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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生曲(무생곡)을 부르며 평생을 보낸다
3월 일요법회 법문
無生歌曲送平生(무생가곡송평생)
무생곡을 부르며 평생을 보내노라
幾度溪山黃又靑(기도계산황우청)
계곡과 산색이 몇 번이나 변했던가?
千古旅情百代事(천고여정백대사)
천고의 나그네 정, 백대의 일들이여
浮雲起滅月虧盈(부운기멸월휴영)
뜬구름 일어나 사라지고 달이 차고 기움이네.
無生歌曲送平生 무생곡을 부르며 평생을 보내노라
옛날 큰스님들께서는 일상 생활하는 모습을 ‘無生歌(무생가)를 부르며 세월을 보낸다’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無生歌(무생가)는‘깨달음의 노래’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 천지만물이 현상계에 전개돼 있는데, 본래 이 모든 존재들이 생긴 바가 없다는 것이라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불교를 어느 정도 이해 못 하면 잘 납득이 안 되는 말이죠. 또 깨달음을 달리 표현할 때 無生法印(무생법인)이라 하기도 합니다. 축원을 할 때 맨 끝에 붙이는 말이 頓悟無生之大願(돈오무생지대원)입니다. ‘단박에 무생을 깨닫기를 크게 원합니다’라는 뜻입니다. 『華嚴經(화엄경』 <十忍品(십인품)>에 세 번째 무생법인이 나옵니다. 無生法印(무생법인)은 法(법)을 생략하고 ‘無生印(무생인)’이라고도 합니다. 생겨남이 없다는 이 말은 쉽게 바꿔 말하자면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죠. 어제, 오늘, 내일 하루하루 세끼 밥 챙겨 먹고 할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는데 사는 게 없다는 얘기입니다. 살아가는 실생활의 현실 경계를 두고 사는 게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하여 받아들이기가 어렵겠죠. 그런데 옛날 도인들의 가풍이라든지. 큰 스님들의 일상생활 모습을 無生歌(무생가)를 부르며 살고 있다고 표현을 했다는 것입니다. 앞에 읊은 시는 조선 선조 중기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霽月敬軒(제월경헌 : 1542~1633) 선사가 지은 시입니다. 서산대사의 제자입니다. 임진왜란 때 승병장이 되어 전쟁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곳곳의 명산 사찰을 찾아다니며 수행하다 금강산이 마음에 들어 금강산에서 30년을 살았다 합니다. 치악산 영은사에서 법랍 76, 세수 91세로 입적하였습니다. 아마 역사적으로 스님들의 생애를 놓고 볼 때 장수한 스님으로 기록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는 해탈의 경지에서 부르는 노래를 게송을 읊어서 법문을 했죠. 옛날 선사 스님이나 큰 스님들은 말 길게 안 해요. 게송 한 번 읊어버리면 그게 법문 전부인 거예요. 무생곡을 無生歌(무생가)를 부르며 평생을 보냈다고 하지요. 그냥 사는 게 없이 산다 - 쉽게 번역해서 말하자면, 이런 뜻이에요. 사는 게 없이 그냥 산다 이 말이 참 뭔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 같기도 하고 무슨 뜻인지 궁금하게 생각되기도 하죠. 사실 우리 모두가 사는 게 없이 사는 겁니다.
幾度溪山黃又靑 계곡과 산색이 몇 번이나 변했던가?
계절 따라 이제 산색이 바뀌어지지 않습니까? 오늘이 3월 2일로 봄이 시작되었죠. 희망의 봄의 기운이 솟아오르는 그런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나뭇잎이 다시 피어나고 이제 푸르름으로 장식이 되겠죠. 가을이 되면 이제 단풍 지고 낙엽 지고 산색이 또 바뀌게 됩니다. 幾度(기도)는 ‘몇 번이나’라는 뜻이고, 溪山(계산)은 ‘계곡과 산색’입니다. 幾度溪山黃又靑(기도계산황우청)은 ‘계곡과 산색이 몇 번이나 노랗게 되었다가 푸르게 되는 것을 보았던가’라는 뜻으로 지금까지 얼마나 살아왔던가 라는 뜻입니다. 물론 나이대로 살아왔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세 번째 구를 보도록 하지요.
千古旅情百代事 천고의 나그네 정, 백대의 일들이여
千古(천고)는 萬古(만고)와 같은 뜻으로 쓴 말입니다. 萬古(만고)의 旅情(여정)이나 千古(천고)의 旅情(여정)이나 인생은 여행하는 곳이라는 이야기입니다. 『楞嚴經(능엄경)』원문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오죠. 평생 한 생애를 사는 것이 여행을 하다가 날이 저물어서 호텔 같은 그런 숙소에 들어가 하룻밤 묵는 것과 같다는 비유가 있습니다. 일생이 여행하다가 하룻밤 숙소에 들어가 묵는 것과 같다 - 그러니까 千古(천고)의 旅情(여정)이지요. 계속 다녀야 돼요. 생 자체가 여행의 1박이니까... 百代(백대)는 代代(대대)와 ‘대대로 이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자손 대대로’라는 말도 흔히 씁니다만 항상 대대로 이어지는 거 아닙니까.
浮雲起滅月虧盈 뜬구름 일어나 사라지고 달이 차고 기움이네.
뜬구름이 일어났다가 없어지고 달이 찼다가 기울어진다고 했습니다.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도 있지요.
인생을 이런 여정의 분위기로 읊어놓은 사구송이 생각나서 오늘 소개를 해드렸습니다.
항상 길을 가는 사람은 이정표를 읽는다고 하잖아요. 차를 타고 가다 보면 이정표가 고속도로에도 있어서 어디까지 갔는지 알 수 있지요. 그래서 내가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가 이정표를 한번 읽어 보고 마음을 가다듬고 새롭게 나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불교는 인생을 斷見(단견)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斷見(단견)이란 시간의 시작과 끝을 한정적으로 정해 놓고 그 밖의 것을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어떤 면에서 단순하게 표현하는 말이기도 한데 “내가 죽으면 그만이지”라는 말을 잘합니다. 그런데 정말 깨달은 사람, 즉 해탈한 사람은 죽으면 그만이 아니에요. 잠이 들면 아무것도 의식은 속에서 생각이 안 일어나지만 꿈이 꾸이는 수가 있습니다. 누구나 잠을 많이 자면 꿈을 꿉니다. 그렇듯이 한 생애를 볼 때도 죽고 나서도 보통 靈駕(영가)라고 부르는 意生身(의생신)의 세계가 있어요. 그러니까 인생은 千古(천고)의 여정이지요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가고 하듯이 금생도 가고 내생도 가야 되는 그런 말과 똑같은 뜻으로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래서 언제부터 언제까지 시간을 한정해 놓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것에서 깨달음이라는 걸 다르게 표현해보자면 깨달음은 영원하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시간적으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공간적으로 무한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한정된 범위가 없어요. 그 다음에는 원만하다는 걸 아는 거예요. 모든 것이 제대로 딱 자리를 찾아서 원만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외에 한 가지 더 말을 덧붙이자면 청정하다는 겁니다. 본래 청정한 거예요. 본래 자성이 더러운 법은 없어요. 업이 들어서 잘못된 업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마음을 잘못 쓰게 되니까 도덕적으로 말할 때 나쁜 일을 하는 수도 있죠. 그러나 自性(자성) - 본성 자리인 자기 자성은 청렴한 거예요. 마음은 어느 누구 없이 본래 청정하다는 거예요. 마음 자체가 오염되어 있거나 더러워진 건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마음이 오염됐다고 하는 것은 번뇌가 항상 마음속에 일어나니까 그런 것입니다. 번뇌가 말하자면, 거울에 끼는 먼지와 같은 것이고. 목욕을 안하면 몸에 끼는 때와 같은 거예요. 그래서 중생은 때로써 살아가는 존재예요. 수시로 때를 묻히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그런데 斷見(단견)을 가진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다음 생을 부정합니다. 이런 斷見(단견)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신앙 정서를 가질 수가 없어요. 미스코리아를 선출할 때도 眞善美(진선미)를 뽑잖아요. 진이 1등이고 선이 2등이고 미가 3등인가 봐요. 진선미를 가지고 등수를 매긴다고 하지요. 그런데 본래 청정한 그 자리는 聖(성)이에요. 진 선 미 보다 더 높은 경지가 거룩할 聖(성), 성의 경지입니다. 종교가 성에 해당합니다. 불교 교리에서도 성인 聖(성)자를 붙여서 말하는 四聖諦(사성제)가 있지 않습니까? 네 가지 거룩한 진리. 자기 불성 자리 성품은 성스러움이고 또 다르게 말하자면, 청정한 것이고. 이 자체는 오염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청정한 성품 자리를 가지고 있으니까 자기 부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 부처를 안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는데 그것을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法華經(법화경)』에는 이런 비유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지 행각을 하면서 떠도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매일 이집 저집 다니면서 문전걸식을 하며 밥을 빌어 먹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길가에서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을 때 어떤 이가 이 사람의 옷 속에 값진 보물 하나를 넣어주고 갔습니다. 말하자면 요즈음의 보물인 다이아몬드 같은 아주 값비싼 보석을 주머니에 넣어주고 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난한 유랑객이 그걸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거지 행각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法華經(법화경)』에서는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 다른 일이 아니고 모르고 있는 옷 속에 숨겨 있는 보물을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비유는 어느 가난한 집이 있어요. 집도 지붕도 초라하고 쓰러져 가는 가난해 보이는 집이에요. 마당에 잡초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요. 그런데 어느 사람이 그 집 앞을 지나가다가 “저 마당가에 있는 잡초를 싹 제거하고 땅을 파 보라”고 권했습니다. 집 주인이 “왜 땅을 파라고 하느냐?”고 하니 “글쎄 한번 파보시오. 땅속에 어마어마한 큰 보물이 나올는지 모르오”라고 말하고 지나갑갔습니다. 그런데 집 주인이 실없는 사람의 허튼소리로 여기고 땅을 파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믿지를 못한 것이지요.
‘저 사람이 미쳤나 뭘 안다고 저 마당의 잡초를 다 뜯어내고 땅을 파면 거기서 보물이 나온다고 하나’라고 하면 보물이 나오지 않지만 나그네가 일러준대로 하면 땅속에 보물 덩어리가 있다는 겁니다. 열반경에 나오는 설화입니다.
믿지 못하는 마음은 곧잘 단견에 빠지는 부정적인 생각을 일으키게 합니다. 자기 자신이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斷見(단견)을 외도의 생각이라 합니다.
그와는 반대로 常見(상견)에 빠지지 말라는 말도 있어요. 常見(상견)은 단견의 반대로 무조건 있다고 믿는 유(有)의 관점에서 고정관념을 가지는 것입니다.
옛날에 중국에서 한 때 참선하는 선종이 좀 쇠퇴되고 염불을 권장하는 그런 시대가 있었습니다. 永明延壽(영명연수) 선사 같은 분은 그래서 이제 염불과 선을 하나로 보자는 禪淨一致(선정일치)를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모두 禪(선)은 안 하고 염불만 하려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스님이 ‘전부 염불만 하려하니 잘못하다가 참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지겠어’라고 염려되어 서 “극락이 없는데 무슨 극락에 간다고 떠드느냐?”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극락 극락 하지 마라. 네가 가봤나? 내가 가봤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방편으로 전부 참선은 안 하고 염불만 하려고 하니까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게 되는 결과가 될까봐 방편으로 한 말이라고 볼 수 있지요.
그 스님의 말을 조금 더 부연해서 설명하자면 극락이 있다고 꼭 믿는 것도 - 어떤 면에서 오해가 없어야 되는데 - 常見(상경)이 돼버리므로 무조건 있다고 믿어도 안 됩니다. 처음 듣는 분들은 이게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죠. 항상 하다고 믿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涅槃經(열반경)』에서는 ‘涅槃四悳(열반사덕)’인 常樂我淨(상락아정)을 설하고 있지요. 이 세상 중생계는 무상한 세계인데 부처님 세계는 영원한 세계라고 하여 아미타불도 無量壽佛(무량수불)이라고 번역하잖아요. ‘영원한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도의 속성을 말할 때도 영원이라고 앞서도 말했지요. 깨달음(覺)이라는 것도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이고, 공간적으로 무한한 것이다 라고 형용사를 통해서 수식하자면 그렇게 말하는데 그러나 우리가 그 생각에 또 집착해버리면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있다고 고집해도 안 되고 없다면 고집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큰절에 가면 금강계단 패찰을 붙여놓은 그쪽에 설법전을 향하는 그쪽에 十玄門(십현문)에 나오는 사구게의 게송이 주련으로 걸려 있습니다.
初說有空人盡執(초설유공인진집)
처음 유와 공을 설하자 사람들이 모두 집착하다가
後非空有衆皆捐(후비공유중개연)
뒤엔 공유가 아니라 하니 모두 다 버리니
龍宮滿藏醫方義(용궁만장의방의)
용궁에 가득한 의술 처방의 뜻은
鶴樹終談理未玄(학수종담이미현)
학수의 마지막 말씀에도 이치가 현묘하지 않았네.
初說有空人盡執 처음 유와 공을 설하자 사람들이 모두 집착하다가
부처님이 처음에 설법을 하실 때는 있다·없다고 구분해 말씀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있다·없다고 구분해 말해줬다는 말이지요. 예를 들면 극락이 있다. 또는 없다 라고 설법하는 방편이 그랬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있다고 말하고 없다고 말하고 보충해 말하자면, 구분해서 말해줬더니, 말에 전부 집착해버리더라는 거예요. 人盡執(인진집) - 사람들이 다 집착해 있다는 뜻으로 있다고 하면 있는 쪽으로 몰리고 없다고 하면 없는 쪽으로 몰린다는 것입니다. 중생심은 그런 경향이 있지 않습니까?
後非空有衆皆捐 뒤엔 공유가 아니라 하니 모두 다 버리니
초기에는 그렇게 말하니까, 말 따라 집착해버리니까 그래서 할 수 없이 뒤에 가서는 그 집착을 버리도록 하기 위해서 공유가 아니라고 했다는 말입니다.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 두 개를 다 부정해버렸다는 衆皆捐(중개연) - 대중들이 모두 버리더라는 말입니다.
龍宮滿藏醫方義 용궁에 가득한 의술 처방의 뜻은
龍宮滿藏(용궁만장)은 『華嚴經(화엄경)』설화에서 나온 말로부처님 법문이 수록한 경전에 용궁에 저장되어 있었다 하여 생긴 말입니다. 용수보살이 『華嚴經(화엄경)』을 용궁에서 가져왔다고 하여 龍宮將來說(용궁장래설)이라고 합니다. 용궁에서 가져왔다는 설화적인 이야기로 上本(상본)·中本(중본)·下本(하본)의 인간 세상에는 도저히 유통될 수 없는 큰 양의 『華嚴經(화엄경)』이 있었다는 거죠. 龍宮滿藏(용궁만장) - 용궁에 가득 저장돼 있는. 醫方(의방)은 약을 제조할 때 처방전 같은 것입니다. 의사들이 처방할 때 요즘에는 주사도 맞고 약도 쓰고 이런 여러 가지 처방법이 있는데, 이것이 醫方(의방)입니다. 부처님 법문이 중생의 병을 치료하는 醫方(의방)이란 말이지요.
鶴樹終談理未玄 학수의 마지막 말씀에도 이치가 현묘하지 않았네.
鶴樹終談(학수종담)은 부처님께서 鶴樹(학수)에서 열반에 드셨잖아요. 사라수 밑에서 열반에 드셨더니, 나뭇잎이 하얗게 변해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학수라 합니다 마지막에 『涅槃經(열반경)』을 설하시고 열반에 드셨습니다.
理未玄(이미현) - 마지막 설법할 때까지 말로는 이치를 드러낼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학수에서 마지막 법문하실 때의 말씀에도 말속에서는 본래의 진리가 그대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서 斷見(단견)의 생각을 가지고 살면 안 된다. 또 동시에 常見(상견)의 생각을 가지고도 살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斷常(단상) 二見(이견)에 빠지면 불법 밖의 외도라고 하는데 외도에는 불법 밖의 외도 외에도 附佛法外道(부불법외도)라 하여 불법에 기생하는 외도와, 學佛法外道(학불법외도)라 하여 불법을 배우면서도 견해가 올바르지 못한 외도의 세 종류가 있습니다.
斷常(단상) 二見(이견)에 빠지지 말고 항상 오늘도 가고 내일도 가고 금생도 가야 되고 내생도 가야 되는 그런 여정으로 생각하면서, 또 새 희망의 새 계절을 맞이해서 새로운 생활을 영위해 나가시기 바라면서 오늘 법문을 마치겠습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_()_
돈오무생지대원~
미묘하고 깊고 그윽한 법문입니다.
단상 이견에서 벗어나 부처님처럼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매화 향기 속에 반야의 향기가 가득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늘 좋은 말씀..고맙습니다
🙏🙏🙏
감사합니다 _(())_
사진과 스님의 무생곡을 경탄하며 읽습니다. 감사합니다. ^^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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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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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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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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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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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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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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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