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존의 성숙과 절대의식의 만남
◈ 참자아 탐구 : '나' 로 머무세요.
우리 모두는 존재한다는 느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 연습을 하지 않고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나' 라고 부릅니다. 우리 각자는 '내가 있다, 내가 존재한다' 는 것을 확신합니다.
'있다' 는 것은 곧 '존재한다' 는 의미입니다. 이 존재감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있으며, 매우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존재감은 인식의 시작이며, 우리가 깨어 있는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을 힘들이지 않고 인지하는 목격자, 관찰자로서 기능합니다.
'내가 있다, 내가 존재한다' 는 느낌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이 느낌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그렇다면 있는 '나'는 누구이며 또 존재하는 '나'는 대체 누구일까요?
'내가 존재한다' 는 느낌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이 느낌은 어떤 생각도 떠오르기 전에 이미 자연스럽게 있으니까요. '나'를 찾으려 하지 마세요. 내가 바로 '나'입니다. '나'는 여기에 의식으로서 자연스럽게 있습니다. 그저 자각만 하면 됩니다.
이 자연스럽게 현존하는 느낌을 다른 어떤 개념이나 생각, 또는 의도와도 결합시키지 마세요. '나는 이러저러한 것을 성취하고자 한다', '이 자아탐구란 것이 잘 풀리면 좋겠다', '나는 깨달음을 얻고 싶다' 등의 모든 의도는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현존의 기운, - '내가 여기에 있다' 는 느낌 - 과 함께 머무세요. 그것이 전부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존재한다는 느낌은 거기에 있습니다.
존재감은 아무 노력 없이도 늘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이 숨 쉬고 깨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있다' 는 느낌, 존재감이 먼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아탐구 수행은 한 번에 약 5분에서 7분 정도 짧게 하면 됩니다. 눈을 떠도 되고, 감아도 됩니다. 앉아서 해도 되고, 걸으면서 해도 됩니다. 처음에는 혼자 앉아서 하는 편이 좀더 쉬울 수도 있습니다.
되도록이면 방해받지 않을 만한 시간과 장소를 찾아보세요. 이 수행이 목표로 하는 것에만 집중하세요. 자연스러운 존재감, 즉, 내가 있다는 느낌에 머무르세요.
연습을 조금 하다 보면 '나' 라는 느낌이 방해받지 않고 저절로 유지된다는 사실을 차츰 알게 될 것입니다. 더불어 확장감과 평화를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신체적•사회적 조건화와 강하게 동일시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바뀔 것입니다. '나는 곧 이 몸이다. 나는 누구누구의 엄마이다' 등등의 조건화된 생각에서 벗어나 그저 바라보는 존재, 신념체계를 갖지 않은 존재, 또는 관찰하는 능력 그 자체인 존재가 될 것입니다.
자신이 기쁨 그 자체이며,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이 이 기쁨과 광대함, 빛, 그리고 사랑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입니다. 개인성이 희박해져 갈수록 삶을 더 파노라마처럼 경험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처음에는 개인으로서의 삶이 진짜 현실인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자신이 의사결정을 내리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개별적인 존재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삶이 어떻게든 저절로 진행되는 연극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삶이란 모두 그저 '그러함(Is-ness)' 이란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일관되게 행동하고 말하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드립니다. 참된 존재는 한없이 넓어서 제가 가끔 텔레비젼을 본다거나 레게음악, 청량음료를 즐기는 것 모두를 넉넉히 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제 존재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유달리 종교적일 필요도 없습니다. '영적'일 필요 조차 없습니다. 어떤 존재가 될 필요도, 무엇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내가 나 자신이어야 할 필요 조차도 없습니다. 제게는 이것이 자유입니다. 자유의 개념마저 뛰어 넘는 자유 말입니다. 나는 진실로 변치 않는 참자아입니다.
신념과 정체성이 마음속에 밀려 들어오기 전까지 삶은 얼마나 단순했던가요? 하지만 그 후, 본래 아름다운 마음의 영역은 일상적이고 제한적인 개인의 존재를 만들어 내기 위한 에너지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조건화된 마음의 넘어에는 더 높고 맑은 시각이 없습니다. 그것은 깨어난 존재의 영역입니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이 기쁨과 빛과 평화 속으로 들어갑니다. 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며, 살아내야 할 삶을 '가진' 것도 아닙니다. 내가 곧 삶입니다.
우리가 인지하는 그 어떤 것도 우리 자신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확인이 될 때까지 내면에서 계속 살펴보세요. '나'는 인지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먼저 존재합니다. 이것을 아는 의식으로서 머무세요. 모든 생각과 감각, 모든 현상들이 내 앞에서 오고 가는 것을 관찰하세요.
의식의 화면에 무언가가 나타나기 전부터 우리가 이미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세요. 우리는 이를 힘들이지 않고 인지합니다. 컴퓨터 전원은 켜져 있지만 로그인 하지 않는 것입니다 .
그저 바라보세요. 광대한 존재 안에서 내면이 활짝 열리며 넓어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일상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이 수행을 계속하세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현상보다는 존재하는 느낌 그 자체에 집중하세요.
이렇게 현존(現存) 속에 있다 보면 내면의 힘과 의식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저 지켜보세요. 처음에는 집중하는 것이 참 힘들게 느껴질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이 사고활동이나 다른 사소한 일들로 쏠리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이런 성향을 알아차리게 되면서, 더 큰 깨달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대상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기를 계속함으로써,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힘은 약해지고 더 큰 현존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깨달음의 문턱에 다다랐습니다.
그저 '지켜봄' 의 상태로 계세요. 이 상태는 자연스럽고 드넓으며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진정한 참자아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힘과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그저 객관적인 의식으로서 머무세요.
이렇게 지켜보다 보면 정체성이란 단지 생각일 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나뭇가지에서 저 나뭇가지로 펄쩍 건너뛰는 그런 생각 말입니다. 예전에는 몇 시간이 지나도록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생각의 폭주가 계속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의식으로서 머문다면 마음이 더 활짝 열리고 더 자애로워지며, 자유롭게 됨을 느낄 것입니다. 또 의식이 더 높은 차원으로 떠오르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음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것도 훨씬 수월해질 것입니다. 정체성이 활동을 개시하자마자 내면의 스위치가 탁 켜지면서 우리는 재빨리 알아차리게 될 테니까요.
그렇다면 누구 아니면 무엇이 이 정체성의 활동을 지켜보고 있는 것일까요? 무엇으로서 여러분은 여기에 계신가요? 이런 답들이 들려올지도 모릅니다.
"딱히 뭐라고 꼭 집어서 말할 수가 없습니다. 단지 존재한다는 느낌입니다."
계속 '존재하는' 상태로 되돌아 가십시요. 개인이 아니라 현존으로서, 현존 상태에서 지켜보는 습관을 기르십시요. 현존 상태에 있다보면 지혜와 직관과 통찰력이 쑥쑥 자라나게 됩니다.
또한 개인성이 머무는 심리적 마음의 영역을 뛰어넘어 드높은 현존의 영역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현존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보였던 개인적인 마음은 차차 그 힘을 잃게 됩니다.
'나는 개인이다' 라는 생각이 걸러지면 '내가 있다' 는 현존만이 남게 됩니다. 이 깊디깊은 '의식하고 보며 존재하는' 상태에 푹 잠기십시요.
이를 우리는 인도어로 샷치아난다(satchitananda) 상태라 부릅니다. 삿(sat)은 순수한 존재를 의미하고, 칫(chit)은 의식이며, 아난다(ananda)는 순수한 기쁨이나 행복을 의미합니다.
모든 이들은 이 신성한 상태를 사람합니다. 삿치아난다 상태에서 개인성의 연극이 비롯되고 잠시 동안 지속됩니다. 그리고 개인성이 충분히 무르익으면 다시 현존 속으로 녹아들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신성한 유희입니다. 다른 말로 마야(maya) 혹은 신의 연극이라고도 합니다.
때가 되면 현존은 더 성숙해집니다. 존재 안에서 깨달음이 일어나 '내가 있음'이 보이게 되고 또 지각됩니다. 현존이 느껴지는 동시에 현존을 넘어선 더 깊은 곳도 직관적으로 느껴지는데, 이곳은 현상계를 완전히 벗어난 곳입니다.
이러한 성숙은 은총이 하시는 일이며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서두르지 마세요. 순수한 현존감에 다다르는 것은 그 자체로 굉장한 일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은총 안에 있습니다.
'내가 있다', 즉, 현존은 신성한 원리입니다. '내가 있다' 는 그리스도의 빛이고, 시바 신의 본 바탕이며, 크리슈나 신의 의식입니다.
현존을 단지 환상이라고 내칠 수는 없습니다. 현존은 활동하는 신 그 자체이며, 절대 의식의 역동적인 표현입니다. 현존 없이는 그 어떠한 체험도, 참자아를 깨닫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절대(絶對)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만 정해진 때가 되면 현존이 절대 안에 녹아들기 시작합니다. 내면에서 저절로 성찰이 일어나고 삶이 펼쳐짐을 보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어떤 행동을 할지 계획을 세우거나 마음, 즉, 일어나는 현상을 잣대로 자기 자신을 평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주의(注意)는 전과 달리 산만해지지 않으며, 불변하는 존재와 쉽게 하나로 머뭅니다.
참자아의 빛은 늘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참자아는 아무 노력 없이도 시간을 초월하여 이미 확고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직접 깨닫고 확인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나 자신이 진정한 내 모습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라고 믿게 만드는 개인성이 마법, 혹은 최면에서 깨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깨어나게 되면 자신이 시간을 초월하여 늘 존재함을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삶 그 자체이며, 심지어는 이를 뛰어넘어 삶 전체를 바라보는 영원한 의식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그 순수의식 속에서 순수의식으로서 살게 됩니다.
☞ 출처 : 책 [ 드높은 하늘처럼, 무한한 공간처럼 ] 내용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