맏 아들이 왔어요
매해 한식과 추석 며칠전에 아버님과 어머님의 묘소를 미리 성묘를 한다. 한식날에는 망우리에 모신 아버님 묘소를 찾는다. 추석에는 용인에 계시는 어머님묘를 성묘를 하곤한다. 올 추석에는 어머님을 뵙고 성묘를 하기로 했다. 2018년 9월 15일(토)은 어머님 묘소를 찾기로 약속한 날이다. 일주일 전에 큰 매형님댁에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 어머니가 세상을 하직하신지도 50년 40년이 흐른 세월이다. 나의 부모님 두분의 장지(葬地) 물색은 언제나 큰 사위 큰 매형님의 몫이었다. 일년에 두번 한식과 추석날의 성묘는 4 형제자매 부부가 함께 한다. 91세가 되도록 큰 매형께서는 한번도 장인 장모님의 성묘를 거른 적이 없다. 올 추석(9월 25일)에는 9월 15일(토)에 용인 어머니 묘소를 찾을 예정이었다. " 아, 매형님 ! 다음 토요일(15일)에 어머님 성묘를 가려고 해요. 가실 거죠 ? " " 으 ~~~ 모오 옷 가아 ~~~ 누나는 저녁 다섯시에나 집에 올거야 ~~~" 일주일 전에 큰 매형님댁에 전화를 했다. 건강이 어디가 불편하신건가. 91세이신 연세에 마음뿐으로 귀찮은 것일까. 생각 밖의 대답으로 머리 속이 잠시 허공을 헤맨다. " 열흘 전에 계속 토하고 식사는 커녕 미음도 못 먹었어, 발이 붓고 기운도 떨어져서 걷지도 못하고 있다, 응급실에도 실려가고 이제 ~~에 ~느은 어쩔 수 없나보다 " 저녁에 큰 누님과의 통화내역이다. 일주일 뒤에 작은 누나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울린다. " 형부가 오늘 새벽 다섯시에 돌아가셨단다 " " 아 ~ 아 ~아 ~ 이게 뭔가 아 ~~~ " 목소리가 조금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렇게 화급히 이 세상을 떠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도 않았는데 할 말이 없다. 머리 속이 하얘지는 느낌으로 멍해진다. 함께 성묘를 못가겠다는 음성이 아직도 귀청을 울리고 있는 데 말이다. 집을 청담동으로 금년 4월에 이사를 했다. 누님들과 매형님들을 식사라도 한번 대접하려던 생각이었다. 차일 피일 미룬 것이 가슴에 이리도 아쉬움과 죄송함이 되리라고는 미처 몰랐다. 어머님의 성묘 예정일에 큰 매형님의 고향인 삼천포로 향하는 장의(葬儀)차에 오른다. 추적 추적 흩뿌리는 빗물이 흔들리는 차창에 흐르고 있다. 큰 매형님의 이별을 슬퍼함인가 아쉬움이련가. 아들 며느리 두 딸과 사위 친손자 외손주 처제 처남 형제자매 조카 등등 버스 속에는 그저 침묵만이 감돈다. 일그러진 미망인 큰 누님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싸늘한 모습이다. 입술을 깨물고 지긋이 감은 두 눈가에는 묵직한 눈물이 맺히고 있다. 80대 중반을 넘기고 있는 누님을 어찌하면 좋을까. 넋이 나간 모습을 바라보는 아들 딸들도 무슨 위로의 말을 할 수 있으리오. 큰 매형님과 누님의 얼굴이 겹쳐져 흔들리는 차속에서 가슴이 먹먹해지고 있다. 한줌의 가루로 돌아온 매형님을 고향산천 한곳에 묻는다. 자식들의 흐느낌이 통곡이 되어 산골짜기를 흔든다. 9월 29일(토)에야 뒤늦은 나의 오마니의 성묘길에 나섰다. 작은 누나와 매형 동생부부와 맏 며느리와 장남뿐이다. 큰누님과 매형님의 좌석은 비워둔 채이다. 살아 생전에 그토록 좋아 하시던 들국화 몇송이를 어머니에게 안겨드린다. " 어머니 ! 맏아들 정남이가 왔습니다. 큰 매형과 누님이 함께 못했어요. 어머니의 큰 사위가 지금 쯤 장모님께 인사를 드리려고 오고 있을 겁니다. 구름타고 바람에 휩싸여 삼천포에서 날아오고 있을거예요.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고 수고했노라고 꼬옥 한번 안아주세요. 어 ~어 ~ 엄 ~ 마 아 아 " " 엄마 ! 요즈음에는 꿈속에도 왜 안나타나시는거야 ~~~ , 응, 내가 보기 싫어진거야, 미안해요, 엄마 ! " 무릎을 끓고 어머니에게 올리는 술잔에 북받치는 서러움을 애써 삼키고 있다. 합장(合葬)을 못해 드린 것에 대한 괘씸함의 꾸짖음이 아닐까. 맏딸 시어머니 친인척을 고향산천 이북에 두고 피난을 나온 어머니이다. 이산가족 모두가 그러하듯 생이별(生離別)이다. 열여섯의 나이에 얼굴도 못보고 열두살 코흘리개 소년과 결혼을 한다. 결혼이 무엇인지 시집이 어떤 곳인지 부모의 명령에 따를뿐이다. 호박넝클에 주렁주렁 호박이 달리듯 아홉이나 되는 자식들을 낳는다. 시어머니의 계속되는 시집살이는 매서울뿐이다. 애기를 등에 업고 걸리우며 재넘어 사래 긴 밭을 매느라 허리펼 날이 없다. 살가운 말 한마디 듣지도 못한 어린 남편의 누나 노릇까지 했으리라. 싫던 좋던 40년 이상을 살을 부비며 살아온 부부가 아닌가. 이산가족으로 가족과도 생이별한 어머니인데 저 세상에서도 남편마저 별거(別居)를 해야한다니 기막힌 운명일 것이다. 세월도 흐를대로 흐른 세월이다. 씨잘 데 없는 잡상들의 허구의 말은 허상이며 근거도 없는 낭설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이 귀한 어머니의 아들도 엄마의 품속을 파고 들 것이다. 무슨 낯으로 어떤 허잡한 변명으로 어머니를 뵐 수 있을까. 아들의 가슴은 답답함으로 얼룩이 지고 돌아서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민족의 염원인 남북통일의 그 날이 오기까지, 고향(故鄕) 하늘을 바라보며 고향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에 안장(安葬)해 드리련다. 통일이 되는 그 날에는 어머니 아버지를 가슴에 품고 한걸음에 달려갈 것이라는 다짐에 다짐을 하면서 말이다.
2018년 10월 1일 무 무 최 정 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