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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매봉재
운곡 조이무
내가 태어난 곳은 충남 청양군 화성면의 작은 산골 마을이다. 이름만 들으면 사람들은 먼저 청양고추와 구기자를 떠올린다. 조금 더 나이가 면 사람들은 구성진 가락의 「칠갑산」을 떠올리기도 한다. 산골 아낙의 한숨과 고단한 삶이 노랫가락을 타고 넘나드는 고장, 산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안개가 늦도록 골짜기에 머무는 곳이 청양이다.
그러나 내게 청양은 고추나 구기자의 고장이기 전에 매봉재의 고장이다.
매봉재는 그리 높지 않은 고개였다. 어른의 걸음으로는 숨 몇 번 고르면 넘을 수 있는 야트막한 언덕이었다. 하지만 어린 내 눈에는 그 너머로 세상이 갈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가 장에 가실 때도 그 고개를 넘었고, 돌아오실 때도 그 고개에서 먼저 모습이 나타났다. 그래서 매봉재는 산의 일부라기보다 기다림이 시작되는 자리였다.
사람은 저마다 마음속에 하나쯤 고개를 품고 살아간다. 누군가는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고, 누군가는 오지 않은 날을 기다린다. 어린 나는 매봉재 위에서 아버지를 기다렸고, 늙은 지금은 그 시절의 나를 기다린다. 기다림은 늘 사람보다 먼저 와서 길목에 앉아 있었다.
우리 마을 산정리에는 선영이 있다. 고조부에서 부모님에 이르기까지 여러 대의 조상들이 산비탈을 따라 잠들어 있다. 족보에는 고려 말 무렵 황해도 연백에서 이곳으로 이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계산해보면 조상들은 칠백 년 가까운 세월을 그 산에 기대어 살아온 셈이다. 왕조가 바뀌고 전쟁이 지나가고 일제의 수탈과 가난한 시대가 밀려왔어도 선영은 말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어릴 때는 묘역을 지나도 그 뜻을 잘 몰랐다. 봉분은 그저 잔디가 잘 자란 둥근 언덕이었고, 비석에 새겨진 글자들은 읽을 수 없는 돌의 무늬였다. 나이가 들어 한 자 한 자 이름을 더듬어 읽고 나서야 그곳이 한 집안의 역사를 품은 자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분들이 흘린 땀과 눈물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선영을 찾을 때마다 나는 조상에게 복을 빌기보다 먼저 고개를 숙인다. 자주 찾아뵙지 못한 죄송함 때문이다. 조상들이 정말 말을 할 수 있다면 덕담보다는 꾸지람 한 번 듣고 싶을 때도 있다.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오래 비웠구나.” 그런 질책이라도 들어야 자손 노릇을 조금은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선산은 죽은 이들의 거처이지만, 산 사람에게는 돌아갈 주소다. 주민등록에는 적혀 있지 않으나 마음속 번지수는 분명하다. 내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돌아갈지를 묻는 날이면, 선영의 오래된 소나무와 봉분들이 먼저 대답한다.
지금은 도로가 뚫리고 자동차가 오가지만, 내가 어릴 적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초가였다. 볏짚을 엮은 지붕 위로 박이 열렸고, 저녁이면 굴뚝마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멀리서 보면 마을 전체가 커다란 솥처럼 보였다. 집집마다 다른 저녁을 끓이고 있었으나 냄새는 골목에서 하나로 섞였다.
농번기에는 품앗이가 생활이었다. 오늘은 우리 집 논을 매고 내일은 이웃집 밭을 갈았다. 잔치나 제사가 있는 날이면 누구랄 것도 없이 부엌과 마당으로 모였다. 가난은 집집마다 비슷해서 굳이 자랑할 것도 숨길 것도 없었다. 쌀독이 비면 이웃집에서 한 됫박을 빌려왔고, 다음 농사에 돌려주었다. 돈은 부족했지만 사람의 손은 넉넉했다.
공동체라는 말을 그때는 몰랐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 뜻 속에서 살고 있었다. 함께하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장례를 치를 수도 없었다. 철학이란 책 속에만 있는 줄 알았지만, 돌이켜보면 함께 삽을 들고 논두렁을 막던 사람들의 등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철학책이었다.
우리 집 뒤편에는 참나무 몇 그루와 낮은 야산이 있었다. 집 앞에는 제법 넓은 텃밭이 펼쳐졌고, 마당 끝의 호박넝쿨은 화장실 지붕을 제 집처럼 점령했다. 감나무 세 그루와 고욤나무는 마당 한쪽에서 사계절을 지켜보았다. 가을이면 감이 익었고, 잘 익은 감 하나가 바닥에 떨어지면 아이들은 벌보다 먼저 달려들었다.
집 옆에는 작은 도랑이 흘렀다. 도랑 건너에는 나보다 한 살 적은 윤수네 집이 있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도랑에 미꾸라지와 송사리가 올라왔다. 우리는 검정 고무신을 벗어 그 안에 물을 담고 물고기를 잡았다. 고무신은 신발이기도 했고, 물통이기도 했고, 때로는 작은 어항이기도 했다. 그 시절 아이들의 장난감은 가난했지만 용도만큼은 풍부했다.
여름이면 우리는 도랑에 발을 담그고 해가 지도록 놀았다. 물속의 돌은 미끄러웠고, 잠자리는 머리 위를 낮게 날았다. 배가 고파야 비로소 집 생각이 났다.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그제야 물에서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하루는 놀랄 만큼 길고 풍성했다.
밤이 되면 등잔불 하나가 방안을 지탱했다. 어머니는 그 아래서 바느질을 했고, 아버지는 볏짚을 다듬거나 이엉을 엮었다. 아이들은 희미한 불빛 가까이로 머리를 모아 책을 읽었다. 등잔 심지가 흔들리면 글자도 함께 흔들렸다. 글자가 흔들리는 탓에 공부를 못 했다는 핑계를 대기에는 어머니의 눈이 너무 밝았다.
가난은 늘 우리보다 먼저 밥상 앞에 앉아 있었다. 농부의 땀은 밭고랑마다 스며들었지만 살림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을 어른들은 자주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가난을 탓하며 주저앉지 않았다. 없는 살림에서도 자식들이 학교에 가야 한다는 마음만은 누구보다 단단했다.
어머니는 청라면 장산리의 넉넉한 집안에서 자랐다. 청라국민학교에 다닐 때 공부를 잘해 육 년 동안 시험에서 세 문제밖에 틀리지 않았다고 자랑하셨다. 처음에는 자식들에게 들려주는 어머니 특유의 과장인 줄 알았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그때 속으로 생각했다. 어머니가 틀린 세 문제 가운데 하나가 아마도 아버지를 선택한 일이 아니었을까.
어머니는 그 말을 들었다면 분명 등짝을 한 번 때렸을 것이다. 그러나 다 망한 양반집으로 시집와 평생 고생하셨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넉넉한 친정에서 자라 가난한 살림으로 들어온 어머니는 밭일과 집안일을 도맡았다. 그 와중에도 자식들 옷을 챙기고 학교 준비물을 마련했다.
나는 책가방을 메고 운동화를 신고 학교에 다녔다. 지금은 너무나 평범한 일이지만 그때 시골집 형편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줄여 우리에게 내주었다. 사랑은 언제나 넉넉한 곳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없는 것 가운데 무언가를 떼어주는 일이 사랑에 가까웠다.
1970년대가 되자 마을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새마을운동의 노래가 스피커를 타고 들려왔고, 초가지붕은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등잔불과 남포등 대신 전깃불이 들어왔다. 처음 전구가 켜진 날, 사람들은 대낮도 아닌데 방 안이 환해진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흑백텔레비전이 있는 집에는 밤마다 마을 사람들이 모였다. 화면은 작았지만 사람은 많았다. 뉴스와 연속극을 보기 위해 방 안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화면 속 배우가 울면 함께 울고, 축구 경기에서 골이 들어가면 온 동네가 들썩였다. 텔레비전 주인은 방 한 칸을 내주고도 대접받았고, 아이들은 앞자리를 차지하려다 어른에게 귀를 잡히곤 했다.
세상은 전깃줄을 타고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변화는 갑자기 모든 것을 바꾸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등잔불을 지키던 사람들은 차츰 바깥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산 너머가 막연한 미지의 공간이 아니라, 버스와 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 이어진 삶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 변화 속에서도 내 유년의 중심에는 매봉재가 있었다.
화성 장은 초닷새를 기준으로 오일마다 열렸다. 장날 새벽이면 아버지는 일찍 일어나 옷을 챙겼다. 짚신이나 고무신에 묻은 흙을 털고, 팔 물건이 있으면 보자기에 싸거나 지게에 얹었다. 아버지는 가족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열었지만, 나는 작은 인기척에도 눈을 떴다.
문밖으로 나가는 아버지의 등은 늘 어두웠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등에는 하루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의 힘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매봉재를 넘어 장으로 갔다. 어린 나는 이불 속에서 그 발소리를 들으며 다시 잠들었다.
장날 오후가 되면 나와 동생은 매봉재로 달려갔다. 아버지가 돌아올 시간까지는 아직 멀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다림은 시계를 볼 줄 모른다.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은 늘 약속보다 먼저 길 위에 나가 있다.
매봉재를 오르는 길섶에는 맨드라미가 붉게 피어 있었고, 이름 모를 풀들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우리는 숨이 차도록 뛰었다. 동생은 아버지가 무엇을 사 올지 물었다.
“오늘은 왕방울사탕일까?”
“지난번에 먹었으니까 오늘은 엿일 거야.”
“사탕 두 개면 형이 하나 더 먹지?”
“내가 형이니까 당연하지.”
동생은 형이란 말이 사탕 한 개를 더 먹는 벼슬인 줄 아는 나를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나타나기 전까지 우리의 협상은 언제나 길었다. 사탕의 개수는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분배는 이미 끝나 있었다.
우리는 고개 위에서 장터 쪽 신작로를 바라보았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사람들, 소를 몰고 가는 장꾼들, 지게를 진 농부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 있는 사람은 모두 아버지처럼 보였다. 걸음걸이가 비슷하면 우리는 벌떡 일어났고, 가까이 와서 다른 사람임을 알면 다시 풀밭에 주저앉았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마침내 아버지가 보였다.
사람들 사이로 천천히 걸어오는 아버지의 모습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한쪽 어깨가 조금 내려가 있었고, 손에는 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나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아버지!”
동생도 뒤따라 불렀다. 우리는 비탈길을 내달렸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 깨져도 아픈 줄 몰랐다. 아버지 손에 들린 보따리만 보였다. 그 안에는 왕방울사탕이나 꿀엿이 들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는 우리를 보며 웃었다. 장에서 막걸리 한잔을 걸치셨는지 얼굴이 불그스름했다. 걸음도 평소보다 조금 가벼워 보였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장날의 막걸리가 아버지의 고단함을 잠시 잊게 해주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넘어지면 사탕도 못 먹는다.”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무릎의 흙을 털어주었다. 보따리를 먼저 달라고 손을 내미는 나를 보고 웃으셨다.
“아버지보다 사탕이 더 반갑구나.”
나는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눈은 보따리에서 떼지 못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속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보따리 안에는 사탕과 엿이 있었다. 때로는 고무공이나 공책 한 권이 들어 있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작은 물건들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우리에게 그것은 세상의 전부였다. 가난한 집의 보따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아버지가 장터에서 우리를 떠올린 시간이 들어 있었다.
사랑은 거창한 말로 오지 않았다. 왕방울사탕 몇 개와 꿀엿 한 줄, 새 공책의 종이 냄새로 왔다. 아버지는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지 않았다. 대신 먼 장터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아이들이 좋아할 것을 잊지 않았다.
집으로 내려오는 동안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손은 거칠고 따뜻했다.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으면 흙과 땀과 막걸리 냄새가 함께 났다. 어린 나는 그 냄새를 그저 아버지 냄새라고 생각했다.
집 앞에는 어머니가 서 있었다. 어머니는 돌아온 아버지를 보면서도 먼저 보따리를 받아 들지 않았다. 대신 아버지의 얼굴과 걸음을 살폈다. 장에서 물건은 잘 팔았는지, 돈은 얼마나 남았는지, 술은 얼마나 마셨는지 눈빛으로 묻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장이 영 시원찮았어.”
그러면서도 우리에게는 사탕을 나누어주었다. 살림은 시원찮았지만 사탕만큼은 빠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한숨을 쉬다가도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며 웃었다. 그 웃음에는 남편에 대한 타박과 자식에 대한 사랑이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부모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받았다. 어머니가 밥을 차리고 아버지가 장을 보고 돌아오는 일을 자연의 이치처럼 여겼다.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부모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줄 알았다. 부모도 지치고 두렵고 때로는 서럽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세월은 유수와 같다는 말을 젊을 때는 상투적으로 여겼다. 그러나 고희에 이르고 보니 세월보다 더 빠른 것은 없는 듯하다. 어느새 나는 그 시절 아버지의 나이를 훌쩍 넘어섰다. 그제야 매봉재를 넘어오던 아버지의 발걸음이 왜 느렸는지 알 것 같다. 보따리보다 무거운 것은 가족에 대한 책임이었을 것이다.
부모님은 이제 화성 산정리 선영에 잠들어 계신다. 산소 앞에 서면 나는 여전히 어린아이 같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 생전에 한 번 더 여쭙고, 한 번 더 손을 잡았어야 했다는 생각만 마음을 맴돈다.
세상에는 너무 늦게 도착하는 말들이 있다.
“고맙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사랑합니다.”
그 말들은 부모가 살아 계실 때보다 떠난 뒤 더 선명해진다. 나는 그 늦은 말을 품고 선영을 내려온다.
지난 십이 년 동안 나는 재난 현장을 다녔다. 홍수로 무너진 농경지와 집터, 산사태로 길을 잃은 마을, 절망 속에 주저앉은 사람들을 만났다. 흙탕물에 잠긴 집에서 젖은 살림을 꺼내고, 무너진 논둑을 다시 세우며 나는 종종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는 평생 큰말 없이 가족을 지켰다. 누군가의 삶을 다시 일으키는 일도 결국 그런 묵묵함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나의 봉사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선행이 아니었다. 부모에게 받은 것을 조금씩 세상에 되돌려주는 일이었다.
효란 부모의 묘소를 자주 찾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살아생전 받은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일, 누군가의 무너진 삶 옆에 잠시 서주는 일도 효가 될 수 있다. 부모가 내게 주신 사탕과 엿은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그것을 건네던 마음은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다.
늦은 나이에 다시 학교에 다니고 책을 읽으며 글을 쓰는 것도 같은 까닭이다. 배움의 문 앞에 서니 더 배우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견물생심이라고 했던가. 젊을 때는 먹고사는 일이 바빠 책을 가까이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남은 시간 동안 내 삶을 문장으로 남기고 싶다.
글을 쓸 때마다 나는 과거와 현재 사이에 작은 다리를 놓는다. 그 다리 위로 아버지의 땀 냄새가 건너오고, 어머니의 바느질하던 손이 돌아온다. 검정 고무신에 송사리를 담던 아이와 재난 현장에서 삽을 든 노인이 한 문장 안에서 만난다.
어쩌면 글쓰기도 기다림인지 모른다. 이미 떠난 사람의 목소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일, 잊힌 풍경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를 기다리는 일이다. 문장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매봉재 너머에서 아버지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일 때가 있다.
아버지는 여전히 보따리를 들고 있다. 나는 여전히 동생의 손을 잡고 고개를 달려 오른다. 무릎이 깨져 피가 나도 멈추지 않는다. 이번에는 사탕을 받기 위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 너무 늦게 깨달은 말을 전하기 위해서다.
“아버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들으셨는지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예전처럼 웃으며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는다. 그리고 보따리를 건넨다. 나는 이제야 그 보따리의 무게를 안다. 그 안에는 사탕보다 더 오래 녹지 않는 사랑과, 가난보다 질긴 희생과, 한 사람의 생애가 들어 있었다.
오늘도 해는 매봉재 너머로 진다. 고개의 능선에 붉은 빛이 오래 머문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쓴다. 문장 사이로 고향의 흙냄새가 스며들고, 아궁이 연기가 천천히 피어오른다.
매봉재는 이제 지도 속의 고개가 아니다. 내 삶의 처음과 끝을 잇는 마음의 주소이며,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을 세상으로 건네는 길이다. 그 고개에서 나는 기다림을 배웠고, 기다림 끝에 오는 사랑을 배웠다.
눈을 감으면 또 한 사람이 고개를 넘어온다.
해 질 무렵의 긴 그림자를 끌고, 한 손에는 작은 보따리를 든 채 아버지가 돌아오신다. 나는 고희의 늙은 몸을 잊고 다시 어린아이가 된다. 그리고 매봉재를 향해 힘껏 달려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