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글 과 공 동 체 라 면?
2012-01
들 임 이 -불 확실 성 의 시 대
박병민 목사(새터공동체)
사람들은 요새 들어오면서, 더더욱 급변하는 세태를 보아 가기라도 하는 듯, 마탁 드려지는 세상이 너무 가변적이어서 대두되는 말인지는 몰라도,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고들 있다고 말들을 한다. 우리는 힘들었던 지난해를 비껴 보듯 가게하고, 새로운 해로 접어들었다. 작년에 나의 마음에 커다란 위안을 가져다주신 손 목사님과 함께, 1월 초순에, 강원도 가까이에 있는 경북 영주군의 어느 시골 교회를 다시 불러일으키기 위한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3일간의 모임 동안, 강원도 원주에서 사시던 어르신께서 영주로 내려와 흙집을 잘 지어서 사시면서, 마을의 교회를 다니시게 된 듯하다. 목사님과 함께 갔던 교우들과 나는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지 않고, 그 토담집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머무르게 되었다. 마을의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도 뵐 수 있었는데. 서로 하시는 말씀 가운데 “들임이”라는 말을 배우게 되었다. 우리들이 흔히 하는 말대로라면, 이제 새집을 짓게 되었으니, “집들이”는 언제 하느냐?는 뜻의 말씀으로 여겨졌다. 그렇다. 이 어르신은 집을 멋스럽게 짓고 새집으로 들어 오셨듯이, 나도 새로운 올 한해의 시작으로 들어왔다. 그러면서 그 집 거실의 전면 상단에 “相生樂生”(상생락생)이라는 네모반듯한 현판처럼 보여 지는 글자판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그 뜻은 이 집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즐겁게 살아가자”는 뜻의 이야기인 듯싶다. 우리들이 가만히 생각해보자면, 지금의 사람들은 생활비를 버는 법은 배웠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잊어버린 것 같고, 인생을 사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넣는 법은 상실하지 않았나하는 회한을 갖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멋스럽게 지은 토담집에 들어오니, 어린 아이가 아무 탈도 없이, 예쁘리만큼 잘도 잘아가고 있는 모양을 얘기하는 “도담도담”이라는 말이 머릿가에서 피어나듯 연상이 된다. 또 “相生樂生”(상생낙생)이라는 글을 대하니, 주변에 한자공부에 매진하시는 주(朱) 목사님으로부터 듣게 된 이야기가 생각되어 진다. ‘生(생)’이라는 한자 글은 살아간다는 말보다는, 태어난다는 뜻으로 쓰일 때가 많다, 그 날생(生)이라는 글자는 “사람(人)은 바로 흙(土)과 합쳐져서 만들어진 글자로, 그래서 사람은 바로 흙으로 만들어 졌다는 성서의 얘기를 뒷받침하는 모양의 글자이다”라고 말을 한다.(창세기 3:19). 예전에도 이야기 했듯이 “身土不二”(신토불이)라는 말도 “몸과 흙은 둘이 아니고 서로 하나이다”라는 말도 성서적인 말로 여겨진다. 그러기에 성서의 전도서에서는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간다”(전도서 3:20). 요즈음은 부드러워 느러붙는 흙의 문화이기 보다는, 단단한 모래알을 넣고 짓이긴 콘크리트의 덧칠하기로 뒤덮인 시대를 우리들은 살아가고들 있다. 어느 사람은 이 모습을, 그 나름의 흡수성을 띤 퓨전(fusion)이라고 표현하는 행태의 모습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성서에서도 표리부동(表裏不同)한 겉과 속이 서로 다른 모습을 가리켜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 하도다”라고 말하였다(마태복음 23:27).
우리 공동체가 자리한 마을을 어르신들이 보기에는, 들판이 비교적 있어서인가? 벌말이라고, 이 마을식 발음으로는 “범말”이라 불러왔던 곳이고, 내가 나고 자란 마을은 이 마을에서 이백 미터 남짓 안으로 들어가서 산울을 뒤로하고 이루어진 마을이며. 마을 이름을 신탑리(新塔里)라고 지금도 부르고 있다. 몸이 불편한 나는 우리 마을의 이름에 걸맞게, 늘 새로운 탑(塔)을 쌓아오듯 자의적이다시피 살아온 것 같다. 여름에 손 목사님과 함께 하신 어느 목사님 부부께서, 우리 부부의 살아온 과정을 도형상담으로 나의 기질이라고 할까? 그간의 면면을 살펴주셨는데, 나는 자수성가형(自手成家形)의 사람이란다. 그래서 그와 같은 삶은, 먼저 글의 표현대로 삶아지듯 세상을 살아왔으니, 나에게는 커다란 분노(忿怒)가 내재되어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래서였는가? 지지난달의 소식에서, 지난여름을 나는 노발대발(怒發大發)로 보냈던 것 같다. 나를 팔구년 동안 거둬주시듯 함께해주신, 지금은 옛 어른이 되신 김 목사님의 성향을 그대로 본딴듯 한, 신앙정신을 이어받은 듯싶다. 그 분은 어쩌면 좌우를 함께 지닌, 좌우지간(左右之間)의 삶을 다단함이 아니라 단조롭게 꾸려가라는 삶의 숙제를 나에게 안겨다주시고 가신 아름다우신 어른이셨다. 그래서 간직한 신앙의 적용을 타인을 섬기고, 나누자는 식의 양태를 띠어온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앞에서 말한 “분노(忿怒)”라는 한자를 보면서, 아연실색(啞然失色)이라고나 할까? “분노(忿怒)”라는 한자어는 “마음이 나누어지게 되면, 그것에 매몰되어 가는 노비의 마음이 된다”는 얘기가 아닌가? 분노의 화(火)가 가득하다다고 해서 종이를 불태울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마음이라는 것이, 돋보기가 햇볕을 모으듯 하나로 그 맘가짐이 합해져야 종이를 태우지 않겠는가? 그래야지 나의 마을 이름처럼 금자탑(金字塔)과 같은 신탑(新塔)을 쌓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지금 이 시간 그 “신탑”이라는 말이 “너희들이 쌓자는 신탑(新塔)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을 통해서 쌓아가려는 신탑(信塔)이 되어야한다”라고 위에서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런 예를 성서에서는 천지창조 이후 시간이 한동안 흐른 뒤에 진행되는 얘기에서, 사람들이 공을 드려가며 일을 벌려가고 또 모아가면서 하나님과 높이 겨루기를 하려는 사람들의 공든 탑이 그만 무너지고 마는 바벨탑의 이야기를 한다.(창세기 11:1-9). 어떻게 보면 사람의 힘으로는 모래성위에 쌓는 것이라서 탑을 쌓아가지를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이 지녀야 할 자세로는, 겨우 그 분 안에서 연락(連絡)하고 상합(相合.community)하는 일을꾸려보는 것에 쏠쏠한 재미를 느껴보는 것에 불과하지는 않을 런지?(에베소서 4:16). 이번 모임에서, 손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말씀 중에 기억되는 것은 “하나님은 평등한 분이 아니라, 공평한 분이라는 말씀이다” “평등하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자신의 노력과 상관없이 결과물을 똑같이 나눈다는 것으로 권리, 의무, 자격 등이 차별 없이 고르다는 말인 반면에 “공평하다”는 말은 자신이 노력한 만큼 결과물을 얻게 된다는 말일 것이다. 세상의 역사는 이를 뒷받침 하는 것 같다. 공평이 아닌, 평등으로 시민들의 눈을 멀게 한 공산주의는 몰락하게 되었고, 작금에 들어와 걷잡을 수 없는 불확실성의 세계를 더더욱 지피게 된, 유럽연합회원국들이라는 EU가 그러한 현상을 빚어내고 있다. 여러 달 전에, 눈을 살펴주시는 신학대학교와 맞바라보고 있는 안경원에 들렸더니, 그 곳의 어르신이 하셨던 이야기가 기억되어진다. 오갈 곳 없으신 다리 밑에 기거하시던 연세 많으신 할아버지가 연유가 되어서 시작이 된, 꽃동네의 오옹진 신부님이 하셨던 말씀이라고 하시면서 “거지란 욕심과 지배욕의 변절된 화신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여의치 못한 나로 써는 그렇게 고백 할 수밖에는 없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스가랴 4:6). 비록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자수성가형(自手成家形)이라는 말 보다는, 신수성가형(神授成家形)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방식이리라. “신수성가형을 그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스스로를 행운아라고 말을 끄집어 낼 것이다.” 나는 신탑리의 길을 따라 성당리(聖堂里) 마을 쪽으로 걷다보면, 어느 어르신이 시내에서 이사 들어와 사시면서 외딴집과 그 옆으로 작은 정자를 짓고, 거기에 호호락락정(好好樂樂停)이라고 쓰여 있는 글귀가 좋다. 오늘도 그 정자에 몸을 들여놓고 앉아서 그런 얘기를 되뇌어 본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로마서 12:15). 자의적 발로이기 보다는 나의 나약함을 보면서...... 그래서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데살로니가살전 5:14).
공 동 체 소 식
.
☻ 새터 공동체 가족
예성만 김진구 박성찬 조창봉 이은주 김복순 지명수 권희숙 채경일 주송례 진영택 김정화 박소웅 박정임 라홍채 최성재 최영애 정무래 박종만 박병민 진선미 박한솔 박진솔
* 여러 가지의 육신과 정신적 아픔 중에 있는 새터공동체 식구들의 건강한 몸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세요.
* 성탄절을 앞두고 대덕교회에서(이중삼 목사님), 2011년 12월 22일에 성탄 선물로 겨울옷을 공동체 식구들에게 선사하여 주셨습니다. 명곡교회 백종학 목사님께서 함께하여 주셨습니다.
* 마을 신평반점에서(문창준 선생님) 성탄절 전야인 12월 24일에 자장면, 탕수육 등을 식구들에게 대접하여 주셨습니다.
* 2011년 12월 25일 성탄절 오후에 경당교회에서(신동성 목사님) 함께 하셔서 초중고등부가 발표 행사를 새터공동체에서 가졌습니다. 공동체 식구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 대전오정교회가(최세영 목사님) 새터공동체교회의 교회자립을 위하여 함께하고 있습니다.
* 2012년 1월 1일에 새터공동체교회에 오정교회에 계셨던 예성만 전도사님께서 부임하셨습니다.
☻ 기도하며 함께 하신 분들
금성교회.충전교회.김기홍.진명구.청정인삼(강원구외2인).최선희.신평교회.양오석.정무래.최영애.라홍채.예원교회(최동주).김봉숙(동춘교회).박종만.튼튼영어대전동구(연월순외16인).이은주.수영교회.최성재.박성찬.채윤기(박현실).대덕교회.양명신(동춘교회).신건태.최영관(신평리.2회).이원교회권사회.김복순.주식회사EG(이광형).그리스도의집(금산파리바게트.옹인숙.3회).반석전원교회.새희망교회(차길선외3인).충남금산지역자활센터푸드뱅크(2회).공주원로원교회(김종생).예광교회(노흥방외1인).이원교회.조정리교회(이정애).김용환(최정숙).사랑의쌀나눔공동체(장진성).금산경찰서수사과지능범죄수사팀(전우암외9인).오정교회(최세영).동춘교회4남선교회.쎄븐미용실(손연화외1인).금산군모란회(5인).대전노회(송정길.이권종.권석은.오은탁.노재윤).주식회사한밭(권오철).대한적십자금산군추부봉사회(정인구외1인).황한수(양해석)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