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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의 타락 이후 인류의 죄악은 가속화되는 흐름을 보여 준다. 아담의 장자 가인은 죄에 굴복하여 최초의 살인자가 되고, 자손 7대까지 족보가 소개된 후로는 아담의 족보에서 사라진다(창 4장). 아담의 족보는 셋을 통해서 다시 이어지고, 이후 노아와 아들들의 족보로 말미암아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계보가 형성되어 가는 흐름을 창세기에서 보여 주고 있다. 뎀프스터 교수의 말대로 ‘하나님의 형상의 전수’는 여인의 후손이 오시기까지 계속 이어가야 할 사명이었다. 구분선 아래에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의 아담과 하와, 그리고 노아에 이르기까지의 풍부한 스토리에 귀 기울여 보자.
스티븐 뎀프스터, 혈통적, 지리적 소망(창 3:1~6:8)
(전략) 고귀한 지위와 통치권을 잃은 인간의 추방은 인간의 타락과 죽음을 생생하게 대변한다. 그러나 인간의 추방에는 가계 속의 희망, 즉 뱀에게 주어진 저주에 숨겨진 약속인 소위 원시 복음이 있다(창 3:15). 하나님은 뱀을 저주하시는데, 그 저주 속에는 글자 그대로 인류에 대한 소망의 씨앗이 들어 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은 원수가 될 것이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1) 근접 문맥에 비춰 여자의 후손의 승리는 뱀이 파괴하기 이전의 에덴동산의 원래 상태로의 회귀와 뱀으로부터 세상의 통치권을 빼앗는 것을 암시할 것이다. 옛 창조를 완성하기 위해 여자가 남자에게서 지어졌던 것처럼, 옛 창조의 잃어버린 통치권을 그 합당한 후계자에게 돌려주는 과업을 가진 하나의 후손이 여자에게서 나올 것이다.
아담이 여자에게 개인적인 이름을 지어 주는 장면은 이 형벌의 첫 번째 반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2) 하나님의 심판 이후의 아담의 첫 마디가 희망의 단어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아내를 하와라고 부른다.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창 3:20). 폰 라트가 인지하듯(von Rad 1976: 96) 이것은 남자의 편에서 진정한 믿음의 행위다. 그러나 "죽음의 수고를 견디며 위대한 기적과 신비로서 모성이 유지하고 수행하는 일반적인 생명의 수용"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문맥은 아담이 자신의 아내를 어머니로 명명하는 것을 통해 믿음 속에서 통치권을 재확인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후손을 제공할 자로서 하와가 가질 특별한 역할을 암시한 것이 아닐 수 없다.3)
대부분의 학자들은 후손과 땅의 문제에 있어 신학적 중요성을 많이 보지 못한다.4) 이것은 그 학자들이 주해의 범위를 근접 문맥(창 3장)으로 제한한다는 것을 보여 주며, 문맥이 더 통찰력 있게 읽을 것을 요구할 때 오히려 나무로 읽는 것을 뜻한다. 이 본문이 "왜 여자들이 그토록 뱀을 무서워하고 싫어하는지"(Joines 1975: 1)5)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몇몇 학자들에게 동조하는 것은 기껏해야 빈약한 석의일 뿐이다.6) 생명과 지식의 나무, 생명을 주는 강과 말하는 뱀 같은 이미지로 가득한 장에,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 대 뱀의 말이라는, 실체에 대한 경쟁적인 비전 간의 전투가 진행되고 있으며 이 전투는 '반(反)하나님 상징'으로 배가된다(Wenham 1987: 80). 더욱이 이 전투는 창조된 질서를 누가 통치할 것인가(인간인가 뱀인가)를 결정지을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세상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이미 받았다. 근접 문맥 속에서 이제 이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인간 후손의 미래 운명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문맥의 범위가 일단 창세기뿐 아니라 정경의 문학적 범위로 확장되면, 인류를 위한 이 혈통적 소망의 중요성에 대해 어떤 의심도 남지 않게 된다. 여자의 후손은 잃어버린 영광을 회복할 것이다. 인간(따라서 하나님)의 통치가 세상에 확립될 것이다. 하나님 왕국의 실현은 인류의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7)
이 두 가지 주제는 타락 이야기 후에 즉시 강조된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바깥에서 살며 줄거리는 가인과 아벨의 기사와 함께 출생과 아이들에 초점을 맞춘다(창 4:1~16). 이야기는 아이들이 종교 의식에 참여하는 어른이 되었을 때의 시간으로 청중을 데려간다. 큰 아들의 제사는 거부된 반면 작은 아들의 제사는 받아들여진다. 이런 인간 예상의 명백한 전도 현상은 이스마엘 대신 이삭이, 에서 대신 야곱이 선호되는 데서 보듯, 성경 이야기 전체에 걸쳐 주된 주제가 되며 일곱 아들 대신 다윗이 선택되는데서 절정에 이른다.8) 다윗의 선택에 대한 해설에서 명확히 나타나듯이 하나님이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않다(삼상 16:7). 원래의 상황에서라면 가인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바로 잡으면 장자로서의 그의 합당한 자리를 되찾을 수 있다. 그러나 타락한 세상의 새로운 현실은 죄가 달려들고 지배하기 위해 문에 엎드려 있다(창 4:7). 가인은 자신의 동생인 아벨을 죽임으로써 죄의 통치에 굴복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저주로 땅과 불화하게 된다(8~16절). 무죄한 피는 땅을 더럽히고 정의를 요구한다.
가인은 유랑자의 삶을 선고받았다. 하나님은 가인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특징적인 표를 가인에게 부여하심으로써 인간의 복수에서 가인을 보호하신다. 만일 가인이 죽임을 당한다면 하나님은 일곱 배의 벌을 내릴 것이다. 땅을 유리하는 대신 이 새로운 방랑자는 반항적으로 도시를 건설한다. 가인의 성품이 피와 불화로 더럽혀져 있기 때문에 그 반항적인 도시는 사실 반도시적이다. 다음에는 성경의 첫 번째 족보(창 4:17~24)가 나오는데, 이것은 아우를 죽인 가인으로 시작해 소년을 죽인 아담의 7대손 라멕으로 끝나는 '반계보'다(Robinson 1986. 600). 족보의 끝에서 라멕이 두 아내에게 하는 자랑에 찬 조롱("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창 4:24)은 인간의 거대한 교만과 무자비한 잔인함을 드러낸다.
이 짧은 족보는 심오한 신학을 전달한다. 여기에는 문명의 첫 번째 발전, 농업과 축업, 야금술과 예술의 발전이 들어 있다. 하지만 또한 악한 목적을 위해 지식을 사용하고 하나님의 공의의 특권을 침해하는, 죄가 다스리고 지배하는 문명의 텅 빈 망령이 존재한다. 기자는 짧은 몇 구절을 통해 살인의 은닉에서 유혈의 자랑으로 발전한 인류의 몰락에 대해 의미심장하게 전달한다. 가인의 태연한 말과 가인의 7대손의 자랑이 이 가계를 둘러싸며, 그들의 정신과 도덕적, 영적 나락으로의 몰락을 특징짓는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라는 무책임한 대답은 살인을 부인하려 시도하고(창 4:9),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도다."라고 말함으로써 살인을 자랑으로 여긴다(23절). 이것은 창세기 1~2장에서 인류에게 의도된 통치권은 분명 아니다.
족보 후에 즉시 하와는 죽은 아들 아벨을 대신하는 또 다른 '자손'을 가진다(창 4:25~26). 문맥에서 이런 자손의 대체는 창세기 3장 15절을 떠올리게 하며 땅에 가해진 저주가 풀어지길 바라는 하와의 내적 소망을 대변한다.
이런 내적인 기대는 가인의 혈통과 명확한 대조를 이루는 열 명의 계보를 다루는 데 전적으로 할애한 다음 장(창 5장)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 계보에도 죽음이 나와 있지만 살인은 아니다. 각각의 후손들은 장수를 누렸지만 결국 땅의 통치에 굴복해 차례로 죽음을 맞이했다.9) 장수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피할 수 없었던 이 '타나크'의 족보에 나오는 죽음에 대한 독특한 설명은 문맥 속에서 가장 잘 설명된다. 죽음에 대한 독특한 설명은 에덴동산에서의 심판의 조종(弔鐘)역할을 하는 것이다. 족보 말미에 나오는 또 다른 라멕의 말은 이번에는 살인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땅에 가해진 저주가 풀어지기를 소망한다(창 5:29). 이것은 '안위'를 찾아볼 수 없는, 저주 아래에 놓인 세상이다.
그러나 창세기 3장과 셋의 출생(창 4:25)은 희망의 어조를 반영한다. 이 새 가계도는 하나님의 형상이 이들 속에서 폭력을 통해 사라진 게 아니라 전수되었음을 강조한다(5:1~3).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고 자기를 닮은 셋을 낳았다. 이 족보는 'A는 X년 동안 살았고 B를 낳았다. B는 Y년 동안 살았으며 C를 낳았다.'와 같은 공식을 사용하여 빠르게 결론으로 나아간다. 그러다 계보에서 아담의 10대손인 노아의 출생에 이르러 놀라운 정보를 제공한다.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창 5:28~29). 창세기 3장 17절과의 언어적, 개념적 관련성이 두드러지는데, 특히 아들의 출생과 땅의 저주로부터의 위안 간의 연결 고리가 그렇다. 족보와 땅은 매우 핵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계보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결론에서 '아들'이란 단어의 독특한 사용법이 눈에 띄는데, '아들'이란 단어는 아이의 이름을 말하기 위한 기능을 한다. 명명 행위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형상을 '아담'이라 이름 짓고 아담이 자신을 닮은 아들을 '셋'으로 부르는 족보의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이 명명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의 전수를 보여 주기 위해 의도된다. 그러나 이런 명명 행위가 다시 등장하는 것은 라멕의 아들 노아의 이름이 지어지는 족보의 맨 끝에서다. 이 족보는 가인의 족보와 달리 창세기 3장의 운명적인 저주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노아는 구세주로 그려진다.
노아는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그 역할을 수행한다. 세상은 죄의 통치 아래 끔찍한 곳이 되었다. 한때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을 일곱 번이나 자아냈던 훌륭한 창조는 이제 공포의 집이 되었다. 만연한 악에 가담한 인류에 의해 창조는 훼손되었다. 하나님은 깊이 근심하시고10) 인간을 지으신 것을 후회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인간에게서 다시 시작하려고 결단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인간이 노아라는 것은 별로 놀랍지 않다.
이 시점에서 새로운 족보 공식이 의로운 노아를 소개한다. 그리고 하나의 혈통에 의한 세대 계승을 좇던 기존의 계보 대신, 한 세대의 다양한 자손의 이름이 나오는 '갈래형' 족보가 등장한다. 노아는 셈과 함과 야벳을 낳는다(창 6:9~10).11) 그런 뒤 홍수와 그 결과에 대한 역사가 뒤따른다.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다는 것은 보다 생생한 단어들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대신, '폭력'('하마스')만이 난무한다.12) '이교도들에게 복수하려는 현대 자살 폭탄 테러범을 떠올리는 것은 아마 사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다.13) 그 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이 사람, 아담의 10대손과 언약을 맺으신다.
1) '상하게 하다'(strike)로 번역된 단어는 희귀한 용어로 다른 곳에서는 욥 9:17과 시 139:11에 등장한다. 욥기 본문은 "그가 폭풍으로 나를 치시고 까닭 없이 내 상처를 깊게 하시며"로 나와 있는데, 평행 본문은 '슈프'를 '때리다', '치다'의 의미로 읽는 것을 지지한다. 더 난해한 본문은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밥이 되리라.'고 나오는 시 139.11이다. 대부분의 역본은 이 단어를 '덮다', '가리다'로 번역하는데, NASV는 욥과 창 3장과 일치되는 의미를 전달하도록 '압도하다'(overwhelm)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또 다른 가능성은 창세기의 단어가 '갈망하다'(gasp, pant for)의 언어학적 변형이란 것인데, 그 경우 '얻으려 노력하다'(strive after)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문맥상 말이 되지 않는다. 웬함(Wenham 1987: 80)이 인지하듯이 대다수의 해석자들은 '짓밟다' 혹은 '치다'를 택한다.
2) 개인적인 이름으로 아담을 지칭하는 것은 창 3:17에 처음 나온다.
3) 바르(Barr 1993: 65~66)는 '하와'라는 이름이 '뱀'을 의미하는 아람어 동족어로 설명될지 모른다고 주장한다. 바르는 이런 낡은 해석상의 선택이 증명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이것을 매력적인 가능성으로 진지하게 고려한다. "하와는 아마도 첫 번째 인간을 유혹했던 지혜와 지식의 뱀의 여신이 아니었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교언어학의 함정을 바르보다 더 잘 알고 있는 이도 없다.
4) 지타이(Gitay 1996a)의 지리적 주제 연구와 알렉산더(Alexander 1993; 1998)의 족보 주제 연구의 경우는 두드러진 예외에 속한다.
5) 확실히 조인스는 근동 배경에 기대어 이야기의 상징적 측면을 좀 더 보지만 기사의 정경상의 정황을 대부분 무시한다.
6) 예를 들어 모빙켈(Mowinckel 1954: 11)과 와이브레이(Whybray 1995: 38~39)의 창 3:15에 대한 전형적인 태도를 보라.
7) '후손'이 한 명을 이야기하는지 아니면 집단을 뜻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히브리어 단어 '후손'이 집합 명사라는 사실로 규명된다. 알렉산더(Alexander 1993)가 가리키듯, 다음에 나올 이야기는 한 가족에 집중하기 위해 후손을 국한시킨 것을 강조한다. 집단과 그 집단의 대표인 개인 사이를 오가는 것은 '타나크'에서 분명 흔한 일이다.
8) 예를 들어 장자가 아니었던 셈(창 9:26)과 이스마엘 대신 이삭(21:12), 에서 대신 야곱(25:22~23), 다윗의 형제들 대신 다윗(삼상 16:6~13)이 복을 받았음을 보라.
9) 유일한 예외가 에녹이다(창 5:24).
10) 인류의 폭력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고통을 묘사하는 창 6:6의 이 표현은 중요하다. 이 표현이 또 다시 등장하는 것은 여동생 디나의 강간 소식을 들은 야곱의 아들들의 고통을 가리킬 때다(창 34:7). 이 단어의 어원은 타락의 고통과 연관되어 있으며 하나님이 따로 떨어져 있는 냉정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고난과 고통에 깊이 동요되고 영향 받는 분임을 보여 준다.
11) 직선형 족보가 각 세대를 따라 특정 가문의 대표들(장자)만을 좇는 반면, 갈래형 족보는 동세대의 자손들의 목록을 언급한다. Wilson 1977을 보라.
12) 창 6:11, 13. 이 본문들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우주를 서술한 역사의 마지막 날에 대한 묘사(사 11:9; 합 2:14; 시 72:19)와 비교할 필요가 있다.
13) 아랍 조직 하마스의 이름은 'Harakat al-Muqawamah al-Islamiyya'(이슬람 저항 운동)의 약자로 '열정'을 의미한다.
[본문 속의 참고문헌 표기]
Joines, K. R. 'The Serpent in Gen 3', Zeitschrift für die alttestmentlicher Wissenschaft 87: 1-10.
Rad, G. von (1976), Genesis: A Commentary(trans. J. Marks), Old Testament Library, Philadelphia, PA: Fortress.
Robinson, R. R. (1986), The Christ of the Covenants, Phillipsburg, PA: Presbyterian & Reformed.
Wenham, G. J. (1987), Genesis 1-15, Word Biblical Commentary, Waco, TX: Word.
스티븐 뎀프스터, 박성창 역,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읽는 구약신학』(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pp. 86~92.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혈통과 지리는 성경과 복음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신약교회 성도들조차도 믿음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 에덴 동산 통치권의 회복 등에 연결될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네, 매우 공감합니다.
직계와 방계가 족보에서 중요힌데요. 갈래형의 곁가지에서 하마스와 같은 악하고 무도한 자들이 나오는 것은 혈통의 인위적 왜곡을 행한 결과로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ㅠㅠ
네, 하마스가 열정의 뜻이라는데요. 악한 자들이 열정을 가지면 더더욱 위험합니다.
"인간의 추방에는 가계 속의 희망, 즉 뱀에게 주어진 저주에 숨겨진 약속인 소위 원시 복음이 있다(창 3:15)." ----> 여기에 하나님의 심오한 경륜과 섭리가 충만한 갓 같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아멘!
창3:15
<호크마 주석>
원수(에바) - '적대감', '증오감'이란 뜻으로 그리스도와 성도들에 대해 사단과 그의 하수인들이 갖게 될 악감(惡感)을 의미한다(요 15:18, 19). 그러나그럴수록 우리는 보다 즐거워해야 하는데 그 까닭은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우리의 상이 커지기 때문이다(마 5:12).
머리(로쉬) - 신체상의 '머리' 뿐 아니라(48:14; 신21:12) 지위나 장소에 있어'최고 높은 것'(대하 13:12; 애 1:5)까지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뱀이 최고귀한신체 부위인 머리를 상하게 된다는 것은 그가 도저히 회복 될 수 없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다는 뜻이다.
발꿈치(아케브) - 원뜻은 '끝부분'으로 신체 기능면에서든지, 지위면에서든지 별로 중요치 않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이 발꿈치를 상하게 된다는 것은 그가 비록 해(害)를 당할 것이긴 하나 그것이 치명적이지 못할 것임을 의미한다.
온건하고 합당한 해석으로 보입니다. 공감해요.
창 3:15
<박윤선 주석>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 이 말씀에서 우리는 네 가지 중요한 요소를 주목해야 한다. 곧, (1) 사람과 마귀를 서로 원수되게 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란 말씀에서 이 사실을 볼 수 있다. 이렇게 구원은, 하나님의 단독 역사(單獨役事)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기독교의 구원관(救援觀)의 특징이다. (2) 사람이 마귀와 원수된 상태가 구원이라는 것. 사람이 마귀의 말을 들어 그놈과 친한 것이 사망이었다. 그러나 이제 앞으로 사람이 마귀로 더불어 원수되는 날이 온다. (3)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적대 행위를 계속함. 이것은 한편 택한 백성이 있고, 다른 한편 마귀(악령들)를 따르는 사람들("뱀의 후손")이 있다는 것이다. 마귀를 따르는 사람들의 육신은 마귀에게서 난 것이 아니지만, 그 생활은 악령들을 따른다. (4) 택한 백성의 구원은, 그 백성이 마귀의 머리를 상하게 함으로 성립됨. 우리가 여기서 생각할 것은,
"여인의 후손"이란 말이 메시야를 직접 가리키지 않으나 간접적으로 택한 백성의 대표자 격(代表者格)인 메시야를 의미한다. 이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은 반드시 "여인의 후손"들 중에 택한 백성들을 대표할 후손(메시야)이 나실 것을 생각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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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선 목사님의 해석이 의외로 참신한 것 같습니다.
@장코뱅 백상의 대표자격인 메시아라는 점에서 잘 모르던 부분을 배워서 좋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아담이 자신의 아내를 어머니로 명명하는 것을 통해 믿음 속에서 통치권을 재확인하는 것을 보여준다." ---> 이 부분은 솔직히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일깨워준 것 같습니다.
"창3: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 이 말씀이 범죄에 대한 선고 이후에 나온 것을 새삼 이채롭게 느껴집니다.
<박윤선 주석>
창 3:20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 "하와"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카와(* )니 "생명"이란 뜻이다.
공감합니다~~
매우 공감합니다22
원글 저자 뎀프스터가 복음적이고 보수적인 신학을 공부한 분으로 인터넷 검색을 했지만 그분의 설명과 표현은 생소하거 낯설은 부분이 있습니다. 더욱 공부할 부분이 많음을 체감합니다.
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