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周官-周禮)에 묘소를 맡는 직분이 폐하여지자 중고시대(中古時代)에 재실을 설치하는 공의가 일어나게 되었으나 비나 바람을 막기도 하고 술두리미나 재기를 저장하기도 하여 삼가히 제계와 목욕을 하는 바로서 그로 하여금 극진하고 경건하게 장차 제0사 일을 하는 절차이나니 대개 근본에 보답하고 먼 조상을 추모하는 정을 능히 스스로 그만두지 않는 것이었다. 옛날 경태(景泰:1459~1456)년 의 즈음에 있어서 나의 선조이신 좌랑부군께서 한림원에 이름을 날렸고 장차 큰일을 하려는 듯 하였으나 자신이 세상의 변란을 맞이하여 백씨 이신 사성공과 더불어 그 출입과 처세를 같이하며 산관(散官)인 랑서(郞署)에서 낮게 맴돌며 힘쓰신 것은 오직 그의 노친이 당에 살아계셨기 때문이었으며 마음이 은미하시어 발자취를 숨기고 피함이 있었기에 자상하지는 않으나 필재 김선생이 지어서 보내드린 詩를 보면 대강이나마 가히 상상하며. 우러러 볼 수 있었다, 오직 그 의관과 신발을 묻은 봉분이 팔계(八桂)의 동쪽 지동(芝洞)의 한 기슭에 있으며 그 후로 부장(祔葬)도 있고 단소(壇所)도 있게 되었으니 즉 우리 씨족들의 분영(墳塋)의 언덕인 것이다
옛날에 재실이 있었으나 협소하여 수용하기가 어려워 드디어 인하여 포주(庖廚)를 부속하였고 전의 갑인(1914)년 봄에 이에 양지를 향하고 음지를 등진 위치에 정당을 지었으니 무릇 4칸 짜리로서 동서로는 2칸의 온돌방을 삼았고 중앙은 청사이며 앞쪽은 난간이요 간가(間架)를 물려내니 옛날에 비교하면 차츰 완벽하고 아름다웠으나 세월이 60여년을 경과하자 처마와 창문과 기와와 벽이 기울어 비뜰어지고 틈이 생겨 비가 샐 우려가 없지않아 여러차례나 모아서 손질을 하였으나 오히려 미진함이 있었기 때문에 잇따라 보수를 하고 또한 새로히 동쪽에 협실 2칸을 증축하였으니 대개 여러 종인께서 정성을 합하였으며 당시의 소임이 유능하게 주간을 하였기 때문이다. 공사를 이미 마치자 여러사람들이 말씀하기를 재실에 현판이 없으면 옳지 않으며 기문이 없어서도 옳지 않다.당호가 없으면 호칭할 수가 없고 기문이 없으면 징빙할 수가 없다 라고 하기에 드디어 지명을 인연하여 지강재 라는 현판을 달고서 환국(煥國)으로 하여금 그 사실을 기록케 하였다.
이에 옷깃을 여미고 일어나서 사양하며 말하기를 셍각하면 옛날 처음 건립하던 때에는 오히려 우리 종중의 왕성한 즈음 이었다.
장덕(長德)하신 분이 빽빽하였으며 나의 백조이신 긍암부군(兢庵府君)과 그리고 내암공(耐庵公)과 정산공(靜山公)의 두분이 실제로 처음부터 끝까지 경기(經紀)하셨으나 현판과 기문을 걸지 않고 새기지 아니한 것은 아마도 검소함을 스승삼아 신중 하였음이 아니었겠느냐? 그러나 마지 못하면 한마디 말로서 받들어 告하는 것이 있나니 대저 조선에 있어서의 자손은 한 기운이 유통 하나니 내 몸이 있는 곳에 이 기문이 문득 있어야 사람이 있고 정성이 나타남은 자연적인 이치 이다. 여기에서 모이고 여기에서 재계드리며 강신주로서 제전을 올리고 절하고 읍 하며 오르고 내려가면서 애연하고 숙연하게 나의 정성과 공경을 다한다면 祖考님이 위에서 자시고 경사와 은택이 아래로 내려와서 자손들이 福을 받을 것이다. 국그릇이나 담장을 보면서 조상의 생각을 여기에서 하고 제사 모신 음식을 여기서 나누어 먹어면서 조상의 꾀와 지혜를 우러러 생각하며 길이 효도를 생각하고 돈독함과 신용과 화목함을 미루어 좋은 것을 본받아 망설임이 없이 바꾸지 말고 끌어 간다면 효도하고 공손하는 마음과 재실을 이어내여가며 수선할 공력이 권장함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뭉게뭉게 생길 것이니 어찌 알소냐? 이 지강재가 芝山의 봉오리와 더불어 長久히 보존되어 함께 높다랗게 될 것인지를 더욱 감회가 있구나, 대저 芝草는 신령스러운 풀이니 뿌리를 북돋우어 가지가 사무치면 잎은 더욱 무성하여지고 향기는 더욱 매서움나니 아홉 줄기에 세 가지가 수려하여 짐은 세모(歲暮)를 기다리지 않고서도 향기가 나니라, 思物도 이미 그러한 유형인데 사람이 사물만 못할소냐? 어찌 서로가 더불어 힘쓰지 않을소냐? 라고 하였다, 가령 저 산수의 푸르름과 깊음이 신령스럽고 맑음이 모였다가 흗어짐의 소나무와 삼(衫)나무가 울창하게 무거진 것 같은 것들은 이 재실에 올라와서는 즈음에 저절로 터득할 것이며 재실을 설치하는 뜻에 미치지못하기에 갖추어 기록하지 않았노라,
좌랑공의 18대손인 煥國은 삼가 기문을 지음.
주: 1. 산관(散官)= 일정한 직무가 없는 관직.
2.芝山.芝草.= 지강재에 있는 학유공 지소.와 좌랑공 산소와 산소에 자란 잔디풀.
3.포주.庖廚 = 재실의 부엌을 포주라 일컬음.
4.긍암부군= 환국선조님의 큰집 부군.
5.필재 김공 詩.= 당시 좌랑공이 대구로 발령받아 내려올때 점필재 김공이 전별 詩를 지어
먼길에 노잣돈으로 써라고 주었다.한다 점필재 문집에 실려있다,
*지강재의 야록 한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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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강재.지산에는 학유공 정지소.와 좌랑공 정치소.형재분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학유공 지소.는 무남1녀 이므로 자손이 없어 무후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나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는 누구든지 혼인하여 아들을 얻지못하면 그 부부가 함께 벌초를 하고 정성을 드리면 틀림없이 아들을 놓았다, 그래서 옛날에는 그 산소에 벌초 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합니다, 사실이라고 하더군요, 그 아들은 자손 대대 효자집이 된다고도 하던데요, 누구라도 아들을 얻지 못하는 며느리가 있다면 일러주어서 해보세요, 주.과.포.는 잊지말고요,,, 정성을 드려야 복이 내린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