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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德惠翁主) .. 조선의 마지막 皇女
덕혜옹주의 생애 요약
1907년 ..............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 廢位 및 순종(옹주의 이복오빠) 즉위
1910년 .............. 경술국치(庚戌國恥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다)
1911년 .............. 영친왕 이은 (英親王 李垠), 유학의 명분으로 일본에 볼모로 잡혀 감
영친왕
1912년 .............. 덕혜옹주, 덕수궁에서 출생(아버지 고종 환갑, 어머니 양씨 32세)
덕혜옹주 첫 돌
1916년 ... 5세 .... 高宗, 덕혜옹주의 교육을 위하여 덕수궁 즉조당(卽祚堂)에 유치원 설립
1917년 ... 6세 .... 일제의 강요로 일본인 학교 일출소학교(日出小學校) 입학.일신초등교의 前身
1918년 ... 8세 .... 고종, 볼모가 된 영친왕의 전철을 피하기 위하여 덕혜옹주의 약혼 추진하지만
(金璜鎭의 조카 金章漢과), 일본의 방해로 실패.(約婚하였다는 의견도 있음)
1919년 ... 9세 ... 아버지 고종의 사망 (毒殺說). 이를 계기로 3.1만세운동 일어남.
일본식으로 치루어진 고종의 장례식
1923년 .. 11세 .. 일제의 방해로 출생 10년만에 덕혜옹주(德惠翁主)로 봉해짐. 원래 왕과 宮女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5년이 지난후 옹주(翁主)로 봉해지는 것이 원칙.
1925년 .. 13세 .. 소학교 6학년 때 "왕실의 가족은 內地(일본)에서 교육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일본으로 강제 유학 그리고 일본의 귀족학교 학습원(學習院) 입학
일본으로 떠나는 덕혜옹주 .. 경성역
1926년 .. 14세 .. 純宗(덕혜옹주의 이복 오빠)의 사망으로 일시 귀국 후 다시 일본으로..
1929년 .. 17세 .. 어머니 귀인 양씨(貴人 梁氏)의 죽음으로 일시 귀국하여 보름만에 다시 일본
으로 돌아갔으나, 충격으로 정신분열증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함.
덕혜옹주의 生母 귀인 양씨
1931년 .. 19세 .. 일본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아들 종무지(宗武志 .소 다케유키)와 강제 결혼.
당시 일본의 사다코황후가 宗武志의 財政難을 돕기 위하여 지참금이 많은 덕혜
옹주와의 결혼을 꾸밈. 황후 사망 후 이들 부부도 이혼.
1932년 .. 20세 .. 딸 정혜(正惠 ..마사에) 출생
1951년 .. 39세 .. 딸 마사에의 결혼. 그러나 결혼 3개월만에 집에 유서를 남기고 가출함.딸의
죽음에 대하여도 현해탄 투신 자살설, 살해설 등 여러 설이 있음.
1953년 .. 41세 .. 남편으로 부터 강제 이혼 당한 후 어머니 성을 따와 양덕혜(梁德惠)가 됨
1962년 .. 50세 .. 박정희대통령의 허락으로 영구 귀국. 낙선재와 정신병언에서 여생을 보냄
1963년 .. 51세 .. 이복오빠 영친왕도 영구 귀국
1985년 .. 73세 .. 전 남편 宗武志 사망. 몇 해전에 낙선재로 찾아왔으나 재회는 거절당함
1989년 .. 77세 .. 덕혜옹주 사망
1983년 덕혜옹주의 모습
옹주 翁主
옹주(翁主)는 왕과 宮女 사이에서 낳은 딸이 다섯살이 되었을 때 주어지는 작호(爵號)이다. 덕혜옹주가 태어난 것은 1912년, 경술국치 (庚戌國恥.. 한일합방) 후 2년이 지난 때이었고, 그 때 아버지 高宗의 나이는 환갑이었으며, 이미 왕위는 순종에게 물려주고 태왕으로서 있었다.
하지만 덕혜옹주의 탄생과 高宗의 환갑은 세상에 전연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 명치천황의 황후가 그 해에 죽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日帝는 조선왕실의 자손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 반갑지 않았다. 그래서 다섯살에 주어지는 옹주(翁主)의 작호는 물론 왕의 정식 자녀로서의 입적(入籍)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저 복녕당아기씨(福寧堂兒只氏)로 불리우다가, 덕혜옹주는 고종이 죽고 열살이 되어서야 덕혜(德惠)라는 작호를 얻는다.
덕혜옹주의 출생 .. 덕수궁의 꽃
덕혜옹주가 태어난 것은 우연히도 고종이 회갑을 맞은 1912년 5월 25일이었다. 우리 속담에 "회갑 해에 태어난 자녀는 그 어버이를 똑같이 닮는다"는 말 그대로 덕혜옹주는 아버지 고종의 축소판같이 꼭 닮았다고 한다.
바로 그 전 해에 영친왕을 낳은 엄비(嚴妃)를 잃고 울적하던 차에 덕혜옹주의 탄생은 고종의 크나큰 기쁨이었으며, 이는 실록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아기를 낳자마자 즉시 그 생모 양씨(梁氏)에게 "복녕당(福寧堂)이라는 당호가 내려지고, 그 다음날 고종이 산실(産室)로 아기를 보러 갔으며,
3일째 되는 날에는 흥친왕을 비롯한 종친들이 덕수궁으로 달려와서 문안을 드리고, 다시 生後 일주일 되는 날에는 종척(宗戚 ..임금의 친족과 외척)들의 알현이 있었다. 그 다음날 6월 1일에는 순종 내외가 덕수궁에 부왕을 뵈러와서 産室인 복녕당(福寧堂)으로 아기를 보러 갔다.
삼칠일 되는 날에는 종척 이하 칙임관 이상 직급에게도 高宗이 축하연을 베풀었고, 생후 약 2개월 후인 7월12일에는 아예 아기를 유모를 딸려 자신의 침전인 함녕전(含寧殿)으로 옮겼다. 실록에 나타난 바로는 왕녀가 태어나서 이토록 환영받은 전례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덕혜옹주의 탄생을 사람들은 "덕수궁의 꽃"이라 불렀다고 한다.
덕혜옹주의 生母 .. 복녕당 양씨(福寧堂 梁氏)
덕혜옹주의 生母, 복녕당 양씨(福寧堂 梁氏. 1882~1929)는 高宗의 후궁이다. 덕수궁의 宮女로 있다가 高宗의 承恩을 입어 1912년 5월25일 덕혜옹주를 낳아 복녕(福寧)이라는 당호(堂호)를 받았다. 그녀는 덕혜옹주 외에 2男을 두었으나 모두 요절하였다. 1929년 4월22일 유방암으로 48세에 사망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고양시 사삼릉 권역 내 후궁묘역에 있다.
高宗의 덕혜옹주 約婚 시도
덕혜옹주 5살 때의 모습
고종은 영친왕이 일본으로 볼모로 잡혀가고 마침내는 일본여인과 결혼이 강제되자, 다시 어린 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덕혜옹주가 8살이 되자 어린 딸의 약혼을 시도한다. 고종은 옹주가 8살디 되던 해에 황살의 시종무관(侍從武官)인 김황진(金璜鎭)에게 아들이 있는지를 묻고, 아들이 없다고 하자 조카 중에서 하나를 養子로 들여 놓으라고 어명을 내렸다.
김황진은 조카 김장한(金章漢)을 양자로 받아들이게 되고, 덕혜옹주와 약혼을 하게된다. 그러나 이 시도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시종무관(侍從武官) 김황진이 총독부 경무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고, 덕수궁 출입이 금지되면서 드디어는 이듬해 봄 덕수궁에서 독살되었다. 그리고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로 이 일은 흐지부지되어 잊혀지고 말았다.실제 약혼을 하였다는 얘기도 있다.
유치원 시절
덕혜옹주가 5살 되던 1916년 고종은 덕수궁 즉조당(卽祚堂)에 유치원을 세울 것을 명령한다.즉조당(卽祚堂)은 임진왜란 때 宣祖가 임시 거처로 사용하던 유서깊은 곳이다.
순종실록
1916년 4월 1일 복녕당아기씨(福寧堂兒只氏)의 교육을 위하여, 덕수궁에 유치원(幼稚院) 설치를 명하고, 아울러 경구정자(京口정자 .. 쿄구치 사다코)와 장옥식(張玉植)을 보모(保母)로 촉탁(囑託)하였다. 196년 5월8일 太王殿下(즉, 고종)은 준명당(浚明堂)에 臨하시어 유치원 학도(學徒)를 소견(召見)하시고 筆墨을 하사하시었다.
연로한 아버지 고종은 어린 딸을 귀여워하였지만 또한 가여워했다. 고종은 덕혜옹주을 위해 덕수궁 즉조당(卽祚堂)에 유치원을 설립한다. 亡國의 王이지만 유치원 설립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유치원의 교사를 한국인만으로 채용할 권한까지는 없어서 일본인 교사 경구정자(京口貞子)를 채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유치원에는 덕혜옹주를 비롯한 왕실의 자제 10여명이 다니게 되었다. 高宗(당시는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왕이었다)은 아침마다 즉조당 유치원에 들러서 어린 딸의 재롱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냈다. 고종은 어느날 일본 총독을 덕수궁으로 초빙한다.
그러고는 총독을 유치원으로 데려간다. 高宗은 노래하고 유희하는 어린 것들의 앙증스러운 모습을 총독에게 보여주다가, 고종은 갑자기 아이들 틈으로 들어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재롱을 떨었다. 그러더니 어린 딸의 손목을 잡고 와서는 총독에게 인사시킨다.
이 일이 있은 후 총독은 본국으로 연락하여 덕혜옹주의 입적(入籍)문제를 재촉하였다. 일제는 이때까지도 덕혜옹주를 고종의 정식 자녀로의 입적(入籍)도 허락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해 총독은 덕혜옹주를 일본인 자녀가 다니는 일출(日出 ..히노데)소학교에 입학시켰다. 일출소학교(日出少學校)를 마친 덕혜옹주는 일본의 귀족학교인 학습원(學習院)으로 강제 유학의 길을 떠난다.
일본인 小學校 시절
수업을 마친 덕혜옹주가 학교 교문을 나와 마차(馬車)에 오르려 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일본풍의 교복 치마를 입고 있으며, 머리에는 洋式 모자를 쓴 그녀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다. 뒤에는 한복을 입은 여시종(女侍從)이 겉옷을 들고 뒤를 따르고 있다.
덕혜옹주가 서울 충무로 현제 극동빌딩 자리에 있던 일출소학교(日出小學校)에서 일본인 급우들과 함께 국어(國語 ..일본어) 수업을 받는 모습이다. 뒤쪽에 학교 선생과 수행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업광경을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 3월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기 직전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덕혜옹주의 얼굴에는 애잔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다. 일출소학교(日出小學校)는 당시 일본인 거주자 전용의 소학교이었다.
덕혜옹주의 作品들
덕혜옹주는 일출소학교를 마치고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난다. 떠나기 전에 1925년 3월25일에 소학교에서 송별회 겸 과제물 작품전을 열었다. 어린 나이에 글과 자수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벽에 걸려있는 과제물 작품들....
소학교 졸업식 .. 송별회장
그것이 왕실 가족에 대한 일본식 예의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덕혜옹주의 의자에는 방석을 깔았는지 높게 앉아있다. 이런 모습은 일본 학습원(學習院) 입학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위 사진은 1925년 3월25일 송별회장에서 열렸던 덕혜옹주의 독창회 모습이다. 덕혜옹주는 작문에도 소질이 있었는데, 덕혜옹주는 "비행기"라는 作文을 지었는데 이 글에 曲을 붙여 송별회장에서 직접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8살 .. 아버지 고종의 죽음
14살 .. 일본으로 강제 유학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기 위하여 서울역 기차에 타고 있는 모습
일본 귀족학교 학습원(學習院) 입학식
독살을 두려워 하다
20살 .. 일본 남자와 정략 결혼
1929년 덕혜옹주의 生母인 귀인 양씨(貴人 梁氏)가 사망하였다. 검은 양장차림으로잠시 귀국한 덕혜옹주는 창덕궁에 들어가 어머니가 머물렀던 관물헌(觀物軒)에서 잠깐 기거한 뒤 서둘러 일본 귀국길에 오른다.
1931년 5월 덕혜옹주는 일본 동경대 출신 일본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결혼한다. 훤칠한 키에 전형적인 일본인의 얼굴을 지닌 그는 덕혜옹주와 결혼 후 대마도(對馬島)가 아닌 도꾜(東京)에 저택을 두고 생활하였다.
그들의 결혼은 다분히 정략적이었지만, 결혼 초반에는 행복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결혼 2년 뒤에는 딸을 낳았다. 그들의 결혼에 대한 조선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덕혜옹주의 비극에 대한 소문은 결혼하기 직전부터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그 진원지는 구 조선왕실의 상궁나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금지옥엽 조선의 옹주가 일본의 한낱 섬 백작과 결혼한다는 소문이 나자 조선 왕실은 발칵 뒤집혔고,
1930년 이미 4년전에 덕혜옹주의 이복 오빠인 순종황제가 죽은 후에는 일본정부에 정식으로 항의할 사람마저 없었던 때에 이루어진 이 결혼에 상궁나인들은 상당한 치욕과 덕혜옹주를 동정하는 마음에서 종무지(宗武志)에 대한 진실이 왜곡되기 시작하였다.
백작이 한 눈이 먼 애꾸에 곱추에 난폭하고 배운 것없는 농장 주인인데, 일본 정부가 덕혜옹주와 결혼시키기 위하여 편법으로 백작으로 만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고,아무도 이를 정정해 주지 않자 조선 내에서는 사실로 굳어져 버렸다.
어째든 그들의 결혼 소식은 조선의 백성들에을 더욱 비탄으로 빠지게 했다. "덕혜옹주는 洋裝을 입으시고 자동차로 "소 백작"의 집에 이르러 11시25분부터 순 일본식으로 혼례를 치르었다"는 짧은 보도가 있었지만, 일부 신문에서는 결혼식 사진에서 남편의 얼굴을 지웠고, 이후 조선의 신문기사에서 덕혜옹주는 사라졌다.
덕혜옹주의 남편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은 누구인가 ?
사실 종무지(宗武志)백작은 곱추도 애꾸눈도 아니었고, 난폭하지도 배운 것도 없는 농장주도 아니었다. 그의 종가(宗家)는 대대로 대마도(對馬島)를 통치한 집안으로, 종무지(宗武志)는 그 후손으로서 대마도를 상속받았지만,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폐번치현(廢藩治縣 .. 藩이 없어지고 縣으로 바뀌면서 藩主의 자치가 사라지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제가 시작되는 것)이 되자, 황실에서 도주(島主)의 작위를 폐하고 백작의 작위를 하사한 것이다. 그러다가 1947년 일본에서 귀족제도가 폐지되면서 남편도 백작의 지위를 잃었다.
정략 결혼 그리고 결혼생활
종무지(宗武志)백작 후원자는 당시 다이쇼(大正)천황의 부인인 사다코 황후로, 종무지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게되자 조선왕가의 딸로 지참금이 상당하였던 덕혜옹주를 맺어주어 그 財政難을 덜어주려고 하였다. 사다코황후의 중매로 맺어진 두 사람은 다분히 정략적인 결혼이었지만, 초반에는 행복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이쇼(大正)천황과 사다코황후
결혼 2년 뒤 그들은 딸을 낳았지만, 딸 출산 후 덕혜옹주가 다시 정신병이 재발하게 된다. 덕혜옹주의 정신병은 꽤 오래 된 것으로 아버지 고종의 죽음 후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와 일본인 귀족학교에서 이지매를 당하면서 향수병과 함께 커졌고, 어머니 양귀인(梁貴人)의 죽음 이후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당시 정신병은 신체 장애와 함께 상당히 부끄러운 질병 가운데 하나이었고, 특히 귀족인 덕혜옹주의 정신병은 당시에는 상당한 화제거리이었다. 종무지(宗武志)는 이를 꺼려하여 덕혜옹주를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집안에 가두어 두는 것으로 대신하였고, 덕혜옹주가 자꾸 밖으로 나가려 하자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고 한다. 1947년 일본의 귀족제도가 폐지되고 남편도 백작의 지위를 잃을 즈음 덕혜옹주는 드디어 마쓰자와라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 혼
덕혜옹주의 병은 더욱 깊어지기만 하고, 그들을 맺어주었던 사다코황후가 1951년 사망하자, 1955년 6월에 그들은 이혼하면서 덕혜옹주는 쓸쓸한 末年을 보내게 되었다. 결혼한지 25년만에 결국 이혼하게 된 것이다.
해방 이후 덕혜옹주는 한국인들에게 거의 잊혀졌다. 평소 조선 왕실의 자손임을 내세워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을 못마땅해 하였던 이승만정부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공주를 찾는데 소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반대하기도 하였다. 1950년 서울신문 동경특파원 金乙漢( 고종이 덕혜옹주의 약혼자로 삼으려 하였던 金章漢의 兄)이 정신병원에 입원 중인 덕혜옹주를 찾아보고, 이승만정부에 귀국을 요청하였지만 거부되었던 것이다. 金乙漢은 결국 1961년 5.16군사혁명 후 박정희이장을 찾아가 덕혜옹주의 귀국을 허락받는다.
이혼 이후 종무지(宗武志)는 일본여인과 다시 재혼하고, 대학교수로 지내게 된다. 해방 후 종무지는 1962년에 덕혜옹주가 한국으로 귀국하고 나서는 한번 보고싶다고 낙선재의 덕혜옹주를 찾아왔지만, 덕혜옹주의 충격을 우려하여 즉근들에 의해 거부당하였다.
덕혜옹주의 딸
결혼 2년 뒤에 태어난 딸 마사에(正惠) ..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덕혜옹주의 정신병 재발로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옹주의 딸 마사에(正惠)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사랑하였고, 오히려 병에 걸린 조선인 어머니를 부끄러워 하였다.
딸 마사에의 죽음에 대해서도 어머니의 결혼생활 못지 않게 말이 많다. 가장 알려진 것이 현해탄 투신 자살설, 해방 후 조선 왕족을 감당하지못한 종가(宗家)사람들에 의한 살해설 등등.. 마사에는 해방 후 20대 초반의 나이에 일본인과 결혼하였는데, 연애결혼이었음에도 결혼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혼 3개월만에 집에 유서를 남기고 家出을 하게 되었는데, 가족들은 그녀를 애타게 찾았지만 결국 일본 남알프스산자락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정확한 死因은 지금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아버지 종무지(宗武志)가 직접 그린 딸 정혜(正惠 ..마사에)의 초상
對馬島의 결혼기념비
이 비(碑)는 덕혜옹주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당시 대마도(對馬島)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 단체인 "상애회(相愛會)" 회원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으나, 1955년 덕혜옹주의 離婚 이후 쓰러뜨렸다가, 2001년 씨훌라워號의 대마도 취항 후 한국인 관광객이 늘어나자, 순전히 장사속으로 다시 세운 것이다.
1955년 6월에 덕혜옹주는 남편인 종무지(宗武志)와 이혼하면서 쓸쓸한 만년을 지낸다. 해방 이후 덕혜옹주는 한국인에게 거의 잊혀졌다. 평소 조선왕조의 후예임을 자랑하고 다니던 이승만은 대통령이 된 후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에 비판적이 되었다.
조선왕조의 프린스임을 자랑하던 이승만은 조선의 마지막 皇女를 찾는 일에 소극적임은 물론 덕혜옹주의 귀국을 반대하기도 했다. 1950년 서울신문 도쿄특파원 김을한(金乙漢 .. 덕혜옹주의 약혼자 金章漢의 兄)이 마쓰자와라 정신병원에 입원 중인 덕혜옹주를 찾아갔고, 이승만 정부에 귀국을 요청했지만 반응은 냉담하였다. 그러다가 1961년 5.16군사혁명 이후 金乙漢은 朴正熙 議長을 찾아갔고 마침내 덕혜옹주의 귀국이 허락되었던 것이다.
덕혜옹주의 회갑연 .. 그녀가 어릴 적 乳母이었던 변복동 할머니가 곁에 있었다.
덕혜옹주의 죽음
1983년 덕혜옹주가 잠깐 정신이 돌아 왔을 때 쓴 낙서 한 줄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의 슬픈 운명을 더욱 가슴아프게 기억나게 하고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영친왕) 비전하(이방자영사)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1962년 덕혜옹주는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지 38년만에 그렇게 그리던 고국의 땅을 밟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조선 공주의 자격이 아니었다. 의식까지 거의 없는 안타까운 상태이었다. 귀국 후 덕혜옹주는 7년간의 병원 생활 끝에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다.
1972년 前 남편 종무지(宗武지)가 찾아왔지만 덕혜옹주는 만남을 거부하였다. 1969년 4월 78세를 일기로 사망한 덕혜옹주는 경기도 남양주시 高宗의 무덤 바로 뒤편에 잠들어 있다.
덕혜옹주의 묘
1962년 덕혜옹주는 38년만에 고국에 돌아온다. 意識도 거의 없고 실어증(失語症)까지 있었다. 귀국 후 덕혜옹주는 7년간의 병원생활을 거쳐 창덕궁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다. 1972년에 前 남편 宗武志가 찾아왔으나 덕혜옹주는 만남을 거부하였다.
덕혜옹주는 낙선재에서 회갑을 맞아 좋은 한 때를 보냈으나, 1989년 4월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경기도 남양주시 아버지 고종의 무덤 바로 뒤편에 잠들어 있다.
역사는 덕혜옹주를 기억하지 않았다. 하지만 망각하지 않았기에 결국 현대의 문학은 그녀를 부활시켰고, 다시금 살아난 그녀는 과거를 원망하며 서릿발 같은 고함을 치지 않았다. 다만 고함보다 더 싸늘한 눈동자로 현재를 응시하고 우리의 역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권비영의 소설 "덕혜옹주"는 조선의 마지막 皇女, 덕혜옹주의 비침한 삶을 다루고 있다.황녀이었지만 황녀로 살 수 없는, 평생을 아바마마인 고종을 그리워하며 어머니와 자신의 딸을 마음에 품고 산 여자 .. 이 작품 도입부에는 옹주의 탄생 그리고 나라를 잃은 고종의 근심을 한 잔의 커피와 함께 묘사하고 있다.
요즘 들어 고종은 하루에도 몇 번씩 커피를 찾았다. 시종(侍從)은 죽음을 연상시키는 시커먼 찻물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폐하! 찻잔을 치우라 할까요? " "아니다. 내가 이것으로 위안받을 때도 있느니라. 입에 대지 않으면 하루해가 너무 길게 느껴지는구나"
죽음을 연상시키는 시커먼 찻물.. 옹주가 탄생했으니 황적(皇籍)에 올리는 일이 걱정되고 일본의 감시아래 나라를 지켜내지 못하였다는 자책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 고종의 근심.. 고종은역사적으로도 커피를 즐겨 마신 것으로 잘 알려져있다. 그래서인지 高宗을 다루고 있는 많은 문학작품과 드라마는 그의 무거운 근심을 검디검은 액체인 커피에 종종 빗대곤 하였다. 또한 고종의 무거운 마음의 무게는 김탁환의 "노서아 가비"에도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다.
외롭지 않더냐? 내가 노서아 가비를 좋아하는 이유는 말이다.
이 쓰디쓴 맛이 꼭 내 마음을 닮아서이니라.......................
소설 "덕혜옹주"와 "노서아 가비"는 전혀 다른 두 작가에 의해 집필된 작품들이다. 다만 권비영의 소설 덕혜옹주를 읽노라면 조선의 마지막 皇女의 아버지인 고종에게 그 시선이 닿게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高宗에게 고정된 독자의 시선은 그의 근심을 바라본 것이리라
비극의 시작을 1909년부터 진행하는 권비영의 작품은 덕혜옹주의 삶, 그 처음부터 끝까지 고종의 이야기와 분리되지 않는다. 고종의 등에 업히며 어리광을 부리는 유치원시절의 덕혜옹주와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싳어요. 殿下, 妃殿下 보고 싶습니다"라고 혼잣말을 되내이며 고종을 그리워하는 모습 등 그녀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것은 아버지 고종에 대한 그리움이다.
그렇다면 덕혜옹주의 뿌리, 고종의 근심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김탁환의 작품은 1898년 전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오롯한 고종의 이야기도 아니고, 온전한 역사의 이야기도 아니다. 개화기를 배경으로 질펀한 사기행각을 거침없이 행한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여기서도 고종은 하나의 조연으로 등장할 뿐이다.
하지만 군데군데 등장하는 "노서아 가비"와 고종의 무거운 마음은 권비영의 작품을 읽으면서 여러차례 교차되고 상기된다. 전혀 다른 시대배경과 스토리라인을 갖고 있는 두 작품이지만 마치 하나의 작품인 것처럼 이 두 소설은 묘하게 연결되고 상상력을 자극한다.
덕혜옹주는 자신의 아버지가 러시아공사관에 있을 때 "따냐"라는 여성 바리스타로부터 커피를 마셨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덕혜옹주가 복순이를 자신의 말벗으로 삼은 것처럼 고종역시 "따냐"를 통해 조선을 가늠하고 외로움을 달랬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실제로 고종의 "독차사건(毒茶事件)"은 환궁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운 이후인 1898년 9월에 일어났지만 김탁환은 극의 긴장감을 위해 이 사건은 환궁 전으로 설정하였다. 그의 기발한 설정 덕분에 우리는 고종의 족차사건이 일어난 당시를 좀더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