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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 문서
2. 학계의 시대 구분
고려의 시대별 사회지배계층 구분
호족 → 문벌귀족 → 무신 → 권문세족 → 신진사대부
서양의 역사학적 분류인 고대 - 중세 - 근대의 분류에서 중세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가는 논란거리이지만, 주류 학계에서는 고려 시대를 중세로 본다.
통일신라의 경덕왕이 펼쳤던 한화정책이 본격적으로 빛을 본 시대가 바로 고려 시대이다.
고려가 북진을 표방하고 거란을 노골적으로 적대했으며 요나라 역시 중원으로의 팽창을 염두에 둔 탓에 요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로 벌어진 세 차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요, 송, 금과 사대 관계를 맺어도 주권 국가로서 처신해 고려만의 독자적 천하관에 따라 내부에 번국을 설정하고 외왕내제 체제를 유지했다. 이 시기는 북방 민족이 가장 강성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동아시아 세계에서 전체적으로 세력 균형이 이루어지고 각 국마다 황제국 체제를 유지하면서 상대의 황제국 체제를 인정한 탓이다. 이 탓에 거란과 여진을 한족과 다르게 여기는 몇몇 중국인들은 송나라 역사를 흑역사 취급하기도 한다. 수능에선 교육 과정 개편으로 인해 근현대사 위주의 한국사교육이 이뤄진 탓에 분량이 적지만 공무원 시험에선 전체 문제중 20%가 고려와 관련된 문제다.
크게 고려 초기 / 문벌귀족기 / 무신정권기 / 원 간섭기 / 고려 말기로 나누어진다. 각각의 시대마다 지배 계층은 호족 / 문벌 귀족 / 무신 / 권문세족 / 신진 사대부로 나누어진다. 즉, 지배 계층의 교체가 활발했던 시기였다. 따져보면 문벌 귀족은 호족 시기에 6두품 지식인 관료였고, 문벌 귀족 시기 무신 역시 문벌 귀족의 끄나풀 같은 기믹이었으며, 무신 정권 때의 권문 세족은 정권에 빌붙던 삼별초나 문신들에서 생성되었다. 신진 사대부 역시 권문 세족의 바로 밑에 있던 향리들로 고려 때의 중인과 비슷했다. 때문에 귀족적 성격과 역동적 성격이 공존하는 묘한 양상을 보인다. 이는 아래의 내용을 보면 더 자세히 알겠지만, 국가의 시스템은 관료제 체제를 지향했으나 사회는 전대의 귀족 사회 형태를 상당 부분 유지한 게 크다 하겠다.
왕들의 호칭이 조선처럼 모두 조, 종으로 끝나지 않고 24대 원종/충경왕을 끝으로 원 간섭기 시절부터 묘호가 아예 금지되면서 후반부에는 6대의 '충'자 돌림 왕들과 4대의 '왕'이 등장한다. 여기서 충(忠)자 돌림은 2등 시호고, 공(恭)자 돌림은 3등 시호다. 명나라가 고려 / 조선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우왕, 창왕은 폐위된 데다가 왕씨가 아닌 역적 신돈의 자식으로 몰려 "신우", "신창"이라고 기록되었다.
그래서 명나라가 책봉한 왕들이 공민왕 - 공양왕(양위의 의미) - 태조(강헌왕) - 공정왕(조선 정종) - 태종(역시 한자가 다른 공정왕)이 되는 것이다. 이후 명은 랜덤한 이름을 내려준 편이고, 청나라에서는 강자 돌림, 충자 돌림 위주의 시호를 내렸다.
그래서 조선의 '태정태세문단세'처럼 잘 외우지는 않는다. 할 수는 있다. 태혜정 광경성 목현덕 정문순 선헌숙예 인의종 명신희 강고원 충열선숙혜목정 공민 우창 공양 식으로 외우는 소수의 역사 매니아도 있다. 방식의 차이겠지만 작정하고 외우려면 시대별로 구분하면 어려울 것도 없다. 태혜정광경성목현(초기) / 덕정문순선헌숙예인의(문벌귀족기) / 명신희강고원(무신정권기) / 열선숙혜목정(원 간섭기) / 공우창공(말기). 그냥 어디에 써놓고 한번씩 중얼거리면 정치사 틀이 잡혀있는 사람은 금방 외워지는 편이다. 산토끼에 맞춰서 자르면 잘 외워진다고 전파한 모 공시 국사 강사도 있다.
방식은 태혜정광경성 / 목현덕정문순 / 선헌숙예인의 / 명신희강고원 / (여기서 산토끼 리듬이 끝나기에 나머지는 그냥 나열. '충'자 돌림은 가운데 글자로 구분한다.) / 열선숙혜목정 / 공민우창공양
고려의 경우 태혜정광경성목현이나 예인의명 정도까지는 도움이 되는데, 덕정문순선헌숙까지는 워낙 잘나가던 탓에 새로 한 일이 없어서 별 도움이 안되며, 명종 이후부터는 그냥 개판이고, 충자 붙은 왕들은 이미 연대순 개념이 파괴된다. 충렬왕부터 충선왕, 충숙왕과 충혜왕처럼 재위했다 내려오고 복위한 경우도 있으니... 충렬 - 충선 - 충렬 - 충선 - 충숙 - 충혜 - 충숙 - 충혜로 요약된다. 그래서 별 도움이 안되고, 공민왕 이후는 하다보면 그냥 외워지는 식이다.
3. 고려 초기
10세기 초반, 후기 신라(통일신라)가 중앙 귀족들의 왕위 다툼 속에 지방 호족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하자 지방 군벌들이 난립하는 후삼국시대가 벌어진다. 918년, 송악(지금의 개성시)의 고구려계 대호족(옛 고구려 - 패강진 지역인 패서호족) 출신인 왕건이 역성혁명으로 자신의 군주였던 태봉(후고구려)의 궁예를 제거하고 고려를 건국 한것이 시초. 국호가 고려인 건 당연히 고구려 계승 의식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왕건은 견훤의 후백제와 악전고투를 거듭한 끝에 신라의 항복을 받고(935년) 왕위 다툼으로 어지러워진(이때 견훤이 고려로 망명) 후백제 및 군벌들을 누르며(936년) 다시 삼한을 재통일했다.
초창기에는 호족 연합 정권이라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왕권이 불안정했고, 이는 2대 혜종, 3대 정종의 몰락과 요절을 초래했다. 이에 4대 광종은 5대 10국 시대의 혼란하던 중원이나 발해 등지에서 온 귀화인(쌍기 등)들을 적극 등용하고 중국식 중앙 집권화 관제(과거 제도)를 도입하며 고려를 이전 신라보단 한층 발전된 중앙 집권화 관료제 국가로 변모시켜 간다. 신라 하대의 첫 임금인 원성왕이 독서삼품과를 도입하기 했으나 하급 관리에만 제한이 되었다는 한계가 있었다는 점에서 광종의 과거제 도입은 그 의미가 크다. 이렇듯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호족들의 세력을 꺾고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독자적 연호를 쓰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후 북송과 수교(960년)하면서 칭제건원을 폐기한다.
북방에서 발흥한 몽골계 유목민 거란이 993년 고려를 공격했다. 이 중 1차 침입에서는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는다.
이후 중앙 내부의 권력 다툼과 혼란이 생긴다. 광종에게 억눌렸던 호족들의 발언권이 다시 강화되었고 천추태후, 김치양 등의 전횡, 강조의 정변과 왕위 교체 등이 연달아 발생하였다.
그리고 발해를 멸하고 새로이 등장한 거란족이 건국한 요나라와의 전쟁까지 겁쳐 다소 혼란기를 거친다. 요가 연운 16주를 넘어 본격적으로 중원을 노리기 전에 뒷통수 정리를 한답시고 고려를 세 차례에 걸쳐 침공했다가 매번 패배한 여요전쟁이다. 2차 침입 때는 수도 개경이 함락 당해서 현종이 전라도 나주로 피난했다.
다행히 여요전쟁 당시의 요는 유목 민족 특유의 폭발적인 초기 성장 동력을 가지고 있던 시기가 아니었고 요나라 태조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 거의 70년이 지나서 고려를 침공한 것이었다. 제대로 고려를 침략한 2차전쟁 당시의 요 황제 역시 요성종이다. 고려는 이 전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당시의 군사적 최강대국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결과, 요의 연호를 쓰는 선에서 타협하여 실질적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 있었던 대표적 전투가 그 유명한 귀주 대첩.
대 거란전쟁에서 승리한 고려로 인해, 아시아의 세계 질서는 재편된다. 거란을 제압한 고려에 대한 주변 국가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만주 지역의 철리국이 사신을 보내 고려에 귀부하기를 원하는 표를 올렸다. 연이어 탐라국이 곡물을 바치고, 흑수말갈의 추장이 찾아왔다. 고려는 주변 소국을 거느린 나라로 성장해 갔다. 고려는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송나라와 교류를 하고, 거란과도 교류를 하는 독자적인 세력이 된 것이다. 송나라를 대국으로 생각하던 고려의 태도도 달라졌다. 대등한 위치에서 발언권을 행사하려 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거듭되는 전쟁으로 무신의 힘이 증가하면서 고려 최초의 무신란인 김훈·최질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런 사건들은 무신한테 권력을 주면 안 된다는 인식을 왕과 문신들에게 강하게 심어줬고, 이 일 이후로 군사권(지휘권)을 문신에게 일임시키게 되었다. 그래서 서희나 강감찬도 문신 출신들이었다.
6대 성종과 8대 현종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유교와 불교를 혼합한 중앙 집권 시스템이 안정화 되고 1019년에 요나라와의 전쟁도 종결되었다. 이후 고려는 1122년 16대 예종의 승하까지 103년 동안 전성기를 누리게 되며, 그 중에서도 11대 문종 시기를 고려의 국력이 가장 정점이었던 시기로 보고 있다.
4. 문벌 귀족기
전성기를 거쳐가며 고려 건국 초 가장 위협이 됐던 요나라가 내리막을 걷자, 천리장성 너머 성장하던 여진족이 새로운 위험 요소로 떠올랐다. 이에 고려 16대 예종은 국경 안정과 농토의 추가적 확보 등을 위해 윤관에게 여진 정벌을 명하였고 척준경 등의 활약과 더불어 동북 9성을 확보하게 되었으나(1107년) 여진의 강력한 저항으로 결국 다음 해 돌려주게 되었다.
그러나 여진 정벌 직후 흩어진 부족들이 완안아골타 아래 통합된 여진은 금나라를 세운다(1115년). 금은 북송과 연합 작전을 벌여 요를 멸망시킨 뒤 다시 북송의 수도 카이펑을 공략하고 황제와 태자를 비롯한 다수를 포로로 잡아갔다(1126년의 정강의 변). 고려는 그 위세에 눌려 어쩔 수 없이 같은 해 군신 관계를 맺으며 국가의 위신이 이전보다 떨어지게 되었으나, 두 나라의 관계는 외교로서 정리가 됐기에 전쟁은 없었다. 이자겸은 자신의 재산이나 명예를 훼손하고 싶지 않아 전쟁 없이 즉각적으로 군신 관계를 받아들인 것이다. 특히 금나라가 화북을 차지하며 전대의 요나라보다 훨씬 강성한 국가로 발돋움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고려 조정의 선택은 나쁘지 않았다.
한편, 고려의 중앙 정치는 전성기를 거치며 과거제로 중앙 권력에 진출한 관료들이 공음전, 음서, 사학 등을 기반으로 자신의 가문을 귀족화하는 문벌 귀족의 시대가 갖춰지면서 모순이 쌓이기 시작한다. 문종 때 임금의 장인이었던 외척 이자연을 시작으로 경원 이씨(인천 이씨)의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문벌 귀족 사회는 건국 130년~150년 만에 첫 출연한 셈이지만, 문종 이후로 숙종, 예종 등 왕권이 강한 왕들이 많았으며, 숙종은 경원 이씨를 물리치고 왕위를 얻었고, 예종은 경원 이씨와의 결혼을 강행할 만큼 권세가 강했다. 50년~70년의 태평성세를 지나서야 본격적으로 문벌 귀족 사회의 폐해, 정점이라 할만한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그것이 건국 200여 년 즈음인 인종 때다.
17대 인종 때인 이자겸의 난과 함께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이 폭발되었다. 이는 기존의 문벌 귀족과 새로이 귀족 가문이 되고자 하는 신진 관료들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인종 때 벌어진 이자겸의 난, 서경천도운동, 그리고 18대 의종 대의 정치 상황은 모두 이런 갈등의 연장선 상에 있다. 그러나 이자겸의 난 등의 혼란상에도 불구하고 대내외적으로 큰 문제는 없었기에 인종 대와 그 이후 의종 대의 사회는 표면적으로 50년간 다시 안정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문벌 귀족의 집권기 동안엔 송나라를 본딴 문신 편애 및 무신에 대한 차별이 심화되어 갔다. 아예 원조 문신 국가인 북송은 이 정책으로 나라가 유목민의 조공 셔틀이 되었다. 그런데 송나라의 국방력 약화는 문치주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전 시대 절도사의 발호를 반면교사 삼아 내부 반란을 억제하기 위해서만 짜인, 잘못된 군제의 탓이 컸다. 고려는 우선 국초부터 과거에 무과가 없었으며, 무신은 승진에 제한이 있어서 높은 관직을 얻으려면 문신의 품계를 받아야했으며 전쟁에서 지휘권도 문신에게 있었다. 물론 이는 호족과 군벌의 성장을 막기 위한 조치였고, 강감찬, 윤관 등 유능한 문관 지휘관도 많았지만 문벌 귀족 시대가 계속 지속되면서 중앙 정치의 혼란과 함께 문관, 무관을 포함한 관료들 집단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이 자라난다.
5. 무신정권
이런 문무 차별은 이에 따른 18대 의종 대에 향락에 빠진 왕과 전통적 무인 차별 그리고 문신 귀족들에 대한 무신들의 분노 속에 무신정변(1170년, 고려 건국 252년째)을 초래한다. 물론 무신의 정변은 주도면밀한 쿠데타가 아닌 대단히 우발적인 사건이었으며, 의종의 집권 초기 무신 우대 정책이 도리어 무신의 난의 힘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이점에서 왕실과 귀족 대립 사이 자연스레 무사들이 신분으로 부상한 일본의 막부와는 다르다.
이후 고려 왕은 실권은 없는 상징성만 있는 허수아비 존재로 전락하고, 실권은 무신 실권자들이 장악하는 무신정권이 열린다. 허나 무신들이라고 뭐 문신들하고 딱히 다를 바는 없어서, 그냥 지배 세력 이름에서 ㄴ 받침 하나 빠진 격이었고 무엇보다 '힘이 제일'이라 쿠데타 가능성이 높아져 나라꼴은 더더욱 막장이 되어 갔다. 이는 당연한게, 하는 일이 속된말로 쌈박질인데 나라의 수뇌부를 자처하면서 경험도 없이 통치를 하겠다고 나섰으니 이리 될수 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엄청난 권세를 누리면서도 왕을 자처하는 인물은 없었다. 그나마 이의민이 왕이 되려 했으나 결과는 끔살이었다.
5.1. 초기
무신정권 초기엔 무신 정변을 일으킨 정중부와 이의방, 이고 3인방이 권력을 나눠 장악했으나, 다음해 이고가 역성을 일으키려 하자 이의방이 이고를 척살하고 이의방이 우세한 상황에서 정중부와 함께 권력을 장악한다. 그는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보내는 등 본격적으로 권력에 대한 탐욕을 드러냈으나 이의방 역시 3년 뒤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정중부가 권력을 홀로 쥐어잡게 된다.
그러나 5년 뒤 청년 장군 경대승이 정변을 일으켜 정중부와 정균 등을 제거하며 권력을 틀어쥔다. 경대승은 특이하게도 무인 실권자들이 죄다 고려사 반역 열전에 실린 데 비해 유일하게 거기에 실리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이는 그가 근왕적이었고, 또한 청렴하여 측근들의 부패를 단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무신 협의체인 중방을 닫고 자신의 사병인 도방을 활성화시키면서 무신 정권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경대승은 집권한지 4년 만에 젊은 나이로 병사했고, 이에 정중부의 잔당으로 살아남아 경주로 낙향했던 이의민이 실권을 잡게 된다. 이의민은 동경 (지금의 경주시)의 천민 출신으로 무신 정변에 직접 가담했으며, 당시 폐위되어 거제도에 유배가 있던 의종을 직접 시해까지 한 인물. 이의민은 무려 13년동안 집권했는데 십팔자위왕설을 믿고 왕위에 대한 야심을 품었으며 경상도 지역에서 일어난 김사미·효심의 난을 비밀리에 지원하는 등 권력에 대한 야욕을 드러낸다. 그의 아들들 역시 권세를 믿고 오만해져 남의 재물을 함부로 빼앗고 인사권을 통한 전횡을 부리는 등 만행을 저지른다. 그러던 중 거병한 최충헌 형제로 인해 미타산에서 이의민은 살해 당하고, 그의 아들들을 포함한 일가는 멸족 당하고 만다.
5.2. 최씨 정권과 말기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최충헌은 경대승이 취했던 권력 정책을 계승했다. 즉, 중방을 더욱 무력화시키고 자신의 사조직인 '교정도감'을 새로이 권력 기구로 만들고 도방을 부활시켜 사병을 기르는 등 이전 무인들보다 더욱 강력한 독재 체제를 구축한다. 이런 안정된 권력은 최씨 세습 정권으로 이어진다. 이전 집권자들이 당시의 고려 왕 명종과 함께 공존을 했다면 최충헌에겐 그런 건 없었다. 최충헌 시대 25년간 왕은 무려 5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2명은 최충헌이 폐위한 것(명종, 희종)이었고, 거꾸로 두명(신종, 강종)은 옹립했다. 그는 독재 체제를 구축한 이후 권력을 자신의 아들 최우 (혹은 최이)에게 물려줬으나 때마침 몽골 제국이 고려로 쳐들어 오면서 더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건국 313년 만이었다.
한편 그러면서도 반란과 민중 봉기가 중점적으로 폭발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계속되는 수탈로 인한 민생고와 자연재해에 백성들의 생활은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벌 귀족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그동안의 울분을 푼다는 듯 더욱더 착취와 폭정을 일삼게 되었고 이에 대한 민중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러던 중 1173년에 문신 김보당이 의종 복위를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으며, 이듬해에는 서경 유수 조위총이 무신 정권에 반기를 들며 반란을 일으킨다. 그의 반란에 절령 이북의 40여개 성이 호응하는 등 큰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반란은 민중들에게도 번져나가 특별 행정 구역이었던 향, 부곡, 소에 대한 차별 철폐를 내세우며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 망소이 형제가 그리고 최충헌의 사노 출신으로 신분 해방을 꿈꾸던 만적의 난 등이 연달아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 속 옛 삼국의 땅에서 삼국 부흥을 기지로 내세우며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서경에서는 최광수가 고구려 부흥을 명분으로 거사했고 1193년에는 경상도의 운문과 초전 지방에서 김사미와 효심이 각자의 세력을 이끌고 결탁, 거대한 규모의 신라 부흥 운동을 일으켰다. 심지어 여몽 전쟁 도중에는 담양 지역에서 백제 부흥을 명분으로 이연년 형제가 난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런 삼국 부흥 운동은 당시 고려 조정과 무신 정권에 대한 반발심과 착취, 폭정 속 처참한 생활을 이어가던 농민들의 분노에서 비롯된 것이나 그때까지도 삼국 분립 의식이 각 지역에 남아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계속된 민란은 결국 무신 집권기 고려의 혼란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몽골은 고려에 칩입한 거란의 잔당을 함께 물리친 강동성 전투 이후 고려에 큰 은혜를 베풀었다는 듯 만행을 일삼았고 고려는 불만이 가득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몽골의 사신 저고여가 국경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국교는 단절되었고 결국 몽골이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다. 이에 최우를 필두로 하는 최씨 정권은 몽골과의 전면전은 어렵다고 보았으나, 문신들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화친책도 거부하고 입도 정책을 구사한다. 이는 강화도(강도)에 짱박혀 수전에 극도로 취약한 몽골군이 제풀에 물러가도록 하는 방안이었다.
최우는 스스로도 뛰어난 명필이자 문사로 문신들을 중용하면서 성공적으로 고려의 체제에 안착하는데 성공한다. 최우는 입도 정책을 반대한다면 심복 장군들이라 할지라도 목을 날려버렸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본토 침략이 가시화된 3차칩임 이후 육지의 민중들은 전란의 참화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초기에는 처인성 전투 등으로 소규모 몽골군이 쉽게 물러갔지만, 금나라가 멸망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몽골이 파병하는 군대의 규모가 증가하였고, 이 병력이 충주 이남으로 진격하면서 백성들은 진짜 지옥을 맛보게 된다. 그 와중에도 무신 정권과 그 사병 삼별초는 몽골군에 제대로 항거하지도 않았고 조운으로 세금만 걷을 뿐이었다.
각지에선 민중들을 중심으로 전장에 내몰린 힘없는 장수들과 승려, 천민들이 합심하여 죽기 살기로 몽골군에 저항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토호를 주축으로 고려를 배반하고 몽골에 붙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서경(평양 - 동녕부) 주변과 동북면(쌍성 총관부)이 그렇게 넘어가면서 고려의 강역은 사실상 철령, 자비령 이남의 통일 신라 영역 정도로 내려앉았다. 무신 정변이 터진 이후 60년의 무신 정권도 그랬지만, 40년 가까운 대몽 항쟁 동안 고려라는 왕조 국가는 정말로 없는 거라 다름없었다 봐도 무방할 정도이고 고려 본토는 무정부 상태에 가까웠다. 결국 오랜 전란을 버티기 힘들게 되자 최항 - 최의를 거쳐 최씨 정권이 몰락했다.
1259년 고려는 태자를 몽골로 보내 쿠빌라이를 만나 강화(講和)를 논의했고, 이로써 여몽전쟁을 막을 내리게 된다. 태자가 몽골로 간 사이 고종이 승하했고, 이에 태자는 귀국하여 왕위에 올랐다. 몽골과의 강화를 논의하고 온 원종은 전쟁이 끝났기에 개경 환도를 시도했으나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무신 집권자가 된 김준과 이후 집권하게 되는 임연, 임유무 같은 무신 지도자들의 반대로 무산된다. 하지만 이들은 몽골과의 대립을 주장했던 자들로 끝이 좋지 못했으며, 1270년 임유무가 살해당함으로써 1세기 동안 이어진 무신 정권은 무너지게 된다. 무신 정권이 무너지자 개경 환도도 이뤄지게 됐다.
이후 일어난 삼별초의 난의 마지막 항쟁지였던 제주는 탐라총관부로 원에 넘어갔다가 돌아왔다. 삼별초는 자주 정신의 발로라는 측면도 분명하지만 무신 정권의 핵심이었던 친위 세력 최후의 발악에 가까웠다는 한계가 있었다.
6. 원 간섭기
고려는 원의 내정간섭을 받게 됐지만 국체를 보존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이는 당시 국왕이던 원종의 적절한 외교 정책(거래)과 오랜 저항의 결과였다. 특히 원종이 태자 시절 입조하여 직접 교섭한 원나라의 창시자 쿠빌라이 칸(세조)은 세조구제(世祖舊制)안에 '불개토풍(不改土風)', 즉 고려의 풍습과 제도를 바꾸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나 외왕내제는 끝났다. 고려는 이후 몽골의 부마국이 되면서 몽골 문화가 점점 퍼져갔고 (몽골풍) 고려의 풍습도 몽골에 전달되었다 (고려양). 공물에 시달리고 원정에 동원되기도 했으며, 카다안의 침입 같은 사건도 있었다. 그래도 전쟁 자체가 종식된 건 다행이었다.
원나라의 간섭과 함께 원 황제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 충성 충(忠)자로 시작하는 왕들의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반원 자주 정책을 펼쳤다는 공민왕도 왕비는 원의 노국대장공주였다.
때문에 외국에서는 몽골 제국의 지도를 그릴 때 고려를 포함시켜서 그린다. 사실 고려가 점령이 된 건 아니어서 엄밀히 따지면 포함시키면 안되지만 킵차크 한국에 점령되거나 공물을 바쳤던 러시아 공국들 역시 포함된다. 앞서 나왔듯이 원나라 간섭의 단적인 예가 첫 충자 돌림 왕인 충렬왕 때인 두차례의 걸친 쿠빌라이의 일본 원정과 공녀, 그리고 외왕내제 폐지다.
이름 뿐이었던 고려 왕실은 황제국의 부마로서 예전의 왕권을 어느 정도 회복하게 되었다. 심지어 충선왕 때는 원나라의 황위 계승 분쟁에 한몫을 거들어 상실된 영토와 요동 지역을 포괄한 심양왕 (후에 더 높아진 심왕)을 받아서 고려 왕 겸 심양 왕으로 두배의 강역을 다스리던 시절도 있었다. 탐라 총관부와 동녕부 같은 다른 지역은 이미 충렬왕 때인 1290년에 돌려받았다. 한편 심양왕은 충선왕의 관직으로, 이후 고려 왕에게 세습되지 않고 조카 연안군 왕고에게 세습되었으며 5년간의 (명목적) 영광에 그쳤다. 그러나 다루가치나 정동행성 이문소 등 원의 간섭은 계속되었다. 정동행성은 원래 일본 정벌용 임시 기관이었으며 차츰 원나라의 고려 통감부가 되었다.
당시 고려 국왕은 부마국의 반 독립적 왕이지만 사실은 원 제국의 서열 n위 황족이기도 했다. 이 왕들은 고려사 최고의 막장 왕들이 된다. 충선왕은 개혁을 하려다가 실패하고, 후에 권세를 얻은 뒤에는 고려에 돌아오지 않고 원의 수도 연경에서 학문과 수도 생활에만 몰두했으며, 양위를 받아 뒤를 이은 충숙왕도 좀 나았지만 비슷한 템포를 겪다가 결국 역시 양위, 그의 아들 충혜왕은 아예 향음에 빠져 몽골 공주까지 겁탈한 막장 왕이 되어 몽골 사신에게 잡혀가고 아버지 충숙왕이 다시 왕좌를 차지하였다가 사망한 이후에 복위했다가 다시 폐위당했다. 결국 이 시대 왕들의 모순, 즉 권력은 상대적으로 강해졌지만 정작 고려 내에서 그 권한을 이용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밉보이면 폐위되었다가 빌고 빌어 복위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그 점이 이 왕들의 막장화를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원나라를 등에 업고 날뛰는 권문세족(부원배)의 횡포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심해졌다.
여몽 관계 문서에서도 자세한 내용을 확인 가능.
7. 고려 말기
충혜왕의 사후, 충혜왕의 어린 아들인 충목왕과 충정왕이 뒤를 이었으나 둘다 얼마 안 가 요절했으며, 홍건적의 난 등의 반란 크리가 터지며 원 제국은 70년만에 몰락의 조짐을 보였다. 뒤를이어 1351년 왕위에 오른 공민왕(충혜왕의 동복 아우)은 무너져가는 원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반원 정책을 펼쳤다. 고려는 다시 부흥하는 듯 보였다.
공민왕은 대표적 권문세가였던 기씨 일족을 숙청하고 몽골풍의 양식과 변발을 금지시켰으며, 정동행성(특히 이문소)를 폐지한 뒤 군대를 동원해 쌍성총관부를 점령하여 옛 강역을 회복했다(병신정변, 1356). 심지어 일시적이나마 요동을 공격하는 모습에서 정점에 달한 모습을 보인다. 이성계가 압록강을 오녀산성 (졸본)은 물론 요동의 중심부인 요양을 점령한 적이 있으나 군량 부족과 나하추의 게릴라전 때문에 결국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퇴각한 사례. 이 사실 덕분에 위화도 회군에 대한 떡밥이 더욱 풍부해진다.
그러나 중원의 혼란 속에 일어난 한족의 농민 반란군인 홍건적이 수도 개경까지 쳐들어와 공민왕이 안동까지 몽진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규슈의 왜구가 삼남 지방은 물론 서해도 (황해도), 수도인 개경 부근과 지금의 함경도까지 터는 위기의 시대이기도 했다. 이후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신돈 숙청 이후 초심을 잃고 혼군이 되어 횡음에 빠졌고, 결국 시해까지 당하면서 고려 왕조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다. 다만 공민왕의 말년 행보에 대해선 조선 왕조의 개국 당위성을 위한 왜곡이 어느 정도 들어간 게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공민왕의 치세를 기반으로 하여 향리 계급에서 비롯된 신진 사대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원명 교체기로 외적이 침입이 끊이지 않은 혼란 속에 신흥 무인(최영, 이성계) 세력들이 성장한다. 원명 교체기의 혼란 속에 일어난 원나라와의 전쟁, 홍건적의 침입,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등은 탄탄한 사병을 가진 이들이 성장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최영과 이성계는 공민왕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공민왕 시대의 권신 이인임의 지원에 힘입어 왕위에 오른 우왕 대에 이인임을 비롯한 권문세가 일당들을 숙청하고 어느 정도 국가 체제를 재정비하고 본격적으로 요동 정벌을 실현하려는 듯하였으나 당시는 고려 멸망 4년 전이었다.
원간섭기 이후 이 고려 멸망기까지의 상황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실제로는 한국사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헬게이트'에 가까웠다. 계속되는 외부의 침입과 권문세족들이 남긴 각종 폐해로 인해 고려의 민생은 문자 그대로 파탄 상태이었으며 고려 조정의 통제력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황산대첩 등으로 고려의 최고 영웅으로 떠올랐던 이성계가 (지금까지 역사 속의 가장 큰 떡밥이 되는) 위화도 회군을 일으킨다. 가능성이 있었다고 하는 쪽에선, 실제로도 나중에 조선 대에 들어서 태조와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계획하였다는 것과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고려와 조선의 강병이 요동으로 치고 올라오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에 근거를 둔다. 반대 측에서는 성공했다 할지언정 과연 그것이 국가가 재정비되는 시기에 도움이 되었을지는 의문을 제기한다. 새로 일어나는 명과 맞서야 했으니 당연히 엄청난 국력이 소모되었을 터라는 것. 앞서 보았듯이 고려는 압록강을 한번 넘었으나 곧바로 회군했다. 이성계는 최영을 제거, 우왕을 폐위하고 잠시 그의 아들 창왕을 옹립했다가, 그들이 요승 신돈의 자식이라는 선전으로 쫓아낸 뒤, 그 다음 공양왕을 세워 몇가지 개혁안을 수행시켰다. 그리고 이때 정몽주가 이성계를 궁지로 몰며 저항했으나 결국 이방원이 그를 선죽교에서 살해했고, 4개월 뒤(음력 7월 16일) 이성계는 "권지고려국(왕)사"로 선양 찬탈 을 받았다.
고려는 역성혁명의 반발을 우려한 이성계의 조치로 6개월간 이름만 존속되다 1393년 음력 2월 15일 명의 승인으로 조선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고려는 475년만에 멸망했다. 보통 왕씨 왕조가 종말을 고한 1392년을 조선 개국으로 보아 474년만에 멸망했다고 본다. 1403년에야 태종 이방원이 명나라로부터 고명(誥命)과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을 받아 왕호를 쓰기 시작했다.
무려 500년 가까운 기간동안 존속했으나 1170년 무신 정변 이후에는 이미 멸망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위험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는데도 천운인지, 아니면 뒷감당할 수단이 있었는지 꽤 오랫동안 버텨왔다는게 놀라운 역사라 하겠다. 후세의 조선도 왕조 멸망을 가까스로 피한 양란을 겪고도 200년 넘는 시간을 버틴 점은 유사하지만, 조선의 경우 중앙 집권 체제로 고려보다 안정적인 통치가 가능했고, 양란 이후 외세의 침입 이전까지 대체적으로 고려보단 안정적이었다.
8. 여담
8.1. 원 간섭기의 유전적 영향
인터넷의 전문가들은 원나라의 영향으로 한국인의 유전자에도 변화가 생겼다는 소리를 하지만, 유전자풀에 영향을 줄 정도로 몽골인들이 많이 오지는 않았다. 몽골은 오히려 중앙아시아 유전자풀에 영향을 준 정도가 컸다.
일단 유전자의 역사적 영향을 추정할 때는 분자생물학을 통해 측정된 DNA의 돌연변이 정도에 따라 구분된 집단인 하플로그룹을 기본 단위로 사용한다. 하플로그룹은 기본적으로 Y염색체, mt-DNA(미토콘드리아 DNA) 하플로그룹의 2종류가 있는데 역사적 영향을 추정할 때는 보통 Y염색체 하플로그룹을 이용한다. Y염색체는 성염색체의 한 종류이며 유전자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로지 부계를 통해서만 내려오기 때문에 전쟁이나 침략, 정복을 통해 전파되기 쉬워서 역사적 영향은 Y염색체를 지표로 측정하는 경우가 많다. mt-DNA 하플로그룹은 모계를 통해서만 내려오기 때문에 모계지표의 측정 때 이용한다. 이외에도 상염색체의 구성 비율을 통하여 측정하는 방법이 있는데 상염색체는 유전자의 몸통을 이루는 부분이므로 여러 집단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장 효과적으로 나타내긴 하지만 이민족의 소수 유입 같은 경우 세대가 지날 때마다 1/2씩만 유전되는 염색체의 특성상 유전적 영향이 희석되어 버리기 때문에 역사적 영향의 지표로써는 이용이 쉽지 않다.
Y염색체 하플로그룹의 경우 알파벳의 순서가 빠를 수록 더 오래된 그룹이다. 이 항목에서는 C와 O그룹이 추정에 사용되었는데 중 C그룹은 아프리카에서 발생하였으며 아주 오래 전에 아프리카를 출발하여 동남아를 거쳐 동북아로 북상한 그룹이다. O그룹은 시간이 훨씬 지난 다음에 아시아에서 발생하였으며 역시 동남아를 거쳐 동북아로 북상한 그룹이다. C그룹은 아주 오래 전에 아시아에 먼저 도달했지만 이후로도 수렵, 채집이나 유목사회 수준을 벗어나진 않았던 걸로 보이며 농경을 통해 급격하게 숫자를 늘린 O그룹에게 밀려났기에 주로 변방에 분포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인의 경우 Y염색체 하플로그룹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O2b와 O3인데 O2b는 약 40%가 나타났으며 일본인과 퉁구스 계통인 만주족에게서도 나타난 그룹이지만 중국의 한족이나 몽골인 등에게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O3의 경우 중국 한족에게서 가장 많이 나타났으며 만주족에게서는 약 40%, 일본인에게서는 20% 정도가 나타났다.
몽골인의 경우 Y염색체 하플로그룹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C2와 O3인데 인데 C2가 60%, O3가 20% 정도로 나타났다. C2는 한국인에게선 15% 정도가 나타났다. C2는 널리 퍼져 마커에 해당하는 그룹인 C2-M217를 통해 주로 측정되며 세부 구분으로 크게 C2e와 non-C2e(C2b+C2c)로 나뉜다.
C2e는 여러 동아시아 국가에서 골고루 나타나긴 하지만 소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C2-M217의 서브 그룹인 C2e-z1338는 한국인에게서 4%~12%, 일본인에게서 2%~8%로 정도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남중국과 동남아시아와 해안가에서 주로 나타나는 그룹으로 몽골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non-C2e는 주로 C2-M217의 서브 그룹에 해당하는 마커인 C2b-L1373을 통해 측정되는데 몽골인 C2의 약 91%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몽골을 중심으로 해서 높은 빈도로 나타나기 때문에 '칭기즈 칸 모달'이라고도 불리며 몽골인과 역사적으로 복잡하게 얽혀온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과 같은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민족들 및 시베리아를 비롯한 북아시아의 퉁구스계 민족들에게선 50% 정도가 나타났지만 한국인과 일본인에게서는 겨우 0.00784%밖에 나타나지 않았다. 특히 이중 C2c는 몽골인 전체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한국인에게서는 아예 나타나지 않았고 외부 접촉이 적은 시베리아의 북퉁구스 계통 민족인 어웡키족에게서는 60% 이상 나타났다.
즉 한국인의 C2 중 몽골인에게서 주류를 차지하는 non-C2e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특히 만주를 경계로 급격히 줄어드는 모양을 나타냈다고 한다. 종합하면 한국인의 C2는 동아시아에서 민족이 형성되기도 전인 아주 오래 전에 도래했던 유전자의 흔적이 남은 것에 불과하며 한참 뒤인 중세시대에 있었던 여몽전쟁과 원 간섭기에 의해 초래된 유전적 영향은 거의 없었다는 걸 시사한다.
한국인의 유전자가 몽골 및 만주족을 비롯한 여러 북아시아 민족들과 가깝다는 뉴스기사도 있는데 이는 Y염색체 하플로그룹이 아닌 mt-DNA 하플로그룹이나 상염색체 분석을 통해 나타난 결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