이후에는 홍해를 건너기도 하였고,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로 말미암아 의식주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을 하면서도 그들은 끊임없이 원망, 불평,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불순종하게 되고, 그 결과 광야에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결과만 낳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험이 곧 믿음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신명기의 경우 출애굽 2세대를 향하여 말씀하신 내용인데, 거기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신명기 29장 2절에서 4절입니다.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경험했다고 해서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했다고 해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경험했다고 해서 듣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마13:13). 보았다고 해서 본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내가 경험했다. 그러나 경험한 바에 대해 깨닫지 못하는 것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보기는 보았지만 본 것에 대하여 깨닫지 못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때는 보지 않고도, 경험하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된 것이 사도행전 1장 8절인데, 거기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많은 분들은 본문에 대하여 증인이 되는 것을 강조합니다. 물론 주께서 사도들을 불러 증인으로 세우신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내용을 보면 그들이 증인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증인의 역할을 하기 위해 무엇이 먼저 있어야 하는가? 성령이 임하셔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성령 없이는 결코 증인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증인보다 앞서야 할 것이 무엇인가? 성령의 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부하기를 성령이 임할 때까지 기다릴 것을 말씀하셨던 겁니다. 사도행전 1장 4절입니다.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결국 믿음이든, 믿음 안에서 행해야 할 어떤 일이든 하나님의 역사 없이는 인간 스스로 무엇 하나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리고 인간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이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어떤 선한 것도 내 놓을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인간에게 돌아가야 할 공로는 전혀 없다는 것, 하나님께서 주셔야지 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야지 만 거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것을 내 놓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에 대한 정당한 이해인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처럼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주의 일에 동참하도록 명하시는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 스스로는 결코 이룰 수 없지만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령의 특별한 임재로 그들을 붙드셔서 그들을 통하여 주께서 친히 그 일을 행하기 위해 그들에게 명령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19절과 20절인데, 우선 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위격으로 계십니다. 성부, 성자, 성령 가운데 제2위격이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실 때 친히 창조자로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친히 섭리하시는 분이시기도 하십니다. 때문에 성자 하나님으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은 것으로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성부의 아들로서 성자 하나님은 본래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계셨고 지금도 가지고 계시지만, 지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인성을 취하시고 그리스도라는 직책을 수행하시는 분으로써 말씀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중보자로서 선지자 직분을, 제사장 직분을, 그리고 왕의 직분을 수행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사하시며, 자신의 교회를 모으시고 가르치고 다스리며, 자신이 기뻐하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행하시지만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그렇지 않은 자들까지, 아니 모든 만물에 대하여 친히 역사하실 수 있는 분으로 위임 받은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지금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못하실 것이 전혀 없는 분으로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권세를 받으신 분으로써 예수님께서는 바로 자신의 제자들을 보내시는데, 그것이 이어 나오는 19절과 20절입니다. 그러니까 19절에 나오는 것처럼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도록 명하시는데, 제자를 삼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지만, 그러나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내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무턱대고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의심하는 자가 있지만, 심지어 사도행전에 보면 승천하기에 앞서 어떤 질문을 하느냐 하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대하여 질문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지상의 왕국처럼 이해하는 질문으로, 여전히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것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으로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자들이 복음에 대한 이해가 어떤 면에서는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은 그렇게 부족한 자로 있지만, 바로 그런 그들을 보내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럼 부족하기 때문에 그냥 보내시느냐? 물론 완벽한 상태로 보내시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서 저들을 보내십니다. 내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행할 것이고, 너희는 나의 명령을 따라 행할 때 아무렇게나 행하지 않도록 그렇게 역사하실 것이란 겁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는 어떻게 말씀하시느냐?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성령을 먼저 주겠다는 것으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사도들의 사역이 그러하다면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백성으로서 주를 위한다고 할 때 만약 주를 위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조금의 것은 우리에게 속한 것으로는 결코 있지 않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성령을 주셔서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를 이끄신 결과로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인간에게 돌아가야 할 영광이 조금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고 훼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전에 언급한 적이 있지만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 초판 헌사에서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롬12:6)라는 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우리 자신에게서 모든 영광 돌릴 기회를 제거하여 그분 홀로 영광스럽게 부각되며 우리는 그분 안에서 영화로워하는 것”이 믿음에 잘 부합되는 것이다.
정확하게 고린도전서 1장의 내용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6-29) 혹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있을 수 있고, 능한 자가 있을 수 있고, 문벌 좋은 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1:30) 구원에 속한 어떤 것도 우리가 행한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 홀로 이루셨습니다(요19:30 참조). 때문에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만 자랑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고전1:31 참조).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명확하게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나의 나됨은 오로지 주의 은혜에 근거해서만 있다는 것입니다(고전15:10 참조). 은혜가 없으면 나의 나됨도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직 은혜인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은혜 외에는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 돌아가야 할 공로는 전적으로 부정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아 사도들을 보낸다고 할 때 그들의 모든 사역은 그들 스스로의 능력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덧입은 자로서 간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해야지만 증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이 19절과 20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먼저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는 것으로 말씀하기도 합니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순서상 복음이 먼저 전파되어야 합니다. 즉 가르침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가르치지 않고 복음이 전파되지 않는데 제자가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럼 무엇을 가르치는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말씀에 이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말씀입니다. 이때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신약의 모든 말씀이라 할 수 있고, 신약은 그 내용이나 정신에 있어 구약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구약의 희미한 것을 좀 더 밝혀주는 성격이 있기 때문에 신구약 통틀어 전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도라는 직분은 없습니다. 사도는 비상시대에 속하는 직분으로 사도 이후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항상 있어야 할 직분, 즉 항존직으로 목사를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교회를 섬기는 목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사도가 받은 이 말씀처럼 복음을 전파하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가르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말씀을 선포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 역사를 보면 중세 시대는 사도권을 계승했다고 하면서 마치 교황이 교회의 머리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한 이들이 바로 이 일에 전념하지 않았습니다. 가르침이 아닌 의식만 행할 뿐이었습니다. 성경도 보면 자국어로 번역된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은 읽을 수도 없는 라틴어 성경을 사용하였고, 예배가 아닌 미사 의식을 라틴어로 행하였습니다. 즉 미사에 참석하지만 참석만 할 뿐 가르침을 받는 것은 전혀 없었던 겁니다. 칼빈은 이런 저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거추장스런 제도는 이 한 마디로 무너지고 만다. 곧 어느 누구도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의 수고를 다 기울이지 않는 자는 사도들의 후계자일 수 없다. 누구든지 교사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자는 사도라는 이름을 올바로 사용한다고 볼 수 없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사도라는 직분을 말하지는 않지만 목사로 세움 받은 자가 자신에게 맡겨진 말씀의 사역을 충성스럽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주님 앞에서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을 가르친다고 할 때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모든 교리들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에 대한 내용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데, 어렵다는 이유로 가르치기를 미루거나 멈춘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면 인간의 공로는 말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의 공로를 말한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 은혜라는 말 때문에 우리의 마땅한 삶의 규범인 율법에 대한 가르침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하나님 앞에서 악한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몇 가지만을 말씀드렸지만 목사는 성경의 전 교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럼 배우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런 가르침을 사모해야 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전체 교리를 배워야 할 책임이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가르침을 받지 않고는 결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목사가 성경의 전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결코 자신의 제자를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주신 말씀을 올바르게, 성실하게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의 내용으로 오시면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말씀하시는데, 모든 민족이란 이방인까지 포함한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상직분으로써 사도가 오늘날 목사와는 다른 형태의 사역을 보게 되는데, 목사는 개교회를 섬기는 자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 받았기 때문에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해야 할 의무를 부여 받은 것입니다. 조금 더 비교하자면 구약 시대는 선지자들에게 유대 나라라는 국경선이 그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담이 허물어져 버린 신약 시대는 유대 나라가 아닌 이방 나라까지 복음의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에게 가라고 명령하시는 겁니다. 마가복음에서 온 천하를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도 동일한 내용입니다.
다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때 ‘모든’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낱낱이라는 의미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이때 ‘모든’이라는 말은 빈부귀천 차별하지 않는다는 의미,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는다는 의미, 유대인 외 이방인까지라는 의미에서 ‘모든’입니다.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주의 제자로 삼아야 한다면 사도들의 사역은 실패한 사역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나아갔지만 믿는 자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도 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모든’이라는 말이나 ‘세상’과 같은 단어가 나올 때 소위 보편구원론자들처럼 하나님은 모든 사람, 즉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구원 받기를 바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영원한 작정을 따라 누구는 선택하기로 하시고, 누구는 버리기로 하셨습니다. 왜 선택하셨는가? 왜 버리기로 하셨는가? 그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의 이유를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택한 백성으로서 믿음 가운데 있다면 이런 내용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와 감사의 내용인지를 확인하셔야 합니다. 선택할 의무가 없으셨지만 선택하시고, 선택하셨기에 때가 되어 부르시고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는지, 우리는 바로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난 뒤 주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는 말씀 뒤에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어떤 이들은 가르침 없이 세례가 가능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굉장히 잘못된 이해입니다. 매튜 풀 주석에 있는 내용을 참고하여 말씀드리자면, 성경에는 복음에 대한 지식을 단지 조금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준 전례들은 나오지만, 복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은 전례는 전혀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세례를 받은 자들은 모두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가르침을 받았고, 그 가르침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으며(행8:37), 세례 요한도 요단강에서 ‘자기들의 죄를 자복’한 자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마3:6). 다만 이것으로부터,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신자들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사도는 ‘모든 민족’에게 세례를 주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세례와 동일한 뜻을 가진 구약의 할례의 경우는 태어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유대교로 회심하는 경우도 보면 할례를 받기 전에 하나님의 율법으로 가르침을 받았지만, 일단 아버지가 유대교인인 경우에는, 그 자녀들도 태어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심지어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10:14)는 말씀도 하셨기 때문에 유아들도 세례를 통하여 구원의 표를 받을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세례는 유아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순서상 가르침을 받아 가르침에 대하여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들에게 주는 것인데, 주님께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세례의 실제적인 시행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신 겁니다. 달리 말하면 사도가 세례를 베풉니다. 오늘날에는 목사가 세례를 베풉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를 대신하여 세례를 베푸는 것인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례를 베풀 뿐입니다. 외적으로는 사람을 통해 세례를 베푸시지만, 실제 시행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란 것입니다. 따라서 목사가 세례를 베풀 때 그의 행위는 마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시행하시는 것과 똑같은 당위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할 때 ‘이름’이 갖는 의미가 그것입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위를 따라서 세례를 행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자를 삼기 위해서 가르쳐야 하는데, 가르침 혹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람의 입을 통해서 합니다. 사도들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며, 오늘날에는 목사를 통해 개교회에서 설교로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를 대신하여 이 직무를 맡았는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맡았을 뿐입니다. 진정한 시행자는 누구인가?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와 분리할 수 없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때문에 목사가 설교를 한다고 할 때 그 설교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이상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야 합니다.
다시 세례로 와서, 세례는 물로 씻는다는 의미입니다. 물을 가지고 우리의 더러운 육체를 씻는 것처럼 물이 의미하는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는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런 측면에서 세례는 구원의 의미를 갖는데, 주의해야 할 것은 구원 자체 혹은 구원을 위한 조건이 아니라 구원을 나타내는 표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21절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즉 물로 세례를 준다는 것은 구원을 준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표를 준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물 자체가 우리의 더러움을 씻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더러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깨끗하게 씻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에 보면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입니다(롬6:3 참조). 그가 죽으심으로 우리 또한 죄에 대하여 죽고, 그가 부활하심으로 이제 우리는 의에 대하여 산 자로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4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이런 측면에서 세례를 주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만들기 위한 것으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를 삼는다는 것을 통해 이 부분을 말씀드렸지만 가르침만이 아니라 가르친 것에 대하여 지킬 수 있도록 할 것까지 명하고 계시다는 것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세례를 받았지만 방금 읽어드린 로마서 6장의 말씀처럼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로서 그에 합당한 열매가 없다면 과연 그가 믿는다고 말하는 것, 그리고 믿음을 따라 고백하는 바가 사실로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서는 결코 구원을 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세례를 받고도 순종함이 없고, 우리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걸맞은 삶을 살지 않는 경우에는,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더 큰 정죄 아래 놓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서신서들을 보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 있는 교회들을 향하여 책망의 소리를 높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요한의 서신의 경우에는 성도이면 아예 죄를 지을 수 없는 것처럼 말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죄를 지을 수 없다가 아니라 죄가 얼마나 성도에게 어울리지 않는가를 그런 식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성도는 오로지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1장의 내용을 성경 봉독으로 읽었지만 고린도교회의 경우는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심각한 문제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에 대하여 뭐라고 표현하는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고전1:2)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 부르면서도 사도는 서신을 통해서 신랄한 책망을 하기 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에게는 분명 연약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는 완전 성화를 주시지 않기 때문에 연약함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세례를 받은 이후 온전함으로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가르침이 필요한 것이고, 그 가르침을 따라 지키도록 하는 권징이 시행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교회의 참된 표지를 말하는 본문은 아닐 수 있지만, 주님께서 사도들을 보내시면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보면 결국 말씀 혹은 복음의 전파, 성례의 시행, 권징까지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가 해야 할 일이 그것입니다. 동일하게 오늘날 목사가 해야 할 일이 그것입니다. 사도들의 경우는 모든 민족에게 가서 그 일을 해야 하지만, 오늘날 목사는 개교회를 섬깁니다. 이런 차이 외에 동일하게 이 모든 것을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일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도, 성례를 시행하는 것도, 심지어 권징까지 하는 이유도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설교의 앞부분부터 말씀드린 것처럼 이 일은 사도가 행하지만 실제 주체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날 목사가 말씀을 전하고, 성례를 시행하고, 권징도 행하지만 이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와 분리할 수 없으신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주체이십니다.
우리로써는 주님과 동일한 길을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말씀을 따른다는 것이 우리의 본성을 따라서는 너무나도 힘이 든다는 것을 잘 압니다. 왜냐하면 너무나도 연약한 자로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 가운데 부패성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그 일을 행하시되, 사람을 세워 그 일을 하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람은 연약하고 부족하고 부패성을 가지고 있어 죄악된 것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런 방식으로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봐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 마지막에는 어떤 말씀을 하시느냐? 제자를 삼아라. 그 일을 위하여 가르치라. 세례를 주라. 가르친 것을 지키게 하라고만 말씀하시지 않고,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스스로는 할 수 없지만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함으로 그 일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때 함께 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이 임재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이 말씀 이후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재림하실 때까지, 다시금 이 땅에 오실 때까지 거기에 계십니다. 그럼 인성이 올라가셨기 때문에 신성으로만 함께 계시느냐? 우리는 쉽게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신성과 인성은 분리할 수 없다는 것도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성찬과 관련하여 말씀드렸던 것처럼 전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시되,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이 함께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인성과 분리할 수 없으신 신성이 함께 하시지만, 그리스도의 인성이 실제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런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어쨌든 지금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맨 처음부터 우리에게 알렸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느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래는 죄로 말미암아 함께 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죄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사도들을 모든 민족에게 보내시는 이유는 바로 이 일을 실행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었지만 영원 전에 작정하신 바가 아직 실행되지 않아 복음 앞에서 믿음으로 나아오지 않은 자들을 부르시기 위해서 사도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수행함에 있어 사도들 스스로는 아무런 힘도, 아무런 능력도 없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내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졌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할 것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할 때 이 동일한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함께 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날 성도들과도 함께 계십니다.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현재 모습에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만이 나의 힘이라고 고백하면서 주를 따라가야 합니다. 주께서 가르쳐주시는 대로, 그러나 가르침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모든 가르침대로 순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불순종의 모습 가운데 책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설교의 가르침 가운데 한 부분은 책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책망까지도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자녀를 만들기 위한 방편인 줄 알고 우리는 책망 속에서도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을 보는 자로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자들로서 우리가 점점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있었던 이유, 오늘날 목사가 항존직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무엇보다 유형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