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비콰라족’의 가족생활
-『슬픈열대』 <7부 남비콰라족>을 중심으로-
브라질 중부 고원지대에 살고 있는 ‘남비콰라족’에 대한 민족학적 조사는 레비스트로스가 인류학자로서의 충분한 조건을 갖춘 후에 시행된 탐험이었다. 그런 만큼 앞서 이루어진 탐험에서 겪었던 문제점에 대한 충분한 반성과 함께 조사 대상에 대한 면밀한 인식과 편견에서 벗어나려는 충실한 태도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남비콰라족 탐사 전에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와 문명에 관해 서구인이 갖고 있는 편견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 또한 그러한 인식의 결과였다.
레비 스트로스가 만난 남비콰라족은 6개의 가족으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집단이었다. 이들의 생활형태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환경적인 측면이었다. 남비콰라족의 생활영역은 ‘반사막성의 초원, 최악의 불모지역’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냥거리도 없는 최악의 거주지역 중 하나였다. 이들의 생활은 계절에 따라 두 개의 형태로 구분되었는데, 10월에서 다음해 3월까지의 우계에는 언덕 주변에 거주지를 마련하고 곡식농사나 사냥의 정주생활이 이루어졌으며, 다른 기간은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건계의 고달픈 유랑생활을 해야만 했다. 환경적 요인은 남비콰라족의 남녀관계의 성격을 규정지었다. 부부는 집단의 경제적, 심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생활 단위였다. 부부는 구성원들의 존속을 보장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남자의 활동이 중심이 되는 시기는 우계로서 이때에는 농사와 사냥을 중심으로 생활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건계가 되면 농사와 사냥이 어려워지고 여성의 채집 활동에 의존해야 했다. 이들의 가족생활은 서로에 대한 애정과 신뢰로 유지되었고 비록 남성들이 여성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존중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측면은 사회적 활동이나 종교적 의식에서 여성들은 배제되지만 개인적이고 가정적 상황에서는 매우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남비콰라족의 결혼은 소수의 단일집단에서만 짝을 찾을 수밖에 없는 열악한 조건 때문에 특별한 규칙을 갖게 되었다. 결혼의 상대는 ‘교차사촌’인 여성이 대상이 되었다. ‘교차사촌’은 부모와 다른 성별을 가진 형제자매의 자식이며, 부모와 같은 성별인 형제자매의 자식(평행사촌)과의 결혼은 금지되었다. 족장이나 주술사와 같은 인물에게 허용된 ‘일부다처제’ 제도가 결혼의 일대일 대응을 어렵게 하는 경우에는 젊은 남성들에게 ‘동성애’적 관계를 허용하는 방식으로 긴장도를 완화시켰다. 결혼 후 자식의 수는 염격하게 제한되었는데, 젖을 떼거나 때론 3살 되기 전까지는 부부관계가 금지되거나 목욕을 하지 못하는 금기가 적용되었다. 이런 관습은 유랑활동의 어려움에서 파생하였다고 보여 진다. 많은 아이들은 이동에 심각한 어려움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여성들은 아이를 유산시키기 위해 물리적 행동이나 약물에 의존하기도 하였다.
비록 아이들의 숫자는 제한되었지만 아이들과 부모의 관계, 특히 어머니와의 관계는 친밀하고 정감이 넘쳤다. 부모들이 아이들을 때리거나 벌은 주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아이들도 또한 스스럼없이 부모를 상대하였다. 특히 주목할 것은 젊은 여성들과 소녀들의 관계로 이들은 친구와 같이 가깝게 지냈으며 서로를 친근하게 상대하였다. 이러한 집단적 유희는 소녀들의 독립심을 향상시켰고 그들의 자존심을 높여주었다. 아이들은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면 같은 성별의 부모로부터 생활에 필요한 기술과 생존방식을 학습하였다.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친밀한 관계는 가축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들에게 가축은 식용대상이 아니라 친밀함을 나누는 대상이었다.
성인들 사이의 애정관계도 자연스럽고 개방적이었다. ‘사랑하는 것은 즐겁다’라고 특징지을 수 있을 정도로 이들은 일상에서 성에 대한 대화를 편안하게 나누었으며 애무와 애정표현을 숨기지 않았다. 이들에게 쾌락은 육체적인 만족을 뜻하기 보다는 유희적이며 감정적인 만족에 가까웠다. 육체적인 금기나 거부감은 이들에게서 찾기 어려웠다. 이들에게 수치는 육체적인 노출이나 금기가 아니라 마음의 평정이나 흥분과 관련된 문제였다. 이러한 관계는 비록 물질적으로는 어려운 조건이었음에도 서로를 지탱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식량이 부족할 때 서양에서는 한 사람의 양도 되지 않은 적은 음식을 가족 모두가 불평없이 먹는 모습은 가족 간의 신뢰와 애정을 증명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부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부족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은 족장이었다. 족장은 특히 유랑생활인 ‘건계’기간 더 큰 의무와 책임을 담당해야 했다. 사냥과 채집을 지도해야 했으며 다른 부족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추진해야 했다. 족장은 정치적 권력자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족장은 선임 족장의 지명을 통해서 계승되는데, 부족원들의 동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족장의 권위는 명령이 아니라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능력과 솔선수범하는 태도 그리고 타인에게 아낌없이 물자를 제공할 수 있는 관대함에서 생겨났다. 족장이 지게 되는 의무의 가중함 때문에 족장을 거부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족장의 의무를 보완하는 권리로 주어지는 것이 여러 명의 아내를 얻을 수 있는 자격이다. 보통 두 번째로 얻는 부인은 부족의 젊은 여성인데 이들의 역할은 경제적 측면이 아닌 족장에 대한 정서적 위로의 성격으로 주어졌다. 남성들은 보통 여성들과 같이 목욕을 하는 경우가 적은 데, 족장은 이들 젊은 여성들과 같이 목욕을 하거나 놀이를 함으로써 권력에 대한 보상 및 권력의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다.
남비콰라족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구성원들의 효과적인 협력과 자신의 역할에 대한 분명한 책임감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 가족 제도 속에는 레비 스트로스가 이론화시킨 ‘친족의 기본구조’에 대한 핵심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친족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것 중 하나가 ‘결혼할 수 있는 상대와 불가능한 상대를 구분하는 것’(여성의 교환)인데, 남비콰라족 또한 평행사촌과의 결혼은 금지하는 한편 교차사촌과의 결혼만을 허용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 이것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중요한 원리는 ‘증여-답례’의 상호교환 원칙으로 남비콰라족에서 일어난 선교사 학살 사건의 근본적 원인도 이러한 ‘증여-답례’의 원칙에 대한 무지에서 발생하였으며, 결혼제도의 ‘교환’과 마찬가지로 족장의 의무와 권리 또한 ‘족장과 집단 사이에 급부와 특권, 편익과 의무가 끊임없이 갱신되면서 균형’을 통해서 상호교환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첫댓글 - 환경 적응 속에서 탄생하는 문화, 문명, 세계 인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