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름 이야기
어느 나라에 '멍청이가 익힌 한 가지 재간'이라는 속언이 있다. 멍청이가 어쩌다가 익힌 한 가지 재간이 장해서 걸핏하면 그것을 떠벌이는 경우를 말한다.
이 멍청이는 그 한 가지 재간이 씨름이어서 글 속에서도 가끔 이를 우려먹는다. 내가 처음으로 씨름 이야기를 다룬 것은 30여년 전에 쓴 '미리 쓴 日記' 가 아닌가 생각된다.
내가 고보(高普) 1학년 첫 체육시간에 동급생들을 출석번호 2번부터 26번까지인가를 차례로 모조리 둘러메친 내용이다. 그때 체육선생님이 '동양 제1의 역사' 라는 칭호가 붙은 우리나라 역도 의 창시자 서상천(徐相天) 선생님이셨다.
시간이 끝나고 나서 선생님이 나의 고향을 물으시더니 '세상에 너처럼 씨름을 잘하는 아이는 처음 보았다'고 과찬하셨다. 그래서 중학 5년을 졸업할 때까지 동급생들 사이에서 나는 '씨름꾼' 으로 통했다. 고보(高普)는 고등보통학교의 줄임말인데 2학년부터는 교명이 중학으로 바뀌었다.
체구가 왜소한 약질이 익힌 재간이어서 선생님이 탄복하셨던것 같다.
나는 이런 말을 할 때면 제 몸 추는 것 같아서 겸연쩍은 마음이 없지도 않다. 그러나 이것이 분별없이 문벌이나 재력, 학식, 출세등을 내세우는 자랑에 비하면 자랑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말이야 바로 말이지 촌스럽게 마구잡이로 익힌 씨름 재간을 우리 선생님 말고 누가 또 대수롭게 여기랴 싶기도 하다.
그래서 별로 낯 뜨거운 생각을 안 하고 마음 놓고 나불거리는데 그뿐만이 아니다. 이제는 이 늙은이하고 씨름 한판 겨뤄보자고 대드는 무례한 젊은이가 나타날 리 만무하므로 더욱 신이 나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친김에 일제 말엽의 일본 유학시절의 무용담(?) 한마당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대학예과 1학년 1학기 말이던가 우리는 전 학년 500여명이 1주일간 나라시노의 부대로 야영훈련을 나간 일이 있다.
첫날 훈련을 마치고 났는데 어느새 우리 조선학생 측과 일본학생 측에서 각각 대표 5명씩을 차출해서 씨름판을 벌이자는 교섭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학생의 구성 비율은 조선학생은 정확히 20명이고 대만 출신이 2~3명, 그리고 나머지 470여명은 일본학생이었다. 그런데도 조선학생들이 호락호락하게 저희들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자 은연중에 피아간에 대립감정이 싹터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원비율로 보면 대등한 경기가 될 리가 없는데 우리 측에서 누가 얼떨결에 그들의 술수에 넘어간 것 같다. 그때까지는 조선학생 가운데서 아무도 내가 씨름손이나 한다는 것을
알 리도 없었는데.
하여간 일본학생 측에서는 즉각 거구의 역사 5명을 추려내서 시위를 하는데 우리 측에서는 교섭의 주동자조차도 뒤를 사리고 나오지를 않는다. 우리는 그때 나라는 빼앗긴 처지였지만 민족의식은 뚜렷한데 그대로 주저앉으면 자존심 문제일 듯싶었다. 승발식(勝拔式)이어서 잘하면 혼자서 몇 명이라도 잡을 수가 있기 때문에 내가 차고 나섰다. 맨 앞에 내 이름을 적고 뒤에는 씨름 재간에 구애 없이 덩치 큰 학생 4명의 이름을 적어냈다. 그 명단에는 아마 방일영(方一榮), 고진극(高鎭極), 이영우(李永宇)군 등 덩치 큰 학생이 들어 있었을 것이다. 창씨 개명에 따라서 나는 모
도무라, 고진극은 다까시마, 그리고 이영우는 노부끼로 통했다. 방일영은 그때 일본식 창씨도 하지 않았고 휴간 중이기는 하나 조선일보사의 배경이 있어서 은연중 조선학생의 리더의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인지 일본 학생들도 그에게는 친구 사이의 호칭인 군(君)대신 존칭어인 호오상(方氏)으로 통했다.
그때 나는 선발로 나가면서 조선 씨름 식으로 처음부터 허리춤을 잡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덩치가 왜소한 내가 만만하게 보였던지 그들은 쾌히 승낙을 했다. 내가 차례로 거구의 일본학생 5명을 메어치자 그들은 분을 못 삭이고 이번에는 허리춤을 잡지 않고 시작하는 일본의 스모를 제안했다. 이번에는 내가 쾌히 승낙을 했다. 그리고 시작과 동시에 허리춤을 잡아서 다섯 놈을 또 모조리 메꽂았다. 혼자서 10판을 독판치자 그들은 기가 죽고 우리는 그해의 야영훈련 동안 기를 조금 펴고 지냈다. 방일영을 비롯하여 조선 학생들이 모조리 모여서 나를 응원했고 내가 한 사람씩 메꽂을 때마다 발을 구르며 환호하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연하다.
그때로부터 66년이 지난 시점인데 지난 1월에 나는 방일영문화재단(方一榮文化財團)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서중회(序中會)원들의 신년교례회에 생존한 선배회원으로서 초청된 것이다.
서중회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일보사의 사주이신 방응모(方應謨)사장님이 창설한 장학회이다. 일제말기까지 이어진 장학회원수는 60여명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름이 정확하게 알려진 회원은 40명 정도인 것 같다. 회원 가운데는 고승제(경제학자), 김기림(金起-시인), 민관식(閔寬植-정치인, 체육인), 방종현(국어학자), 백석(白石-시인), 윤석중(아동문학가), 이원조(문학평론가), 홍기문(한학자), 황종률(정치인), 황학성(黃鶴性-정치인) 씨 등이 들어 있는데 나는 같은 회원으로서 민관식 씨와 말년까지 자별하게 지냈다. 다같이 테니스를 즐겨서 테니스코트에서 자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해던가 민 회장이 나보고 서중회원 가운데 다 고인이 되고 이제는 원 교수와 우리 두 사람만 남았다고 쓸쓸하게 회고한 일이 있었다. 이제 민 회장마저 타계하고 나서 이제는 나 홀로 생존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1월의 교례회에 나가보니 나보다 한 살 밑이며 대림수산회장(大林水産會長)을 역임한 김명년씨가 또 한분 생존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흘렀는데 '서중회'는 해방 뒤인 1975년에 '방일영장학회'로 이어졌다가 1993년에 '방일영문화재단'으로 발전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장학생의 수는 금년 1월 시점에서 417명에 이르는데 학생을 제외하면 거의 모두 법조, 행정, 정치, 교육, 외무, 산업 등 각 분야에서 굳건한 이 나라의 동량으로서 중책을 맡고 있는 것 같다.
그날의 회순에는 일제강점기의 회원인 우리 두 사람이 선배 입장에서 회고담을 들려주는 순서가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방일영 군과는 동문수학한 인연이 있으므로 그런 쪽의 회고담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나는 서중회의 장학금으로 무리 없이 예과 3년, 본과 3년의 전 과정을 이수할 수 있었을 터인데 학도병 강징으로 예과 2년으로 일단 학업이 중단되었다. 그리하여 방일영 군과의 학연도 2년의 짧은 기간으로 끝났다.
하여간 달리 별 재주가 없는 이 늙은 선배는 한 가지 익힌 재간이 그 뿐이어서 역시 그날도 학창시절의 씨름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일본학생들을 혼자서 열 판을 메꽂았다는 대목에서 만당한 후배들은 통쾌하다고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런 자리에서도 씨름 무용담(武勇談)을 꺼낸 것은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끝부분에서 "내가 학창시절의 씨름판의 승자는 될는지 모르지만 이 세상에서 별로 남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방일영 회장은 생전에 조선일보사의 사장, 회장을 역임하고 장학회를 발족시켜서 우리나라의 수많은 동량을 육성했음으로 그가 진정한 인생 씨름판의 승자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언급했다.
그것은 나의 진정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사실 씨름판에서 '세상에서 너처럼......' 하는 찬사쯤은 바로 꺼지는 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말을 이어서 "먼저 저 세상에 가 있는 방일영 회장이 오늘 저녁의 이 회고담을 듣는다면 그는 필시 이렇게 말할는지 모릅니다. "아니야, 자네가 지금까지 장수해서 그런 자리에서 후배들의 갈채를 받으니 자네가 역시 인생 씨름판의 승자일세"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나는 또 이렇게 말하지요." 아닐세, 영겁의 시간 속에서는 5년이나, 10년쯤 더 산 세월은 수유에 지나지 않네. 역시 사람이 태어나서 한 평생 보람있는 큰 발자취를 남기는 것이 얼마나 장한 일인가. 역시 자네는 인생 씨름판의 승자였네"라고 말하지요.
나의 회고담은 역시 씨름 이야기로 시작해서 씨름 이야기로 끝을 맺은 셈인데 '인생 씨름판'에서 연상되어 언뜻 떠오르는 대목이 있다.
어떤 수도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돈 벌고 출세하면 됐지 죽은 뒤의 평가가 무슨 대수냐? 죽으면 그뿐이다 라는 생각은 잘못이다. '삶'이 인생의 시작이지만 그 끝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라고.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치부를 하고 크게 출세를 했어도 죽은 뒤에 그놈 잘 죽었다. 그년 잘 죽었다는 오명의 꼬리가 후세에까지 길게 이어진다면 그것은 실패한 인생이라는 뜻일 듯싶다.
그건 그렇고 오늘의 씨름 이야기가 주제넘게 '인생 씨름판'까지 들먹이고 보니 아무래도 경기 중에 반칙(反則)이라도 한 것처럼 다소 낯 뜨거운 생각이 없지 않다.
<2008년 「월간문학」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