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에 달린 자.
신21:22-23, 갈3:13절, 193.135.492장.&
구약 성경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수많은 예표가 증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우리가 보기에 은혜로운 것도 있지만, 외적으로 보기에 부정적이고 좋지 않아 보이는 내용들도 있습니다. 놋뱀이 예표로 사용된 것이나 오늘 본문처럼 나무에 달려 죽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예수님의 예표로 사용된 경우가 바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역이 비록 구원의 성취라는 긍정적인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의 성취 방법에 있어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기에,
이와 같은 부정적인 예표들도 불가피합니다. 우리는 이런 부정적인 그림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얼마나 죄를 미워하시며, 아울러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희생의 값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1.그 죽음의 방법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예표가 됩니다. 1)사형받은 자의 시신을 처리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의 나무에 달린 자에 대한 규례는 사형당한 자의 처리에 관한 내용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인은 대개 돌을 던져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죄인이 죽으면 그 후에 말뚝에 묶거나 나무에 매닮으로 하나님께 저주받았다는 증거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죽은 자에게 수치를 더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엄히 경고하기 위해서 행해졌습니다. 창40:19절에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끊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 먹으리이다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민25:4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죄인을 직접, 나무에 달아 죽이는 것은 아니었으나, 로마인들의 방식은 살아있는 죄인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 자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나 죽은 자를 나무에 목을 다는 것은 모두가 죄인에게 큰 수치가 되는 형벌이 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못 박히심은 자연스럽게 "나무에 달린"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행5:30절에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라고 했습니다.
벧전2: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처럼 가장 수치스럽고 저주스러운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2)그리스도의 시신 처리의 예표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시체는 매우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민6:11절에 "제사장은 그 하나를 속죄제물로, 하나를 번제물로 드려서 그의 시체로 인하여 얻은 죄를 속하고 또 그는 당일에 그의 머리를 성결케 할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시체"이든지 그것은 죄의 찌꺼기라는 의미를 지녔으며, 그렇기에 거룩한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그냥 방치해 둘 수 없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범죄에 대한 처벌로 죽임을 당한 시체는 나무에 달되 밤새도록 두지 말고 반드시 당일에 땅 속에 묻어서 그 부정함이 이스라엘이 미치지 못하도록 해야만 했습니다.
수8:29절에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질 때에 명하여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고 했습니다. 수10:26-27절에 "그 후에 여호수아가 그 왕들을 쳐 죽여 다섯 나무에 매어 달고 석양까지 나무에 달린대로 두었다가 해 질때에,
여호수아가 명하매 그 시체를 나무에서 내리어 그들의 숨었던 굴에 들여 던지고 굴 어귀를 큰돌로 막았더니 오늘날까지 있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을 예수님의 시체 처리에 있어서 이 지침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더군다나 그 다음 날이 안식일이었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급하게 무덤에 장사지내도록하였던 것입니다. 요19:31절에 "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달라하니"라고 했습니다.
이유야 어땠든지 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당일에 장사지내므로 성경의 예언을 성취시킨 것입니다.
2.그 죽음의 의미에 있어소도 예표가 됩니다. 처형당한 죄인이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은 그의 시체를 다시 나무에 매달아 두는 것과 또한 반드시 당일에 장사지내도록 한 것에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당일에 장사 지내라고 명하신 것은 시체를 그대로 둠으로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거룩한 가나안 땅을 더럽히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린 시체는 하나님에게도 또 인간에게도, 버림 받았다는 의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죄인일지라도 그 인격과 생명을 존중해 주신 하나님께서 나무에 달린 자에 대해서 유독 "저주"를 선언하신 것은 이상해 보이기도 합니다.
창4:15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임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모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분이 걸머지신 저주는 그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임을 관과해서는 안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것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야가 보좌에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달린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가 전해지면, "예수는 저주를 받았다"는 말로 응대했던 것입니다. 고전12:3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담당한 저주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고 느낀다면 그 누구도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을 저주를 짊어지시고 굳이 십자가에 죽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우리를 위한 희생과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그것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그러나 그 죽음의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1)죄인은 자기 죄의 삯으로 죽은 것입니다. 구약의 나무에 달린 자와 신약의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사이에는 외면적으로 유사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결과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죽을 죄를 범한 자기의 죄로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죄의 삯으로 죽은 것이지 어느 한 사람의 생명도 구할 수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롬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생명도 구할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죽음은 단지 한 범죄자의 죽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스스로 자신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그 죄에 깔려 죽고만 것입니다. 우리는 그에게 동정을 표할 수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죽음을 죽은 것입니다. 2)그리스도의 죽음은 구원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죽어 마땅한 범죄자의 죽음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히 율법의 저주에서부터 우리를 속량하고자 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값으로 주고 우리의 생명을 사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들을 나무에 달리게 하였고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저주 대상이 되심으로 우리를 죄와 율법에서 속량하신 것입니다. 신21:23절에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게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천국의 유업을 얻은 축복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축복은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인들에게까지도 적용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류의 구속을 위하여 죽음의 길을 가신 것은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흠과 점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를 영원히 대속할 죽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저주와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마27:46절에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저주와 죽음은 그것을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모든 인류가 구원받을 수 있는 새로운 장을 여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셨는지를 기억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범사에 감사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려드리는 복된 성도들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