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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소설 '꿈이 있는 뜰' (1부)
드라마 소설
꿈이 있는 뜰
(1부)
글 : 권 기 훈 (시인/방송작가)
Y시의 중심 가에 위치한 K종합병원. 오전. 어느 병실에서 엄살 섞인 사내의 비명 소리에 이어,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악--" "아니, 왜 이렇게 엄살이 심해요?" "얼마나 아픈지 알아요?" "남자가 그것도 못 참아요!"
그 병실. 오전. 소영은 주사를 놓고 새침하게 돌아선다. 순간 현재의 책이 떨어진다. "어머, 어떡해..." 소영이 책을 집어드는데, 갈피 사이에 사진 한 장이 삐죽 보인다. "애인… 이예요?" 현재는 얼른 사진을 나꿔 챈다. "……?" 현재는 얼굴을 붉히며 "애인은 무슨..." "이름이 뭐예요?" "지원이, 서지원이요." "그럼 서현재씨 동생이예요?" "왜 실망했어요?"소영은 입을 삐죽하며 돌아선다. "참 고향이 어디죠?" "그건 왜 물어요?" "아뇨. 내가 아는 사람과 닮은 것 같아서..." "그게 누군 데요?" "음악 선생님!" "네?"
무용실. 오후. 소영은 동료 언니 재희와 땀을 흘리며 무용연습을 하고 있다. "글쎄, 초등학생처럼 음악선생님 어쩌구... 기가 막혀서, 난 첨에 농담 하는 줄 알았다니까!" "네가 그 사람의 선생님을 닮았겠지 뭐."
욕실. 오후. 재희와 소영이 무용연습을 끝내고, 샤워를 하고 있다. "근데, 그 환자 뭐 하는 사람이래?" "모르겠어! 알게 뭐야! 언닌 참 별걸 다 알려고 그래!" "너도 내 나이 돼 봐라." "... 자기 말은 학생이라고 그라는데, 이상한 책만, 그것도 보는 건 한번도 못 봤으니..."
가로수 길. 오후. 재희와 소영이 낙엽이 떨어지는 한적한 가로수 길을 걷고 있다. "재미있네 뭐. 근데, 너 오늘 뭐 할거니?" "엄마한테 가 봐야 되." "참 그렇지..."
시외버스 정류장. 오후. 버스에 탄 소영이 창 밖으로 돈 봉투를 내민다. "이것 갖고 싼 방 하나 얻어 봐." "그래, 알았어. 어머니 병간호 잘해 드리고 와..." 소영은 말없이 끄덕인다.
달리는 버스 안. 오후. 스쳐 가는 저녁풍경... 소영은 수심에 잠긴 채 앉았다.
고향, 어머니의 방. 밤. 초췌한 어머니는 자리에 누워 있고 소영은 물그릇을 들고 들어와 앉는다. 어머니는 일어나려다가 심한 기침을 한다. 소영은 얼른 부축하고 약봉을 뜯는다. "병원 일 고단할 텐데, 뭐 하려 왔누..." "약..." "약 먹어서 날 병 같음 벌써 낫제..." "제발 기운 차리고 일어나세요." "틀렸어..." 소영은 그만 눈물을 쏟아 놓을 듯이 글썽인다. "엄마가 이러시면 난 어쩌라고..."
다음 날, 병원 복도. 오전. 소영이 주사 판을 밀며 바삐 지나는데, 재희가 뒤따르며 묻는다. "잘 갔다 왔니? 어머닌 좀 어떠셔?" "맨날 그렇지 뭐. 가까이 모셔 와야 하는데."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하다." "별 소릴 다하고 있어. 참 그런데, 언니. 방은 구했어?" "아직. 알아보긴 했는데, 그 돈 갖곤 쉽지가 않더라." 그때, 백 브레이스를 착용한 현재가 휠체어를 타고 오다가 유재희에게 다가선다. "방 구하려고 그래요?"
소영은 "(자신에게 묻는 줄 알고, 보지도 않은 채 쏘듯이)아뇨!" 재희는 "(민망한 듯)자취방요. 혹 서현재씨 알고 있는 방 하나 없어요?" "아, 그런 거라면 진작에 말씀을 했어야죠. 제가 누굽니까. 어떤 방을 원해요? 말씀만 하시죠." 소영은 "(돌아보며)그만 됐네요, 훼방꾼님!" "아니, 얘..." "나원 참, 기가 막혀서... 해결사란 말은 들어 봤어도 훼방꾼이란 말은 생전 첨 들어보네." "미안해요. 대신 사과할게요." "유간호사님, 방 얻어 주면 황간호사한테 커피 한잔 얻어먹게 해주는 거죠?" "그럼요." "유재희씨, 고마워요!" 하고 소영을 보자 소영은 샐쭉하고 간다.
선우의 집 앞. 오후. 소영은 주소쪽지를 들고 찾아온다. 열린 대문 안쪽으로 조금은 낡은 건물과 작고 아담한 정원에 하얀 마리아 상이 보인다. 소영은 기웃거리며 들어간다.
동 정원. 오후. 선우는 낮은 사다리 위에서 정원수를 다듬고 있다. 소영은 넋 나간 듯 그 모습을 바라본다. 그때, 선우가 돌아보며 "누구요?" "저……" 선우는 소영을 보는 순간, 놀라며 그대로 발을 헛딛고 사다리에서 떨어진다. 소영은 황급히 다가앉으며 "괜찮으세요...?" 선우는 땀을 훔치며 일어선다. "어떻게 왔어요?" 소영은 조심스레 "저, 빈 방 있어요?" 선우는 고개를 젓는다. "빈 방이 하나 있긴 하지만... 세놓은 적은 없는데요." 소영은 멋쩍게 웃으며 "정원이 참 예쁘네요..."
그 집 앞. 오후. 소영은 아쉬운 듯 나온다. 그때, 연선생이 들어가다가 돌아본다. "아가씬 누구요?" "자취방 구하려구요." 연선생의 눈이 확 커진다. "그럼..." "잠깐만!" 소영이 돌아본다. "방이 꼭 필요하면 잠깐 기다려 봐요." 연선생은 갸웃하고 들어간다. "……?"
어느 백화점의 선물코너. 오후. 소영은 어느 백화점의 선물 코너를 둘러보고 있다. 그 눈에 모형 금송아지와 목각 송아지가 대조적으로 보인다. 판매원이 나서며 "금송아지 한 마리 몰고 가세요. 금송아지는 행운을 가져다준답니다." 소영은 금송아지를 하나 산다.
선우의 집, 소영의 방. 밤. 소영은 이불을 덮고, 벽에 기대앉은 채 책상 위에 놓인 금송아지를 보며 바이올린 소리를 듣고 있다. 그때, 밖에서 펌프질하는 소리, 세수하는 소리, 코푸는 소리, 가래침 뱉는 소리가 들린다. 소영은 역겨운 듯 얼굴을 찌푸린다.
동 밖. 밤. 선우는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고 있다. 연선생이 들어온다. "너무 닮았어! 똑같애! 어쩌면 닮아도 저렇게 닮을 수가...?"
동 소영의 방. 밤. 소영은 그 소리를 듣고 있다. "난 그 여자가 다시 돌아온 줄 알았다니까!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지 뭐야! 나도 놀랬는데, 자넨 어땠는지 안 봤어도 알 만하네!" 대답 대신에 선우의 세수하는 소리, 가래침 뱉는 소리, 코푸는 소리. 소영은 역겨운 듯 얼굴을 찌푸린다. "괜히 들어왔어. 이럴 줄 알았으면..." 하고 이불을 뒤집어쓴다.
병원 복도. 오전. 소영은 주사 판을 밀고 지나가는데, 현재는 "(휠체어를 타고 소영의 앞을 가로막으며)커피 사줘요. 안 사줘요?" "왜요?" "주사 아프게 놨으니까!" 소영은 새침하게 간다. 현재는 따라가며 "그리고 또 있어요." 소영은 눈을 흘기며 "바빠요! 비켜요!" 현재는 보며 "그 눈 흘기는 모습까지 똑같다니까!"
간호사실. 오전. 소영은 재희에게 "언니, 그 환자 왜 그렇게 장난이 심한지 모르겠어. 한번도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다니까!" "글쎄, 난 모르겠던데. 소영이 너한테만 그러는 거 보니 아무래도 수상하다, 얘." "무슨 뜻이야?" 재희는 생각난 듯 "얘, 참 알고 보니 그 환자 아버지가 소문난 땅 부자래더라. 게다가 외아들인데다가 한때 고시공부까지 했대더라." "......?" "그러니 네가 찾는 왕자님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만하면 나 보기엔 괜찮은 것 같으니 잘해 봐라." 소영은 주사 판을 밀며 "환자는 취미 없네요!" 그때, 오다가 멎는 현재. 소영과 재희는 그대로 다른 병실로 들어간다.
다른 병실. 오전. 현재는 휠체어를 타고 따라 들며 "환자는 뭐 평생 환잔가. 이봐, 새침데기 아가씨! 나 이래봬도!" "집에 가면 나도 금송아지 있다구요!" 현재는 빈정대듯 "커피 한잔 얻어먹기 되게 힘드네!" 소영은 노려본다. "아, 아니예요, 유재희씨!" 하며 소영을 안으려 한다. "왜 이래요! (밀어 버린다)" 현재는 넘어진다. 황급히 현재를 부축하는 소영. 재희는 깔깔대며 웃는다.
선우의 집, 유리의 방. 밤. 유리는 악보를 보며 바이올린을 켠다. 서툴지만 열정적이다. 순간, 툭! 끊어지는 줄- 유리는 낭패된 표정이 된다. 얼른 일어나 책상 서랍을 뒤진다. 그러나 없는 모양이다. 유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나간다.
동 소영의 방. 밤. 소영은 "(책상 위에 유난히 반짝이는 금송아지를 보며)이게 진짜 금이라면……" 유리의 "(목소리)언니!" 소영은 "(문을 열고 내다보며)유리가 웬일이야?" 유는리 "(바이올린 줄을 내보이며)내일까지 연습해 가야 하는데..." "그런데?" "무서워서 혼자 못 가겠어." "알았어. 잠깐만 기달려."
동 정원. 밤. 유리와 소영은 정원을 나오고 있다. "(하늘을 보며)별이 참 아름답죠?" "(건성으로)그래, 아름답구나." "아이 참, 언닌…" 소영과 유리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한 곳을 본다. 선우도 저만치 정원에서 별을 보고 서 있기 때문이다. 쓸쓸한 모습이다. 소영은 갸웃한다. 그러나 유리는 알고 있다는 듯이 본다.
동 소영의 방. 밤. 바이올린을 켜는 유리와 신기한 듯 보는 소영. 유리는 바이올린을 멈춘다. 소영은 "(보는)……?" 유리는 "(문득)우리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생각하다니?" "선생님과 결혼할 뻔한 여선생님이 있었대요." "그런데?" "그런데, 연선생님의 말씀으론 언니가 그분을 참 많이 닮았대요." 소영은 "(보는)……?" "어쩌면 선생님께선 그래서 언니한테 이 방을 주었는지도 모르겠어요." "……?" "그 동안 이 방은 그 여선생님이 떠나신 후론 이제까지 한번도 다른 사람한테 빌려준 일이 없었는데 말예요." "......?"
동 정원. 아침. 연선생이 정원수를 다듬는 선우의 사다리를 잡아 주고 있다. 이때, 소영과 유리는 테니스장에서 돌아오고 있다. 소영이 쿡! 웃는다. "왜 웃어요?" "요즘 닮았다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연선생과 선우는 함께 웃으며 들어가는 소영과 유리를 본다.
병원 복도. 오전. 현재는 휠체어를 탄 채 창 밖을 보고 있다. 재희는 "(지나다가 보며)오늘은 왜 그렇게 우울해 보여요? 황간호사 못 봐서 그래요?" "오늘은 왜 안 보이죠?" "쉬는 날이예요." "그랬군요." "(다가서며)황간호사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그 새침데기 아가씨 그냥 귀엽죠 뭐." "그럼 혼자만 끙끙 앓지 말고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해 보시지 그래요." 현재는 "(쓸쓸히 웃는다)... 황소영씨 너무 깨끗해서 내가 다가서면 반드시 때 묻히고 말 것 같아서요."
선우의 집 마루. 오후. 선우와 연선생은 바둑을 두고 있다. 자신만만하게 돌을 놓는 연선생. 선우는 "이거 낭팬데..." "졌으면 돌 던지지 그래!" 선우는 "(묘수 자리 찾았다. 회심의 미소)……!" "이러다가 해지겠군. (일어서려 한다)" 선우는 그 묘수 자리에 돌을 놓는다. 연선생은 "아차! 그걸 몰랐군! 딱 한 수만 물리세!" "그럴 순 없지!"
소영의 방. 오후. 소영은 "유리는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부모님은?" 유리는 "(눈시울이 젖는다)……" 소영은 "(본다)……?" "중학교 2학년 때 두분 다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저런……" "이선생님은 아버지 후배 되셔요." "그랬구나... (분위기를 의식하며)너 참 바이올린 잘 켜더구나. 바이올린은 언제부터 배웠니?" "아버진 제가 유능한 바이올 리스트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시면서 박봉으로 모아 둔 적금을 해약해서 제게 바이올린을 선물하셨죠. 그런데, 바로 그날..." 소영은 "(다시 분위기를 의식하며)그럼 연선생이란 분은 이선생님과 어떤 사이시니?" "네, 같은 학교에 근무하셔요." "하지만 그 분은 이선생님하곤 딴판인 것 같애." "어떤 점이요?" "암튼 말씀도 잘하시고 때론 허풍도 세신 것 같고..." "겉 보긴 그래도 마음씨가 좋으셔요. 이선생님을 돕던 오선생님이 떠나신 후, 여러 가지로 도움을 참 많이 주시곤 해요." "언제 기회 있을 때 연주 좀 부탁해도 되겠니?" "그러죠 뭐. 잘은 못하지만..." "실은 내 꿈이 발레리나 였거든." "어쩐지 그런 분위기를 느꼈어요." "너 참 감각이 대단하구나." "아니, 뭘요."
동 마루. 오후. 연선생과 이선생은 까르륵… 웃음 소리가 흘러나오는 아랫방 쪽을 본다. 연선생은 "오늘은 출근 안했나부지?" "응, 쉬는 날인가 봐. 유리하고 꽤 잘 어울리는 것 같애. 애가 외롭게 자라서 그런지 부쩍 따르고 그래." "사람은 어때?" "모르겠어. 별로 얘기 나눌 기회가 없으니, 그냥 착하고 좋은 사람 같애." "아무 느낌도 없어?" "무슨 소리야?" "처녀총각이 한 집에 살면서 너무 재미가 없는 것 같아서." "처녀총각? 자네 정말..." "아, 미안. 노총각은 총각 아닌가... 그나저나 그놈은 아직도 소식 없나?" "그놈이라니?" "자네 제자 말이야!" "아, 글쎄 어디서 무얼 하는지 통 소식이 없으니 걱정일세."
연선생과 이선생은 마루에서 내려온다. 이때, 소영이 나오다가 연선생을 본다. "안녕하세요?" "오늘 쉬는 날이라구요?" "네." 이때, 유리도 나온다. "안녕하셔요?" "너 요즘 예뻐지는 것 같구나!" "아이, 선생님은..." 소영은 나간다. "어디 가세요." "바람 좀 쐬려구요?" "점심은?" "먹었어요." "나참, 맛있는 거 혼자만 해 먹지 말고 이선생이랑 좀 나눠 먹고 그래요." 선우는 "원 싱겁긴 어서 가기나 하게."
근처 호수. 오후. 연선생의 "(목소리)아이쿠우!" 소영이 돌아보면 연선생은 저 만치에 주저앉아 있다. "어머, 왜 그러세요?" "아유, 나참, 소영씨 쫓아오다가 그만 발목을 뼜지 뭡니까. 무슨 여자 걸음이 그렇게 빨라요." 소영은 "(쿡 웃는다)……!" "남은 아퍼 죽겠는데, 웃긴 왜 웃어요?" "죄송합니다." 소영은 앉는다. 연선생도 앉는다. 그들의 시야에 잔잔한 호수의 물결...... 소영은 호수 건너편에 위치한 넓은 정원의 별장을 보고 있다. 연선생은 "(하늘을 보는 듯 딴청을 부리며)하늘이 맑군요." 소영은 여전히 별장을 본다. 연선생은 "(여전히 하늘을 보며)하늘처럼, 눈부신 햇빛처럼 그렇게 살고 싶군요." 소영은 여전히 별장을 보고 있다. 연선생은 "(소영을 보며)부러워요?" "......" "참 이선생 어때요?" "……?" "사람이 어떠냐구요?" "그냥 그렇죠, 뭐." "소영씨한테 잘 안 해줘요." "말씀이 없으신 분 같아요." "그 사람 옛날엔 그렇지 않더니만, 소영씨가 얘기 좀 시켜 봐요. 알고 보면 외로운 사람이예요." "......" "그렇게 지내다 보면 누가 또 알아요. 인연이 될는지... 옛말에 친하게 지내다 보면 밥 먹여 준다는 말도 있잖아요." "옛말에 그런 말도 있었어요?"
간호사실. 오전. 소영은 뭔가를 급히 찾고 있다. 현재의 "(목소리)뭘 그렇게 찾아요?" 현재는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며 싱글벙글 웃는다. 대꾸 않고 계속 뭔가를 찾는 소영. 재희가 "(나타나며 소영에게)수술환자 차트 아직 못 찾았어? 큰일났네. 곧 수술 들어갈 시간인데." 현재는 "(시늉을 해 보이며)이렇게 이렇게 생긴 거 찾아요? 내가 도와줄까요?" 재희는 "그래 주실래요?" "찾아 주면 커피 사주나요?" 소영은 "알았으니 빨리 찾아 주기나 해요." "정말이죠?" "속아만 봤어요?" "(차트를 내주며)여기 있어요!" 소영은 "(어이없다는 듯)아니?" "저쪽 휠체어 위에 있던데요." 재희는 "오! 맞어. 조금 전에 그 환자 이빈후과 보냈었 잖아." 소영은 새촘하게 나꿔 챈다.
동 복도. 오전. 소영은 휠체어를 탄 현재에게 커피를 뽑아 준다. 그때, 목발을 짚은 환자가 일부러 부딪힐 뻔하며 지난다. 소영은 "어머머!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환자는 저만치 가다가 소영을 힐끔 보고 간다. 현재는 "괜찮아요? 기왕이면 한잔 더 뽑지 그래요." "아니, 두 잔씩이나 마시게요?" "혼자 무슨 재미로 마셔요." 소영은 새촘하게 돌아선다. "소영씨!" 소영은 돌아본다. "바람 좀 쐬고 싶어요." "그래서요?" "간호사가 뭐합니까?" "뭐예요?" 현재는 "(백 브레이스가 지겹다는 듯)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아요." "난 바빠 죽겠다구요!" "그래도 소영씬 행복한 죽음이네요." "뭐예요?" "아, 아니예요. 혼자 나가 보죠 뭐. (급히 가며)하지만 사고 나면 책임져야 할걸요." "기가 막혀서..."
동 잔디밭. 오전. 소영은 현재의 휠체어를 밀고 와 멎는다. "소영씬 음악선생님 얘기 듣고 싶지 않으세요?" "(시큰둥하게)관심 없어요!" 현재는 커피를 마시며 회상에 잠긴다.
어느 양로원. 회상. 무의탁 노인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옷을 입혀 주는 오선생과 선우의 모습 위에 현재의 "(목소리)음악선생님과 영어선생님은 정원 가꾸는 게 유일한 취미 였죠."
병원 잔디밭. 오전. 현재는 "음악 선생님은 영어선생님과 같은 학교에 근무하셨는데, 영어선생님 댁에서 자취를 하셨죠." "......" "그리구 전 부모님 성화에 영어선생님 댁에 덤으로 맡겨졌구요." "......" "그런데, 음악선생님도 소영씨처럼 꽤나 새침데기 였죠." 소영은 짜증스럽게 본다. "영어선생님이랑 데이트할 때면 내가 영어선생님 대신 음악선생님께 '선생님, 추우신 데 안아 드려도 될까요?' 하면 '얘가 왜이래!' 하셨죠." 소영은 현재의 시늉에 쿡 웃는다. "소영씨, 손 한번 잡아 봐도 될까요?" "(뿌리치며)어머, 왜 이래요!" 현재는 쓸쓸히 웃으며 생각에 잠긴다. "영어선생님과 음악선생님은 서로 무척 사랑했나 봐요?" "음악선생님도 소영씨처럼 영어선생님 앞에선 새침을 떨곤 했지만, 영어선생님은 모른 척 하곤 했죠." "......" "하지만 난 달라요. 이상 보단 현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니까요." "......" 현재는 소영의 손을 힘있게 잡는다. 소영은 조금 놀란다. 그러나 그대로 본다. 현재는 "(손을 놓으며)커피 잘 마셨어요. 다음엔 내가 살게요."
소영의 방. 밤. 소영은 금송아지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현재의 "(목소리)환자는 뭐 평생 환잔가! 이봐, 새침데기 아가씨! 나 이래봬도!" 소영의 "(목소리)집에 가면 나도 금송아지 있다구요!" 소영은 여전히 금송아지를 보며 생각에 잠겨 있다. 재희의 "(목소리)얘, 참 알고 보니 그 환자 아버지가 소문난 땅 부자래더라!" 소영은 "(금송아지를 보며) 이게 진짜 금이라면……" 소영은 불을 끄고 자리에 눕는다.
엘리베이터 안. 오후. 소영과 재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다.소영은 "생각보다 얘기해 보니 쬐끔은 괜찮은 치 같애." 재희는 "그 친구 제법이네. 무슨 얘길 했길래 그렇게 꼴도 보기 싫다던 우리 소영양의 마음을 싹 바꿔 났지?" "그 사람은 만날 때마다 자기 고등학교 선생님들 얘길 하곤 해. 특히 영어선생님과 음악선생님 얘길." "영어선생님? 얘, 참 너네 집 아저씨도 영어선생님이라며? 그렇다면 혹...?" "말도 안돼. 영어선생님이 어디 한 둘인가 뭐." "하긴...!"
동 밖. 오후. 소영과 재희는 엘리베이터에서 나온다. "얘!" 소영은 돌아본다. "오늘 네 자취방 구경 좀 해도 되겠니?" "좋을 대로."
선우의 집 앞. 오후. "어맛!" "아이쿠!" 나오던 연선생과 재희의 부딪힘- 쏟아지는 과일…… 연선생은 허겁지겁 과일을 줍는다. 멍하니 보다가 웃는 소영과 재희.
동 소영의 방. 오후. 소영과 재희는 과일봉지를 들고 들어온다. "미안해서 어째!" "미안하긴! 이 혹 좀 봐 얘! 그런데도 그친 미안하단 말도 없었잖아! 아유 아퍼!" "사람이 너무 미안하면 말도 못하잖아." "그런데, 그 치가 네가 말하던 너네 아저씨니? 진짜 깨어진다! 깨어져!" "뭐가? 머리가?" "환상이!" "연선생님이라고 이선생님의 친구 분이신 데, 수학선생님이셔." "아니, 뭐 수학선생? 그러면 그렇지! 아휴 꼭 정원사 사다리 잡아 주는 아저씨 같이 생겼더라 얘!"
동 밖. 오후. 재희와 소영이 나온다. "왜 벌써 가려구? 저녁 먹고 가지." "다음에." 이때, 선우가 들어오며 "아! 손님이 오셨나 보죠?" "아, 네." "유재희라고 해요." "이선우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소영이 귀엽게 봐..." 소영은 재희를 꼬집는다. "아얏!" 소영은 어쩔 줄을 모른다. 선우는 "그럼. (하고 들어간다)" 소영은 "왜 그래, 언니!" "진짜 근사하게 생겼다 얘! 뭐랄까... 시쩍이랄까... 아니, 그 분위기, 그 목소리..." "뭐가 좋다고 그래, 남자가 좀 남자다운 데가 있어야지." "더 이상 어떻게 남자다울 수가 있단 말이니." "암튼 난 싫어!" "오 그래, 너 참 그런 애 였지."
병원 앞. 밤. 소영은 걸어오는데, 휘파람 소리. 소영은 돌아본다. 잔디밭에 앉아 있던 현재가 일어서며 "야근이예요?" 소영은 "(다가서며)밤 기온이 찬데 여기서 뭐해요?" "갑갑해서 나왔어요. 저 넓은 밤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음악선생님이 생각나요." 현재와 소영은 하늘을 본다.
어느 보육원. 회상. 오선생과 선우가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고, 입맞추고 다독거려 주고 있다. 현재의 "(목소리)음악선생님이 떠나신 후, 그 정원은 영어선생님의 몫이 되었죠. 얼마나 열심인지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가 아니라 마치 꿈을 가꾸는 정원사 같았어요."
병원 잔디밭. 밤. 현재는 "난 영어 선생님의 잃어버린 현실을 찾아 주고 싶었지만 결국은 실망만 안겨 드리고 말았죠." "그 분은 결혼하셨나요." "아뇨." "……?" "왜 그래요?" "아, 아무것도 아네요. 그런데, 참 이상해요. 음악선생님이 영어선생님을 그렇게 좋아했다면 왜 떠났을까요?" 현재는 별을 보며 우울해진다. 소영은 더욱 의아히 본다. "(울적하게)저 하늘 어딘가에 별이 되셨을 거예요." "어쩌면…… 제가 공연한 걸 물어 봤나 보군요..." 소영은 젖은 눈으로 본다.
선우의 정원. 달밤. 별님 같은 오선생의 영혼이 휘황한 달빛아래, 정원 잔디밭에서 나비처럼 춤(고전무용)을 추고 있다. 현재의 "(목소리)영어선생님께선 밤마다 별이 되신 음악선생님의 영혼이 그 정원에 내려와 춤을 추는 꿈을 꾸신다고 하셨죠."
동 소영의 방. 밤. 생각에 잠겨 있는 소영 위에, 현재의 "(목소리)그래서 영어선생님께선 그런 환상에서 깨어나기 위해 한때 신부님이 되실려고 하기도 하셨대요." "......" 현재의 "(목소리)하지만 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 환상은 지울 수가 없었던 것 같아요." 소영은 뭔가를 알았다는 듯 불현듯 나간다.
동 정원. 달밤. 소영은 달려와서 확인하듯 주위를 둘러본다. 밝은 달…… 푸른 잔디밭…… 소영은 어느 새 자신도 모르게 오선생처럼 춤(현대무용)을 추기 시작한다. 그때, 바이올린 소리…… 소영은 돌아본다. 유리가 바이올린을 켜며 오고 있다. "아니, 유리야?" "잘 추시네요. 며칠 있으면 이선생님 생신인데, 우리 축하선물로 연습해 두는 게 어떨까요?" "좋아!" 소영은 살포시 유리를 안는다.
동 마당. 아침. 소영과 선우는 출근을 서두르며 나온다. "병원 일 힘들지 않아요?" 소영은 웃는다. "소영씨도 빨리 결혼해야죠. 결혼하면 생활이 조금은 덜 힘든다고 들 하더군요." "그런데, 선생님은 왜 안하셨어요?" "글쎄요..." 소영은 선우를 본다. "그럼." "저, 선생님." 선우는 소영을 본다. "혹... 병원에 입원한 제자 분 계세요?" "아뇨. 없는데..." "그럼 혹 이름이...?" 그때, 전화가 울린다. 선우는 전화를 받기 위해 마루로 올라가고, 소영은 뭔가를 말하려다가 돌아서 나간다. 선우는 전화를 받으며 소영을 보는데……
어느 병실. 오후. 환자는 "(부랑스럽게 화를 내며)아니, 뭐 이런 게 다 있어! 갈아 달라면 갈아줄 일이지 간호사가 하는 일이 뭔데 그래, 엉?" 소영은 파랗게 질려 있고, 환자는 "나한테 혼나고 싶어? 이 병원 원장이 누구야? 원장한테 당장 가볼까?" "(대들듯)지금 시트도 없고 또 이만하면 깨끗하니 내일 갈아 주겠다는 데, 왜 화를 내고 그래요?" 환자는 "얘가 아직 내가 누군지 모르는 모양인데, 너 당장 쉬고 싶어? 좋은 말할 때 내놔!" "없는걸 당장 어떻게 내놓으란 말예요?" 환자는 "(목발로 때릴 듯이)이게 그냥!" 소영은 겁에 질린 채 어쩔 줄을 모르는데… 그때, 현재의 "(목소리)소영씨!" 돌아보면 현재가 나타난다. 현재는 "(소영에게)저... 지금 원장님께서 급히 찾던데, 빨리 가 봐요." 하고 소영을 잡아끌고 나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