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한 철이 지나면 지렁이 사장들은 다음 해를 대비해 지렁이가 잘 잡히는 밭을 발 빠르게 물색하고 일 년간 독점 계약을 해야 한다. 지렁이라고 무턱대고 아무 골프장에서나 잡는 게 아니었다. 좋은 밭은 가격도 만만치 않고, 선수금도 현찰로 주어야 한다. 다른 사장들과 경합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골프장 지렁이 잡이는 관리인들이 부수입으로 주인 모르게 뒷구멍으로 해먹는 경우가 많다. 세상 물정에 어두워 그런 뒷구멍이 있는 걸 모르는 관리인이 있을 때는 악장수처럼 불타는 혀를 놀려 설득도 시켜야 한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골프장 주인도, 골프를 치는 사람도, 밤새 골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까맣게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구 사장은 사람들이 <다른 밭은 없냐>고 물어도 어물적 넘기는 것으로 보아 달리 확보해 논 밭은 없는 듯 했다. 구 사장이 확보해 놓은 곳은 대부분 느슨하게 관리를 해서 어중이 떠중이가 쉬게 넘볼 수 있는 밭들이었다. 그러니 작황도 좋지 않았다. 그래도 몇 푼 찔러 주기는 한 모양인데, 그게 문서로 작성하고 누가 감시를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얌체들이 끼어 들어 문제가 발생하는 일이 잦았다.
지렁이는 토론토를 중심으로 북쪽과 서쪽에서만 잡혔다. 그것도 3백 킬로미터 내에서만 많이 잡힌다고 했다. 어째서 다 같은 땅인데 토론토에서만, 그것도 북쪽과 서쪽에서만 많이 잡히는 걸까. 모를 일이었다. 구 사장은 캐나다에서가 아니라, <세계에서>까지를 들먹이며 마치 지렁이 박사라도 되는 것처럼 토론토 지렁이를 내세웠다. 나 역시 어디에서 지렁이 잡이라는 희한한 직업이 있다는 걸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비가 촉촉히 내려 지렁이 작황이 좋을 날인데도 정형이 개인적인 볼 일로 결근한 날이었다. 그런 <좋은 날>은 잔디가 있는 곳이면 어디고 지렁이가 널려 있어 굳이 먼 곳으로 갈 필요가 없었다. 그 날 도착한 곳은 처음 와 보는 골프장이었다. 구 사장도 처음인 듯했다.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도둑지렁이를 잡으러 온 것 같았다. 개인 클럽에서 운영하는 모양새로 첫 눈에도 규모는 작아 보였지만 시설물들은 고급스러웠다. 파킹장에는 골프를 칠 날씨나 시간이 아닌 데도 차들이 즐비했다. 구석에서 짐을 푼 우리는 구사장의 지시대로 깊숙이 들어갔다. 우리의 몰골이 사람들에게 목격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을 내려 놓은 구 사장은 도망 치듯 서두르며 오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역시 도둑질이기 때문에 피해 있다 다음날 새벽에 나타날 모양이었다. 짐작대로 지렁이는 즐비하게 나와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어찌하다 방향을 잘못 틀어 오던 길을 되짚어 나오게 되었다. 너무 많은 지렁이가 깔려 있어 땅만 보며 정신 없이 긴 탓이었다. 도깨비불처럼 반짝이는 동료들의 후레쉬 불빛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멀지 않은 곳에 제법 큰 건물 하나가 보였고, 불빛과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흘러 나왔다. 호기심으로 가까이 다가가 보니 창문이 눈높이에 있었다. 무심코 안을 들여다 보던 나는 아, 하고 짧은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비가 추적이는 밖과는 달리 그 곳에는 별천지가 전개되고 있었다. 거기에서는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화려한 파티가 한참 무르익는 중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정장을 넘어, 여자들은 웨딩드레스 같이 화려한 파티복들이었다. 여자들은 하나 같이 <비비안 리>고, 남자들은 하나 같이 <크라크 케이블>이었다. 영화에서처럼 손에다 술잔을 든 채 담소하는 사람도 있고, 중앙에는 우아하게 춤 추고 있는 쌍쌍이 보였다. 춤을 모르는 나는 그게 탱고인지 트로트인지 가늠할 수 없었지만 흘러 나오는 노래는 클래식 이었다. 춤이라면 꽃뱀과 제비가 떠올라 경멸하던 나였지만 생전 처음으로 춤이 멋있다고 생각되었다.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 빙빙 돌아가는 착각에 빠졌다. 거기에다 고개까지 까닥이며 박자를 맞추었던 것 같다. 그때 한 여자가 창가로 걸어 왔다. 나는 내 주제도 잊은 채 <참 예쁘다> 라고 생각하며 넋을 잃고 바라 보았다. 그러다 나와 여자의 눈이 딱 마주쳤다. 여자는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밖이 어둡고 유리에 빗물이 어려 윤곽이 잘 잡히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다 비명과 함께 여자는 쓰러진 듯 했고, 장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번쩍 제정신으로 돌아온 나는 사태를 관망할 것도 없이 어둠 속으로 냅다 뛰었다. 두어 번 엎어지며 지렁이가 쏟아 졌지만 상관할 계제가 아니었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짙은 숲이 있어 그리로 뛰어 들었다. 뛰기보다는 숲 속에 가만히 웅크리고 숨어 있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았다. 멀리서도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창을 통해 보였다. 곧 이어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후레쉬를 들고 나와 건물 주위를 비추고 다녔다.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시 안으로 돌아갔다. 그 때서야 쿵쿵 뛰던 가슴이 좀 갈아 앉았다. 대신 쓸쓸한 생각이 가슴으로 밀려 왔다. 안 젖은 곳이 없어 담배 한 대 피울 수도 없었다. 이렇게 한심한 모습을 아내가 보고 있다면……하고 생각하다가 고개를 세게 저었다.
그 여자는 무엇을 보았을까. 분명 유령을 보았을 것이다. 또 하나의 유령이 탄생한 밤이었다. 세상에 많고 많은 유령은 그렇게 해서 탄생하는 것 같았다.
외국사람이 탄 적도 있었다.. 외국사람이 타기는 처음이었다. 지렁이 차를 타기에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아가씨 두 명이었다. 화장품 냄새가 풀석일 만큼 멋을 부렸는 데도, 차 안의 조악한 분위기에는 별 주저하는 기색이 없었다. 전부들 긴장했다. 농담을 주고 받으며 킬킬대던 사람도 입을 다물다 보니 차 안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거의 대부분이 이민 초년병들라 외국 아가씨에게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했었는데 둘은 스페인어로 말하고 있었다. 스페인어를 안 쓴 게 얼마나 되었다고 나는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끼어들었다. 영어 때문에 막혔던 가슴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둘의 영어 실력도 나만큼이나 서툴렀다. 페루 리마에서 온 아가씨들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해서도 지렁이에는 통 관심이 없었다. 불과 의례적인 몇 마디를 나눴을 뿐인데 다른 사람들에게 눈치가 보이도록 나를 따라 붙었다. 차 안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화려한 몸매였다. 나는 너무 뿌리칠 수도 없어 어정쩡하게 동행하는 꼴이 되었다.
“ 사실은 지렁이 때문이 아니고 미국을 가려고 왔는데요.”
뜸을 들이던 아가씨가 본론으로 나왔다. 짐을 만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과는 엉뚱한 방향이었다.
“ 미국이라뇨? 미국을 가려는데 왜 지렁이 차를 탔죠?”
도무지 모를 말이었다.
“ 누가 그러는데 지렁이 차를 운전하는 한국사람을 만나면 미국으로 가는 길을 안다고 해서요…...”
그랬었구나! 지렁이 차 운전을 하는 사람들이 미국으로 밀입국 시켜주는 일도 하는가 보구나. 하긴, 토론토 근처의 지리는 손금 보듯 하는 사람들이니까……
미국의 유흥업소 쪽으로 가려는 아가씨들 같았다. 처음부터 촌스런 남미의 보통 아가씨들과는 다르다는 느낌이었다.
사실이 구 사장도 그런 일을 한다고 했다. 미국으로 넘겨 주는 데는 돈이 오가는 모양이었다. 아가씨들은 필요하면 몸으로 때우겠다는 식의 얘기를 남의 말 하듯 덧붙였지만, 그 말까지 구 사장에게 전하지는 앉았다. 내가 구전이라도 먹잘까 봐 그러는 지 구 사장은 애써 무덤덤한 척 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도 이러쿵 저렇쿵 일언반구도 없었다. 은근히 한 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 사람들이 있는 기회를 기다렸다.
“ 어찌됐습니까, 페루 아가씨들! 필요하면 몸으로 때우겠다고 하던데?”
일부러 <몸으로 때우> 에다 힘을 주었다.
“ 그냥, 그냥 불쌍해서 넘겨 줬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꿩도 먹고 알도 먹은 것 같았다.
페루 아가씨들. 어쨌든 무사히 넘어 갔음 돈이나 많이들 버시오! 난 진심으로 빌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