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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로 기록한 결심
성경본문 : 느헤미야 9: 38
38.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인하여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을 치나이다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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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에는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는 소위 역사적 문서들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가장 대표적인 민족사적 의미를 지니는 문서가 있었다면 아마도 1919년 일제 치하에서 발표된 최남선 선생에 의해 작성되고 애국지사 33인에 의해 서명된 '기미 독립 선언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우리가 더 주목할 것은 이 독립선언이 있기 한달 전 이미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14개 원칙 제창에 자극된 일본 동경 유학생 11명이 조선 청년 독립단을 결성하고 1919.2.8 일본 동경 조선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소위 2.8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것입니다. "조선 청년 독립단은 우리 이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한 세계의 만국앞에 독립을 기성하기를 선언하노라---"이렇게 시작되는 선언문은 이광수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선언문 10장을 복사하여 품에 간직한채 학교를 중단하고 현해탄을 건넌 김 마리아 선생에 의해 이 문서가 국내로 유입되면서 3.1운동과 기미 독립 선언문을 선언하게 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불과 한줌밖에 안되는 11명의 유학생들에 의해 문서로 기록된 선언문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가를 짐작할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소위 예루살렘 수문앞 광장에서 말씀의 부흥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이 이제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살고자 하는 새 인생의 결심을 문서로 기록한 후 서명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 9장 전체는 이스라엘 민족에 대하여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자비하신 은혜를 베푸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기대를 지속적으로 져버리고 범죄했는가를 참회하는 내용들이 먼저 소개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부터는 결코 이런 불순종의 삶을 살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런 결심을 문서화하여 기록으로 남기기로 합의합니다.
그리하여 민족의 지도자 84인이 이 문서에 서명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느헤미야 10장은 이 서명자들의 명단입니다.(10:1-그 인친자는--)1절에는 대표로 느헤미야와 시드기야(부총독이나 비서실장)가 서명하고, 2-8절까지는 21명의 제사장들이 서명합니다. 9-13절까지는 17명의 레위족 대표들이 서명을 합니다. 14절이하 27절까지는 일반 백성의 지도자들(두목들)44명이 서명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문서는 에스라에 의해 작성되고 느헤미야가 대표로 서명했을 가능성(10:1에 첫 번째로 나오는 사람이 느헤미야)이 있습니다. 도대체 이 역사적 문서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부흥을 체험한 주의 백성들이 결심하고 문서에 기록한 새삶의 내용은 무엇이었는가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10:28-39까지의 내용인 것입니다.
저는 이 내용은 오늘날도 여전하게 부흥을 사모하는 주의 백성들에게 결심되어야 할 삶의 모습들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이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결심을 문서로 기록하여 선언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자, 그러면 오늘의 우리 성도들이 문서로 기록하여 결심할 새로운 삶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1.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순종하겠다는 것입니다.
느10:29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인 것입니다. 죄는 바로 이 법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본래의 뜻은 "표적(표준)을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부흥이 일어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이 죄를 자복하고 회개한 것입니다.
느9:26에 보면 "저희가 오히려 순종치 아니하고 주를 거역하며 주의 율법을 등뒤에 둔 것을--"회개하였습니다. 느9:34-35에 보면"우리가--주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며 주의 명령과 주의 경계하신 말씀을 순종치 아니한 것을--"회개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가르쳐 우리는 포스트 모던의 시대라 일컫습니다. 이 시대의 현저한 특성은 삶의 기준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절대적인 표준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일 뿐이고 주관적일 따름입니다. 이제 현대인들은 더 이상 계율에 얽매이기보다는 내 식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더 정직하게 표현하자면 기성세대처럼 내 본능을 내가 붙들고 있는 가치관에 의해 통제하며 살아가기보다는, 그냥 내 본능대로 내가 느끼는 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현대적인(포스 모던적인) 삶의 행태들이 가정파괴, 동성연애, 집단적인 이기주의, 무정부적 사회혼란, 아방 가르드(파괴의 문화),데카당스(퇴폐문화),무분별한 방황--그리고 이 방황의 끝에서 만나는 각종 중독증(알콜, 마약, 성, 포르노, 도박, 쇼핑)우울증과 자살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부흥을 체험하면 다시 하나님의 말씀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붙들고 살겠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씀이 제시하는 원칙을 따라 순종하며 살겠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부흥을 사모하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다시 말씀앞에 서십시오. 결심하십시오. 그리고 할수 있다면 그 결심을 문서로 기록해 보십시오.
2. 세속적인 영향을 따라 살지않겠다는 것입니다.
느10:29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살겠다고 고백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어지는 10:30,31절에서 두가지 무엇을 안하겠다고 결심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세속적인 영향력을 따라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우선 30절에서는 자기 자녀들이 국제 결혼을 안하도록 유의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으로 기독교는 국제 결혼을 반대한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성경에는 얼마든지 국제 결혼의 긍정적인 모습도 소개됩니다. 다윗의 조상이요, 예수님의 조상이었던 룻과 보아스의 결혼은 대표적인 사례일 것입니다. 다만 이 시점에서 국제 결혼이 금기사항으로 선언된 이유는 국제 결혼을 통한 무분별한 이방문화의 영향을 경계하기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신자인 우리 자녀가 불신자인 자녀들과 결혼하면 불신앙적인 가치와 비 성경적인 삶의 영향을 받을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닙니까?
그것이 솔로몬 왕이 무너져 간 원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이 말씀은 국제 결혼의 금기가 아닌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이 어떻게 세속적인 영향에서 보호되며 살것인가를 가르치는 경계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불신자들과 접촉하지 않으면서 인생을 살수는 없겠으나 우리에게 죄된 영향을 끼칠수 있는 이웃들과는 분명한 경계선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과 다른 모습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세상을 책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느10:31절은 안식일을 범하지 않도록 결심하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도 구약시대처럼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가 논의의 초점이 되어서는 안되고, 왜 주께서 이 명령을 주셨는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식일 제도가 무너지면 그렇지 않아도 세상 살기에 바쁜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번 하나님을 예배하고 묵상하는 일마져 등한히 할 때 과연 주의 백성들이 믿음을 지탱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안식일 제도는 구약시대에 주의 백성들이 당시의 세속 문화와 세속 영향에서 자신들을 지킬 수 있는 하나님의 선물이었다고 믿습니다. 저는 이런 안식일을 지키는 방법은 달라질 수 있지만 안식일 지킴의 정신만은 새 언약의 시대에도 계승되고 보존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마르바 던은 그의 저서인 '안식'에서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면 안식일이 우리를 지킬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저는 주 5일 근무제가 보편화되면 오히려 이런 크리스쳔 문화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싶습니다. 하루는 어디가서 놀고 운동하시더라도, 하루는 온전히 마음과 몸을 쉬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봉사하는 일로 사용하시는 안식일 회복운동이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두날을 다 노는 일로 보내려 한다면 그것은 가정의 재앙, 민족의 재앙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삶을 즐거워 할줄 알아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세속적인 영향을 거부할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결심을 문서로 기록하실 용의가 있으십니까?
3. 하나님의 사역을 힘써 지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느헤미야10:32-39까지의 말씀입니다. 여기에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 두가지가 있습니다.
무엇들이지요?
하나는, '하나님의 전'이라는 단어이고,
또 하나는 '십일조'라는 단어입니다.
32절에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쓰게 하되", 33절에도 "---하나님의 전의 모 든일을 위하여 쓰게 하였고"35절 하반부에도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하였고"라고 기록됩니다.
39절 마지막 절에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 하리라"는 그들의 결심이 고백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과 십일조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의 사역의 핵심적인 주체였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 당시에 바벨론 포로에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지었지만 생활이 어렵다는 구실로 십일조를 등한히 함으로 성전관리가 엉망이었고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함으로 성전을 떠나가는 일마져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의 백성들이 부흥을 체험하자 그들이 제일 먼저 결심한 것이 주의 전을 위한 십일조의 실천이었던 것입니다.
느10:35을 읽어보십시오.
"해마다 우리 토지 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하였고"했습니다.
이것은 삶의 여유가 생기면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우선순위를 부여하고 그렇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최대의 헌신이 아닌 최소한의 헌신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사실상 구약시대에 정상적인 믿음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드린 모든 십일조(레위인 지원 십일조외에 회식의 십일조, 3년에 한번씩 드리는 구제의 십일조)를 가산하면 그들은 실제로 수입의 23%이상을 하나님의 사역을 지원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께 더 많이 드릴수 있음이 기쁨이 아닌가요? 안벌고 안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많이 벌고 많이 드리기를 원하십니까?
여러해 전 어떤 지방도시의 청년이 교회 목사님께 와서 "목사님, 제가 십일조 많이 드릴수 있도록 기도해 주셔요"라고 부탁을 해서 "그럼 지금 현재 형제는 십일조를 드리십니까?"물으셨답니다. 그랬더니 청년은 "지금은 제가 수입이 불과 십만원에 지나지 않아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답하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지금부터 매월 만원씩 드리기를 약속하면 기도해 드리지요"하니까."예, 약속하겠습니다."했답니다. 그후 이 청년은 십일조는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만원 드리다가 5만원, 10만원,15만원, 드디어 20만원을 드리게 되었답니다. 그의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하여 십일조를 100만원 마침내 200만원을 드리게 되자 갈등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단순하고 솔직한 분이어서 목사님을 찾아와 의논을 했답니다. "목사님, 솔직히 20만원까지는 드리기가 어렵지 않았는데 십일조가 100만원을 넘어가자 너무 너무 힘드는 데 어떻게 하지요" 이때 한참 생각하던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할수 없지요. 제가 주님께 다시 형제가 십일조를 감당할만큼만 드릴수 있도록 형제의 수입을 조종해 달라고 기도해 드리지요"
헌금 이야기만 나오면 긴장하고 부담을 느끼는 분들이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영적인 교회에서 왜 물질 이야기가 언급되어야 하는가?"라고 물으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난 세기의 유명한 영국의 설교자 켐벨 몰갠 목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십일조라는 돈이나 곡식헌금은 물질적인 것이지만 이 헌금의 배후에 있는 헌신은 영적인 것이다. 우리의 물질적인 헌금은 바로 영적인 헌신의 표현이다. 헌신없이 헌금은 가능하지 않으며, 헌금으로 표현될수 없는 헌신은 위선이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역이 힘차게 일어나는 부흥을 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누군가가 헌신을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힘써 지원하며 자신을 드리는 헌신자들을 통해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는 넓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교회에 적지않은 헌금을 드린 가정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성도에게 "어떻게 그런 헌신을 하셨습니까?"물었더니 이분의 대답이 무엇인줄 들어보시겠습니까? "제가 부모님이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더니 한마디 이런 설명을 더 하시더라구요. "그러나 만일 제 아이들이 반대했다면 할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 아이들이- 아버님, 마땅히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마음 변하기 전에 어서 하세요.-해서 이 헌금이 가능했습니다."
제 소감이 무엇이었을까요?
"야, 복받은 가정이라구나.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가정을 이런 자녀를 축복하시지 않겠는가?"
저는 여러분과 저의 가정이 우리 모두 이런 축복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런 헌신을 통해 어두운 이 시대에 하나님의 나라가 다시 한번 이 땅에 능력있게 펼쳐지는 부흥이 일어나기를 기도하십시다.
이런 부흥을 사모하신다면 저는 오늘 여러분과 제가 집에 돌아가서 자녀들과 가정 예배를 드리며 우리 식구 각자가 '헌신 서약서'를 작성해 보시기를 도전하고 싶습니다.
요즈음 우리 직장에서는 회사와 자신의 '사명 선언문'(비전 선언문)을 작성하는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 사명 서언문과 함께 우리 가정의 혹은 나의 '헌신 서약서'를 문서로 기록해 보시면 어떨까요? 우리의 후손들에게 경건한 영향을 끼칠 어떤 유산보다 더 소중한 역사적 신앙문서를 남겨 보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