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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오늘도 예배자로 나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의 삶과 가정 가운데에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앞뒤 좌우 계신 분들과 사랑의 고백, 축복의 인사 나눕니다.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베드로는 열한 사도들과 함께 서서 지금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이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는 것은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요예를 통해 약속하신 성령 강림 사건의 일임을 담대하게 선포하게 됩니다. 성령 강림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큰 계획 가운데 한 부분으로 말세의 때에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시겠다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따라서 다시 오실 주님 재림의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성령의 역사는 계속되는 것이죠. 더불어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부어주신다 하시는 이 약속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것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없기 때문이, 따라서 모든 육체에게 허락하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주로 시인하게 하고 고백하게 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죠.
이처럼 베드로는 설교의 첫 돼지를 자신들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선지자 요엘을 통해서 주신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고 선포하게 된 것이죠.
여러분 이 요엘서의 성취, 이 베드로의 선포는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과 귀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던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굉장히 집중해서 주목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다시 한 번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크게 요청하면서 그들을 더욱 집중시키면서 이제 진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복음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나사렛 예수 새롭게 딱 한 장을 꺼내든 카드가 뭐냐 나사렛 예수라는 것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이 나사렛 예수 이분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진정한 주이시며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본격적으로 설파하게 되는 것이죠. 오늘 말씀을 잘 이렇게 따라가다 보면 진짜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우리가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 땅에서 사역하셨던 부분들, 그 사역을 통해서 예수 자신이 주가 되셨고 그리스도가 되셨음을 증명했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증명해내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매우 존경하고 있던 다윗을 들어 내세우는 거예요. 다윗이 기록한 시편의 말씀 그 말씀을 인용해서 이야기합니다. 바로 시편 16편 그 말씀인데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그리고 부활하셨다. 그리고 그러한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예수가 오셨다. 이 복음의 핵심을 선포하면서 예수가 주이시다라는 것을 두 번째로 이야기해 주죠.
그리고 세 번째는 다윗의 예언 시편 10편을 인용해서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를 끌어올리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그 안치심이 바로 성령 강림 사건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라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예수가 주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게 됩니다. 세 부분을 기억하시면서 오늘 말씀을 이어갔으면 좋겠는데요. 먼저 22절에서 24절의 말씀을 보면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고 순환 부활이라는 핵심적인 단어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셨던 부분들을 이야기하는데 베드로가 지금 모여 있던 많은 군중들을 향해서 외칩니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내 말을 들어보십시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보는 앞에서 그분을 통하여서 여러 가지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을 이야기합니다. 22절 말씀 우리 같이 읽어보실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즉 예수님이 오셔서 하셨던 사역이 바로 증거가 된다는 것이죠. 여러분 예수님께서 3년 공생애를 보내는 동안에 수많은 권능과 기사와 표적들이 일어났던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보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더니 물이 변해서 어떻게 됩니까?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바디메오가 눈을 뜨는 놀라운 기적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자연인이 거친 파도가 잠잠해지는 그러한 역사도 보는 것이죠.
그것뿐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더니 죽었던 나사로 그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역사를 보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이 외에도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며 모든 것을 살리시는 놀라운 능력을 이 땅 가운데서 보여주셨다는 거예요. 이처럼 사역 가운데서 보인 수많은 이적들은 예수가 신적 권능을 지닌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명하기에는 충분하다는 것이죠.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보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실제라면 예수님이 오셔서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살리시는 이러한 놀라운 역사들이 현장 가운데 일어났다면 이것이야말로 그분이 그리스도이심을 주라는 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오셔서 스스로를 증명해 내셨죠.
그리고 베드로는 이어서 그리스도의 대속을 전하게 됩니다. 23절 같이 읽어보실까요?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박아 죽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신 것은 표면적으로 볼 때는 누가 죽인 거예요? 유대인들이 죽인 거죠. 유대인들이 예수를 그들의 권력을 이용해서 죽인 것처럼 보여집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어서 예수님께서 그들이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지만 당시에 있던 유대인들은 어떻게 했어요? 예수가 뭐가 문제가 있으니까 죽었지 그들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아니잖아요. 그렇게 다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보면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해서 권세를 이용해서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이었다. 미리 아심을 따라서 율법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내어주신 것이라고 베드로는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예수가 범죄했기 때문이 아니라 혹은 무능해서 십자가에 허무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예수 십자가의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아래에 있었고 하나님께서 이끌어가시는 대로 함께 동행함으로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죽으심이었다는 따라서 여러분 예수님께서 33세의 젊은 나이에 감당하셔야만 했던 죽음의 원인은 그저 비명 행사가 아니라 인간 구원을 위해 태초에 미리 계획해 놓으신 하나님의 은혜의 장치였다는 것이죠. 결국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의 중심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죠 예수님의 죽으심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러한 헛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모여 있는 자들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십자가 처형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래서 베드로는 사람들이 예수를 죽였지만 하나님께서 살리셨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부활하게 되셨다는 것을 24절로 이어가게 됩니다. 우리 24절 같이 읽어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으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주셨다. 그래서 살리셨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 예수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내셨을까요?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여러분 예수님은 본래 사막의 권세 아래 매일 존재가 아니라는 거예요. 본래 사망의 권세 아래 매여 있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죠. 사망의 지배를 받으실 수 없는 사망의 지배를 뛰어넘는 존재가 예수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볼까요? 예수께서 왜 사망의 존재에 세 사망의 세력이 존재할 수 없는 분이신가? 그것은 단 한 가지 이유죠.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사망의 권세에 묶일 수가 없는 분입니다.
여러분 사망이 왜 찾아왔습니까? 사망 죄의 결과잖아요. 죄의 결과 즉 죄가 없었다면 사망이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죄가 있었기 때문에 사망이 온 거예요. 따라서 첫 번째 아담이 하나님의 명령하신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여러분 아담이 사망을 경험했을까요? 못했을까요? 안 했을 거예요. 그걸 따먹었기 때문에 정녕 죽으리라는 사망이 그에게 임한 것이죠. 그래서 불순종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하신 대로 죽음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인생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손인 모든 인류는 사망의 그늘 아래서 살아가는 불쌍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죠. 그러니 우리에게 사망을 이기시는 이 예수 부활의 소식 그리고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는 이 놀라운 사실이야말로 진짜 복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죄의 대가는 무엇입니까? 죽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 있잖아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이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 아니에요. 여러분 로마서 6장 23절 큰소리로 우리 한번 선포하도록 합니다. 로마서 6장 23절입니다. 시작
죄의 삭은 사망이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처럼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 사건에 대해서 예수는 결코 사막에 매여 있을 수 있는 그러한 분이 아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강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22절, 23절, 24절 이 세 구절을 통해서 우리가 보는 게 뭐예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직접 하신 사역 기적과 표적과 이러한 놀라운 사역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명했고, 22절에서는 대속의 죽음,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이 사건이야말로 그리스도임을 증명하기에 충분했고, 세 번째 부활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멈추지 않고 부활하시는 이 사건이야말로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것이 충분히 증명할 가치가 있다.
여러분 이 세 구절 굉장히 짧잖아요. 짧지만 강력한 복음이 이 안에 담겨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도 예수의 사역, 대수의 죽임, 부활의 영광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임을 믿고 그 복음 안에서 살아가는 믿음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이 부활의 굉장히 중요한 강조점을 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부활 사건을 조금 더 강화시키기 위해서 시편에 기록된 다윗의 말씀을 인용하게 됩니다. 증거로 제시하는 것이죠.
시편 16편 바로 8절에서 11절 말씀인데 원래 이 시편의 말씀을 쭉 읽다 보면 이 내용이 마치 다윗이 부활한 것처럼 느껴지게 읽혀져요. 한번 같이 한번 읽어보실래요. 25절부터 28절 말씀인데 우리 읽어보실게요.
다윗이 그를 가리켜 이르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었으며 나로 요동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혀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도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주 앞에서 내게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므로
쭉 읽다 보면 다윗이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내가 꼭 부활한 자처럼 그렇게 느껴지는 요소들이 이곳저곳에서 보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말씀을 가지고 지금 대중들 백성들에게 이야기합니다. 25절에 그를 가리켜 그는 누굽니까? 예수라는 것이죠. 26절에 육체도 희망에 거한다. 27절에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신다. 27절에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이다. 28절에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다 등 이러한 표현들이 바로 다윗이 예수의 부활을 예언한 것이다라고 선포하는 거예요. 다윗이 쓴 그 시편의 내용은 자신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를 지금 표현하기 위해서 예언한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 베드로는 그 근거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존경하는 다윗도 한 인간이었다. 그는 놀라운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도 죽어서 무덤을 남겼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무덤이 우리 중에 있다. 지금 그것을 선포한 거 29절 읽어보실까요?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에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렇죠 다윗의 묘가 지금 우리 중에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인 예수가 죽지 않고 부활하셨다는 이 사실과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오늘 우리 중에 이 묘가 있다는 이 내용은 완전히 대비되는 것이잖아요. 따라서 베드로는 앞서 인용한 이 시가 다윗의 씨가 아니라 다윗 자신을 이야기하는 시가 아니라 메시아를 강조하기 위한 예언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30절 31절은 뭘 어떤 단어를 꺼집어내냐 하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왕으로 세우셨잖아요.
근데 왕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지자였다는 이야기를 해요. 우리 한번 보실까요? 30절 31절입니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본고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되 그가 음부의 버림이 되지 않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선지자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맹세하셔서 과거부터 알려주셨던 다윗을 통해서 한 사람이 태어날 것이고, 그가 죽고 부활할 것임에 대한 그 사건을 다윗도 알았다는 거예요. 왜 선지자로 세웠기 때문에 그래서 그가 말씀으로 기록해 낸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 의미로 볼 때 다윗은 예수 부활을 예언한 선지자이고요. 예수는 사망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메시아이시고요. 베드로는 예언의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 부활을 증거한 전도자다.
이해가 되시죠? 이해가 되시죠 다윗은 선지자로서 부활에 대해서 예언했고 예수는 직접 오셔서 부활의 사건으로 증명해내셨고 지금 베드로는 그 말씀을 인용하고 또한 부활의 사건을 보고 경험한 것을 전하는 전도자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너희들에게 전파하고 있다는 그래서 32절을 통해 120명 성도가 지금 성령을 받아서 막 방언으로 이야기를 했잖아요. 말씀을 전했잖아요. 이 사건이 바로 그러한 은혜의 사건으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32절 말씀 같이 읽어보실까요?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의 증인이로다.
여러분 이처럼 예수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명백한 진리인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 부활을 부인합니다. 당시에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더 많았겠죠. 우리는 지금 믿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부활이라는 것을 믿고 지금 고백하지만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자고 말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예수는 그렇게 해서 죽었다 허다한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이 많았을 거예요. 그러면서 예수가 무슨 부활이야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죠.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렇고 여러분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요.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적어도 우리의 이성적 판단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우리의 이성적 판단으로 인간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판단 이의 생각으로는 되지 않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핵심 진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실이죠. 그래서 여러분 기독교에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14절을 통해서 이런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실까요?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오.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왜 헛것이 됩니까?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무슨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 여러분 우리는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릴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잖아요. 부활하신 주님이 없다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가 않는 거예요. 물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지는 것이죠. 그러나 거기에서 머물렀다면 그것이 온전한 신앙이 될 수가 없는 것이 부활하셔야만 의가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 우리는 어쩌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부활을 믿지 못하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 시대 말씀. 그런데 여러분 어떠세요? 내가 예수 믿고 살아가면서 이 땅 가운데 열심히 살잖아요. 무엇을 위해 삽니까? 이 땅의 소망을 위해서 삽니까? 부활 소망을 바라보면서 사십니까? 참으로 안타깝고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부활에 대한 신앙, 하늘 소망에 대한 그 소망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이죠. 이 땅의 삶이 더 좋고 이 땅에서의 소망을 누리고 싶고 그 그런 것이 우리에게 더 크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이 우리에게는 바뀌어져야 된다는 겁 적어도 예수를 믿고 예수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다면 우리가 그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이 땅에 매어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지만 하늘 소망을 바라보며 한걸음 한걸음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하늘 가는 밝은 길, 그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죠. 저와 여러분들이 하루하루 살아갈 때 이 부활 소망 가지고 살아가는 하늘 소망 바라보며 살아가는 믿음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한 베드로가 구약 말씀을 인용해서 복음을 선포했던 것처럼 우리도요.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는 구약에 기록되어져 있잖아요. 신약에서는 오실 메시아, 다시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신약이 기록되어져 있잖아요. 우리도 이 말씀을 인용해서 세상 가운데 무엇을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아야 된다는 것이죠. 베드로는 부활의 주님을 주님으로 끝내지 않고요. 이어서 승천하신 예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다윗과 비교하게 됩니다. 우리 33절 말씀을 보실까요? 33절 읽습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심에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
여기 매우 중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죠. 하나님께서 예수를 부활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끌어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히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뒤에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약속하신 무엇을 성령을 누구에게 받아서 아버지께 받아서 누구에게 지금 120명 성도들에게 부어주셨다. 할렐루야 이들이 지금 증언하는 게 뭐예요?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 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분을 승천시키셔서 약속하신 그 성령을 지금 우리에게 부어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방언으로 너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할렐루야 그래서 여러분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어떻게 약속하셨는가 요한복음 16장 7절을 한번 같이 읽어봅니다. 읽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에사가 너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오.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 보내리라.
예수님이 가시면 누굴 보낸다고요? 해사 성령을 보내시겠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야만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그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다. 요한복음 14장 16절도 같이 읽어보실까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성령께서 우리와 영원토록 언제까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함께 하시겠다. 그 성령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겠다.
이렇게 약속해 주신 것이지,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부활하신 예수를 높이 올리셔서 자기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부어주신 것이죠. 그런데 이 승천의 사건 역시도 베드로가 누구의 말씀을 인용하냐 하면 다윗의 시편의 말씀을 인용해서 보충 설명을 하게 됩니다. 우리 34절 35절인데 시편 10편 1편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원수로 내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다윗은 승천했대요 못했대요. 못했다는 거예요. 하지만 예수는 승천하셨다. 이것이 다윗이 예언한 내용 가운데 기록되어져 있다. 지금 베드로와 열란사도 또 120명의 연도들이 있는 그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모여서 듣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선포하는 내용이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게 하셨고 부활케 하셨고 승천케 하셨고, 더불어 어떻게 성령을 지금 이 자리에 보내주셔서 너희가 지금 보고 있지 않느냐 이것이 복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함축해서 그들에게 강력하게 도전을 이야기하며 설교의 마무리를 짓습니다. 30 6절인데요.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한번 같이 읽어봅시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라.
그렇게 말하죠. 이게 무슨 말이겠어요? 하나님께로 부름받은 공동체 신앙 공동체라면 너희가 하나님께 부름받은 신앙 공동체라면 반드시 확실히 알아야 될 것이 있다. 그 내용이 뭐예요? 예수가 뭘 하는 거예요? 따라 합시다.
주와 그리스도
따라합니다.
주와 그리스도
그렇습니다. 예수가 바로 너희의 주가 되셨고, 예수가 바로 너희의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주가 되셨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가 곧 하나님이시다. 예수가 곧 주인이시다. 예수가 바로 나의 삶의 근원이시다. 할렐루야 그리스도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가 곧 메시아다. 예수가 나를 구원하셨다. 이것을 너희들이 받아들여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 성령을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셨는데, 그 성령의 역사로 너희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순간 너희들은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지금 이 베드로가 모여져 있는 수천 명의 유대인들을 향해서 너희가 못 박은 예수 그 예수는 바로 진짜 주님이시고 진짜 그리스도이시다. 이걸 믿기를 원한다. 이걸 지금 전파하고 있는 겁니다. 표면상으로 유대인 너희가 예수를 신성 모독으로 십자가에 못 박은 것. 그 사건.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하심,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 지금 이렇게 이루어졌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는요. 2천년 전에 십자가에 죽으실 때 무능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죄가 있으셔서 죽으신 분이 아닙니다. 단지 저와 여러분들 너무나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 살리시려고 친히 말씀에 따라 죽으시고, 또 우리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로 이끌어주시 승천케 하시고 또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대신 성령님 보내주시고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살아가면 너희도 구원의 은혜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놀라운 은혜를 이 땅에 있는 성도들도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진리 가운데 거하라. 그렇게 오늘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가 나를 위해서 죽고 부활하심을 믿으십니까? 그분이 승천하셔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걸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는 나의 주인이십니다. 할렐루야 예수는 나의 그리스도 구원자 되십니다.
이 놀라운 사건 앞에 엎드려 절하고 경배하며 예배하는 기쁨이 저와 여러분 가운데 풍성하게 넘쳐날 뿐만 아니라 이것이 진리이기에 멈출 수 없는 마음 가지고 세상 가운데 아직 믿지 못하는 그들에게 이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놀라운 기쁨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당시에 있던 이들에게 실제 복음을 전한 거예요. 오늘 돌아가셔서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쭉 묵상하면서 베드로가 왜 이 말씀을 주셨는데 그럼 예수님께서 지금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신 그 사건이 그리스도를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그렇죠.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시는 이 사건 하나님께서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승천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신 것 이것도 하나님께서 하셨다. 그래서 지금 이 현장이 어떻다는 거예요. 성령의 역사로 방언을 하고 너희들이 지금 보고 있다.
근데 그것이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신다. 할렐루야. 그러니 우리가 성령을 구해야 되지 않아요. 우리 안에 성령이 있지만 충만함을 구해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 날마다 성령 충만해서 내가 하루하루 살아갈 때 성령의 손에 붙잡힌 바 되어서 이끌려가게 하시고 바른 길 가게 하시고 주의 말씀을 볼 때 깨달아지게 하시고 깨달아질 뿐만 아니라 그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순종의 삶을 살게 하시고 누가 도우셔야 돼요? 성령이 도우셔야 돼요.
여러분 솔직히 내 힘으로 할 수 없잖아요. 저도 그래요. 저도 아무리 목사라지만 내 마음대로 살아가면요. 그냥 방탕한 인생이에요. 제가 가끔 어떤 생각을 하냐면 가끔 말씀을 드렸잖아요. 무슨 옷을 입느냐에 따라 진짜 달라진다고요. 저도 예비군으로 갈 때 군복 입으면 아무 데나 안 뜨라니까요. 아무 데나 앉아요. 이상해져요. 군복만 입으면 그 군인을 이렇게 나쁘게 축하는 게 아니라 군복만 입으면 편해진다는 거죠.
그만큼 추리닝 입으면 집에서 대굴대굴 구르잖아요. 누가 양복 입고 집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 있습니까? 추리닝을 입었으니까 집에서 구르는 거죠. 예수의 옷을 입으면 바뀌어진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러니까 예수의 옷을 입고 내가 성령 충만함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날마다 날마다 구해야 되지 않겠어요. 하나님 내가 세상에 편한 옷 너무나 많지만 이 편한 옷 입는 거 너무 즐기지 않게 하시고 가끔 입더라도 내가 깨달아질 때 벗고 예수의 옷 입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성령님 좀 도와주십시오. 우리 그렇게 기도해야 되지 않겠어요 그럴 때 성령께서 그래 그래 왔다 왔다 내가 힘 주겠노라 도와주겠노라. 함께 가자. 그래 그 길이 옳은 길이다. 응원하고 힘 주시고 능력 주시는 것 아니겠어요? 저와 여러분 한 주간 살아갈 때 이 성령 의지하고 성령의 도우심 따라서 한 주간도 믿음으로 승리하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