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흐루시초프’서 보자” 혁명동지 29인의 비밀 암호 (7)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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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는 한 번뿐이다. 다음에 오는 기회는 변질된 것이다. 오늘의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과감하게 포착해야 한다. 그 무렵 김종필의 상념을 지배하던 언어였다.
1961년 9월 15일 강화도에서 해병대 훈련을 참관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오른쪽). 바로 뒤는 김종필 중정부장. 중앙포토
꽃샘추위가 매서운 1961년 초봄 나는 분주해졌다. 박정희 소장과 대구에서 혁명 결의(2월 19일)를 한 뒤였다. 혁명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출동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전의 정군(整軍)운동은 육군본부 동료들로 충분했다. 이젠 혁명이다. 실병력이 있어야 했다. 그들을 이끄는 야전장교를 포섭해야 했다. 나는 한강 이북, 박 소장은 한강 이남을 맡았다. (5회 참고)
1961년 9월 15일 강화도에서 열린 6·25 인천 상륙작전 기념행사에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가운데 사복 차림 선글라스)과 육사 8기 동기생 등 5·16 주역들이 모였다. 이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주로 포진해 있었다. 앞줄 왼쪽부터 오정근 중령(해병), 강상욱·오치성·이석제 대령. 뒷줄 왼쪽부터 옥창호·정세웅 대령(해병), 길재호 대령 , 김종필 부장, 유원식 준장. 사진 오정근씨 아들 오명식 삼정KPMG 고문
청계천과 무교동 사이에 조흥은행 본점이 있었다. 그 옆에 술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상수’라는 한글 간판을 달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으면 상수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으면 ‘수상’이다. 이곳은 동지를 끌어들일 때 만남의 장소로 자주 사용됐다. 일종의 아지트다.
우리는 상수를 ‘흐루시초프’라고 불렀다. 당시 소련의 ‘수상’인 흐루시초프의 직책을 거꾸로 읽은 것에서 착안했다. 그는 유엔총회 무대에서 구두를 벗어 연단을 두들기며 서방사회를 비난하는 연설로 꽤나 유명했다. 전화로 서로 만날 곳을 이야기할 때면 우리는 암호처럼 “오늘은 ‘흐루시초프’에서 보자”는 식이었다. 헌병대 감시망도 그곳엔 닿지 않았다.
‘흐루시초프’에서의 가장 큰 성과는 포천에 있는 6군단 포병단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 부대는 5·16 때 제일 먼저 육본을 점령했다. 6군단 소속인 홍종철(군단 작전참모) 대령과 구자춘·신윤창(군단 포병단 대대장) 중령을 만났을 때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 인물 소사전: 홍종철(1924~74년)
육군 6군단 작전참모로서 포병단을 이끌고 5·16에 참여했다. 서울대 상대 출신의 육사 8기생.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위원 겸 문교사회위원장을 역임했다. 대통령 경호실장(63년 12월)을 거쳐 문화공보부 장관(64년 9월)과 문교부 장관(69년 4월)을 지냈다. 74년 6월 청와대 사정담당 특별보좌관 재직 시절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려다 숨졌다.
이들은 모두 육사 8기 동기생들이다. 맥주를 마시면서 내가 입을 떼자마자 “혁명하자는 거지? 그래, 세상 뒤집고 바꾸는 거 찬성한다” “더 얘기할 필요도 없어. 우리 다 생각이 같아”라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대개 그런 분위기였다. 각 부대 지휘관들, 대대장이나 연대장들이 나오는데 많은 설명이 필요없었다. 내가 “이제 안 되겠다”고 하면 “이런 군대 갖고 안 된다” “나라를 방치할 수 없다” “염려하지 말라. 우리에게 임무가 주어지면 다 수행하겠다”는 말을 거침없이 했다.
JP 빤히 보던 관상가 백운학…대뜸 외쳤다 “됩니다, 혁명!” (8)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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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운(時運)은 대사(大事)를 이루게 한다. 천운이라고도 한다. 5·16 거사가 그랬다. 변혁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확산됐다. 민심은 새 질서를 요구했다. 이를 드러내주는 절묘한 장면이 있었다.
1961년 4월 말이었다. 나는 거사를 위한 비밀 준비를 진행 중이었다. 병력 투입을 위한 부대별 출동 계획이 완성돼 가던 때였다. 일요일 아침, 육사 8기 동기생인 석정선이 청파동 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내게 “사업이 잘 안 되는데, 백운학이한테 좀 같이 가자”고 했다.
1962년 2월 동남아 6개국 순방 당시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오른쪽)과 석정선 정보부 2국장.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
백운학은 관상을 잘 보기로 이름난 역술인이었다. 자유당 말기에 국회의원 당선과 장차관 취임을 맞혔다고 해서 정계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낭산(郎山) 김준연의 3대 국회의원(1954년) 당선을 예언했다고도 알려졌다. 나는 “안 가”라고 손사래 쳤다. 그러자 석정선이 “야, 네가 지프차가 있잖니. 그것 좀 태워 달라는 소리다”라고 했다. 나는 지프차에 석정선을 태우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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