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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06_주기도01_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누가복음 11장 1~2절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할렐루야! 지금 이곳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지금 이곳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우리도 서로 사랑하고 축복하기 원합니다. 서로 인사합시다.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이 당신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저는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을 배경으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기 원합니다.
조용한 외침들
한주간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평안하셨는지요? 나라는 어수선하고 불안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저는 이것이 건강한 대한민국으로 나아가는 국가적인 몸살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혼란한 틈을 타서 불의한 세력이 다시 권력을 차지하면 안되겠지만 제가 보기에 우리나라 시민의식이 많이 성숙하고 성장했습니다. 어제만 해도 서울 도심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광화문 일대에 주최측 추정 약 20만명, 적어도 15만명 정도의 군중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했습니다. 그런데도 경찰과의 큰 충돌 없이 평화적인 시위로 잘 끝났습니다. 20만명 가까운 인파가 아무런 사고도 없이 시위를 끝낸 것은 참 성숙한 시민의식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폭력을 앞세워 시위를 한다고 주장이 전달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조용하더라도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한목소리로 외치는 구호가 세상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권능을 사용하지 않으셨지만 그 어떤 권세보다 크신 능력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외치셨습니다. 십자가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시는(demonstrate)’ 외침입니다(롬5:8). 저는 NIV영어 성경으로 로마서 5장 8절의 본문을 읽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데모하시듯이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향한 사랑을 외치시는 것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이 강압적인 폭력, 하나님 사이즈의 어떤 강한 권세와 능력으로 압도하며 드러났다면 저는 모세의 시내산 앞에 백성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할지언정 그 사랑에 압도당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비천한 모습까지 사랑으로 품을 만큼 더욱 낮아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 사랑을 외치십니다.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한다!> 그 십자가의 조용하지만 강력한 외침을 듣는 사람은 삶이 바뀝니다. 그 사랑에 사로잡히고 강권되어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능력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조용한 외침들, 그것에는 아주 큰 능력이 있습니다.
다음 주에는 ‘민중총궐기 대회’로 노동자에서 농민들에 이르기까지 더 많은 사람이 모일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일지 모르나 아마도 이런 분위기라면 어제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일 것입니다. 이렇게 모인 작은 촛불들이 큰 힘이 되어 대한민국이 새롭게 되기를 정말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계속 조용한 외침이 있는 평화적인 시위가 이뤄지길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시위대를 막고 서있는 의경들도 모두 우리 대한민국의 청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지 명령에 순종하여 서있을 뿐이지 자의적인 태도로 맞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절대 폭력시위는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의경들 가운데 우리 형탁이가 있었고 이제는 수성이가 있습니다.
수성이가 지난번 짧은 휴가를 왔을 때 통화를 했었습니다. 그때 수성이에게 우리나라의 갈등 현장에 자주 서게 될 것인데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느끼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중보자가 되어 보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욕먹고 또 원치 않는 진압을 하면서 고통스러워하기보다는 하나님이 대한민국의 가장 큰 갈등의 현장에 중보자로 세워주셨다는 생각으로 기도하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희남집사님과 동현집사님도 그러실 것입니다. 어느 누가 자식을 전쟁터 같은 자리에 두고서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교회 부모님들은 더욱 더 대한민국 갈등의 현장을 향한 중보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의 평화를 가지고 오는 중보자로, 화목제물로 이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도 그렇게 세상에 보냄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20: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성이가 대한민국 갈등의 한복판에서 중보자가 되는 것처럼, 우리 삶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 나라의 중보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기도로 기도하기를 배운 사람
이런 생각 속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기도하고 돌아오시는 예수님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1절)”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당시 세례 요한의 공동체뿐만 아니라 많은 공동체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기도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그 단체의 정체를 드러내는 신조, 혹은 비전선언문 같은 성격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같은 이유로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기도, 주기도는 그리스도인 공동체, 예수님의 공동체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드러내는 기도인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새로 입문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기도를 가르쳐왔습니다. 바로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안에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 어떤 삶을 추구하는지가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의 2천년 동안 같은 내용의 기도를 반복해 왔고 지금도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기독교는 나라와 종파를 뛰어넘어서 같은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주기도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우주적인 교회의 기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가장 좋은 대답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란 주기도로 기도하기를 배운 사람”입니다.
주기도문과 독립선언문
그리스도인을 이런 식으로 정의하는 말을 처음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주기도문을 그저 주문을 외우듯 암송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정확하게 이 기도의 내용을 배워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를 한다는 것에는 놀라운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해방된 대한민국에서 그것을 읽는 것은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이미 독립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19년 당시에 독립선언문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두 세 사람이 모여서 함께 암송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일본제국주의에 반역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 안에 담겨진 내용들 때문입니다.
우리가 암송하는 주기도문은 흡사 일제 치하의 독립선언문과 같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을 정신을 차리고 그 의미를 파악해서 읽어보면 그것은 세상의 통치를 받지 않겠다는 선언이고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있다는 선포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따르고 세상과 다른 새로운 삶을 살겠노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주기도를 ‘담력이 필요한 기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일제치하를 살아가는 사람이 독립선언문을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암송한다고 하면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이 될까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은 거의 ‘독립군’ 혹은 ‘독립투사’일 것입니다. 그 사람이 외형적으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력거를 끌던지, 가정주부이든지, 사업가이든지, 그 외적인 일과 관계없이 순사는 그 사람을 독립군이라고 간주할 것입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우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기도입니다. 주기도문을 주문 외듯 외우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의미와 내용을 되새기는 사람, ‘주기도로 기도하기를 배운 사람’은 결국 주기도문 안에 담겨진 삶을 살려고 한다는 뜻에서 ‘그리스도인’ 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로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할 이유를 이제 깨닫게 됩니다. 단순히 글자를 알고 암기하는 것이 ‘주기도를 배운 것’이 아님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께 드리던 자신의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께서 사셨던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삶과 신앙이 많은 차이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과연 주기도의 내용을 다 배우고 이해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게 될까요? 그것이 마술처럼 한순간에 이뤄질 일은 아닐 것입니다. 다시 독립선언문과 그것을 암송하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암송하려는 사람은 자신이 그것을 중얼거리는 것 자체가 위험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본의 순사는 그 사람을 의심하고 잡아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아직 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속적으로 암기하고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 자체가 결국 그는 그렇게 독립선언문의 내용처럼 살려고 하는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주기도를 모든 모임에서 거의 매일처럼 때로는 무의식적으로까지 암송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땅에 임하였으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날은 예수님께서 다시 이땅에 오시는 때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독립군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이땅에서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싸워나갑니다. 그것을 자꾸 되새기며 생각하게 하는 것이 주기도문입니다. 모르고 있을 때는 의미없는 마술의 주문 같은 것일 수 있지만, 알고 배우게 되면 더 이상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주기도문은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자라도록 돕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앞으로 두달동안 주기도문을 조금씩 음미하듯 배우며 2016년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2017년을 ‘주기도를 배운 사람’으로 시작하고 싶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신앙의 위험
제가 주기도를 정말 잘 배워야 하겠다고 생각한 중요한 이유가 한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최근에 목회자들 안에 이슈가 되었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교계에 잘 알려진 어떤 목사님께서 지금 어렵고 혼란스러운 때이니만큼 더욱 더 ‘예수님만 바라보자’라고 하신 말씀이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분은 이미 24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내용으로 책도 쓰시고 세미나도 하시는 깊은 영성을 추구하는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그리고 성도들이 ‘예수님만 바라보자’라고 하는 말이 왜 논란이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처음 최순실씨의 태블릿이 뉴스로 보도가 되고 다음날 대통령 사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대통령이 자신에게 쏟아지던 의혹들을 일부 인정하는 꼴이 되어서 온 나라가 분노하던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이분은 칼럼을 통해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자", "24시간 주님만 생각하자" 같은 내용을 반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공허하고 공허한 얘기, 어떤 진공상태에서 쓰고 있는 얘기 같이 들렸고 이점에 대해 반박하는 글들이 점점 쌓이게 되었습니다.
성도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상관없이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24시간 주님만 생각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일까요? 저는 이것이 개인적인 영성과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많은 유익이 있다고 믿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늘 마음 속에 묵상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가 다윗의 시편 16편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라는 말씀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고 살려는 마음은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는데 유익합니다. 더군다나 신약 성경에서 바울은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을 의식하려고 24시간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정말 필요하고도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칫 24시간 주님만 바라보는 영성 훈련에 의존하면 신앙이 개인적이고 사유화될 위험을 가지게 됩니다. 신앙의 공공성을 놓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개인 영성만을 추구하다가 사회적 영성을 놓치는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보냄받은 자, 보냄받은 그리스도인으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영성 신앙은 아주 세련된 기복신앙의 수준에 머물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다가 예수님과는 전혀 눈이 마주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은 예수님이 바라보고 계시는 영혼들과 세상을 나도 볼 수 있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을 따라가면 세상의 불의와 부정과 폭력에 시달리는 영혼들과 세상의 악한 영들이 보여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과 우리의 눈이 마주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한국교회는 천국과 세상, 교회와 세상, 교회와 가정, 교회와 일터 등에서 복음을 이원론적으로 해석하고 가르치는 일을 너무 많이 오래 해 왔다. 목사님들조차도 이것이 당연히 영적인 일이라고 생각하고, 사회적 영성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신학인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야고보는 참된 경건은 과부와 고아를 돌아보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약1:27).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향해 나의 눈을 뜨는 것이 참된 경건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고 제사를 지내며 성회로 모이고 수많은 제물을 태워 제사 지내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제사와 함께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는 악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이사야1:10-23).
이사야 1:23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우리는 이런 고관들의 모습을 뉴스를 통해서 계속 전해 듣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인들도 많고, 또한 목회자들도 많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걸까요? 그들에게는 개인적인 영성,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잘하는지 모르지만, 사회적 영성, 나와 이웃들, 나와 세상과의 관계에서는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나누어 둘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라고만 생각하는 한 이런 실패는 계속될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는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1:4:20)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과 분리된 이원론적인 삶을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기를 구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 가운데서 드러나도록 구하는 내용입니다. 어쩌면 한국 교회의 위기는 주님의 기도를 목회자가 제대로 가르치거나 배우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 일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천국과 세상, 교회와 세상을 나누는 이원론을 배격합니다. 우리의 삶이 세상과 등지고 나홀로 성을 쌓고 하나님과만 교제하도록 하는 신앙생활은 가짜라는 것을 주기도는 드러냅니다.
기도, 주님의 기도가 필요한 시대
지금은 정말 기도가 많이 필요한 때입니다. 어제 서울을 비롯해서 전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촛불집회를 간간히 뉴스를 통해 지켜보면서 정말 진심으로 기도를 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역사가 새롭게 바뀔 수 있는 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이 있듯이 지금이 우리나라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정말 많은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특히 우리는 36년 일제치하에서 해방되었으나 친일세력을 척결하지 못하였습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을 하야시켰지만 곧 5.16 군사혁명으로 또다시 나라가 새로워질 기회를 잃었습니다. 87년 6.10항쟁을 통해 대통령직선제를 할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되었으나 야권분열로 다시 기회를 잃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시민혁명이 제대로 성공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최순실 국정농단사태로 인해 온국민이 하나가 되어 정권을 규탄하는 일이 이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기회처럼 여겨집니다. 사회의 모든 영역들, 경제, 언론, 기업, 종교(기독교)의 부패세력들이 모두 드러나고 정의롭고 공평한 시스템들이 많이 생겨나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국민을 생각하고 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의로운 지도자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예배와 식사 후에 공동회의를 하면서 여러 안건들을 다루고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기도를 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특히, 우리 교회의 공동기도문을 작성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거창하거나 멋있는 말은 없더라도 진실하게 하나님께 우리의 기도를 올려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계속 ‘주님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배우도록 하십시오'라는 마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암송하고 한주간을 보내고 2016년을 지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치시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도록 은혜와 긍휼을 베푸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61106_성찬_주기도문01_너희는이렇게기도하라.pd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