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 평전 제8장 예술과 스포츠로 인류를 하나로 만들다 3. 미국 청년들을 일깨운 다양한 예술・스포츠 단체들 1970년대 초, 문선명이 세계 선교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미국 대륙은 어지럽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공산주의 강대국 소련과 경쟁하느라 여념이 없는 와중에 젊은이들은 히피문화와 반전운동에 빠졌다. 20년이 지난 1992년에 문선명이 한 연설을 돌아보면 어떤 사명으로 그가 미국에서 예술과 스포츠 섭리를 시작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내가 미국에 가서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민주세계의 선도 국가인 미국의 젊은이들이 영상 미디어에 빠져 급진적이고 악한 길로 치닫는 것을 어떻게 방지할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미국의 TV가 큰 문제입니다. 현대 사조를 이끌고 가는 것이 영상 미디어인데 미국 젊은이들이 여기에 도취되어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젊은이들이 사탄세계로 들어가기 때문에 그 같은 상황이 전개되지 않도록 방어책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같은 현상을 방어할 수 있는 길은 영상미디어를 활용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구원해줄 수 있는 길을 찾아내 사탄세계의 맨꼭대기를 돌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리틀엔젤스를 만들고, 뉴욕에서는 뉴욕심포니를 인수하고, 그 다음에 발레단을 만들고 첨단을 달리는 록뮤직그룹까지 만든 것입니다."
1970년대부터 문선명이 미국에서 만든 음악, 무용, 스포츠 단체는 무척 많았다. 그러나 그것이 추구하는 정신은 언제나 하나였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그리고 인류 화합'이 모토였다. 이와 더불어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조화, 종교 화합을 기본 정신으로 삼았다. 당시만 해도 동양이 서구에 비해 굉장히 가난하던 시절이었기에 자칫 동양 예술은 폄하될 수 있었고, 스포츠 실력은 서구에 비해 많이 뒤처졌지만 실제 동양 예술은 깊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선명이 시작한 첫 번째 예술단체는 1973년 9월 15일에 창단한 국제새소망합창단(New Hope Singers International)이다. 이 합창단은 피부색이 다른 수많은 나라에서 온 청년 남녀들로 구성되었다. 노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심정을 들려주고 모두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인류 한가족이라는 소망을 표현했다.
1974년, 합창단은 미국 10대 도시에서 진행된 '인생의 축전' 집회에서 멋진 공연을 선보여 청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았고 통일철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 이바지했다. 그 행사 후 합창단은 1974년 9월 뉴욕 메디슨스퀘어가든 집회부터 시작된 문선명의 미국 8대 도시 순회강연에 동참했다. 또 일본과 한국에서 열린 순회강연에서도 공연했으며, 1975년 6월 7일 여의도광장에서 120만 명이 참여한 구국세계대회에서도 아름다운 화음으로 청중들의 심금을 울렸다. 또한 1976년의 양키스타디움과 모뉴먼트 집회에서도 공연을 펼쳤다.
새소망 합창단은 공연만 한 것이 아니라 「크리마스 선물」과 「사랑이 있는 곳에 나를 거하게 하라」등 2개의 음반도 냈다. 공연과 더불어 단원들은 틈이 날 때마다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워싱턴DC에 새로 구입한 교회 건물을 보수하는 일을 했으며 '가정교회' 활동을 통해 워싱턴 곳곳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활동을 했다. 여러 해가 지난 뒤, 새소망 합창단원으로 활동했던 이들이 다시 모여 특별 공연을 했다. 1990년 한국을 찾아 공연했으며 2009년 1월에도 또 한 번 방한해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미국에서 시작한 또 하나의 예술단체는 뉴욕심포니 오케스트라(New York City Sympy OrchestrA)다. 1973년 뉴욕심포니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국제문화재단(ICF)을 통해 도움을 주었다. 그러다가 1975년 10월에 완전히 인수해 데이비드 이튼(David Eaton)과 토마스 루드비그(Thomas Ludvig)가 책임 지휘자로서 새 출발을 시작했다. 이튼은 우리나라의 산유화에 반해 「산유화」라는 곡을 창작한 명작곡가이다.
새로 태어난 뉴욕심포니는 처음에는 소수의 음악가들로 구성돼 여러 차례의 작은 콘서트를 열었다. 그렇게 조금씩 이름을 알려나가다가 1975년 겨울에 드디어 커네기홀에서 완벽한 오케스트라를 구성해 처음으로 교향곡을 연주했다. 사람들이 재탄생한 뉴욕심포니에 열광적인 박수를 보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뉴욕 심포니는 더욱 훌륭한 공연을 펼쳐 사람들에게 행복을 안겨주고 음악 전통을 보전해 나갔다. 실력이 쌓이고 명성이 높아지자 미국을 벗어나 전 세계를 순회하며 유명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했다.
"예술의 위대함이 지닌 비밀은 바로 심정, 감성 그리고 공연의 참된 목적을 담는 데 있습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위대한 연주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예술가는 보다 더 고귀한 영혼을 작품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심정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술을 새로운 차원으로 승화시킵니다. 이런 이유로 예술가들은 기술적 측면과 더불어 더욱 열심히 자신의 영감을 개발해야 합니다."
뉴욕심포니가 고전음악을 주로 연주하는 악단인 것에 반해 선버스트(Sunburst)는 록그룹이다. 요란스러운 록그룹을 만든 이유는 미국을 포함한 세계의 청년들을 감화시키기 위해서는 그들이 좋아하는 음악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973년 4월 창단된 선버스트는 각종 집회에서 흥겹고 빠른 음악으로 청년들을 불러 모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데 큰 일조를 한 팀이었다. 훗날 한국과 일본에서도 청년과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선버스트 그룹이 창단되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또한 국제민속무용단(International Folk Ballet)을 만들어 세계 각국의 민속무용을 보존하고 계승시키면서 멋진 공연을 펼쳐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또 하나의 예술단체는 고월드브라밴드(Go World Brass Band)이다. 1976년 5월 6일 창단된 고월드브라밴드는 금관악기로 구성된 악단이며 이름 그대로 '세계로 가자'라는 뜻을 품고 있다. 책임자는 캐빈 피카드(Cabin Pickcard)와 데이비드 이튼이었는데 피카드는 훗날 뮤지컬 「심청」을 작곡해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 브라스밴드는 특히 1976년 6월 1일, 창단된 지 1개월이 되지 않았음에도 양키스타디움 대회에서 아주 큰 역할을 맡았다. 행사가 시작되기 전, 갑자기 강한 푹풍우가 쏟아져 곳곳의 장식품들이 파괴되었고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이 비에 흠뻑 젖어 마치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또 행사장 바깥에서는 반대자들의 집회가 열려 그야말로 혼란의 극치였다. 사람들이 동요하기 시작할 때 누군가 '당신은 나의 햇살'을 부르기 시작했고 고 월드브라밴드가 멋진 연주를 하여 사람들의 불안을 잠재웠다. 노래가 사람들을 감흥 시키자 기적적으로 비가 멈췄고, 행사는 예정대로 진행돼 역사에 길이 남는 사건이 되었다.
이후에 열린 워싱턴 집회에서도 큰 역할을 했고 집회가 열리기 전에 다양한 봉사활동과 거리 곳곳에서 소규모 공연을 열어 수만 명의 사람들을 초대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러한 고월드브라밴드의 헌신으로 워싱턴 모뉴먼트 대회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국제십자군(International One World Crusade:IOWC)에 동참해 전도와 봉사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몇 년 후, 문선명은 밴드를 영국으로 보내 음악공연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을 하도록 했다. 이 활동에 영향을 받아 유럽 신도들은 유럽 고월드브라밴드(European Go World Brass Band)를 창단했다. 또한 미국 대학원리연구회(US-CARP)를 지원하면서 선버스트, 국제민속무용단 등과 함께 미 대륙을 횡단하며 대학 캠퍼스에서 공연을 펼쳐 많은 대학생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했다.
미국의 예술 발전에 기여한 또 하나의 일은 맨해튼센터의 복구이다. 아주 오래전인 1906년 오스카 해머스테인(Oscar Hammerstein)에 의해 건축된 유서 깊은 오페라하우스였다. 오스카는 뮤지컬 극본 작가였는데 작곡가 리처드 로저스와 함께 사운드 오브 뮤직(Sound of Music), 왕과 나(The King and I)등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또한 평범한 뉴욕 사람들이 저렴한 가격으로 오페라를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 극장을 지었다.
처음에 맨해튼 센터는 뉴욕의 유일한 오페라 하우스로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 마리오 란차(Mario Lanza)등 전설적인 가수들이 공연했다. 또 '오페라의 유령'이 처음으로 영화화된 흑백 무성영화의 배경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뉴욕은 세계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했고, 크고 화려한 극장들이 생겨나면서 맨해튼센터는 차츰 변방으로 밀려났다. 그리하여 쇠퇴의 길을 걷다가 1970년대 중반에는 도시의 흉물이 되고 말았다.
문선명은 그 모습을 보면서 무척 가슴이 아팠다. 유구한 전통과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오페라 하우스가 그렇게 수십 년 동안 방치되어 있는 모습에 누군들 가슴이 아프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돈 많은 사업가들은 이익이 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들이기를 거부했다. 문선명은 문화와 예술은 상업적인 이익을 떠나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하는 것임을 잘 알기에 신도들의 성금을 모아 1976년에 맨해튼센터를 사들였다.
건물은 외관이 수려하고 내부는 유럽풍으로 장식되었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듯했다. 곧 전문가들이 달라붙어 대대적인 수리작업에 들어갔으며 세계 여러 곳에서 통일교 청년들이 모여 봉사활동을 했다. 그렇게 5개월의 수리 끝에 1976년 5월 재단장을 하고 새로이 문을 열었다. 재개장 후 맨해튼센터는 뉴욕 문화의 새로운 심장부가 되었고 하나님의 심정을 보여주는 정신적 명소로 떠올랐다. 'God Bless America Festival', '국제문화의 밤' 축제, 'Man of LA MANCHA'등 다양하면서도 수준 높은 작품들을 공연해 뉴욕 시민들에게 예술의 가치를 일깨우고 오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저렴한 가격으로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1983년에는 방송국 시설이 갖추어진 '애틀랜틱 비디오'를 설립했으며, 1990년에는 각 나라 TV회사들의 입주가 가능한 '워싱턴TV센터'도 세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