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쓰비시 만행 고발하는 시민운동가 다카자네 대표와 시바타 사무국장
취재팀이 일본 현지에서 만난 시민운동가들은 대체로 네 가지 특성을 띠고 있다. 정치적 의도나 야심이 없다는 점. 권위주의나 상명하달이 아니라 수평적인 연대와 상호존중이 몸에 배었다는 점. 조직의 규모나 사회적 영향력에 신경 쓰지 않고 누가 뭐라고 하든 꾸준히 열성을 유지한다는 점. 나이 지긋한 장·노년층이 백발에 아랑곳없이 정력적으로 활동한다는 점 등이다.
미쓰비시의 조선인 강제동원 취재를 위해 만난《나가사키 재일 조선인 인권을 지키는 모임》의 다카자네 야스노리 대표와 시바타 도시아키 사무국장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적지 않은 나이와 일본 우익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아무 대가 없이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에게 가해졌던 인권유린 실태를 추적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미쓰비시의 조선인 강제동원에 관심이 많다. 나가사키대학 불문과 교수로 재직하다 퇴임한 다카자네 대표가 그 이유를 말했다.
“나가사키에서 미쓰비시는 다른 기업에 비해 세력이 압도적이지요. 지역 경제 자체가 미쓰비시중공업의 조선소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나가사키의 경제기반 세 가지가 관광, 수산, 미쓰비시입니다. 그러나 미쓰비시는 태평양전쟁 때 조선인 강제동원을 가장 많이 한 기업이에요. 노무자가 부족하면 몇 명이 더 필요하다고 일본 정부에 요구했지요. 일본 정부나 군 당국과 한 몸이나 다름없었어요. 그럼에도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합니다.”
1951년생인 시바타 사무국장은 원폭 2세대로, 조선인이 많이 끌려갔던 다카시마에서 성장했다. 조부모와 부모가 다카시마에서 생선가게를 운영해왔는데, 나가사키 시내로 이사했다가 원폭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시바타 사무국장은 태어날 때부터 심장기형으로 여러 번 수술을 했다. 그는 심장병 중증장애인이다.
두 사람은 오랜 세월에 걸쳐 조선인 피폭자 문제, 나가사키조선소와 다카시마탄광, 하시마탄광 강제연행자 등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해 왔다. 그 성과물이 1982년 7월 제1집을 시작으로 6집까지 발간한「원폭과 조선인」이다. 이 책자를 통해 나가사키내 조선인 인구 추이, 피폭자 현황 등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하시마 탄광 문제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특히 하시마에 버려져 있던 ‘매화장인허증(埋火葬認許證)’을 무더기로 입수해 그곳에서 사망한 조선인이 1925부터 1945년까지 총 122명이고, 그 중 강제동원기간인 1938년∼1945년 사망자가 56명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망자가 발생했을 때 지역 관청에서 발급하는 공문서인 이 매화장인허증에는 사망자의 신원, 사망일시, 원인, 매장 ㄸㅎ눈 화장 여부 등이 기록돼 있다. 다카자네 대표가 제시하는 자료를 보니 사망원인이 한자와 일본문자로 ‘병사’, ‘익사’, ‘발육불량’, ‘역병’, ‘변사’, ‘자살’, ‘추락에 의한 뇌진탕’, ‘두개골 골절’, ‘매몰로 인한 질식’, ‘두부타박상’, ‘복부내장 파열’ 등으로 기재돼 있었다. 조선인들이 어떻게 비명에 갔는지 한눈에 보이는 듯했다. 도망가다 물에 빠져 죽었거나 일본인 노무계에게 린치를 당해 숨진 조선인들의 한 맺힌 사연들은 이런 건조한 의학용어 속에 은폐돼 있다.
두 사람은 1986년 당시 신원공개를 꺼리는 어떤 일본인으로부터 매화장인허증 원본을 건네받은 뒤 자료 분석과 보고서 작성을 마치고 규슈대학 석탄자료관으로 보내 관리를 맡겼다. 이 같은 기록을 보고 가족의 유골을 찾으러 온 한국인도 있었다고 한다. 다카자네 대표가 분노를 담은 목소리로 그 전말을 전했다.
“하시마에서 1944년 6월 6일 사망한 이완옥(당시 22세)이라는 노무자가 있었어요. 높은 곳에 설치된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해 석탄을 운반하다가 레일 틈에 빠지는 바람에 밑으로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그 사람의 조카가 매화장인허증을 찾아본 뒤 백부 유골을 한국으로 옮기고 싶다고 미쓰비시 측에 요청했습니다. 하시마에 있던 유골이 현재 다카시마의 ‘공양탑’ 밑 밀폐된 공간에 묻혀 있으니 그곳을 확인하고 싶다고 한 거죠. 그러나 미쓰비시 광업의 후신인 미쓰비시 머티리얼 측에서 ‘지금 굳이 땅을 파겠다는 것은 사자(死者)를 모독하는 짓’이라고 거절했습니다. 자기들이 생명을 모욕해 놓고 그걸 제대로 수습하려는 행위를 모욕이라고 하는 건 용서할 수 없는 일입니다.”
두 사람이 보기에 미쓰비시가 취해야 할 자세는 분명하다. 시바타 사무국장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배상해야죠. 미쓰비시가 기업으로서 아시아에서 살아나가려면 조선인이나 중국인 강제연행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지금이라면 회사 일을 하다 죽거나 다친 사람에 대해 당연히 보상하고 연금을 주거나 가족 생계를 책임집니다. 하물며 강제로 끌려와 그렇게 됐던 사람들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려는 건 말도 안 되는 행동이지요.”
다카자네 대표도 전적으로 같은 생각이었다. “시바타 얘기에 100% 찬성입니다. 미쓰비시는 미군정 때 재벌그룹들이 해체됐기 때문에 태평양전쟁기간의 미쓰비시와 지금의 미쓰비시는 별개의 기업이라고 주장합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미쓰비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면 일본 법원에서는 이 같은 ‘별(別)회사론’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 미쓰비시 손을 들어주지요. 그러나 1952년 샌스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해 일본이 미군정에서 독립한 뒤 미쓰비시의 흩어진 기업들은 다시 합체되지 않았습니까? 사원의 근무연수라든가 급료, 사시(社是) 등을 얘기할 때 ‘미쓰비시 1백년사’라고 말하면서 서로 다른 회사라고 하니 얼마나 궤변입니까? 그때그때 자기들 편할 대로 어쩔 때는 같은 회사라고 했다가, 어쩔 때는 다른 회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쓰비시는 ‘국가가 책임지면 기업도 화해에 나설 준비가 돼 있다’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기업 스스로 사과하고 책임지겠다는 것이 아니고, 국가가 책임지지 않을 걸 뻔히 아니까 끝까지 회피로 일관하는 것입니다. 국가를 방패 삼아 그 뒤에 숨는 행태를 그만둬야 합니다.”
● 미쓰비시는 어떤 기업인가?
에도 막부 시절인 1835년 도사 번[士佐藩, 지금의 시코쿠 지방 고치현]에서 출생한 하급 무사 출신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가 1870년 세 척의 배를 가지고 해상무역에 손을 대면서 기업사가 시작됐다. 1873년 회사명을 ‘미쓰비시상회’로 내걸서 미쓰비시라는 상호가 처음 등장하게 된다. 미쓰비시[三菱]는 이와사키가의 문장(紋章)이었던 3개의 마름(隆, 바늘꽅과의 1년생 식물)에서 따온 것이다.
야타로는 이른바 ‘사가(佐賀)의 변란’이 발생했을 때 정부를 도와 반란군을 진압하는 등 메이지유신으로 정권을 잡은 인사들과 긴밀히 접촉하며 기업을 성장시켰다. 그는 막부 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정봉환(大政奉還, 1867년 에도 막부가 국왕에게 국가통치권을 넘겨준 사건)을 성사시킨 국민적 영웅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사업을 승계한 데다 일세를 풍미한 사상가이자 실력자였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년~1901년]와도 밀접한 관계를 이어갔다. 야타로는 1874년~1884년에 걸쳐 후쿠시마, 아오모리, 오카야마 등 여러 곳에 광산을 개발했는데 그 중심이 된 것이 훗날 조선인 강제동원으로 악명을 떨치게 되는 다카시마 탄광이었다.
야타로는 미쓰비시 재벌이 완성되기 전인 1885년에 위암으로 사망했지만 그 이전에 미쓰비시가 성장할 수 있는 기초를 확고하게 다져놓았다. 그가 죽은 뒤 동생 야노스케[彌之助]가 사장직을 물려받아 석유 재벌로 발돋움시켰다. 야노스케는 1887년 정부 소유 나가사키조선소를 불하받은 데 이어 미쓰비시조선, 미쓰비시제지, 미쓰비시상사, 미쓰비시광업, 미쓰비시은행, 미쓰비시전기 등을 차례로 설립하며 그룹을 부흥시켰다. 야노스케의 뒤를 이어 야타로의 장남 히사야[久彌]가 미쓰비시 총수를 맡았다. 야타로의 사위들은 미쓰비시 재벌의 성장에 두고두고 도움이 됐는데, 맏사위와 넷째 사위가 내각총리를 역임했고 둘째 사위는 교토지사를 지냈다. 이들은 미쓰비시와 민정당 등 정계를 연결하는 파이프 역할을 했다. 야노스케 또한 일본 정계의 거물 고토 쇼지로[後藤象二郞:1838년~97년]의 딸과 결혼해 혼인으로 막강한 인맥을 구축하는 데 일조했다. 이래저래 미쓰비시 집안은 정경유착의 대명사로 일컬어질 수밖에 없었다.
미쓰비시 그룹은 미쓰비시합자회사를 지주회사(持株會社:주식 소유에 의해 기업을 지배하는 회사로 재벌 본사들이 대부분 지주회사 역할을 한다)로 개편시켜 산하 회사들을 총괄 관리하는 콘체른(Konzern) 형태를 갖추면서 크게 성장했다. 1930년 들어 산하 회사 120개사, 자본금 9억엔에 달하는 초대형 재벌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정부의 강력한 지원 속에 사세를 확장한 미쓰비시는 특히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기간 중 군수산업으로 급성장했다. 나가사키조선소를 모태로 1934년 탄생한 미쓰비시중공업에서 당시 세계 최대 전함으로 일컬어졌던 무사시[武藏]호, 진주만 폭격과 가미카제 자살공격으로 맹위를 떨친 제로센[零戰] 전투기 등을 만들어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그 발판에 식민지 조선인들을 대거 강제 동원해 개별 작업장 노역을 시켰다. 일본 학자 및 시민운동가들이 2006년 발간한『전쟁책임 연구』에 따르면, 미쓰비시 작업장에 끌려간 조선인은 총 10만명에 달했다. 이 중 1만명 이상이 나가사키의 조선소와 병기공장, 제강공장, 탄광 등에 동원됐다. 일본 패망 뒤 연합군총사령부는 전쟁에 적극 협력한 책임 등을 물어 군수재벌을 해체하면서 미쓰비시도 작은 회사로 뿔뿔이 해체했다. 1946년 9월 조사 때 미쓰비시 재벌계 기업 76개 회사의 총자본금은 27억 350만엔으로, 자본 규모에서 미쓰이 재벌과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었다. 그 무렵 미쓰비시 총수인 이와사키 고야타는 “나라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패전했기 때문에 그 명령에 따라 해체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자발적 해체는 나의 신념으로는 할 수 없다. 미쓰비시는 국가의 명령에 따라 당연히 국민으로서 해야 할 의무를 다했기 때문에 돌이켜보아도 한 점 부끄러울 것이 없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결국 해체조치가 단행돼 미쓰비시 중공업은 동일본중공업, 중일본중공업, 서일본중공업 등 3개 회사로 분할됐다. 미쓰비시 상사는 무려 120개사로 세분화됐다. 그러나 미쓰비시 그룹은 제2차 세계대전 종결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이 1952년 발효된 이후 단계적으로 재결합했다. 미쓰비시중공업도 1964년에 재통합했다. 현재 미쓰비시 그룹의 핵심 기업은 미쓰비시중공업과 미쓰비시 UFJ 은행, 미쓰비시상사 등이다. 이 중 미쓰비시중공업은 차량과 선박, 각종 터빈, 발전기 등을 제조하는 세계적 기업으로 종업원 수가 계열사를 합쳐 총 6만2000명이며 전체 매출은 4조 4천억엔이다(2008년 기준). 한편으로는 역사왜곡으로 유명한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약칭 새역모) 측에 막대한 후원금을 주는 등 과거사 문제에 아무 반성이 없는 대표적 우파기업으로 꼽힌다.
조선인 강제동원 문제와 관련해서는 1944년 일본 나고야의 미쓰비시중공업 산하 군용 항공기(정찰기) 공장에 근로정신대로 끌려갔던 할머니 7명이 2009년 후생연금 탈퇴수당 명목으로 1인당 고작 99엔을 받은 사건이 널리 알려져 있다. 엄밀히 말하면, 99엔 지급의 주체는 일본 정부지만 이를 미쓰비시중공업과 분리해 생각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 애초에 할머니들이 후생연금 가입 여부에 대한 확인을 일본 정부에 요청한 이유가 미쓰비시중공업의 은폐 때문이었다. 미쓰비시중공업 사업체에 근무했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맥한 사실마저 기업 측은 한사코 부인하며 자료를 감춰왔다. 할머니들이 1998년 확인요청을 한 때로부터 무려 12년이 지난 2009년 9월 7일에야 일본 후생노동성 산하 사회보험청은 이들의 미쓰비시중공업 근무 사실을 공식 인정했다. 후생노동성은 후생연금 중도탈퇴에 따른 수당을 1940년대 당시의 화폐 액수 그대로 계산해 피해자들에게 99엔을 지급했지만, 미쓰비시중공업은 단돈 1엔도 내놓은 적이 없다.
한국에 대한 이 같은 심각한 원죄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의 정부는 다목적 실용위성 ‘아리랑 3호’의 발사 사업자로 미쓰비시중공업을 선정해 논란을 빚은 바 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은 2008년 10월 아리랑 3호 발사 용역의 우선협상 대상업체로 미쓰비시중공업을 최종 선정했다. 2009년 이명박 한국 대통령과 아소 다로 일본 내각총리는 정상회담에서 아리랑 3호 발사체 용역업체로 미쓰비시중공업이 선정된 것을 환영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위성을 탑재한 로켓 발사는 일본 다네가시마 우주센터 요시노부 발사장을 이용할 예정이다. 우리 나라의 정부가 아리랑 3호 발사에 일본 로켓을 쓰기로 함에 따라 미쓰비시중공업은 해외 상용 로켓시장에 최초로 진입하게 됐으며, 추가 해외시장 개척에도 발판을 놓게 됐다.
▶출처:김호석·권기석·우성규 공저『일제식민통치시대의 강제동원, 그 알려지지 않은 역사』「일본 전범기업과 강제동원의 현장을 찾아서」돌베게 편찬(2010년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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