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의 출생과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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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욱진 화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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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화백의 출생지는 1917년 충남 연기군 동면 송룡리 105번지이다. 장기용과 이기재 사이에서 4형제 중 차남으로 1917년에 태어났다.
장욱진의 집안은 홍성에 있는 결성 장씨로 연기군 서면 고복리와 동면 등에 분포되어 있는 장씨 집안이다. 장욱진의 부친은 그가 7세 때 장티푸스로 갑자기 타계했다.
고모 밑에서 자라던 장욱진은 9세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0세 때에는 전일본 소학생미전에서 일등상을 받고 이후 경성치과전문대학교가 후원한 소학생미전에 과슈 작품을 여러 차례 출품했다.
16세때 경성 제2고보 3학년 때 공정치 못한 일본 역사 교사에게 격렬히 항의하다 퇴학처분을 받았다. 그후 집에서 쉬는 동안 계속 그림을 그리다가 만공 선사가 있는 예산의 수덕사에서 6개월간 수양을 하게 된다. 여기서 나혜석을 만나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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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업에 열중인 장욱진 화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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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이중섭과 함께 한국 서양화가를 대표하는 장욱진 화백은 보통 신사실파라고 한다. 신사실파란 1947년 김환기, 유영국이 결성한 미술 근대화를 말하는데 서양 쪽에서의 고흐, 고갱을 대표하는 후기인상파가 그 효시였다. 초기에 신사실파는 모더니즘의 경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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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욱진 화백의 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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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인들의 특징은 아카데미즘에 대한 거부, 전통 요소의 현대적 번안, 조형요소에 대한 연구 등이었다. 신사실파란 어떤 사물을 닮게 그리는 사실(寫實)이 아니라 그 사물을 바라보는 작가의 주관을 중시하는 새 조류다. 신사실이란 주관과 접목이란 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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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욱진화백의 작업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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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은 한 마디로 어린이의 동화(童畵)처럼 천진하다. 최순우 전 국립 박물관장의 말에 의하면, “철학자도 시인도 아니지만 화가가 외곬으로 다다를 수 있는 분명한 인생관과 예술관 그리고 마치 신심(信心)의 깊이에도 비길 수 있는 간절하고도 맑은 시심(詩心)과 그 예술에 대한 신념을 굽힐 줄 모르는 사람” 이라고 했다
장욱진은 생애 1000여 점이라는 그림을 그렸다. 그런 작품들의 세계가 대개 노장사상에 가까운 그림들이다. 노장사상 뿐만 아니라 불교와 전통적인 무속, 민화, 설화 등의 요소가 자연과 어우러지는 게 특징이다. |
첫댓글 작년에 용인시 고택을 문화재 지정
올해 서울대미술관에서 전시회 열려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