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15 우리가 잡아야 할 여우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아 2:15)
개회예배 말씀이 저에게 배정되어서 많은 부담이 있었습니다. 몇 가지 주제를 놓고 기도하는 가운데 문득 이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는 말씀입니다. 목회하면서 한 번도 아가서를 강해한 적이 없고, 이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를 한 적도 없습니다만 계속 이 말씀이 머리를 맴돌았습니다. 묵상을 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저의 목회의 여러 문제점들을 이 말씀을 통해서 지적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제가 드리는 말씀은 저의 부끄러운 고백이며, 하나님의 은혜로 벗어나기를 원하는 연약함이요 죄악임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비록 설교의 형태로 호소하고 권유하기도 하겠지만 먼저 제 자신에게 적용되는 것임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에서 포도원이 무엇인지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가정에도, 교회에도, 다른 형태의 공동체에도 적용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그 포도원에 꽃이 피었습니다. 하지만 꽃이 열매가 되지 못하면 큰 의미가 없습니다. 포도나무는 열매를 거두기 위해 심은 것이지 꽃을 보기 위해 심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포도원에 작은 여우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아가서에 등장하는 여우는 팔레스타인 전역에 넓게 분포되어 있는 야행성 잡식 동물입니다. 싹이 돋고 잎이 피어나는 봄철에 포도원에 침입하여 나무를 갉아 먹습니다. 겨우 내 바싹 말라있던 나무에 물이 오르면 껍질을 벗겨 먹기가 좋기 때문입니다. 그런 여우를 방치하면 피었던 꽃이 떨어지고 결국은 포도농사를 망치게 됩니다. 이것이 여우를 잡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여우를 “작은 여우”라고 표현했습니다. 왜 작은 여우일까요?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고 제가 추측해 본 바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작은 여우만 물이 오른 포도나무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큰 여우도 포도원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농부들이 여우를 막기 위해 포도원에 울타리를 둘러놓았기 때문에 큰 여우는 여간해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울타리에 작은 구멍이 생깁니다. 작은 구멍이기 때문에 큰 여우는 들어가지 못하고 작은 여우만 들락거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실제로 포도나무에 해를 끼치는 놈들은 큰 여우가 아니라 작은 여우입니다. 그래서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아무튼 작은 여우입니다. 작은 여우가 하는 짓이기 때문에 그 피해가 별로 심각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작은 여우 한 두 마리쯤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놈을 잡으라고 말합니다. 포도나무 한 그루라도 망치는 것은 주인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작은 여우라도, 비록 한 마리밖에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포도원에 들어온 이상 잡아야 합니다. 집안에 쥐 한 마리도 들어오게 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손가락만한 쥐새끼라도 반드시 잡아서 없애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도 생쥐 한 마리가 먹으면 얼마나 먹겠고 손해를 끼친들 얼마나 끼치겠느냐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피해가 얼마나 크고 작은가의 문제가 아닙니다. 수가 많고 적음에 관한 문제도 아닙니다. 허용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가르고 나누는 원칙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여우 한 마리가 아무리 작고 그것이 남기는 피해가 보잘 것 없어 보인다 하더라도 포도원에 있지 말아야 할 것이라면 제거하는 것이 주인의 뜻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포도원을 지키고, 포도원에 있는 나무를 지키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 각자가 섬기는 교회가 포도원이고, 넓히면 우리 합회, 그리고 한국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범위를 가장 좁히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포도원은 목회자로서의 우리 마음 밭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울타리를 허물고 들어오는 작은 여우가 있습니다. 당장에 포도나무를 뽑아버리거나 말라죽게 할 만큼 강하고 센 여우는 아닙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게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작은 여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의 눈치 채지 못하는 여우입니다. 하지만 이 작은 여우를 방치하면 포도원은 서서히 망가집니다. 포도원에서 일하는 보람도, 포도원을 통해서 얻어야 할 결실의 기쁨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여우를 잡고 우리의 마음 밭을 지켜야 합니다.
저는 1987년 11월에 목회사업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동안 제 인생과 목회의 뿌리가 뽑힐 것 같았던 위기가 몇 차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서 깨닫는 것은 그런 커다란 위기는 오히려 치명적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정확하게 인지할 뿐 아니라 긴장해서 최선을 다해 싸우기 때문입니다. 그런 큰 위기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작고 사소해 보이는 문제들, 즉 작은 여우들입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방치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 마음 밭에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작은 여우, 그래서 이 특별한 모임을 시작하면서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세 마리의 작은 여우는 자기연민, 비교의식, 그리고 책임전가입니다.
1. 자기연민(自己憐憫)
우리 목회자들이 반드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첫 번째 작은 여우는 자기 연민입니다. 자기 연민이란 스스로를 가련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감정, 다른 말로는 신세타령입니다. 이것만큼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해악을 끼치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쉽게 우리의 마음 밭에 자기 연민이라는 작은 여우가 돌아다니는 것을 허용합니다.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 자기 연민은 꽤 달콤하고 매력적인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연민이라는 감정에 속아서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그런데 그 위로란 넘어진 자신을 일어나게 하는 위로가 아니라 넘어져 있는 것을 정당화 하는 위로, 좌절하고 낙심한 자신에게 그래도 괜찮다고 해 주는 거짓 위로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나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으면 누가 나를 불쌍하게 여길까라고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목회자들은 언제 그리고 어떤 경우에 자기 연민에 빠지게 될까요? 야심찬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최선을 다했는데 결과가 형편없을 때 우리는 쉽게 자기 연민에 빠집니다. 교단의 행정자들이 내 진심을 몰라 줄 때, 부당한 취급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 때, 내 능력에 비해 사역지가 형편없다고 생각할 때도 자기 연민에 빠집니다. 뿐만 아니라 건강에 문제가 생겼을 때, 부부관계가 평화롭지 못할 때, 자녀들이 속을 썩일 때, 경제적인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도 자기 연민이라는 감정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삶의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 앞에서 우리는 자기 연민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리고 자기 연민이라는 작은 여우는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제거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들지 않습니다. 자기 연민은 자기 위로로 변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연민은 우리의 마음 밭을 황폐하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잡초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연민은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감정이지만, 자기 연민은 가장 천박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연민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하며 손을 쓸 수 있지만, 자기연민은 자신의 현실 인식을 심각하게 왜곡해 두 손과 두 발을 묶어버리는 감정의 병이다. 연민은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과 치유의 필요성을 발견하고 힘을 주는 말과 행동을 하게 하지만, 자기연민은 우주 만물을 개인의 상처로 축소해 자신이 더 중요하다는 증거로 들이밀게 한다. 연민은 자비로운 행동을 일으키는 아드레날린이지만, 자기연민은 중독성이 있는 마약으로 인생을 낭비하고 폐인이 되게 한다.” 그렇습니다. 자기 연민은 우리의 마음 밭을 황폐하게 하는 작지만 강력하고 치명적인 여우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사명을 갉아 먹으면서 자기 몸집을 키우는 여우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부끄러워서 자세히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저도 자주 자기 연민에 빠집니다. 너무나 제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긴 나머지 목회를 그만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때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자기 연민이라는 여우는 너무 작아서 아주 조그만 틈만 생겨도 제 마음 밭으로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가 목회 사역을 마치는 날까지, 아니 죽는 날까지 이 작은 여우는 계속해서 제 마음 밭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들어올 때마다 잡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제가 발견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황폐하게 하는 자기 연민이라는 작은 여우를 잡는 비결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 보”(히 12:2)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가련하고 불쌍하게 보여도, 이 땅에 오셨던 우리 주님에 비하면 왕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갖지 못하셨던 것을 가지고 있고, 주님이 누리지 못하셨던 것을 누리고, 주님이 받지 못하셨던 대접을 받고 있으면서 스스로를 가련하고 불쌍하게 여기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는 자기 연민은 주님보다 나 자신을 더 귀하고 높일 때 내 마음 밭으로 들어오는 여우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말과 이론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위로하고 불쌍하게 여기지만 결국 자기 연민은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귀하게 여기는 이기적인 사랑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우리가 무슨 이유에서든 자기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죄악입니다. 자기 연민은 우리가 회개하고 극복해야 할 죄입니다.
마케루스 지하 감옥에 갇힌 침례요한은 자기 연민에 빠질 수 있는 최적의 환경에 있었습니다. 메시야에게 침례를 베풀고 세상을 진동시켰던 그의 사역은 불꽃처럼 사그라졌고, 그의 이름을 부르던 군중들 뿐 아니라 제자들까지도 그를 떠나갔습니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사역을 섬긴 결과는 차디찬 감옥에 갇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증거 한 예수님마저도 침례요한을 외면하셨습니다. 요한이 잡혀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갈릴리로 물러가셨(마 4:12)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자신을 가련하고 불쌍하게 여기기에 좋은 환경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침례요한은 자신의 마음 밭에 자기 연민이라는 작은 여우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증언의 기별을 보십시오. “만일 요한이 자기 연민에 빠져 자기의 지위를 빼앗기는 일에 대하여 슬픔과 실망을 표시하였다면 그는 불화의 씨를 뿌렸을 것이며 질투와 시기를 조장하여 복음 사업의 전진을 심각하게 방해했을 것이다.…요한은 믿음으로 구속주를 바라봄으로 자기희생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자기 자신에게 이끌려 하지 않고 그들의 생각을 높고 더 높은 곳으로 끌어 올려 하나님의 어린양을 주시하기에 이르기까지 힘썼다. 요한은 자신의 한 목소리, 곧 광야의 외치는 소리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이제 그가 침묵과 은퇴를 기꺼이 받아들인 것은 모든 사람의 눈이 생명의 빛 되신 이에게 향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소망, 178)
침례요한이 그의 마음 밭에 자기 연민이라는 작은 여우를 허용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욱 그렇게 해야 하겠습니까? 침례요한의 사역에 비하면, 침례요한의 헌신에 비하면, 침례요한의 충성에 비하면, 오늘 우리의 사역과 헌신과 충성은 얼마나 빈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입니까? 그런 우리가 우리의 마음 밭에 자기 연민이라는 여우가 돌아다니게 하는 것은 얼마나 한심하고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다시는 자기 연민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우리의 마음 문을 굳게 지킵시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틈타서 들어온 자기 연민이라는 여우를 발견하는 즉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제거합시다. 저와 여러분이 가는 목회자의 길에 자기 연민으로 인한 낙심과 좌절이 없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2. 비교의식(比較意識)
목회자로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 밭을 황폐하게 하는 두 번째 작은 여우는 비교의식입니다. 자기연민과 마찬가지로 비교의식도 거의 사람의 본능에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는 자신과 남을, 내 것과 남의 것을 비교하는 법을 배우고 익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비교의식이 동기를 유발하는 긍정적인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불평불만의 원인이 됩니다. 사람의 비교의식은 대부분 나보다 더 나은 환경과 조건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과 비교하기 보다는 자기보다 넉넉한 사람과 비교하기 때문에 상대적 빈곤을 느낍니다. 비교의식은 감사와 만족을 우리의 마음 밭에서 몰아내는 작은 여우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비교의식이라는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거의 대부분이 목회를 시작할 때에는 비교의식을 갖지 않습니다. 주님의 농원에서 일하는 그 자체로 감사하고 만족하기 때문입니다. 동기 목회자가 좀 더 좋아 보이는 사역지에 보냄을 받아도 부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사역지가 열악해 보인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합회장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연륜이 쌓이면서 점점 비교의식이 우리의 마음에 자리를 잡습니다. 교회의 크기를 비교하고, 목사관의 유형을 비교하고, 목회활동비 액수를 비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교는 거의 대부분 거룩한 사업에 쏟아야 할 우리의 에너지를 낭비하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이런 비교에서 만족을 줄 수 있는 사역지가 얼마나 될까요? 30%라면 70%의 목회자가 불만이고, 20%라면 80%의 목회자는 불만입니다. 비교의식에 의해 생겨나는 불평과 불만은 해결될 방법이 없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주인에게서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둔 사람의 문제가 바로 비교의식이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자기의 달란트를 활용하지 않은 사람은 가장 적은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었다. 이 사실에는 사람이 자기가 받은 천부적 재질이 적다해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봉사할 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경고가 포함되어 있다. 만일 저희가 어떤 큰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들은 얼마나 큰 기쁨을 자기고 그 일을 할지 모른다. 그러나 저희는 작은 일에서 봉사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실물, 355)
비교의식의 가장 큰 폐해는 현재 주어진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더 좋은 환경, 더 좋은 조건이 주어질 때까지 기다리면서 현재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에 대해 변명합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명백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것과 나에게 주어진 것을 비교함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익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 서재에 있는 책들 중에 가장 감동적인 책 제목은 [더 얻을 것도 더 누릴 것도 없는 삶]입니다. 전생수라는 목사가 남긴 글을 엮은 책입니다. 1954년생인 전생수 목사는 총회신학교 2년을 수료한 후 목회를 시작해서 강릉지방의 금산감리교회를 개척해서 섬겼고, 후에 충주에 있는 농촌교회인 추평교회를 섬기다가 2005년 10월 14일에 새벽기도를 하던 중 뇌중풍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 시골교회만 섬긴 그는 제대로 된 사례비를 거의 받아본 적이 없는 목회를 했습니다. 교인이 빚 갚기 위해 과수원을 팔아서 드린 헌금이 있어서 오랜만에 제대로 된 사례비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에 그는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에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가 죽기 일 년 여 전 사순절에 유언을 남겼는데 그 일부분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 아무개라는 이름을 달고 산 지 쉰 한 해 되는 봄, 예수의 도에 입문한지 스물여덟 번째 되는 해에 유서를 쓰노라. 나는 스물셋 되던 해에 예수의 도에 입문하여, 늦은 나이에 학문을 접하며 좋은 스승들을 만났고, 좋은 길벗들을 만나 여기까지 살게 된 것에 감사하노라. 나는 오늘까지 주변인으로 살게 된 것을 감사하고, 모아 놓은 재산 하나 없는 것을 감사하고, 목회를 하면서 호의호식하지 않으면서도 모자라지 않게 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이 땅에서 다른 무슨 배경 하나 없이 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고, 앞으로도 더 얻을 것도 없고 더 누릴 것도 없다는 것에 또한 감사하노라. 사람들의 탐욕은 하늘 높은 줄 모르며 치솟고, 사람들의 욕망은 멈출 줄 모르고 내달리며, 세상의 마음은 흉흉하기 그지없는 때에,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음에 감사하노라. (중략) 사랑하는 이들이여! 나는 목회자로 살면서 목회를 위한 목회, 교회를 위한 목회를 하지 않고, 우리 모두의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목회를 하였으니, 여러분들이 앞으로도 계속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를 바라며, 우리 모두가 영원한 생명 안에서 어우러질 수 있으리라 확신하노라.]
그는 자신의 삶을 [더 얻을 것도 더 누릴 것도 없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이보다 행복한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가 이런 삶을 살다가 죽을 수 있었던 비결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일을 하면서 사는 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잘 안되지만, 한참 멀었지만, 저는 전생수 목사를 닮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의식이 우리의 본성에 너무나 깊이 박혀 있어서 비교를 하지 않고는 견디기가 힘들 때에는, 기왕에 비교를 할 바에는 제대로 된 비교를 합시다. 어중이떠중이와 비교하지 말고 비교할 가치가 있는 분과 비교 합시다. 그분이 누구이겠습니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외에 우리가 비교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주님의 가정 형편과 내 가정 형편을 비교해 봅시다. 주님이 받으셨던 대접과 내가 받고 있는 대접을 비교해 봅시다. 주님이 머무셨던 집과 내가 사는 목사관을 비교해 봅시다. 주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과 내가 섬기는 교회의 신자들을 비교해 봅시다. 그리고 주님이 지신 십자가와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를 비교해 봅시다. 그리고 이 말씀을 기억합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3. 책임전가(責任轉嫁)
우리의 포도원에서 반드시 잡아야 할 세 번째 작은 여우의 이름은 [책임전가]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으로서 우리는 어쩌면 책임전가라는 DNA를 가지고 태어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배우지 않아도 거의 본능적으로 책임을 전가하는데 익숙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게 주어진 환경에, 나라와 교회의 제도에,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책임을 전가하는데 우리 모두는 선수들입니다.
연합회는 합회에 책임을 전가하고, 합회는 연합회에 책임을 전가합니다. 합회는 일선 목회자들의 무사안일이 문제라고 하고, 일선 목회자들은 합회의 권위주의와 탁상행정이 문제라고 합니다. 목회자는 교인들이 헌신하지 않기 때문에 부흥이 안 된다고 말하고, 교인들은 목회자의 무능력 때문에 교회가 무너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책임전가는 몇 년 째 계속되고 있는 교회 개혁이라는 거대 담론(談論)의 중심입니다. 신자들은 한국 교회의 위기 상황의 원인이 목회자들에게 있다고 하고, 목회자들은 성숙하지 못한 신자들에게 있다고 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 원인이 예언의 신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 책임전가야말로 우리교회를 허무는 가장 강력하고 기만적인 작은 여우라고 생각합니다. 이 여우를 잡지 못하는 한 일선교회든, 합회든, 한국교회든 다시 생명력을 회복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책임을 전가하는 가정, 책임을 전가하는 교회, 책임을 전가하는 사회가 어떻게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교회와 달리 우리 재림교회의 목회 환경은 책임을 전가할 최적의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책임 전가의 도구로 주신 제도가 아니지만 우리는 책임 전가하는데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발령을 잘못 낸 합회장의 책임이고, 합회 행정을 깔끔하게 하지 못하는 임원들의 책임이고, 방향을 제대로 설정하지 못한 연합회장의 책임이고,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 재림교회 시스템의 책임입니다. 내 목회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성도들이 문제이고, 헌신은 안하면서 직분에만 집착하는 장로들이 문제며, 교인들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떠난 전임 목회자가 문제입니다. 이것은 매우 솔직한 저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우리의 문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까요?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전가했던 것처럼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책임일까요? 이렇게 우리가 책임을 전가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복음사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때가 올까요? 지금처럼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행정조직 개편을 백 번 하고 날마다 부흥과 개혁을 부르짖어도 그 날은 오지 않을 것입니다.
목회 초년에 저는 합회장이야말로 교회를 바꿀 수 있는 책임과 권한이 있는 지도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눈에 들어온 이런 저런 부조리와 불합리에 대한 책임이 합회장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문제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합회장이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나도 아는 것을 왜 합회장은 모를까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합회에서 일하게 되어 합회장의 사역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가 깨달은 것이 합회장이 마음먹는다고 해서 교회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합회장도 일선교회의 목회자와 똑같은 일을 하는데 다만 그 영역에 차이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연합회장과 다섯 합회장들이 마음을 단단히 먹으면 교회가 일시에 변하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몇 해 후에 연합회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임원도 부장도 아니었지만 이전보다 연합회장의 직무에 대해 자세하고 깊이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다시 깨달은 것은 연합회장의 사역도 일선교회 목사나 합회장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지회장이나 대총회장의 일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누구에게 기대를 걸어야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련한 저에게 답을 주셨습니다.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이 세상에 내 교회를, 우리 교회를 책임질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합회장의 교회가 아니라, 연합회장의 교회가 아니라, 대총회장의 교회가 아니라 내 교회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여전히 조직과 환경과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회자의 길을 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마음 밭에 들어오는 책임전가라는 작은 여우를 끊임없이 잡아야 합니다. 환경에, 조직에, 지도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한다고 해서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내 책임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맡기신 것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물으시지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게 묻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결산은 내가 해야 할 일입니다. 책임전가는 일시적인 자기위로요 자기기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 밭을 황폐하게 하고, 재림교회라는 포도원을 무너뜨리는 책임전가라는 작은 여우를 철저히 잡아야 합니다.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세상에는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늘 깨어지는 결심이지만 하고 또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는 이번 목회자협의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엘렌 화잇이 1906년에 쓴 편지의 한 부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그대는) 말씀을 가지고, 말씀으로 살며, 말씀을 전파하라. 예수께서는 그대에게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주셨다. 그 약속을 붙잡고 감사하라. 자아 부정과 자아 희생에 따른 참된 가치를 평가할 사람은 그대나 내가 아니다. 개혁 사업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온갖 믿음과 눈물과 기도가 요청된다. 우리의 임무는 십자가를 높이 들고, 예수님의 본을 좇아 십자가를 메는 일이며,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 위에서 당하신 고난의 침례를 열망하도록 이끈 그 같은 정신으로 항상 일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서신 66, 1906)
박 상길 목사(경기중부 목회자 협의회)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