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漢詩)
오도송(悟道頌)
계성편시장광설溪聲便是廣長說 平平仄仄仄仄仄
산색기비청정심山色豈非淸淨心 平仄仄平平仄平
야래팔만사천게夜來八萬四千偈 仄仄仄仄仄平平
타일여하거사인他日如何擧似人 平仄平平仄仄平
소동파<蘇東坡>
계곡물 소리는 한량 없는 부처님의 설법이요
산천 초목 울긋불긋 빛깔은 어찌 청정 법신이 아닌가?
밤 사이에 내린 계곡물 소리 팔만사천 게송인데
이 도리를 남에게 어떻게 일러줄까나?
이 게송(偈頌)은 칠언절구(七言絶句) 평기식(平起式) 오도송(悟道頌)이다. 압운(押韻) 설(說)은 입성(入聲) 설운(屑韻) 운족(韻族)이고, 심(心)은 하평성(下平聲) 운족(韻族)이고, 인(人)은 상평성(上平聲) 운족(韻族)이다. 세 운족(韻族)으로 작게(作偈)했다, 소동파(蘇東坡)는 북송(北宋) 팔대(八代) 문장(文章) 시인(詩人) 거사(居士)로 알려졌는데, 평측(平仄) 운통(韻統)을 맞추어 보니, 오도송(悟道頌)은 평측운법(平仄韻法)에도 전혀 맞지를 않다. 당송 팔대 문장가로 알려진 소동파가 평측운목을 맞추지 않는 것은 의문으로 남는다. 소동파는 문장가인 만큼 승호선사(承皓禪師)와 문답(問答)을 보면 아만심(我慢心)도 컸던 모양새다. 하루는 변복(變服)을, 하고 승호선사 계신 절에 갔니, 승호선사께서 대관(大官)은 존함(尊銜)이 어떻게 되시오? 물으니, 소동파가 나의 성(姓)은 칭(稱)이오, 대답하자. 승호선사가 칭가(稱家)라 하면 제방(諸方) 선지식(善知識)을 저울질하러 다닌다는, 말이요? 소동파 그렇소이다. 승호선가가 가가대소(呵呵大笑)하시고 내가 방금 크게 웃는 웃음의 소량(笑量)이 얼마인가? 소동파가 평생 공부한 지식이 승호선사 질문에 ”꽉“ 막혀버렸다. 불교는 아만 교만이나 알량한 식견 사량계교(思量計較) 지식으로 안 된다. 아마 소동파 거사가 자존심이 ‘콱 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승호선사의 지혜 보검 앞에 무릎을 꿇고, 하루는 거사(居士)가 황주 황룡사 상총선사(常聰禪師)가 도법(道法)이 고준(高峻) 하다는 말을 듣고 상총선사를 친견하고 법문을 들으려고 갔다. 그러나 상총선사는 동파거사(東坡居士)에게 그대는 어찌 유정설법(有情說法)만 들으려 하는가? 무정설법(無情說法)은 어찌 듣지 못하는가? 소동파 유정설법(有情說法)은 들었지만, 무정설법(無情說法)은 난생처음 듣는 법문이라, 그 말에 그만 의심이 생겨 화두(話頭)가 되어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한 생각에 젖어 말을 타고 골똘히 생각 어떤 것이 무정(無情)이, 설법(說法)을, 한단 말인가? 하고 의심하는 그 찰나에 쏴~ 하고 수십 미터 절벽에서 폭포가 떨어지는 굉음(轟音)이 귀에 들려서 눈을 번쩍 떠 보니, 말이 천길만길 폭포 절벽에 서 있었다. 아찔하다. 한 걸음만 잘못 걸으면 생사(生死)가 갈라지는 지경(地境)이다. 이때 폭포(瀑布) 소리가 소동파에게는 생사(生死) 법문(法門)으로 들렸다. 그래서 읊은 게송이 위의 오도송(悟道頌) 게송이다. 이런 경계를 시화(詩畫)에서는 입상진의(立像盡意)라고 한다. 폭포(瀑布)의 정물(靜物)의 상(像)이 뜻을 다한다는 경지(境地)다. 소동파 거사가 상총선사의 무정설법(無情說法)을 듣지 않았다면 아마 폭포 소리는 그냥 폭포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 계곡 폭포 소리를 듣고 읊은 오도(悟道) 시(詩)라 평측운(平仄韻)을 맞출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짐작이 간다.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書不盡言),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言不盡意)고 했다. 그래서 뜻을 드러내려면 어쩔 수 없이 상을 세워서 뜻을 다한다(立像盡意)고 했다. 선사들이 수좌(首座)를 제접(提接)할 때 방편(方便)으로 방할(棒,喝)을 쓴다. 알고 보면 방(棒)과 할(喝)도 입상진의((立像盡意)인 셈이다. 방과 할에 깨우치면 득의망언(得意忘言)이다. 핵심 본뜻을 얻고 나면 말이 필요가 없게 된다. 부처님께서 영산회상에서 연꽃을 드신 것도 알고 보면 입상진의(立像盡意)의 법문(法門)이다. 소동파거사(蘇東坡居士)가 무정설법(無情說法)인 폭포 소리에 도를 깨닫는 것도 입상진의((立像盡意)의 법문(法門)이다. 그 점을 상총선사(常聰禪師)께서 무정설법(無情說法) 법문으로 소동파거사(蘇東坡居士)를 목적지에 도착하면 뗏목을 버리게 한(捨筏彼岸) 것이다. 소동파(蘇東坡) 시(詩)중에 금시(琴詩)라는 시(詩)가 있다. 선문(禪門)의 선적(禪的)인 시(詩)이다. 거문고에 소리가 있다 하면은 갑 속에 두었을 때는 왜 안 울리나. 그 소리 손가락 끝에 있다 하면은 그대 손끝에선 왜 안 들리나.<若言琴上有琴聲 放在匣中何不鳴 若言聲在指頭上 何不於君指上聽> 그대 손끝에선 왜 안 들리나. 선문(禪門)에 화두(話頭) 같다. 아마 소동파가 능엄경도 본듯하다. 능엄경에도 금슬비파(琴瑟琵琶)가 나온다. (금슬비파)琴瑟琵琶) 수유묘음(雖有妙音) 이 시를 보면 소동파 거사도 능엄경(楞嚴經)을 본듯하다. 능엄경에도 금슬비파(琴瑟琵琶) 이야기가 나온다. 거문고와 비파 비록 아름다운 소리 가졌으나, 오묘한 손놀림이 없으면 소리를 낼 수 없다네.<琴瑟琵琶 雖有妙音 若無妙指 終不能發> 의타연성<依他緣性>을 이른 말이다. 오늘은 소동파거사의 오도송을 근체시(近體詩) 평측운목(平仄韻目)으로 맞추어 보았다. 여여법당 화옹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