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함없이 경기장을 찾아 응원하는 한화의 팬들.
범접하기 힘든 준엄한 표정의 한 사내가 방으로 들어간다.
방으로 들어선 사내는 누워 있는 여자를 내려다본다.
여자는 눈이 부신 듯 사내를 올려다본다.
"오실 줄 알았십니더."
사내는 여자 옆으로 다가가 앉는다.
"산판일 끝내고 왔다."
사내는 가만히 속삭이듯 말했다.
"야. 그럴 줄 알았십니다."
얼굴 가까이 얼굴을 묻는다. 그러고 떤다.
머리칼에서부터 발끝까지 사시나무 떨 듯 떨어댄다.
얼마 후 사내의 경련은 멎었다.
"임자."
"야."
"내 몸이 찹제?"
"아니요."
"우리 많이 살았다."
"야."
내려다보고 올려다본다.눈만 살아 있다.
여자의 사지는 마치 새털같이 가볍게,
사내의 옷깃조차 잡을 힘이 없다.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십니더."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사내는 여자의 머리며 얼굴을 쓰다듬고 자리에 눕힌다.
여자는 이틀을 더 지탱하고 난 뒤에 숨을 거둔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 나오는 용이와 월선이의 마지막 대면 장면입니다. 제가 토지에서 서희와 길상을 제치고 가장 좋아하는 등장인물들이죠. 말수가 없는 잘생긴 사내 용이는 소설의 제목 그대로 땅의 정서가 온몸에 배어 있는 인물이죠. 용이는 무녀의 딸인 월선을 사랑하게 되는데 당시의 시대상이나 가치관은 이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주위의 반대로 이 둘은 실로 굴곡이 많은 사랑을 하게 됩니다. 토지를 읽으며 이들의 사랑을 보고 '아, 나도 한 번 이런 사랑을 해 봤으면'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던 사랑이었죠.
세월이 흐른 뒤 월선은 몸져 눕게 되고 사경을 헤매길 반복하지만 기별을 보내도 용이는 산판에서 요지부동,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보내도 꼼짝하지 않았던 것은 용이의 처절한 자기학대였습니다. '기름을 다 태우고 심지를 태우기 시작한 것처럼'(작자의 표현) 월선이 가느다랗게 생을 지탱하고 있었지만 어쩌면 용이는 자신이 갈 때까지 월선이 기어이 버텨줄 거라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산악자전거에 빠져서 타기 시작한 지 벌써 이십여 년이 다 되어가는군요. 자전거로 온 산천을 무던히도 쏘다녔는데 자전거를 타면서 경험한 추억들도 참 많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평온하고 즐겁게 다니던 라이딩은 얼마 가지 않아 기억에서 대체로 사라지고 그야말로 악전고투했던 라이딩들이 기억에 선명하게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남아 있는 것뿐 아니라 제겐 더없이 소중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섭씨 33도, 34도의 무더위 속에서 이틀 동안 의정부-대전간 460여 킬로미터를 왕복한 라이딩이 그렇고, 4월초 거센 바람을 동반한 찬비를 비옷도 없이 정면으로 받으며 남해안 도로를 새벽부터 밤까지 일주한 일이 그렇습니다. 이른바 꽃길이라는 완만하고 평탄한 임도 라이딩은 기억들이 오히려 단편적으로 남고 또 그마저 흐립니다. 그러나 핸들바가 들릴 정도로 경사가 심한 지옥의 업힐 코스를 오르고 나면 보람은 커녕 너무 힘이 든 나머지 오를 당시에는 "아, 대체 비싼 자전거 사서 뭐하겠다고 이 고생을 하는 겨." 하면서 입에서 욕이 저절로 나오지만 이 또한 나중에 즐겁고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합니다.
사람의 삶이란 참 오묘한 것 같습니다. 평온하고 평범한 일상은 곧 잊혀지기 쉽지만 굴곡이 많고 고통스러웠던 삶은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기 마련인데 세월이 점차 흐르면서 모난 바윗돌이 풍화작용을 거쳐 둥글게 순화되듯 굴곡이나 고통도 순치 과정을 겪으면서 급기야 즐거웠던 추억으로 승화되면서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는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빈농이셨던 제 아버님의 지게는 아버님의 삶의 무게만큼이나 언제나 엄청난 무게의 짐들이 쌓였습니다. 열 살이 되기 한참 전부터 아버님을 따라 쇠스랑이며 곡괭이며 낫자루 등속을 들고 따라다녔는데 얼마 걷지 못해서 손아귀가 아파오는 바람에 연장들을 팔로 안아 보기도 하고 땅에 질질 끌어보기도 하고 어깨에 일부 나눠서 메기도 해 봤지만 그 무거운 짐들을 지시고 고갯길을 두어 번 넘도록 아버님은 거의 쉬시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아버님께서 고생하시는 걸 두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당시엔 무엄하게도 정말 힘들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는데 나이가 든 지금은 그 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울 뿐더러 제 생의 꽃같은 시절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주절거린 건 한화 이글스의 팬들이 생각나서입니다. 이글스 팬들은 오랜 암흑기를 겪는 와중에 다른 팀 팬들의 조롱까지 감수하면서 언제나 '최강한화'를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변함없는 이글스 사랑을 보여왔습니다. 용이와 월선이 말고는(한화팬을 제외하고는) 모릅니다. 팬들의 그 사랑이 얼마나 깊고 숭고하고 여한이 없는 사랑인지요. 저는 그래서 한화팬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한화 이글스의 팬들은 보살이 아닙니다. 보살이라는 겉포장지를 벗기고 보면 그들은 꽃처럼 빛나는 보석입니다.
그나저나 오늘 경기는 쉬는 경기였네요.
좋지 않은 모습이 하루에 몰아서 나온 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 선수들이 오늘 일들을 빨리 잊고
평상심으로 돌아오리라 보여집니다.
언제나 한화 이글스, 파이팅!!!!
첫댓글 청죽님의 삶에 대한 애정과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었네요~
뛰어난 감성은 어릴적 숱한 경험과 인내 등에서 오는 삶의 결실인 듯 보여지네요~
한편의 수필같은 글을 읽으며 참으로 다양한 생각들이 오가는군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서보단 어릴적 시골에서 자랐던 친구들을 보면 전원생활의 순수함이 느껴지고 가끔은 부족함에서 배운 인내와 나눔의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그런 여유가 있으셨네요~
이글스팬들에 대한 나름의 해석에도 깊은 공감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내용도 없이 길기만한 글에 과분한 칭찬이십니다.
오늘 지긴 했어도 우리 선수들 자랑스럽죠?
아! 청죽님... 차라리 작가가 되시지 그러셨나요.. 심금을 울리는 글입니다.
이글을 마지막으로
잠을 청합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
와~막 눙물이 또르르르..감동이 밀려옵니다.
저도 이글스 원년팬으로서 완전 공감하네요.
보살이 아니라 팀이 침체할때는 소리죽여 눈물 머금고 응원했던 사람중 한사람입니다..ㅠㅠ
청죽님 리뷰를 보고 잠이 들었어야 하는데, 어제는 7연승 실패로 인한 급격한 피로로 바로 잠이 들었는데,
아침에야 보게 되었습니다.
갈수록 감동의 질이 깊어지는 청죽님의 리뷰...
유명한 작가이시거나 아니면 재야에 숨어 있는 한화이글스 야구팬 고수분이 필명을 "청죽"으로 만드셔서,,,,
부족한 이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시는것 같네요 ^_^;;;;
감사합니다.......제가 본 청죽님 글중에 두손가락 안에 드는 명문이십니다 ~~ㅠㅠ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한편의 수필을 읽는것 같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명문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없이 아름다운 글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