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피크 - 太平山頂 (The Victoria Peak)
港[항구항, 항구강, 통할홍]
기원전 전국시대 기원후 5호16국(20국)으로 분열하면서
광서성, 광동성, 복건성 서부지역에서는 훗날 북한(北韓)과 남한(南韓)이 건국된다.
이들은 산동성 노나라(공자), 추성시의 추나라(맹자)가 제나라에 망하고,
제(濟)나라가 초나라에 망하게 되자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이었다.
그후 기원후 하남성 정주시의 한성백제가 북제에 점령되어 제후로 떨어지자,
하북성 서남단 안양시의 양나라로 피신했다가 산동성 제남시의 위례백제 지역으로 들어간다.
다시 동영시의 동명부여 백제로 밀려난 백제인들은 백제의 한주(韓州)였던 반도로 들어와
백제(百濟)를 이어간다. (양나라의 원래 수도는 하남성 개봉시(카이펑/대량)였음)
일부는 남아서 세력을 모아 북경으로 들어가 연나라 자리에서 남제(南濟)를 건국한다.
나머지는 중국 광서성, 광동성, 복건성으로 피신하게 된다.
중국 남단으로 내려온 백제인들에 의해서 ad800년대 5대10국 시대 때 광서성, 광동 서부에 북한을 세우고,
광동성 복건성 서부 지역에서는 남한을 세운다.
초나라가 진나라에 멸망당하자 진시황에 합병되었다.
5호16국 시대 때 토착민들은 유유(劉裕)의 유송(劉宋363~422/479 재위420~422 고조)에 영향을 받다가,
당나라가 점령하자 중국 남단의 수군항 기지로 활용한다.
그후 5대10국 때 송나라의 조광윤(趙匡胤927~976/재위 960~976)에게 점령되어 수군기지로 활용하였다.
(5대10국/5대: 후당,후량,후주,후진,후한. 10국: 오월,민월,형남,오,초,남당,남한,북한,전촉,후촉)
1513년 포르투갈의 Jorge Álvares(호르헤 알바레스)가 최초로 홍콩에 상륙하였다.
그후 영국이 들어와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였다.
청나라가 영국의 동인도 회사 통제를 강화하자 영국은 아편으로 맞섰다.
청나라가 영국의 아편 수입을 금지시키자 1840~2년 영국과 제1차 아편전쟁이 발발하였다.
아편전쟁의 패배로 영국과 난징조약을 체결하여 홍콩섬을 정식으로 양도하였다.
영국은 빅토리아시를 건설하면서 영국 총독부를 신설하게 되었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에서 패하여 홍콩 구룡(九龍)구역이 북경조약으로 영국령에 귀속되었다.
구룡(九龍)반도와 광동성 간에 철도가 개통되면서 1870~1880년대 자유 무역항으로 발전하면서
아시아에서는 가장 먼저 빅토리아 문화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1898년에 영국은 홍콩과 인접한 신제(新界/신계)구역을 99년간 조차받게 된다.
이후 영국의 주요 무역항이 되면서 자유 무역항이 되었다.
1941년 4월 28일 일본제국은 홍콩을 점령하였다.
홍콩 점령후 식량배급을 통제하고 강제 배급제를 실시하는 공산주의 정책을 펼쳤다.
일제는 전비를 마련한다며 국채를 마구 발행하고 통화 환율정책의 실패로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유발시켰다.
160만 인구였던 홍콩 인구는 100만 명의 난민 발생으로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남태평양 등으로
피난했고, 1945년 8월에 60만 명으로 줄어든다.
1949년 중화민국이 대만으로 밀려나고 모택동이 중화 인민공화국을 수립하자,
중국 공산당의 억압을 피해 100만 명의 중국인들이 이주하여 인구가 대체된다.
1978년 등소평의 개혁 개방정책으로 선전(심천) 경제특구가 생겨나게 되면서,
홍콩의 경제산업은 2차 제조업, 섬유업종에서 3차 서비스업종으로 대체되었다.(한국은 2차 제조업 성장)
1984년 중국과 영국은 1997년7월1일 홍콩의 주권을 중국으로 이전하는 합의를 하였고,
홍콩이 앞으로 50년간 자치권을 행사하는 특별 행정구역으로 둔다는 홍콩 기본법을 1990년에 제정하였으며,
홍콩 특별 행정구 행정장관이 이끌어 간다.
행정장관은 중국 국무원에서 제1차 위원회(400명)에서 추천하여 선발하고,
제2차 위원회(홍콩800명)에서는 간접선거로 선거인단의 투표로 결정된다.
중국 측, 홍콩 측에서 각각 선발되면 선거인단 투표로 결정된다.
홍콩측이 유리한 것같지만 사실은 아주 불리하여 민주화 시위 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아주 높다.
2047년에 주권이 중국으로 넘어간다는 미래 가치때문에 홍콩 측 선거인단 800명은
중국 국무원의 영향을 받아 꼭두각시로 전락한다.
인구는 7백만 명이다.
1841년 6월 7일 자유 무역항이 된 후 제1차 발전을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이룩하였다.
1949년 국공내전 이후 중국인들이 이주하여 홍콩 상하이 은행과 스탠다드 챠타드 은행 등이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중국의 북한 지원으로 무역 수출입 통제와
제재를 받아 경제가 침체된다.
경공업 중심의 경제로 전환되었다가 무역제재가 풀리면서 제2차 산업인 가공 수출제품으로 전환하여
전자 부속품, 방직물, 플라스틱, 시계, 가발 등의 수출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78년 등소평의 개혁 개방정책이 실시되자, 선전 경제특구 등으로 홍콩의 제2차 산업이 이주하고,
홍콩은 제3차 서비스산업으로 발돋움하게 된다.(한국보다 약20년 앞서감)
1997년 홍콩 반환이후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주식시장 침체로 아시아 금융위기로
홍콩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1998년 8월 국제 투기꾼들이 홍콩달러의 약점을 틈타 선물시장과 증권시장을 교란하여
막대한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극복하려 하였으나 마이너스 5% 경제성장을 하게 되었다.
1999년 홍콩 정부는 투자신탁 방식으로 주식을 사들여 주가방어에 나섰으나
마이너스1% 경제성장을 유지해야만 하였다.
9.11사태로 관광업이 타격을 받았고, 2003년 3월 사스 테러사건으로 홍콩경제가 회복할 기색이 없자,
중국정부는 홍콩에 특혜를 주게 된다.
이때부터 홍콩은 중국경제에 의존하기 시작한다.
달러약세에 힘입어 홍콩달러는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게 되어 수출품에 다시 활기를 띄게 되었다.
(홍콩은 달러 약세일때 성장하는 나라(관광)/ 한국은 달러 강세일때 수출이 잘됨.
달러약세란 1천원당 달러가치가 900원, 800원으로 떨어질때(수출둔화, 국내 내수경기 활성화)를 말하고,
달러강세란 1천원당 1100원, 1200원으로 점점 올라갈때(수출증가, 국내 내수경기 둔화)를 말한다.
그런데 달러강세가 장기간 지속되면 수입원자재 가격상승으로 결국은 수출무역도 둔화된다).
한국경제도 1960년대부터 1990년까지 1, 2차 제조산업에서 3, 4차 서비스, 정보산업으로 변모하는 데는
20~30년이 채 안 걸렸다.
홍콩은 1841년 개방이후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발전하다가 일본 침공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하였다.
일본은 겉으로 공산주의를 아주 싫어하면서도 점령국에 대해서는 공산주의 정책을 펼쳤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은 믿을 수가 없는 나라라는 것이다.
1910년 12월 회사령을 공포하여 조선의 회사 설립을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꿔
조선의 경제발전을 막았다.
그 바람에 한국은 1970년대까지 초가집을 짓고 살아야만 하였고, 군읍단위에 전기가 공급되었으며,
성냥 부족으로 이웃집에 불을 빌리러 가야하는 시대를 살아야했던 것이다.
한국전쟁 후 회사설립이 신고제로 바뀌어 발전하는 데는 30년도 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1867년 명치유신에 그 해답이 있다.
일본은 명치유신을 단행하여 단15년만에 근대화를 이룩한다.
중세시대에서 근대시대로의 본격적인 도약을 단15년만에 해낸 것이다.
조선에 이런 사실이 알려지게 되면 일본보다도 더욱 발전할 것을 두려워 하여
조선을 점령하고 식민통치를 하면서 조선의 근대화를 막는 조치들을 취해왔던 것이다.
15년만에 근대화를 이룩한 일본은 제국주의로 무장하고 조선을 침략하여,
1882년 임오군란을 유도하며 구식군대를 해산시키고 진압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부터 1945년까지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으면서
조선의 경제발전을 저지당해 왔던 것이다.
장장 63년간을 지배당하면서 한국의 경제발전은 일본제국으로부터 방해받아 왔다.
홍콩과 비교하면 100년의 차이가 있다.
홍콩(香港)은 향강이라고 부르는데 원래 이름은 한강이다.
이들의 조상이 한강유역에 살았고, 광동으로 내려와 중화되어 가면서,
광동어로 향강으로 부르다가 포르투갈, 영국이 진입하면서 홍콩이 되었다.
지금도 발음은 향강으로 발음한다.
한강(한수)은 호남성 강릉시, 한양시, 호북성 단양시, 양양시 일대에도 있었고,
장강(양자강/낙수) 강서성, 호남성 상류에도 있었다.
그 이전에는 하남성 정주시에 한강이 있었다.
이곳은 정주시 한성백제 지역으로 북위에서 분열한 고환(동위/고태>구태)의 아들인 고양이
정주시 한성백제 점령에 이어 양나라의 수도 개봉시를 점령하고 북제를 건국하면서
하남성 개봉시(카이펑)에 자리잡는다.
정주 한성백제인들의 주력은 양나라의 하북성 서남단 안양시로 들어가고,
양나라가 북제, 북주에 와해되어 제후로 떨어지자 황하강 주변 하북성 남단의 한단시, 석가장을 거쳐,
산동성 제남시 위례백제로 이주한다.
이때 중국 남단으로 피난가는 백제인들이 광서성, 광동성, 복건성으로 밀려 들어가게 되고,
훗날 5대10국 시대 때 북한과, 남한을 건국한다.
그러므로 백제의 후예는 반도백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광서, 광동성, 홍콩, 싱가포르에도 같은 피를 가진 백제의 후예가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에는 백제향, 백제촌, 백제방 등으로만 알려져 있다.
이것은 중화되는 것을 끝까지 거부한 백제인들의 흔적이다. (제일교포와 비슷한 현상임)
홍콩이 한때 제1,2차 아편전쟁 당시 싱가포르 이주가 있었고,
일본군 침공으로 160만 명의 인구가 60만으로 줄어들 때 싱가포르로 이주해버린다.
홍콩은 일본 침략을 받지 않았더라면 엄청 발전했을 나라였다.(홍콩과 한국인의 지능지수가 1,2위)
한국은 충혜왕 때문에 고려말부터 부녀자와 여자들은 집안에서 가둬놓고 밖을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충혜왕 사건을 겪은 후부터 조선에서는 중앙 권력집권화로 권력 지도부의 유학교육을 강화하였으며,
외출시 면사포와 왕골포를 쓰고 얼굴을 가리고 다니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부모끼리 딸아이의 짝을 지어주는 풍습이 유행하게 되었으며,
조선 여인들은 혼례날에 남편의 얼굴을 처음으로 보게 되는 아이러니컬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또 그런 현상이 자연스러운 관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일제시대를 거치며 더욱 안으로 움츠러 들었다.
딸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본군/순사가 오면 벽장, 장롱, 산속에 숨어있어야 할 정도였으며,
이런 풍습은 195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래서 딸이 있는 왠만한 시골집에 가면 집안에 벽장과 다락방, 또는 지하로 연결되는
골방이 하나씩은 모두 지어져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1910년 12월 회사령을 공포하여 조선인의 회사 설립요건을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바꾸는 바람에 회사를 마음대로 설립할 수가 없었으며,
경제발전과 산업화는 전적으로 일본에 의해 저지당해 1970년대까지 초가집에서
호롱불을 켜고 살아야만 하였던 것이다.
홍콩과 비교해서 100년의 시차가 있었던 것이다.(이거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진다.)
자기나라에서는 법으로 할 수 없으니 남의 나라를 점령하고 반대되는 정책만 펼쳤다.
일본 우경화 정책은 정답이 이미 나와있다.
(일제 패망후 조선 공산당 당수 여운형에게 조선총독부에서 공식 항복선언하고
조선의 주권을 이양한 것을 무력화시키고, 미군이 철수하게 되면 다시 들어와서
계속 식민지로 이어가려는 역사 공작을 시도하고 있음.
반공 메카시즘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이것이다.)^^
충혜왕(왕정)이 북경(연경)물만 먹지 않았더라면 과연 그랬을까?
뭉케 당시 대도였던 하남성 개봉시에서 부터 쿠빌라이의 연경(북경)으로 끌려간 소수민족들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국제 인종시장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이 잡혀 들어왔다.
마자르, 타타르, 카작, 우즈벡, 메리키트, 거란국, 금나라, 서하국, 동단국, 흥요국, 발해국,
동진국, 단파국, 연파국, 후발해국, 대진국, 고욕 발해국, 정안국, 동하국, 고려국, 여진족, 말갈족,......
잡혀온 여자들은 아무렇게나 다룰 수가 있었고 연경에서 충혜왕은 타락해서
고려로 들어왔던 것이다.(유학파)
그에 비해서 충선왕[쿠빌라이의 외손주]은 최초의 한몽 혼혈왕으로 심양왕과 고려왕으로 있으면서
원나라 황위 계승까지 노려 서장성 티벳자치구 샤카지방(부처 탄생지) 차가타이 한국 상왕으로
3년간 유배당해 있으면서 고려 공녀차출을 막아보려고 노력한 고려의 선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