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만찬의 우롱 ( 11: 17-22 )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9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고전 11: 17 유익이 못되고 해로움이라 -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
고린도 교회의 모임은 유익이 되지 못하였다.
1] 내가 명하는 이 일에
'이 일'(*, 투토)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2-16절에서 언급한 여자가 수건을 써야 한다는 관습에 대한 논증 전체를 가리킨다(Grosheide).
(2) 바울이 다음 절에 이어서 명령하는 성만찬(聖晩餐)에 대한 것을 가리킨다(Godet).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하다. 바울은 16절에서 이미 여자가 공예배시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관습에 대해서 완전한 결론을 맺었다.
따라서 '투토'를 16절 이전의 내용에 연결시킨다는 것은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다.
도리어 그것은 이어서 논할 성만찬에 대한 것을 지칭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입장에 따라 다수의 영역본들은 본 절을 '다음의 명령에서'(in thefollowing directives, NIV) 혹은 '이어지는 교훈에서'(in the followinginstructions, RSV)라고 해석하고 있다.
2]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본 절은 공예배시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한다는 점을 권하기 전에, 먼저 고린도 교인들을 칭찬했던 2절의 내용과 대조를 이룬다.
바울은 이제부터 명령할 성만찬의 규례를 고린도 교인들이 경솔히 생각하고 행함으로 범죄 하였으며, 교회 내에 파벌이 형성되어 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를 책망하려고 한다.
3]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본 절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칭찬하지 않은 이유를 드러낸다.
고린도 교인들의 모임은 편당(偏黨)을 이루어서(19절) 부유한 자들이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고(22절) 주의 만찬에 불경하게 참여하였기 때문에 유익이 되지 못하였다.
고전 11: 18 교회에 모일 때 - 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
그것은 분쟁과 분열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파들은 교인들의 지식과 믿음과 인격이 부족하므로 생긴다.
1] 먼저
'먼저'(*, 프로톤)는 바울이 고린도 교인을 책망하는 논증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나 '둘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한 견해는 학자들간에 분분하다.
(1) '둘째'에 해당되는 사항이 없다(Hofmann, Morris).
따라서 '프로톤'은 '첫째로'(firstly)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강조적인 표현으로서 '주로'(principally)를 의미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프로톤'만 본문에 사용된다면 타당하지만, 본문에서는 '멘'(*, '진실로')과 더불어 사용되고 있기에 타당치 않다(Godet).
(2) 34절 내용으로 이해한다(Edwards, Grosheide).
왜냐하면 34절에서 바울이 더 하고 싶은 말들을 가서 하겠다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 절은 둘째 책망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본 절에는 구체적인 책망의 내용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이 책망하기를 원했다면 아마도 책망의 내용이 기록되었을 것이다(Godet).
(3) 20절에서 둘째 책망이 시작된다고 본다(De Wette, Olshausen, Ruckert).
그러나 20절의 '그런즉'(*, 운)은 새로운 내용을 말한다기보다는 앞서 말한 것을 요약하는 것으로(Grosheide), 앞의 내용과 지속적이고 확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이 견해 또한 적절치 못하다.
(4) 12-14장을 둘째 책망으로 이해한다(Heinrici, Meyer, Osiander).
바울은 본문에서 고린도 교인들이 주의 만찬에 대해 소홀히 하는 문제를 책망하고, 12: 1에서부터는 새로운 주제, 곧 은사의 문제에 대해 책망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사실은 12: 1에서 '데'(*, '그러나')를 사용해서 11장과 연결된 관계를 형성하면서 새로운 주제로 화제를 전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Meyer).
이상의 네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2] 교회에 모일 때에
'교회에'(*, 엔 테 엑클레시아)에서 관사 '테'(*)는 공인 본문(Textus Receptus)에는 삽입되어 있으나 고대 사본(*, A,B,C,D)에는 생략되어 있으므로 관사 '테'는 생략되어도 무방하다.
관사 '테'가 없을 경우, '교회에'는 '모임의 장소'가 아니라 '모임'을 가리킨다.
이렇게 볼 때 본 절은 장소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모임의 성격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Edwards, Godet).
3]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1) 분쟁
'분쟁'(*, 스키스마타)은 본서 1: 10에서 사용되고 있으나, 그것은 본 절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바울이 다음 절에서 '편당이 있어야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본 절에서의 분쟁은 가난한 자와 부자 사이에서 생겨난 대립을 가리킨다.
(2) 어느 정도 믿거니와
바울은 들었던 분쟁에 관한 소문들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그 소문들의 진위(眞僞)를 가려볼 때 분쟁의 사실들이 분명하기에 책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바울이 그 소문의 진위를 어떻게 파악했는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