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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예루살렘 성전에 머무는 ‘성전교회’에서 떠났다. 그러나 카톨릭은 아직도 성전교회와 그 신앙에 머물러 있다.
성당 안에 갖가지 성화나 아이콘과 우상들을 세워놓고 종교개혁 이전의 그 성전교회를 답습하고 있는 모습이다. 유럽 여행을 가서 보면 어느 도시를 가보아도 관광의 중요지점이 성당순례다. 로마의 베드로, 바울성당, 밀라노, 피렌체, 피사의 두오모 성당, 베니스의 마르코 성당,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에 자리한 성심성당, 심지어 독일의 조그마한 시골인 로텐부르그의 야곱 성당 등이 여행자들의 주요 관람루트다.
아름답다. 크고 예술적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생명력과 역동성이없어진 지금 그곳에는 노인들만 모여서 미사 정도 드리고 있다. 대부분의 성당 입장자는 관광객들이며 성당유지비는 관광객들의 입장료에 의지하는 형편이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으로 지어 놨으나 성전의 역할은 물론하지 못하고 있다.
개신교의 예배당은 예배도 드리고, 회의도 하고, 연극,음악,영화 관람도 하고, 각종 공연과 예식도 한다. 이미 우리 성도들의 몸이 성전이며 또한 하나님의 성전인 예수그리스도는 예루살렘성전에만 머무시는 것이 아니라 무소부재하시는 성령님으로 존재하시기도 하기 때문에 중세의 그리고 현재의 카톨릭 같은 성전이 필요 없다.
그래서 카톨릭의 성전이라는 컨셉에서 벗어나 현대적이고 사용상의 편리함이 우선하는 회중의 집합소적이며 기능적인 요소를 우선하는 장소다.
유럽의 그 많은 호화로운 성당들은 옛날 왕이나 거대한 교회세력이 그 힘만 가지고 건물을 건축하였다. 성도들의 정성스런 헌금보다도 권력의 힘에 의존하여 강제적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심지어는 베드로 성당같이 면제부를 팔아가면서 지어진 건물이다.
그러나 우리예배당은 그야말로 수 십년 동안의 기도와 과부의 두 렙돈에서 부터 시작하여 부자의 낙타구입비에 이르는 헌금까지 망라하여 지어지는 玉盒깨뜨리기며 하나님의 대 역사다.
2004년 4월부터 2005년 9월까지의 만리현교회의 본당 建築役事는 단순한 건물 짓기가 아니고 그것이 있기까지의 수 십년 간의 기도와 성도들의 수 많은 옥합 깨뜨리기의 결정체 였다. 강제로 참여해야 한다는 억압이 없었고, 억지로 헌금하라는 강요가 없었고 많이 가진자는 많이 가진 자 대로 없는 자는 없는 자 대로 자신들의 신앙적 양심과 애끓는 신앙심의 發露만이 있었다. 돼지저금통, 수 십년 간의 적금, 집과 땅을 판돈, 결혼반지 판돈, 폐지판돈 등등 교회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는 이해가 어려운 결단이었음을 우리는 확인하였다.
1960년대 까지만 해도 만리동은 서울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발에서 다른지역에 뒤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1970년 들어서면서 서부역이 생기며 도로가 넓어지고 차츰차츰 소위 말하는 서울의 달동네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후에 되어 진 것 이지만 1980년 들어서면서는 더욱 지역적 발전이 눈에 띄게 보이며 1990년대에는 만리동과 중림동과 서계동이 옛날의 허름한 집들이 점차 벽돌 집들로 바뀌고 2000년 들어서면서 공덕동과 중림동일대에는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었고 특히 서울-부산간 KTX가 시작되면서 만리동의 재개발움직임은 아주 현저하게 되었다. 이런 지역환경의 발전을 보며 1970년 4월에 봉헌한 교회당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고 교회도 지역발전과 맞게 발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담임목사와 성도들의 일치된 생각이었다.
정등운목사 은퇴하고 1972년 부임한 제11대 김광원 담임목사는 1976년부터 1970년4월 준공한 만리현 교회 예배당이(본당 85평-150석/부속 건물 15평) 협소하여 여러 가지 불편함과 지역발전에 걸 맞는 만리현교회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새로이 예배당건축하는 문제를 여러 각도에서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불편함이란 만리동 큰 길에서 자동차로 교회에 진입할 수 없고 주차장은 물론 만들 수도 없고 현 교회 건물로는 교회학교 교육을 제대로 시행할 수 없고 교회주변이 민가들로 둘러싸여 건축법상 고층으로 올릴 수도 없는 처지라는 것 이었다.
선임장로인 김병욱장로의 제안으로 1977년 건축위원회 발족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 첫 사업으로 1979년 교회는 효창동에 대지 325평/건물135평을 매입하게 되었다. 매입 후 교회는 현재의 만리현교회의 대지와 건물을 매각하고 그 대금과 교인들의 건축헌금으로 효창동에 연건평 600평의 교회건축을 하기로 하고 구청에 건축허가까지 받게 되었다.
물론 성도들에게는 아래의 투시도까지 제시하여 본격적인 교회건축의 시동을 걸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장로들의 반대와 성도들의 반대에 부딪치게 되어 시행되지 못하고 결국 김광원목사는 1981년 7월 돌연 왕십리교회로 떠난다.
교회 내에서 효창동으로의 교회 이전 건축에 대해서 반대하는 교인들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였다. 하나는 만리현교회는 만리동에 있어야지 효창동으로 가면 만리현 교회로써의 의미가 없어진다. 둘째는 그 효창동 대지 옆 약50미터 되는 곳에 만리현 성결교회라는 비교적 큰 교회가 이미 있는데 그들과 경쟁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 부분에 대한 당시의 김광원담임목사의 술회....
2009년 1월7일 이메일로 역사편찬위원장과 다음과 같은 메일을 주고 받았다.
위원장의 질문: 1977년 부터 교회를 신축하시려고 모든 계획을 세우셔서 진행하시다가 1981년 갑자기 왕십리교회로
이임하셨는데 그즈음의 교회와 목사님의 형편은 어떠하셨는지....
김목사님의 답변: 가장 눈물 나는 아쉬움이었다.
1972년 만리현교회에 부임하던 때부터 1981년 만리현교회를 이임하기까지 만 9년 동안, 내 마음 중심에는
한 시도 성전을 새롭게 지어야겠다는 일념이 떠난 적이 없었다.
마침내 교회적으로 여러 차례 의론 끝에 이 일을 적극 취진하게 되어 신축할 대지마련은 물론, 건축설계와
조감도, 마포구청의 건축허가 등이 모두 갖추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경제적 협력이 어려워 건축헌금도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성전건축을 하지 말자는 의견이 대두 되어, 아쉽게도 이 일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내심
크게 상심도 되고 낙심도 되어 만리현교회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다. 만약 그때 성전건축을 하게 되었다면
그 일은 이루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1981년 11월에 서초동 남산교회 부목사였던 안경철목사가 제12대 만리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 역시 이 건축문제를 제일 큰 일로 생각하여 2005년 9월 새로이 교회본당을 완공 할 때까지 수십년 동안 매년 교회표어를 “새 성전을 주옵소서”로 하였다. 그는 부임하여 협소하고 불편한 교회공간을 해결하기 위하여 전에 담임목사 사택에 세들어 살던 사람들을 우선 내보내고 애찬실로 그리고 분반공부 교실로, 부속 조그마한 방도 기도실(도원부)과 분반공부 교실로 바꾸고 효창동건물 2층을 살림방으로 그리고 나머지 공간은 교회학교 용도로 사용하게 되어 상당한 교회공간을 확보하였다.
안경철담임목사는 1982년 교회표어를 “새 성전을 주옵소서”로 하였다. 그는 이 표어를 2004년 건축 끝날 때까지 23년간 변함없이 내걸었다. 그리고 결국은 해 내었다.
1985년에는 건축위원장이 바뀌어 김창립장로가 위원장이 되면서 교회건축에 대한 여러 가지 안들이 나와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첫째는 전과 같이 효창동에 교회를 신축하여 만리현교회를 이전하는 안, 둘째는 효창동대지와 현 만리현교회 대지를 매도하여 그 대금으로 서부역 쪽으로 내려가서 교회를 짓는 방안 그리고 셋째는 효창동대지를 매도하고 현 위치에 짓는 방안을 여러 해에 걸쳐 논의하였다.
많은 교인들의 의견이 현 위치에 건축하는 것이 좋으니 어렵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어 그럼 이곳에 건축하기위해서 대지를 더 늘여 고층으로도 지을 수 있게 해야한다는 결론을 내려 시간과 비용이 들겠지만 열심히 기도하고 건축헌금을 하기로 했다.
그 첫사업이1986년 7월30일 만리동2가 220-3에 있는 대지 20평을 매입하는 것 이었다. 이후 1998년 12월 17일까지 13년에 걸쳐 지금의 임마누엘교육관 대지 90평과 본당의 대지568평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는 마치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면서 그곳의 이방족속들의 성을 여리고에서부터 시작하여 성7개를 차례로 정복하던 일 같이 한 집 한 집 매입하는 과정은 참으로 힘들었다. 집주인들은 우리의 계획을 알고 시가보다 높은 액수를 요구하였다. 물론 우리교회 교인들도 섞여 있었고 그들은 지금 다 교회를 떠났다.
1994년 다시 건축위원장은 박우상장로 바뀌며 그는 먼저 임마누엘교육관을 건축하는 일에 힘을 쏟아 1999년 7월에 무난히 봉헌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대지 90평에 건평 약250평의 지하1층 지상4층의 건물이며 목사님의 주거시설이 4층에 함께하는 교육관이다. 이때도 물론 교인들은 아무 불평 없이 건축헌금들을 하여 재정상 아무 어려움 없이 기공과 준공을 마치었다. 그리하여 교육시설의 공간을 충분하게 되어 교회학교는 남의 빌딩에 곁방살이하던 것을 면하고 우리만의 공간에서 교육하는 좋은시절을 만나게 되었다.
조성일장로가 건축본부장으로써 밤낮없이 수고를 하였다. 특히 터파기 과정에서 바닥에 경암이 깔려있어 본래의 건물 높이만큼 못 올리어 지하예배당이 완전 지하가 아니고 반 지하가 되는 기술상의 어려움을 극복하느라 건축본부장인 조성일장로가 고생하였다. 이 건축의 와중의 옥의 티라면 건축설계사로 교회에 헌신하려고 마음먹었던 정병배집사 가정이 교회를 떠나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교육관 건축이 끝나고 2002년에 건축위원장은 최홍식장로로 바뀌어 본격적인 본당 건축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우선 동년 7월21일 교회건축선언을 하게 되었고 9월1일부터 3년의 기한으로 건축헌금약정을 받기 시작하였다. 2003년 11월에는 중구청으로 부터 건축허가를 받아 2004년 4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2005년 9월4일 봉헌감사예배를 드림으로 만리현교회 본당건축의 역사를 마치게 되었다.
만리현교회의 온 성도들은 건축시공을 하기 전부터 공동기도문을 작성하여 매일 각자의 집에서 3회이상 그리고 교회의 모든 공식집회마다 공동기도문을 같이 한 목소리로 봉독하였다. 준공검사가 나오고 봉헌감사 예배드리던 날 직전까지....이 기도문은 당시 김범용권사가 초안을 잡고 한민우부목사와 이길종장로가 가다듬어 최종 안경철담임목사의 승락을 받아 코팅까지하여 전 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어 읽게했다.
2004년 봄부터 만리현교회의 주일예배는 근처에 있는 소의초등학교 강당을 한번 사용하는데 20만원을 지불하고 2005년 7월까지 사용하였다. 매주일 아침 9시에는 예배준비위원들이 이길종장로와 황규명권사의 지휘하에 11시 예배를 위한 모든 자리준비를 하였다. 이규봉/박정한성도는 음향준비를 거의 일년 반 동안하며 서로들을 더 알게되었고 성도의 교제를 더 든든히 가질 수 있었다. 찬양대는 연합찬양대를 구성하여 지휘자가 공석임에도 임경희집사가 본래의 지휘자들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지휘를 해주었음이 교인들의 마음에 깊이 각인 되었다.
그 소의초등학교에서의 2005년 8월14일 마지막 예배풍경을 이희원원로장로가 교회홈페이지에 올린 것을 옮겨본다.
★ 제76번째로 마즈막 예배를 드리다 ★
1. 일 시 ; 2005.08.14 11;00
2. 장 소 ; 소의초등학교 대강당(체육관)
3. 참 석 수; 약 220명
4. 주요 예배내용
찌는 뜻한 말복더위에도 불구하고 이른 아침부터 기획팀과
예배위원님들의 마즈막 예배를 위해 준비해놓은 대강당에
전교인이 모여서 봉사의 달 8월 두번째 성일로 기도와 찬양
으로 하나님께 소의학교 대강당에서의 마즈막 예배를 드리다.
예배순서에 의해서 최홍식장로님의 기도 와 안경철목사님의
성경봉독(출애급기 15 ;22-27), 연합찬양대의 "주와 함께 가
는 은혜스러운 찬양에 이여서 "쓴물 과 단물"의 말씀증언으로
많은 은혜를 받은 후 서중석목사님의 축도로 마즈막 예배를 마치다..
2004.년 3월14일 소의초등학교 대강당에서 첫 예배를 드린 후
2005 년 8월14일 76번째로 마즈막 예배를 드릴때 까지 그간
지켜주신 주임의 은혜를 감사를 드리고 매주일 예배준비 와
연합찬양대의 찬양,안내, 차량정리 그리고 어깨티를 두르고 학교 정문 과
후문에서 노방전도를 해주신 남녀선교희 희원 여러분에게 그간의
노고를 진심으로 차하 하는 바입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그간 수고들 하셨습니다 .
5. 주요 알릴사항
1).교희건축 ; 98% 각층별 마무리 작업 중임
2),희 의 ; 예배 후 새성전 203호실에서 기획위원희의 를 가지다.
3) 기 도 희 ; 이번주 금요기도희는 할렐루야 찬양대주관으로 드립
4) 일일수련희 ; 2005,08,14 - 8.15 새성전체험 전교인 일일 수련희
를 개최함
5).준비모임 ; 8월14일 16;00 새성전 203호실에서 봉헌예배 준비
모임을 가짐
6) 퇴 원 ; 조연석 권사님께서 어깨수술하시고 교희출석 하심
7).인 사 ; 교희학교 이우람 선생이 캄보디아 단기선교차 떠나
시고 후임으로 임수정 선생님이 오심
8) 부 의 ; 김효순집사 남편 김종원 성도님이 8월14일 새벽 하나님
의 부르심을 받음
9).기 타 ;
ㄱ. 8월14일 대강당에서 예배후 전교희 비품을 1인1개식
새 성전으로 각자 운반키로 하다.
ㄴ.오늘 76번째 소의초등학교 대강당 에서의 예배를 마
즈막으로 드림으로서 그간 부족하마나 예배내용을
올리는 것도 마주막이 되겠습니다.
그간 많은 협조 감사를 드립니다.
2005.08.14 주일
만리현교회 본당을 건축하는 일은 단순한 건축물을 짓는 사업이 아니엇다. 1982년부터 온 교인들은 우리 교회가 현 위치에서 옮겨지지 않고 짓게 되기까지 새벽기도회 그리고 금요기도회 등 기도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매달렸다. 물론 김광원목사때 준비해둔 효창동대지가 큰 밑받침이 되었고 교육관을 지은지 얼마 안 되었는데 또다시 본당 짓기위한 건축헌금약정에도 모두들 분에 넘칠 만큼의 헌금약정을 하고 대부분 기한 내에 완납함으로 교회는 재정적인 어려움 없이 교회일을 하며 건축은 건축대로 순조롭게 진행하였다. 모두들 벽돌 한 장 한 장 쌓는 마음으로 어린아이로부터 어르신까지 심지어는 돌아가신 분들까지도 후손들이 완납하는 일이 있었다. 그야말로 옥합을 깨는 일들의 모임이 바로 건축헌금약정이요 이행이었다.
하나님께서
효창동대지를 본당건축의 씨앗으로 준비해주셨으니 여호와이레요,
하나님께서
만리현교회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지 않고 현 위치에 짓게 하심은 여호와 닛시요,
하나님께서
건축 중 그리고 건축 후 건축문제로 우리끼리 다투지 않게 하시니 여호와 샬롬이요,
하나님께서
건축 후에는 어려운 이웃들의 병을 고치는 사업을 하게 하시니 여호와 라파이니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건축을 위한 수입/지출 중요내역(2002년 9월-2007년 1월)
수입(단위:원) 지출(단위:원)
효창동대지 매매1,322,294,166 총 건축 공사비 4,471,915,000
건축헌금 2,262,626,786 담임목사아파트잔금273,292,000
재무부 이월 609,000,000 설계 감리비 273,000,000
2005년 차입금 490,577,767 성구/비품구입비 261,017,170
2005년 비품헌금 308,925,091 음향및 조명시설비 159,200,000
2002년8월 이월금274,353,754 차입금상환 224,012,828
이자수입 177,957,879 은행대출상환 80,000,000
2006년 은행대출 150,000,000 주민보상비 24,000,000
2003년 건축적금 138,000,000 건축시공 준비비 17,802,610
소의초등사용료 14,300,000
대출이자 6,284,000
법무사비용 2,521,758
기 타 15,57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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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액 5,733,735,443 총 액 5,730.578.206
잔 액 3,157,237
안경철 12대 담임목사의 교회건축 Episode
내가 시무하는 교회는 거의가 건축과 관련이 되어 있다. 대구제일교회에서도 중심가에 있던 교회가 외곽지역으로 이전하게 되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고 마무리는 하지 못하고 그 교회에서 받은 퇴직금은 그 교회 헌금으로 다 바치고 남산교회에 부임하여 왔는데 남산교회에 오니 회현동에 있던 교회가 3호 터널을 계획한 정부의 시책에 따라 외곽 지역인 서초동으로 이전하게 되어 거의 3년동안을 건축 하였는데 시작한지가 1년이 되어 골조공사만 끝이 난 상태였고 전기도 들어오기 전이다. 나는 그 교회에서 2년 6개월동안 건축 마무리를 하고 그 교회에서 받은 퇴직금도 남산교회에 다 헌금하고 만리현교회로 오게 되었다. 만리현교회도 역시 교회건축이 계획되어 있었다.
효창동부지를 1억 2천만원에 구입하였고 자금마련을 위하여 만리동에 5가정과 효창동에 5가정이 전세로 들어 있었는데 일주일이 지난후 설합을 정리하다 보니 동신건축 종합설계사무소에 의하여 지하1층 지상4층 옥탑2층 연면적 659평으로 마포구청으로부터 1981년 6월 5일부로 허가가 나와 있었다. 처음에는 꿈에 부풀어 이 곳에 건축을 하리라 생각을 하고 기도하면서 진행을 하였는데 그 꿈은 첫 번째 겨울 눈이 많이 오므로 차량운행이 부적절함을 깨닫게 되었고 두번째는 주차장이 지하에 설계되었는데 보일러 실을 빼면 8대 가량세우게 되어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주일이면 8대 가량의 자가용이 교회 주변에 세워야 만 됬는데 미래를 생각하면 그것 가지고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요 세번째는 교회를 건축하려면 세든 가정을 내어 보내야 되는데 그 당시 교회 예산은 약5천 만원정도 이고 전세금은 4천 5백만원이었다.
하루는 용산구청 세무직원이 나를 찾아와 면담을 하였는데 교회라고 할 지라도 세를 받았으면 세금을 내야 한답니다. 이유는 그가 가지고 온 서류를 보여 주는데 아랫층 세든 사람들의 전세금액이 세부적으로 다 기록이 되어있었다. 그분은 마침 어느교회 집사님이라고 소개를 하기에 방법을 의논 하였더니 교육관으로 용도가 나와 있으니 첫째는 세든 사람들을 다 내 보내야 하고 두 번째는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장소의 구체적인 구조변경 과정과 교육용도로 사용하는 현장을 사진으로 찍어 사유서를 제출 하면 된다고 하여 세든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교육관으로 사용해야 되도록 기획 위원회에서 의논을 하였다. 그 당시에 경제적으로 넉넉한 형편이 아니므로 어떤 장로님은 반대도 하였다. 어떻게 하여 이 대지를 구입 하였고 많은 시간을 들이고 돈을 드려 설계허가를 받았는데 젊은 목사가 오더니 물불없이 행한다고 반대다.
기획 위원회에서 이미 결의를 했음에도 나갈 생각들을 안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심지어 아래층 세든 사람들에게 장로님이 와서 안나가도 된다고 이야기를 하여 나갈 생각들을 안했다는 것이다. 어느날 그 가정중 전세금을 제일 많이 내신분과 이야기를 하기에 이르렀는데 우리의 사정이 긴박하다 하였더니 그러면 즉시 나가겠다고 이야기를 하여 5가정중 3가정을 내보내고 아래층을 교육관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토요일이면 학생들이 아랫층에와서 교육도 하고 여름성경학교때는 Camp Fire 도 하였는데 어려운 일은 학생들이 오기를 싫어 한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첫째는 쥐벼룩이 많아서 견딜수 가 없는 것이고 둘째로는 오는길 가는길에 이웃에 있는 성결교회 앞으로 지나가야 되는데 성결교 학생들이 일일이 시비를 건다는 것이다.
쥐벼룩문제는 고양이를 키우는 일이 제일 빠른 길이라는 데 마침 당시 관리 부장이셨던 000 장로님댁에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고 한 마리를 가져오니 새끼 고양이라도 쥐들이 다 달아나 쥐벼룩 문제는 해결을 하고 그 고양이는 거의 8년을 키우다 자연사 되었다.
여러가지 형편에 마음속으로 교회 건축은 만리동 본교회 자리에 지어야 되리라 생각하게 되었다. 그 계획은 첫 번째 건축 위원회에서 부결되었고 강한 저항에 부닦쳤다. 더욱이 소문에 듣기로 환일고등학교에서는 만리현교회 옆 부지를 구입하여 정문을 낸다는 소문도 들렸다. 우리교회가 만리동에 건축하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그 부근의 집을 구입하여야 할 형편이나 기획위원회에서 의논을 하였더니 모두가 다 반대다. 특별히 건축위원장은 완강하게 반대를 했다. 더욱이 만리동 교회를 매각 하기로 하여 시내 모 교회와 타협중이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내용인 즉 서울지방경찰청 교경협의회 친교 모임에서 만리현교회를 구입하려던 목사님으로부터 자세한 내용 설명을 듣게 되었다. 그 당시 만리현교회는 무허가 건물 이어서 매각을 해도 어려운 여건에 포기를 하였다고 한다.
만리동 부근에 집들을 사려고 하면 담임목사 이름으로는 곤란하여 건축위원들에게 의논을 하였으나 한 사람도 나서지를 않고 자신들의 명의로 집이 있음으로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만리동 교회 대지 중 일부는 김정렬 장로님의 명의로 되어 있었고 교회에서 사용하는 땅의 번지는 길 주소로 나와 있고 길 주소는 교회주소로 되어 있었다. 그당시 김정렬 장로님은 와병중이 시므로 속히 이전 하여야만 되었는데 마침 미국에 계시던 이수철 장로님이 오셔서 그일을 심부름 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알고보니 전에 구청에 근무 하신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을 하려면 교통비도 사무비도 섭외비도 있어야 되겠는데 건축위원장 자신은 하지도 않으면서 일하는 장로님에게 교회 돈을 쓰려고 한다고 불만의표시가 강하여 어려움을 호소하시는 장로님과 반대하시는 장로님 사이에서 갈등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힘들었으나 결과적으로 이전을 끝내고 1개월 후에 김정렬 장로님은 소천하셨다.
때마침 서울시 정책에 의하여 무허가 건물을 양성화 해 준다는 소식이 있어. 무허가 건물을 양성화 해야 되는데 그 방법을 모색 하던 중 우리교회가 속해있는 중구청에 이길동 집사님(이덕녀 권사님 장남)이 부임하였기에 부탁을 하였더니 기쁨으로 이일을 담당 하였는데 역시 불만의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길동 집사님은 자신이 설계를 직접하여 인근 친구들의 도움으로 도면을 그려 신청함으로 1985년 9월7일부로 정식 준공 검사를 받았는데 문제는 과태료가 9.393.790만원이 나와 지불하여야 만 되었다. 건축 위원장이신 장로님께서는 이 아까운돈을 쓰면서 허가 받을 이유가 무엇이냐고 반대를 하셨다. 참으로 일하기 힘든 교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불만 하는 이들과 일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야 됨으로 끝까지 시행하여 결국은 부가세포함 하여 1천 1백여만원의 벌금을 지불하고 허가서를 받았다.
얼마후 교회앞으로 폭6m의 도로가 중구청 으로부터 계획결정 되었다는 통보와 더불어 교회 정문부분에 도로로 잘려나가는 부분의 보상금액으로 1천 7백만원을 받게 되었다. 만약에 허가를 받지 아니하였으면 그대로 헐려야 되었겠지만 하나님은 미리 아시고 계획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때마다 일마다 필요한 일꾼을 보내 주셔서 건축하는 일이 잘 진행 되도록 섭리하여주셨음을 진심으로 감사 한다. 주변에 있는 집들은 1986년부터 우리 형님이름으로 구입을 하고 그 다음은 내 이름으로 김창립 건축 위원장을 통하여 한집 한집 사기 시작을 하여 8채를 구입하였다. 승용차 한대도 세울 수가 없어서 옛날 고무 공장을 하던 지금의 주유소자리를 세를 내어 차량을 세워 두는데 불편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몇 년이 자난 후 구입한 6채의 집을 헐어서 주차장으로 사용하기 시작 하자 동리 사람들(집을 판매한 사람들이 속았다며 후회들을 하였다는 소문이다.)
1984년도 3월에 지번 정리를 하였고 그동안 구입한 주택이 10채에 9억7백 9십만원 이었고 대지가 8필지에 9억3천8백9십6만5천원으로 구입 하였다. 시급한 것은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한 시설이 문제이여서 교육관을 짓는 일부터 시작하기로 하였다. 교육관을 지으면서부터 받은 긴장감은 나를 상당히 괴롭게 하였습니다. 동리 사람들의 민원과 설계사와 건축 위원들간의 갈등, 나는 3중고를 치르면서 결과적으로 교육관을 완성하여 하나님께 첫 번째 영광을 돌리게 되었으나 이로 말미암아 몇몇 교우들이 교회를 떠나는 일이 발생하여 매우 마음 아픈 일이었다.
이제는 본 교회를 건축 하여야 되는데 대지(大地)가 협소 함으로 대지 구입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환일학원 이사장이신 김예환 장로님을 만나 대지 구입을 의논한 결과 교회가 필요 하다면 자기 사저로 되어 있는 땅이나 환일학교 명의로 되어 있는 땅을 공시지가로 원하는 만큼 매도 하겠다는 제안이다. 이유인 즉 그땅은 원래 감리교 선교사의 사택으로 쓰던 것을 당시 헐값으로 자신들에게 넘겨주어 그 것을 보답하는 의미에서도 이 기회에 실행하겠다는 말씀이다. 당시 건축위원장이었던 박우상 장로님과 나는 정말 기쁨으로 그 일을 진행 하려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계획을 하였다.
그러나 교회 건축 위원회와 임원회에서는 안 팔리는 땅을 우리가 인심을 쓰면서 살 필요가 없다고 반대가 심하다. 반대가 심할 때 마다 마음은 먹검정이 되어 답답했지만 주님의 뜻이 분명히 있음을 믿고 계속 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236평밖에는 구입을 할 수 없다고 정하였으나 그것으로는 문성빌딩에 연결된 땅으로 말미암아 출입구가 비좁아 어려움이 있어서 결국 268.92평을 구입 하기로 하여 대지를 확보하게 되었다.
때마침 마포 구청에서는 효창동 대지가 마포구청 관할 공용 주차장으로 합당 하므로 구입을 하겠다는 제안을 여러번에 걸처 요구 함으로 매각 하기로 하고 그것이 불씨가 되어서 교회 건축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건축 위원들의 공통적인 의견은 교육관 시설이 200평이 있으니까 본당은 800평 정도로 하자는 의견이다. 많은 교인들의 의견이 대두되자 800평에서 1000평으로 1000평에서 1200평으로 결국은 1400평을 건축 하기에 이르렀다. 건축 헌금에 대하여는 많은 이론들이 있었으나 나는 분명히 믿기는 내가 믿는 하나님은 이미 아시고 많이 진행 하도록 도와 주셨는데 앞으로도 도우실 것을 믿었다. 그것은 빈마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먼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드려야 됨을 믿었다.
그래서 그동안 적립해 놓은 퇴직금 전부를 건축 헌금으로 드렸다. 당시 건축위원회 회계는 나보고 퇴직할 때는 어떻게 하려고 다 드리느냐고 불만이다. 또 나에게 왜? 설교 신간에 건축 헌금에 대하여 강조 하지 아니 하느냐고 불만이었다. 그 때마다 나의 대답은 한가지다. “하나님이 이미 계획 하고 계신데 왜 염녀 하느냐”고 이러한 여러 가지 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모든 성도님들의 기도 특별히 당시 안나 선교회원들은 새벽기도가 끝나면 환일학교 땅을 우리에게 허락 해 달라고 7바쿠씩 돌았던 그 분들의 기도와 정성과 봉사로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됨을 감사 드린다.
건축이 끝난 다음 건축 소 위원과 설계회사 그리고 시공 회사측 대표들과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그동안의 과정을 설명 하게 되었는데;
첫번째 설계회사 측의 내용은 자신들이 설계한 것 보다 더 아름다운 교회가 시공하게 되어 감사 하다는 설명이다. 이유인 즉 우리교회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 열심히 봉사한 설계에 홍진승 권사님 현장감독에 김광남 권사님 과 한덕환 장로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시공회사 측의 설명은 자신들이 많은 교회를 시공 하였으나 만리현교회와 같이 기성대금을 요청하는 대로 현금으로 결재 받은 일이 없었다는 것이며 이런 난 공사에 인사사고가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여러 악조건으로 인한 민원이 예측 되었는데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에 따라 만리동 지역 일대가 재개발이 된다고 공지 되었기 때문에 처음에 몇 가정이 민원을 제기 하였으나 재개발을 이유로 설명을 하여 민원을 최소화 하게 되었다.
세번째 교회측의 설명인데 건축위원 회계의 설명은 담임목사가 설교를 통하여 헌금을 강조 한 일도 없었는데 그렇게 많은 금액이 부족함이 없도록 헌금되었다는 설명이다. 교회 완공과 더불어 봉헌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성도들과 지방교역자 들도 모두가 의아 하게 생각하게 되었으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빚 없이 봉헌하게 되었음은 건축위원장 최홍식 장로님 내외의 헌신과 모든 성도들의 참여가 이루어 놓은 하나님의 축복임을 감사한다.
건축이 끝나자 이제 나의 갈길은 은퇴의 준비다. 마지막 은퇴찬하 예배때에 우리 두 사람은 기도를 하면서 그동안 뫃아 왔던 현금전부를 장학 기금으로 드리기로 하였다. 공교롭게도 나에게 퇴직금으로 교회에서 지급한 금액과 우리가 헌금한 장학기금은 같은 금액이었다. 그러고 보니 만리현교회에서 받은 퇴직금도 전부 만리현교회에 헌금한 것이 되었다. 또한 교회에서는 나에게 분에 넘치는 보답을 해 주심에 먼저 하나님께 그리고 장로님들과 모든 성도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아래 글은 만리현교회 건축시 재무부장을 했던 이길종장로의 체험담이다.
나는
2001년 12월부터 2005년 11월까지 재무부장을 했었다. 그 기간에 교회는 건축을 했다. 직책상 재무부장은 건축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수입과 지출의 세세명목에 다 관여를 했고 마감까지하는 행운을 얻었다. 왜 행운이라는 말을 하냐하면 그 기간동안 교회일반재정과 건축재정합하여 약 80여억원을 관리하면서 단 1원의 오차없이 잘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라고 밖에는 해석이 안된다.
당시 같이 수고했던 재무부원들은....이진태권사(일반회계).이복원집사(장부기재),김범용권사(십일조관리)김경모집사(속회/헌금관리),송지호권사/손영준집사(건축헌금관리)가 수고하셨다.
많은 교회에서 건축을 하면서 재무부정과 재무의 부정확 함으로 인하여 갈등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귀가 아프게 들었기에 더욱 그렇다. 아마 내가 만리현교회를 다니면서 이룬 가장 뜻깊은 일이라면 건축당시의 재무부장을 역임했던 것하고 앞으로 되어질 만리현교회 100년사를 위한 역사편찬위원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만리현교회를 새로이 건축하기로 하고 2002년 9월에 안경철 담임목사님과 최홍식건축위원장의 선포가 있었고 2005년 9월4일 봉헌식이 있었다. 선포하고 정식으로 건축헌금 약정을 실시하고 건축 시행사를 정하고 설계도 준비하고 실제건축을 마치기까지 꼭 36개월이 걸렸다. 그 36개월 동안의 절반에 해당하는 18개월을(2004년 3월-2005년 8월) 광야생활 같은 소의초등학교 강당을 빌려 예배를 보며 우리 모두는 만리현교회의 성도로써 체험적 신앙과 서로 의지하고 힘을 합치는 연습 아닌 실제적 고통을 견디어내고 모두가 승리를 맛본 귀한 18개월의 시간이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가 아니고 무엇이라 할 수 있겠는가?
1)
이 대역사의 총수입은 57억 3,300만원이었고 총비용은 57억 3,000만원이었으니 300만원 흑자였다.
2005년 9월4일 오후3시에 봉헌예배를 드렸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그때 우리는 입당예배를 드려야 맞는 것 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건축헌금 약정한 것이 다 입금이 되지 않아 건축사인 한울건축사에 1억 5,000만원 잔금을 은행대출을 받아 한 달 후 지불하기로 약속하고 봉헌예배를 드렸다. 그러니까 빚이 1억 5,000만원이 있기 때문에 봉헌예배가 아니고 입당예배를 드려야 마땅하지만 그냥 봉헌예배로 하기로 2005년 8월 기획위원회에서 결정했다.
봉헌예배 한 달 후 지급해야 할 1억 5,000만원은 은행대출을 받아 지불하고 교회는 추후 1억 5,000만원을 갚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3인의 장로 정용대장로(선임장로), 최홍식장로(건축위원장) 그리고 이길종장로(재무부장)는 각자 거래은행으로부터 각 5,000만원씩 대출받아 미지불금 1억 5,000만원을 해결하였고 만리현교회의 건축약정헌금 미납한 성도들께서 분발하여 미납금을 전부 납부하였기에 교회는 약 1년 후 2006년 11월까지 1억 5,000만원의 은행대출금을 갚아 모든 건축대금과 은행 빚을 청산하였다.
2)
건축헌금은 건축시작 선언인 2002년 9월부터 건축을 마치고 약정헌금이 모두 들어 온 2007년 1월까지 총 293계좌에 459명이 약 22억 6,262만원을 헌금하였다. 이 인원은 만리현교회의 당회원들과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거의 망라된 인원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중에서 재무부장인 나에게 인상적으로 느껴지는 건축헌금자들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자 한다.
건축위원장인 최홍식장로님과 그 아내 임인경권사(2005년 장로)를 제일먼저 꼽지 않을 수 없다. 부부로써
모범적으로 이 커다란 역사를 이끌고 나가기 위해 정말 옥합을 깨는 결단을 해주셨다. 합하여 8억! 총 건축 약정액의 거의 40%에 이르는 거액이었다. 물론 처음엔 비밀이 지켜졌지만 그 비밀이 얼마나 갔겠나? 모든 교인들이 알게 되었고 이 대역사에 임하는 건축위원장과 건축위원들과 교회당국에 대한 교인들과 만리현교회를 거쳐나가셨던 분들 모두 신뢰하게 되어 그들은 기꺼이 건축헌금약정을 하셨다고 생각한다.
지도자의 솔선수범이 주는 커다란 긍정적 충격이 이 건축이 성공하리라는 예감을 애시당초에 주었던 쾌거라고 생각한다. 특히 임인경권사는 그녀가 대학교수로 임용된 1984년 첫 달부터 부어나가던 적금이 만20년 만기되어 3억에 이르러 모두 드렸다는 후문이었다. 그야말로 옥합을 깨뜨렸다 할 수 있지 않은가?
김병욱장로님! 1977년 초대 건축위원장으로서 1979년 11월 효창동대지 마련을 하셨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효창동대지를 마련한 후인 1982년부터 거의 20년간 매주일 빠지지 않고 당신 혼자서 “벽돌헌금”이란 것을 하심을 만리현 성도들은 기억할 것이다. 교육관건축을 마친 1999년까지 20년 가까이 하셨으니 상당한 액수인데도 본당 건축시에는 별도로 1,340만원을 하셨다. 말년에는 특별한 수입이 없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 액수이시니 이 또한 옥합을 깨뜨림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이미 20여년 전에 만리현을 떠나신 김광원 11대 담임목사님께서도 봉헌예배당일 드렸던 사례비 50만원을 전부 건축헌금으로 드리셨고 30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 가셨던 만리현교회의 올드보이 김원규집사님(김병욱장로님 아들)께서도 320만원!
2003년 2월 새벽 조깅하다 불의의 뇌졸중으로 지금까지 병상에 있는 김상현집사와 그를 지극정성으로 수발들고 있는 만리현의 영원한 성가대 지휘자 박경희 집사님이 1,000만원!
만리현교회에 남아 있었으면 틀림없이 장로와 교회학교교장을 하였을 김경백권사님(김옥수 원로권사님 장남)께서 3,300만원!
만리현교회 시온성가대 지휘자로 열심봉사하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소천하신 박진권사님! 약정하시고 미쳐 못내고 남은 400만원을 당시 아무 수입이 없던 정진희집사께서 완납!
모종의 일로 교회를 떠났던 박갑철권사/맹선영집사 께서도 약정했던 1,750만원을 봉헌예배까지 완납하시던 생각! 실제적으로 만리현교회를 떠나셨던 박문규장로님과 박석진집사도 1,200만원을 약정하시고 완납하셨다.
임인경장로님의 큰 오빠이신 미국에 계신 임인걸박사님께서도 동생부부가 만리현교회의 건축위원장임을 아시고 1,200불을 보내주셨고 만리현교회 연합여선교회에서(당시회장 신우희장로님)는 수년간의 여러 가지 판매사업과 회비의 총합체인 2,200만원을 내셨다. 다른 교회도 그렇다고 한다. 남선교회는 빈털털이! 여선교회는 짱짱한 부자! 옛말이 맞다. 홀아비 3년에 이가 서말이고 과부3년에 쌀이 서말?
안경철담임목사/김인태사모님 부부!
2002년 9월 건축선언 이후엔 단 한번도 예배시간에 광고로 건축헌금을 내라는 언급이 없어 재무부장으로서 몹시 섭섭했었는데 2005년 9월 봉헌예배 후 자축연에서 안경철목사님께 그 까닭을 여쭈어 보았다.
목사님말씀이 교회건축은 인간의 욕심과 인간의 계획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축이 필요한 것이라 동의하신다면 그분께서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여 이룰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에 단 한번도 광고를 안했다. 그래도 우리는 멋지게 해냈잖느냐? 하시는 말씀 듣고 역시 평신도와 목회자의 마인드는 다르구나하고 경탄했었다.
안경철목사님은 당신의 당시까지 25년간의 교회의 퇴직적립금 8,000만원과 별도의 건축약정금 7,000만원을 합하여 1억5,000만원을 내셨다.
처음에는 퇴직적립금 5,000만원과 개인약정 7,000만원 합해서 1억2,000만원을 하신다 했다. 나는 재무부장으로서 목사님께 말씀드리기를 목사님께서 퇴직적립금까지 건축헌금으로 하실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냥 개인약정 7,000만원 만 하시지요.
그랬더니 며칠 후에 다시 나에게 전화하셔서 퇴직적립금 전부와 개인약정 7,000만원 합해서 1억 5,000만원이라는
말씀 듣고 아무 말도 못하고 말았던 기억이 새롭다. 옥합을 깨시겠다는 말씀에 어떤 이의를 달수 있겠는가?
재무부장이므로 모든 약정하신 분들의 전후사정을 대충 알게되고 또 약정한 내용은 정확히 알게되면서 약간의 인간적 생각도 들었다. 아~ 이분이 이정도 밖에?
오~ 이분이 이렇게 많이?
그러나 그건 인간적 타산이고 지금의 내 심정은 모든 분들이 다 자기의 인간적 최선은 다 했으며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다 자기 신앙과 관심의 수준만큼은 했다고 생각한다.
3)
건축비품...
이건 교회건물을 지은 후 그 속에 들여놓을 각종 시설과 집기들을 마련하기위해 별도로 약정을 받고 준비했다.
결과는 93구좌에 146명이었다 액수로는 3억 800만원이었다.
강종규/강종수 형제 그리고 황규명권사님/최행자집사님은 3층 대예배당 강대상 마련에 각각 600만원과 650만원을...
김옥수권사님은 2층 목회실의 집기일체 구입을 위해 1,000만원을...
남경복장로님은 교회 밖의 늘 푸른 만리송 구입을 위해 850만원을..서중석 소속목사님/이정재권사님 그리고 이은숙장로님은 그랜드 피아노 구입을 위해 각각 1,400만원씩 내셨다.
송재필/신우희장로님 내외는 5층 주방의 모든 식기와 집기를 위해 1,400만원을...조성일장로님은 2층 기회위원실의 책상과 의자를 기증하셨다.
이건복/이기원/이대원 형제께서는 2층 목회실의 인테리어공사를 손수하시는 수고를 하셨다.박환규장로님/ 홍난영권사님은 2층 소예배실의 모든 집기를 위해 1억을 헌금하시었다.
안경철 담임목사님 께서는 3층 대예배실의 전자올갠을 위해 3,100만원을 헌금하셨다.
무엇보다 특이한건 안경철 담임목사님의 교회학교 제자라 하시는 부평교회 홍은파 목사님 께서 2층 소예배실의 음향시설을 위해 500만원을 헌금하셨다.
지금 우리가 쓰고있는 거의 대부분의 교회집기들...장의자로 시작하여 그랜드 피아노, 전자올갠등등...
약 1,500여점의 집기들을 10원 단위까지 정확하게 261,017,170원에 구입을 하였는데 이 일을 위해 당시 고대봉권사가
7-8월의 폭염아래 동분서주하면서 다 구입하였다. 거의 모두 자비량으로...나중에 영수증들을 모아 책한권을 만들어
재무부에 제출하였다. 참 대단한 집중력이었고 정확이었다. 재무부장인 내가 감히 단언하건데 만리현의 양심 바로 그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덛붙일 이야기는,
한덕환권사님의 18개월 동안의 수고다. 만리현교회를 대표하여 건축현장 감독으로 자원하여 나스셨다. 70세가 넘은
고령이신데도 불구하고 오직 만리현교회를 사랑하시는 마음에 아침 8시부터 하루일과가 끝나는 저녁까지 노동자들과
같이 하셨다. 염천의 여름과 엄동설한의 겨울 지내셨다. 교회에서는 점심과 춡퇴근 차비정도에 해당하는 월 30만원의
수고료만 드렸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준공하고 봉헌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하셨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봉헌식하는 날 명예장로님으로 추대하여 그 노고에 약간의 부담을 덜었다. 만리현교회 역사상 6번째
명예장로님이 되셨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어떻게들 아시고 꼭 그곳에 꼭 그것을 하라고 헌금들을 하시는지 여호와
이레라는 말이 절로 나왔었다. 걱정 없이 다 장만하여 주님께 봉헌하는 2005년 9월4일 성대하고, 거룩하고, 장엄하기까지 한 봉헌식과 예식을 마칠 수 있었다.
다음은 건축헌금자와 비품헌금자 명단이다.
건축헌금자 명단(2002년 9월- 2007년 1월)
294구좌/460명
강대성/김재화.강영진/이연숙.강종규/강종수.강종효.강현우/강윤태.고대봉/임경희.
고신재.고신혜.고휘경.권정숙.강봉연.김경백.김관중/함영희.김광기/이남순.김광남.
김광수.김광원/홍성례.김금숙.김길영.김대훈/김대진.김동철.김동찬.김명옥.김미희.
김민정.김민호/정보영.김범용/김경모.김병욱.김상현/박경희.김성규/손순희.김성중.
김수연.김순단.김순자.김순종/이경순.김승환.김신기/박영자.김영구.김영미.김영숙.
김영순/박금례.김영조/송미정/김지은/김지민.김영주.김영훈/서은경.김옥자.
김원규/김인정.김은아.김재우/박정희.김점옥.김정대/박재현.김정수/이영석.김종미.
김종석/전명옥.김종훈/장효순.김주철/서영봉.김주환/박경애.김준모.김진영.
김창립/김옥수.김창원/권관희.김춘범/손양백/김희숙/손미선.김현옥.김현천/김보영.
김희정.김희주.
남경복/전순희.노경옥/이세일.노경희.노병선/박순녀.노진숙/정순자.동찬/정준선.
동숙자.
박완/박정한.박진/정진희/박제민/박민애/이진옥/박연우.박금례/박성옥/박성희/
박성윤.박갑철/맹선영.박대진/김소영.박덕자.박문규/윤혜진.박석진/김은희.
박성옥/윤명선.박승열/박신철/박신영.박영남.박우상/장상애.박인숙.박인정.
박종록.박춘매.박형연/최덕님.박혜옥/이현준.박혜윤.박홍주/박복례.박환규/
홍난영.반채월.백남성.백영란.백운기/김상덕.변두한.변은영.변형식
서남석/서기자.서동민/홍혜윤.서명숙.서명환/노진일.서정관/박순옥.서정호.
서중석/이정재.손길순.손복순.손성금.손종훈.손철수.손한숙/유호성.송복덕.
송수교.송재필/신우희.송주선.송지호/손영준/송영철.신승희.신언복/이강희.
신원경/신자영.신종훈/김원자.신하연.신혜숙.신현구/이심호.안경철/김인태.
안나영.안상기/차찬회.안소연.안치선/이정순.안희복.인희찬/권은수.엄진영.
엄현경.연합성가대.연합여선교회.오현옥.우고은.우다은.우순자.위영현/류호숙.
유명렬/박일남.유치부.
이건복/김선이.이건우.이규봉.이규일/김새미.이금선/윤재우.이기봉/오정자.
이기원/신랑희.이길종/박순.아남춘/이정희.이대원/이옥정.이덕녀.이도경/
이윤경.이복님.이봉춘/전숭희.이상보.이상순.이석봉/라옥순.이성락.이수정/
이혜정.이수진.이순임.이승덕.이승호.이연실.이연자.이영덕/오희영.이영숙.
이영환/안상일.이용호.이유숙.이윤근/조연희.이은숙.이은순.이은경.이종훈.
이준/이윤형.이준용/정순의.이진숙.이진태/이복원.이춘자.이하연.이희원/
송영길.이희주.이희진.임경희B.임귀례/성길선/김종애/성치영/성영실.임금숙.
임복열.임은화.임인걸.임태선.
장기성/최금덕.장봉순.장연주/장명석.장원기.장학일,전국환/전순애.전영수/최연화.
전인환/김명희.전종수/이주연.전형익/노경미.정계홍.정규식/이묘순/정성진.
정금순/이재윤.정남채.정무길.정승훈/최귀례/정시호.정신범.정영심.정용대/
장영순.정원영/안희경.정월채.정유근/이춘미.정은진.정장화.정종숙.정준극/
백남옥.정진홍.정태리.정화순/신성순.조경희.조균우.조두희.조봉휘/조영순.
조상애.조선희.조성구/조진아.조성용/권성옥.조성일/안혜경.조성철/최은아.
조성환/고은옥.조순경.조애령.조연석/임양숙.조연순/최준.조영연.조예솔.
조우석/박정순.조율희/조환희.조정희.조효례/김혜숙.조훈희.주성희.주젊은이.
지경환/윤성철.지민철.지성일.지성준.
천명자.최계진.최명수/황금숙.최소연.최순임.최유경.최유나.최유진.최정희/
엄상섭.최창금.최필홍.최홍식/임인경.한신.한광현.한귀남.한다슬.한덕환/이예선.
한명희.한민우.한복귀.한영수.한철수.함인규.허매희.홍경택.홍순례.홍승주.홍영자/
정영진.홍진승/김동주.황경진/우혜순.황규명.황나리.황납실.황보현.황선애.황수룡/
정수미.황의정/이복임.황현숙.교회학교본부.아브라함선교회.유니게선교회.
무명(23명).
성전비품구입 헌금자(2005년)
93구좌/146명
강종수/강종규.강현미.권정숙집사.김광남권사.김병욱장로.김선혁.
김성규권사/손순희권사.김순종권사/이경순권사/김정원.김영미집사.
김영조집사/송미정집사.김옥수권사/김경택.김정수집사/이영석.
김종애집사.김진국/인금숙집사/김광수/김정수.
남경복장로/전순희집사.노경옥집사.노경희집사.노병선권사/박순녀권사.
동찬권사/정준선권사.박형연권사/최덕님권사.박환규장로/홍난영권사/
박인숙/박인정.
서명숙.서명환권사/노진일권사.서중석목사/이정재권사.송수교권사.
송재필장로/신우희장로.송주선전도사.송지호권사/손영준집사/송영철.
삼화회.신성순권사.신승희권사.안경철목사/김인태사모.안상기집사/
차찬회집사.안나선교회.안희복권사.엄원석목사.오정자집사.우고은/
우다은.우승식.우혜순.위영헌집사/류호숙집사.유명렬권사/박일남집사.
유미현.이건복권사/이기원집사/이대원집사.이길종장로/박순권사.
이다운.이대호.이덕녀권사.이복님권사.이봉춘장로/전숭희권사.이세일
이수정/이혜정.이연자집사.이영덕/오희영집사.이윤근권사/조연희집사.
이은숙장로.이준영/이시영.이진태권사/이복원집사.이춘자집사.이현주
이현준.임인송집사/박성희집사.
장기성집사/최금덕집사.장상철/이순원권사.전국환장로/전순애권사.
전못례권사.전종수권사/이주연권사.정용대장로/장영순권사.정은주
정승훈집사/최귀례.정규식집사/이묘순집사.정영심.정우진.정준극권사/
백남옥집사.정준호.정화령.정화순권사.조성용집사/권성옥집사.
조애령집사.조연석권사/임양숙집사.조성일장로/안혜경권사.조흥영권사/
박경숙권사.최명수/황금숙집사.최유나.최유진.최홍식장로/임인경장로.
한귀남집사.함인규권사.황규명장로.홍영자권사/정영진.홍은파목사.
첫댓글 오타 있습니다. 정병배집사가 아니라 정경배 집사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