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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강 그리스도의 마음
마음의 변화
여러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품게할 것입니다. 엘렌 화잇은 <시대의 소망> 668페이지에서 이에 대하여 아주 아름답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참된 순종은 마음에서 우러나온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한 마음의 역사였다. 우리가 동의하기만 하면, 그분께서는 우리의 사상과 목적을 그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시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그분의 뜻과 일치하도록 조화를 이루신다. 이로써 우리가 그분을 순종 할 때에 우리는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따라 수행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는 것은 죄 된 인간으로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특권입니다. 여러분 안에 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분께서 들어오시면 여러분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해 주지는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가야 할 발걸음을 대신하여 한 걸음도 내딛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은 이제까지 죄의 종노릇하던 여러분의 존재 자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사실상 여러분이 아무런 변화도 가져올 수 없었던 이유는 여러분의 마음이 통제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분의 마음에 새로운 생각과 감정이 주어졌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감정이 변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음이 여러분 안에 있다면 여러분은 정말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여러분에게 어떤 일을 하였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이전에 침례에 대하여 다루었습니다. 침례는 기적적인 일과 전혀 상관이 없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요한은 기록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 1장 12절).
이 말씀을 보면 "침례를 받은 자들에게는"이라고 하지 않고 “영접하는 자 곧 믿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침례를 받는 순간 믿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침례보다 선행합니다. 침례를 받으려는 시점에 이르렀을 때 여러분은 믿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고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인 교회와 연합할 준비가 이미되어 있어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선포할 각오가 이미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부여하신 능력을 따라 사역을 기꺼이 할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영적인 몸 교회와 결합하기 전에는 그 특별한 능력이나 사역 분야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연합한 후에라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침례를 받을 때 우리는 확신하는 바를 공중 앞에 표명합니다. 그제야 우리의 확신을 표합니다. 하지만 그 확신은 그 이전부터 이미 마음속에 간직했던 것입니다.
침례의 중요성을 제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해하고 믿게 만든 요소는 이미 존재했던 것입니다. 침례에서는 확신한 바를 따라 행동에 옮기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이미 그것은 여러분의 생애에서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절대로 과소평가 하지 마십시오. 그때가 바로 믿는 자들이 진정으로 성장하는 때입니다.
여러분이 성령께서 내재하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 어떤 새로운 것들을 얻게 됩니까?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감정, 새로운 동기를 얻게 됩니다.
새로 태어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하여 잘 알려 주는 글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아마도 내가 읽어본 중에 가장 깊이 있게 설명하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성품의 새로운 표준이 마련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애이다(엘렌 화잇, '진정한 회심' 리뷰 앤드 헤랄드. 1904. 7. 7).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아들일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생애로 평가를 받게 됩니다. 새로운 기준, 새로운 표준이 여러분의 생애에 주어집니다. 이제 여러분은 사랑의 율법에 종속되었습니다. 사랑의 율법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것들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거듭났다고 주장하나 열매가 없는 자들에게 '악하다 wicked'라는 용어가 해당되는 이유입니다. 신약 성경의 '악하다'라는 단어는 이방인들에게 적용된 적이 없습니다.
인간적 기준에서 그 단어는 믿노라고 공언하면서도 살아 계신 그리스도와 전혀 관계없이 사는 자들에게만 사용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악하다'라는 용어를 공공연하게 부도덕을 행하는 '이름뿐인' 교회의 신자들에게 사용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고린도전서 5장 9~13절, 강조 첨가)
한편 예수님께서는 종교적인 체계 안에서 겉으로는 선하게 보이나 속은 타락해버린 사람들에게 이 용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누가복음 11장 39절).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들의 운명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셨습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마태복음 13장 49. 50절).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게 되면 여러분의 생애에 새로운 표준이 세워지게 됩니다. 그런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봅시다. 엘렌 화잇은 그녀의 기고문 '진정한 회심'에서 "마음이 변화된다."라고 했습니다.
나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마음의 변화가 매일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는 일을 하루라도 하지 않으면, 옛 본성으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오래지 않아서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던 옛 습성으로 완전히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 이 둘 사이에는 아주 미세한 선이 있습니다. 육적인 사람이 그리스도께 항복하고, 변화할 수 없는 자신의 절망적이고 무력한 상태를 인정하면 하나님께서는 한순간에 자비하신 손길로 순식간에 하나님 자신을 인간의 마음에 주입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서 다시 기적을 맛보게 됩니다. 육적인 몸 안에 영적인 사람이 거하는 위대한 기적이 일어납니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속에 의지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의지를 올바르게 사용하는데 따라 모든 것이 좌우됩니다. 거듭났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지 않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래, 이제부터는 네가 이러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 대신 너는 꼭두각시처럼 될 것이다." 절대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전인 중앙관제부 control center를 새롭게 하십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오시면 새로운 생각들로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감정이 생기고, 용서할 수 없는 최악의 경우에도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놀라운 용서의 기적
언젠가 나는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용서를 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한 남성이 세미나 도중에 일어나더니 말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말씀을 꼭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의 대답이었습니다. "저는 지금 양심의 가책을 무척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앞에서 또한 목사님 앞에서 고백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순간 여러분이 경찰을 부르리라는 것을 잘 압니다. 앞으로 20년 넘게 감옥살이를 해야 할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숨기고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 새로운 마음이 꼭 필요합니다. 제겐 평화가 없습니다."
세미나 도중에 벌어진 극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같이 설교를 듣고 있는 어떤 부부의 딸을 성적으로 학대했다고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거의 기절할 뻔 했습니다. 내가 세미나를 인도하면서 이런 황당한 장면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흐느껴 울며 자신이 저지른 일을 고백했습니다. 나는 그 소녀가 몇 살이었는지 잊어버렸지만 아마 열두세 살쯤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을 하기는 정말 죄송합니다.”라며 그는 말을 이었습니다. 그 세미나에 앉아있는 어떤 부부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바로 당신들의 딸입니다."
그 부부는 경악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나는 조용히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입을 다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그는 말을 이어 갔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듯합니다. "저는 제 자신을 가장 악하고 가장 불쌍한 인간의 표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용서하지 않는다 해도 저는 별로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충분히 이해할만합니다. 제가 형벌을 받게 될 것도 알고 있습니다. 법에 따라 경찰을 부르겠지요.“
“네, 그렇습니다. 경찰을 불러야죠."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저는 이런 상태로는 단 하루도 살 수가 없습니다."라며 계속 말을 이어갔습니다. "용서받을 구실을 찾으려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 역시 학대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변명이 되겠습니까? 이 여자 아이를 탓하지 마십시오. 책임은 전적으로 저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에게 돌아서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혹시라도 저를 조금이나마 용서해 줄 마음이 있으신지요?"
우리 모두는 숨을 죽이고 꼭 부둥켜안고 있는 그 부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부부는 의자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이보다 더 큰 사랑과 용서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에게 '내가 저 입장이었다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나도 딸 가진 부모인데 정말 그들이 용서한 것처럼 나도 할 수 있었을까?“
그 아이의 부모는 앞으로 나아와 이 남자와 함께 무릎을 꿇고, 팔로 그의 목을 둘렀습니다. 그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이 특별한 순간에 수많은 흐느낌이 들려왔고 회개와 말할 수 없는 용서가 흘러넘쳤습니다.
그 남자는 이 경험을 통하여 회심하였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는 그곳에서 놀라운 증인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성경 세미나 현장에서 그는 실제로 회심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소유한 두 부부가 도무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그런 용서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중에 그 부모들에게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너무나 많은 것을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우리 딸의 재활치료에 매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내가 지금 확언합니다만, 따님은 부모님의 태도 때문에 완전히 치유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모든 일들을 뒤로 하고 잘 극복한 후에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장담합니다. 따님이 부모님으로부터 그러한 사랑과 용서를 볼테니까요. 그 사랑과 용서에 따님의 마음도 눈 녹듯 녹게 될 것입니다.“
얼마 전에 나는 그 딸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더군요. 아름다운 소녀입니다. 아마 이 소녀를 본다면 아들에게 소개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 들 것입니다.
나는 혼잣말로 '와!'라고 외쳤습니다. 내가 그 소녀를 보았을 때 완전히 치유받은 생기발랄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녀는 내가 인도하는 집회에 나와 간증을 했습니다. 듣고 있는 모든 청중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녀는 자기 부모의 놀라운 사랑과 용서를 보고 자기도 하나님의 용서를 붙잡을 수 있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물론 자신도 실수한 부분이 있었다고 시인하였습니다.
나는 또다시 '와!'라는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험악한 일을 만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우리의 태도 때문에 아이들이 치유받거나 용기 있게 전진하는 데 거침돌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부모라면, 어떻게 자녀를 길렀는지, 지금 어떻게 기르고 있는지 나는 잘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아이들을 기를 때 한 아이라도 밤에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밤새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내 마음은 이 부부를 생각하며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녀는 아주 훌륭하게 치유되었습니다. 온화하고 겸손한 이 부부가 우리에게 보여 준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오, 우리는 여전히 슬픕니다. 우리 딸이 당한 일로 인해 무척 속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해자를 정죄할 수 있는 권한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 부부가 정말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실천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나 또한 예수님께서 그분 앞으로 나아오는 막달라 마리아를 얼마나 관대하게 대하셨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녀가 그분의 발을 씻기고 머리털로 발을 닦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창녀나 평판 나쁜 여자로 취급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태도로 인해 그녀는 얼마나 큰 용서와 관용을 느낄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여자도 주님을 섬길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용서를 베풀 수 있는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분께서는 가장 흉악한 죄인일지라도 그분을 섬길 수 있도록 용납하셨습니다. 그분마음속에 있는 사랑이 죄인들을 이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번 그리스도의 마음을 옷 입게 되면 대부분 우리는 얼마나 멀리 그분께로부터 떠나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죄나 잘못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용서를 베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한번은 남태평양 지회에 있는 어느 지역에서 장막집회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대략 5천 명 앞에서 안식일설교를 하는데 텐트 한 구석에 어떤 청년에 홀로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앉아있는 주위에는 아무도 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후천성면역결핍증AIDS 환자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시절은 에이즈에 대해 처음 알게 된 초창기였기에 어떻게 그 질병이 생기는지 많은 혼란이 있었습니다. 스물한살쯤 된 청년이었는데 그의 주위는 텅 비었고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나는 누가복음 15장 11~32절의 탕자의 비유를 설교하던 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기회가 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강단에서 내려가 그 청년이 있는 텐트로 향했습니다. 그의 곁에 앉아 팔을 그의 목에 두르고 함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아마 나의 행동이 내가 했던 어떤 설교보다 더 큰 감화를 끼쳤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아직도 그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청중들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강권으로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엄청난 용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저 젊은이를 판단하는 자리에 어찌 앉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어떤 영문으로 지금 이런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이 순간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이 청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뿐입니다.“
나는 곧이어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형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요?"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예증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내가 그때 탕자의 비유를 설교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 중에 큰형 같은 사람들은 없습니까? 이 젊은이가 방탕한 생활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십니까? 왜 그것 때문에 불편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우리는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이 비유에서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탕자를 위해 잔치를 베푼 일로 몹시 불쾌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 형은 아우가 그런 잔치를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큰 죄, 더 큰 은혜
내 마음 속에 이 아름다운 성구가 떠올랐습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로마서 5장 20절). 죄가 크면 클수록 은혜는 더욱 크다는 이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새 생명을 받을 때 무엇을 함께 받게 됩니까? 그분의 마음입니다.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감정, 새로운 동기를 부여 받게 됩니다. 마음이 변화됩니다. 우리가 살펴보던 인용문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습니다.
기능들은 새로운 방향으로 일하도록 각성된다. (엘렌 화잇, '진정한 회심).
여기서는 말하는 기능들은 '마음의 기능입니다. 새롭게 된 것들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감정, 새로운 동기들, 다시 말해서 마음에 그러한 변화가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또한 마음의 기능들이 새로운 방향으로 일하도록 각성됩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는 어떤 기능들이 있습니까?
사고력, 의지력, 모든 감각, 선택력 의지와 관련, 감정, 식욕, 성적 욕구 이 모든 것이 우리 마음의 기능들입니다. 인간 존재의 모든 부분은 마음 안에 있는 다양한 기능에 의해 지배를 받습니다.
이제 엘렌 화잇이 말하고 있지 않은 부분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그녀는 그 기능들이 변화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새로운 방향으로 일하도록 각성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적 욕구는 마음의 한 기능이라고 말했습니다. 젊은 남성들이 나를 찾아와 “목사님, 내 안에 이런 욕구가 일어납니다."라고 말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해 줍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으니까요. 만약 성적 욕구를 느끼지 않는다면 오히려 염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적 욕망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있고 아니면 평생 자기만족을 찾아 헤맬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으면 즉시 기능이 새로운 방향으로 일할 수 있도록 각성됩니다. 무엇이 새롭고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특정한 기능이 작용하도록 해 줍니까?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기능들, 예컨대 식욕, 사고력, 의지력, 성적 의지력, 목적, 성적 관심 등을 이전과 다르게 본다는 뜻입니다. 내가 난생 처음으로 성적 욕망이 일어나지 않고 한 젊은 여성을 바라보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마음이야말로 원래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로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세속적으로 살다가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교회에서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남성들이 여성들을 그렇게 바라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때 아주 다른 생각이든 것입니다. 수년이 지나서야 그런 생각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신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자를 볼 때 옛날과는 다르게 볼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어떤 기준에 의해 모든 기능들이 각각 작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 마음에 들어오시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떻게 마음의 기능들을 활용할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전에 그런 생각들이 아예 내 안에 존재하지 않았으나 지금 내게 주어진 까닭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에 오셨고, 선을 위해 사용될 수 있음에도 악을 위해 사용된 것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개념이 젊은이들에게 미칠 영향력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젊은이들을 쫓아다니며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잘못이야. 이것을 하면 안 돼. 그런 짓 하면 못쓴다." 질책 대신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 봅시다. 우리의 젊은이들을 이끌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도록 하면 어떨까요? 그렇게 하면 젊은이들이 그들 안에 있는 모든 속성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기능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면 이것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생각과 개념들이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할 것입니다. 이 새로운 마음이 모든 일을 가능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성화의 의미
인용문의 마지막 부분을 잘 보십시오. "사람이 새로운 기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무슨 뜻인지 이해됩니까?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사람이 새로운 기능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기능들이 성화된다"라고 엘렌 화잇은 그녀의 기고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화의 의미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기능들이 성화되는 것입니다. 그저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화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이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감정과 새로운 동기에 따라 행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께서 이전의 방향이 아닌 새로운 방향으로 전진하고자 하는 욕망을 더욱 강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습관의 형성
오랫동안 우리가 간과한 것은 습관의 형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습관을 아예 갖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나를 재촉하십니다. 어쩌면 내가 나의 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서 새로운 방향으로 지금 행동하라고 나를 강권하실 수도 있습니다. 성령께 순종하고 따르기로 지금 선택한다면, 다음번에 동일한 선택을 하는 것이 더 수월해 집니다.
그러나 다음번에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내 눈을 또다시 옛 습관대로 사용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믿음 안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나 스스로는 자신을 바꿀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세미나를 진행하고 있는 중에 한 여성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자신과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점심을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물론이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수년간이 부부를 알고 지내던 터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셋은 햇볕이 잘 드는 밖에 앉았습니다. 그때 그녀가 말했습니다. "난 남편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남편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런 나 자신이 밉지만,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할 수도 없고 또 용서하지도 않겠습니다.”
남편 되는 사람이 거기 앉아 아내의 말을 듣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내 쪽에 물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딱 2분 동안 남편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내 안에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물은 것은 그게 아닙니다."라고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부터 딱 2분만 남편을 용서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며, "목사님 생각에는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아직도 내가 묻는 말에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끈질기게 물었습니다. 딱 2분 동안 남편을 용서해 줄 수 있겠습니까?"
"글쎄.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요 뭐!"라고 그녀는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내가 기도하는 대로 따라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머리를 숙였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탁자에 함께 앉아 있었는데, “내가 드리는 기도를 한마디 한마디 모두 따라해야 합니다."라고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혼란스럽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은하지만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절망적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저 자신을 변화시킬 수도 없습니다. 이젠 지쳤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 보시기에 제가 의롭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중한 죄인으로 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위대한 성도로 보십니다. 예수님께서 저의 모든 죄를 다 가지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녀가 기도를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전부 따라했습니다.
"이제 저를 너그럽게 대해 주심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제 안에 깨끗한 마음을 창조하여 주십시오. 지금 이 순간 성령을 통하여 제 마음에 들어 오셔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창조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제마음속에 어떤 생각을 넣어 주시든지 그대로 행할 것을 하나님께 약속드립니다."
그녀는 여기서 멈칫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문장을 반복하였습니다.
"우리가 잠시 기도를 멈춘 순간 어떠한 생각이 제 마음에 들어 오든지 나는 그 생각을 따르겠습니다."
결국 그녀는 마지막 문장까지 따라했습니다. 나는 "감사합니다. 아멘"이라고 말하고는 기도를 마쳤습니다.
그녀가 눈을 떴습니다. 그러곤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던 바로 그 여인에게 어떤 일이 생겼을까요? 여러분이 짐작하는 그대로 입니다. 남편에게 다가가더니 얼싸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왜 이렇게 바보처럼 살았는지 모르겠어요. 용서해줘요."아내는 말을 이었습니다. 나도 당신을 용서합니다."
그러고 나서 부부는 나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우리끼리 좀 걷고 싶은데요. 괜찮겠지요?" 손을 잡고 걷기 시작한지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돌아온 부부는 행복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아내가 먼저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어요!""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 당신은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잊어버리고 하지 않는 바로 그 일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할 수 없다고 불평하는데 시간을 허비합니다. 자책하거나 학대하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믿음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십자가로 다시 돌아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오실 수 있도록 맡겨야 합니다.“
아내는 속에서 용서가 흘러넘치는 것 같았습니다.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남편에게 애원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용서해 주는 거 아닌가요?"라고 내가 물었습니다.
“오, 아니예요. 내가 너무 못되게 굴었던 것 같아요. 남편이 오히려 나를 용서해 주어야 돼요!"라고 아내가 말했습니다.
그녀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분께서는 자신을 변호하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화해와 하나됨과 용서를 바라십니다. 또한 사랑이 마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찾으십니다."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은 투쟁이 아님
하나님께 굴복하는 일이 참 어렵습니다. 왜 단순하게 모든 걸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우리 안에 모시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게 한다면 그분의 사랑, 기쁨, 평화, 그리고 그분의 용서가 모두 우리의 것이 될텐데 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단순한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왜 그런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하는 습관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긴장 상태에 놓이거나 부담을 느끼거나 유혹을 받거나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 불가능한 상황, 특별히 영적인 문제를 만나면 마음을 그리스도께 드려서 마음을 새롭게 하고 그분의 마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다시 십자가로 돌아가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고 그분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 것들에 대한 확신을 강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습관을 전혀 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신 죽을 듯 살 듯 발을 동동 구르고 소리치고 절규하며 예전의 태도에 집착합니다. 절망적인 상황까지 이르고 나서야 도움을 구합니다. 우리는 신성이 인성과 조화를 이루어 우리 안에 새로운 생각이 자리하도록 그리스도로 옷 입는 습관을 형성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그 부인에게 일어난 새로운 생각이었습니다. 남편을 정말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가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떴을 때 10초도 지나지 않아 그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나도 놀랐습니다. 아내가 사랑스럽게 남편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변화를 아내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나에게 깨달음이 왔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일을 마침내 하셨군요. 그녀에게 새로운 생각을 주셨네요.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을 용서하다니요! 그녀에게 새로운 생각이 임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새로운 생각을 불어 넣으셨기에 남편에게 용서를 구한 것입니다. 사실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생각이었습니다. 그녀가 하나님께 자신의 뜻을 내려놓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켜 달라고 완전히 맡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이 그녀에게 임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어려움이 순식간에 해결될 수 있을까요?
내가 중서부 지역에서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을 때, 두 여인이 서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싸움을 벌였습니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대로 서서 머리가 쭈뼛해지는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설교를 중단하고 말했습니다. “모두 밖으로 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여기에는 전혀 은혜를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나는 싸움을 벌인 두 여인을 앞에 앉혀놓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자, 이제..."
갑자기 한 여인이 가로막더니 "말하고 싶지 않아요. 난 저 사람을 용서할 마음이 없어요."라고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여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목사님. 말씀해 주세요. 나의 행동에 대해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렇게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굴복시켰습니다. 다른 여인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습니다. 미안합니다. 우리가 서로 오해를 했던 것 같군요. 함께 일하다보니 내가 용서를 구합니다."
그런데 다른 여인은 방금 용서를 구했던 그 여인을 쳐다보며 "나는 이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해! 사는 날 동안 절대로 용서 못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혼자 생각했습니다. 양과 염소가 따로 없네! 둘 다 잘못했는데, 한 사람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고백과 회개를 했고, 다른 사람은 스스로 경건하고 의롭다는 태도로 증오를 거두려고 하지 않는구나?
"나는 절대로 용서 못해!" 나는 그녀가 내뱉은 이 말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던 중 우리는 용서할 수 없다고 고집했던 그 여인의 집에서 성경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우리가 여기서 집회를 갖는 것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절대로 용서 못한다는 생각을 가진 집에서는 더 이상 세미나를 열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도님도 저 분처럼 그리스도의 마음,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슬픈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고집을 피웁니다.
승리는 항복할 때 이르러 옵니다!
투쟁한다고 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굴복할 때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게 됩니다.
"내용 복습
1.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으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2. 침례의 중요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3. 언제,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의 법의 지배를 받게 됩니까?
4. 성경에서 '악하다'라는 단어는 무엇을 뜻합니까?
5.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육적인 여러분을 영적인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십니까? 그렇게 되면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 앞에 꼭두각시처럼 되는 것입니까?
6. 가장 사악한 죄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이나 피해를 준 사람 모두를 위해 치유의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러분을 사용하실 수 있을까요?
7. 성화란 무엇입니까?
8. 남들과의 차이, 특히 다른 종파의 그리스도인과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9. 습관 형성을 위한 실제적인 방법들을 말해 보십시오.
※묵상을 위한 질문
여러분은 예전의 생각과 예전의 감정과 예전의 행동을 반복하고 있습니까? 이번 장을 통하여 뒤로 물러가 옛길로 가지 않고 오늘 바로 승리를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습니까?
* 적용
하나님께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기능들이 새로운 방향으로 일하게 되는 놀라운 축복을 누릴 수 있는 상황을 보여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이 일에 있어서 성령께서 확신을 주시는 대로 행동에 옮기겠다고 결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