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천 이동렬 교수님을 그리며
아호雅號 / 일초헌 一草軒
스승의 날이 있었던 학창 시절 배우지 않았어도 한 울타리 안에 있었다면
스승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만나 뵙고 학연의
인연으로, 출간한 수필집을 늘 보내주셨던 도천 이동렬 교수님을 소개한다.
일초헌一草軒 호를 지어주셔서 지금까지 필명으로 쓰고 있다.
아호를 이해하는 데 글 읽는 모든 이들에게 알리는 일이 필수로 여겨지며
또한 유머와 해학으로 수필 읽을 때 그 솔직함에 웃음을 준다.
아호의 유래를 소개한다. (고국 방문 때 동문들에게 나누어준 시집 싸인에
일초헌 조용옥이라 쓰면서도 시건방지게 이해하면? 이런 생각이 들기도)
아호를 지어주신 그날 자필로 쓰신 아래의 수필과 함께 책자를 보내주셨다
토론토로 여러번 초대해 주신 트럼펫 연주회에 한 번도 가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서
이렇게 감사하며, 존경하는 교수님의 글을 소개한다.
"
민중서관에서 펴낸 <국어대사전>을 보면 아호는 "예술가들이 시문<사전에는 사물이라 돼 있으니
사전이 틀렸다>이나 서화 등에 쓰는 본명 외의 풍아한 별호"로 되어 있다. 고향을 다녀오는 길에
사온 안동 소주의 독한 주향과 담배 연기가 뒤섞여 다다미방 도서실 공간을 가득 메운 주연 석상에서
일중 선생이 내 아호를 내릴 때 "나도 이제 일류 서예가가 되겠구나"하는 시건방진 생각도 들었다.
조선 때는 아이가 커서 20살 전후의 성년식을 할 때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했다. 본 이름은
가급적 피하고 또 하나의 이름을 지어 부르기 위해 아호가 생겨났다. 말하자면 출입복은 옷장 안에
걸어두고 또 한 벌의 막 입고 막 빨아 입을 수 있는 옷을 장만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 조선 초 중기까지
호를 사용한 사람들은 주로 문필가들이었는데 조선 말기에 와서는 신분 상승을 지향하는 평민들도
아호를 지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요사이는 예술가는 물론 정치면, 콩나물 배달원, 작가, 호떡이나
떡볶이 판매원, 배우 등 누구나 아호를 지어 이름 대신 쓰는 게 유행이다.
한 사람이 2개 이상의 호를 가진 사람도 있다. 조선 말의 금석학자요 서예가인 김정희는 젊었을 때
쓰던 아호 추사, 중년을 들어서서 쓰던 아호 완당 말고도 수십 개가 넘는 아호가 있다. 아마 추사
자신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 싶다.
아호는 어떻게 지을까? <청장관 전서>에 아호 짓는 방법에 대해서 조선 정조 때의 실학파 선비
박제가와 이덕무의 문답이 나온다. 아호를 짓기 가장 쉽고 편리한 방법은 자기와 특별한 관계가 있는
지명이나 산 이름, 강 이름을 따 오는 것이다. 조선 왕조 500년을 통하여 문명을 날리던 사람 중에는
지명을 아호로 삼은 사람들이 가장 많다. 예로 퇴계 이황은 자기가 살던 토계리의 계좌를 따서
'토계리에 물러나 앉는다'는 의미로 퇴계라 했고 율곡 이이는 그의 고향 율곡리에서, 화담 서경덕은
그가 제자를 가르쳤던 곳의 연못 이름에서, 송강 정철은 전남 담양군 장평의 송강에서 고산 윤선도는
그가 가끔 살았던 경기도 양주의 고산촌에서 따온 것이다.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 거산 김영삼과 후광
김대중은 모두 고향의 지명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던 나는 큰 실수를 한 적이 있다.
대구에 있는 D 대학을 드나들던 때다. 한 번을 사람들 앞에서 아호에 관한 얘기를 할 경우가 생겼는데
아호는 겸손의 미덕을 살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 이를테면 치옹(바보 같은 늙은이)이지 현옹(지혜로운
늙은이)은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런데 앞의 두 정치인은 자기를 거창하고 화려하게 꾸민 아호를
지었으니 대단히 무식한 짓이라고 한참 아는 척 까불대고 있는데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그 호가
자기네들 고향에 있는 지명인데요"하고 일러주는 게 아닌가.
쥐구멍이라도 있었으면 그리로 기어들어 가려고 머리를 처박았을 것이다.
자기의 인생관이랄까 평소 이상과 신념을 나타내는 몇 글자로 호를 만드는 사람도 있다. 예로 백범(모두가
평등함을 주장함) 김구 화가 최북의 호생관(붓으로 생계를 이어갈 사람) 같은 호는 자기의 신념이나 직업에
알맞은 문자들이다.
호를 가지는 또 한 가지 방법은 그 사람 주위에 있으면서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이 그 사람의 특징적
기질을 잡아내서 호를 지어주는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중 말년의 호 완당은 추사가 25살 청년으로
청나라에 갔을 때 추사의 재주에 매료된 당시 청의 석학 완원이 추사에게 내린 아호이다.
1999년 내가 한국 E 대학교로 가던 해에 서울대학교 교수로 간 지구물리학의 문우일에게는 무심헌
이라는 호를, 경북대학교 교수로 있다가 은퇴한 심리학자 김보경에게는 일무거사, 한국 기업은행장
으로 있던 심종린에게는 운촌이라는 달콤한 호를 지어 불렀다. 요사이 컴퓨터를 보니 무심헌 이라는
이름이 자주 눈에 띄는 것으로 보아 문 교수는 그 아호를 애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요사이 젊은 사람들은 사시나무 떡갈나무 등 나무 이름이나 쏘가리 가물치 등의 물고기 이름
백합 채송화 등의 꽃 이름, 아니면 두더지 고슴도치 등의 동물 이름을 별호로 지어 컴퓨터에 올린다.
문제는 나 같은 분별력 없는 노인에게는 이 사람이 쏘가리인지 가물치인지 영 혼란스러운 때가 많다는
것이다. 남과 구별되는 개성이 있는 한글 아호면 좋으련만...
나는 작품에 낙관할 때 도천노옹과 같은 멋을 잔뜩 부려보고 싶으나 아직 그런 호를 쓰기엔
약간 젊다는 생각이 든다. 평생 벼슬은 한 적이 없으니 도천 처사나 도천 도인은 써도 될 나이인데
어딘지 시건방져 보인다.
아, 참 또 하나 있는 나의 아호 청현산방이 생각나네. 내 생가 역동 집에서 강 건너 훤히 내다 보이는
꿈에도 그리워하는 불망의 그 고개를 아직 깜빡 잊고 있었구나!
"
지금은 노환으로
계시다는 소식만 들었고 더는 만날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Get well soon }카드를 보내드렸고, 부디 쾌차하시기를 기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