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는 18 세기초(숙종-영조때 AD 1674-1776)에 발생한 것으로 18 세기 중엽에 이미 형성의 완성 단계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판소리의 기원은 훨씬 이전,신라의 화랑과 관련되며 그 직접적 계보는 산대잡희의 한 과정이었던 극적 노래의 분화로 보고 있다. 판소리는 그 발생의 바탕이 되는 설화를 근간으로 하여 구전가요,무가, 공연 현장에서의 감흥을 위한 재담등 여러 문화적 요인들이 첨가되어 변화해온 적층적 문화형태라는 형성 과정을 가지고 있다.
19세기에 판소리는 양반 청중들을 대상으로 전성기를 맞았는데, 19세기 전반기를 '전기 8명창시대'라 하고,19세기 후반기를 '후기 8명창시대'라고 한다. 권삼득.황해천.송홍록.방만춘.염계달.모홍갑.김계철.고소관.신만엽.송광록.주덕기 등의 8명창들은 각기 특색 있는 창법과 선율을 개발하여 양반들의 감상과 미의식에 보다 가까이 접근하려 했으며, 각 지역의 민요 선율을 판소리에 담아냄으로써 판소리의 표현력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박유전.박만순.이날치.김세종.송우룡.정창업.정춘풍.장자백 등 후기 8명창들은 전기 8명창들의 음악적 업적을 계승하고 이를 다듬어 다양한 더늠(長短)을 창출했다. 이 시기에 박유전에 의해 보다 서민적인 감성에 충실한 서편제 소리가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판소리는 더욱 다양하고 강한 흥행성을 띤 예술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마침내 19세기 후반에 판소리는 왕실에까지 침투하게 되었고, 고종과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많은 창우들은 벼슬을 받기도 했다. 19세기부터 판소리의 주요청중은 양반으로 바뀌면서 이전의 서민의식은 상당히 수정되었다. 덕분에 판소리는 사설.음악.무대 등에서 진경을 이루었으나 민중적 현실인식과 반봉건적 예술적 심화나 문제의식은 일정하게 수정되어 얼마 간은 봉건적 의식의 개입 가지도 허용하는 굴절을 겪었다. 조선 고종 때의 판소리 작가 신재효는 중인 출신으로서 판소리 광대를 적극 후원하면서, 양반들의 미의식에 걸 맞는 판소리의 개작을 시도했는데, 이때 판소리 6마당의 사설집과 성조가.광대가 등의 창작 단가들이 만들어졌다.
20세기는 전기 5명창 시대로 일컬어진다. 그 당시 활동한 명창들은 박기홍.전도성.김창환.이동백.김창룡.김채만.정정렬 등이다. 이때는 국권상실과 급격한 서구화의 충격으로 판소리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마침내는 사멸의 길로 들어서게 된 시기이다. 이 시기 판소리의 변화는 무대예술로서의 변화로 요약할 수 있다. 1902년 기생.광대 등의 단체인 협률사가 만들어지면서 판소리는 극적 요소가 강한 창극으로 변신했다. 또한 유성기의 출현으로 판소리의 향수방식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본래 광대는 남자들이 하던 것이었는데 신재효의 제자 진채선이 최초의 여창이 된 후 허금파.강소춘.이화중선.박녹주 등 여창이 다수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으로 판소리의 소리.발림 등이 여성화되기도 했다.
8.15해방 후 판소리는 여성국극단의 등장으로 한때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으나 판소리 명창들이 창극에 참여하면서 판소리는 점점 쇠퇴해 ,1960년대에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 후 정부의 지원으로 1964년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이 시작되었다. 국가의 정책적 지원에 힘입어 소생의 계기를 맞은 판소리는 1970년대 이후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함께 학자.학생들에 의해 그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