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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425. [역경의 열매] 윤학원 <1-15> 음악이 좋아 교사 그만두고 극동방송으로 이직
33세에 영락교회 시온 찬양대 첫 지휘… 38년 만에 지휘봉 놓고 은퇴 음악회
윤학원 장로가 38년 동안 지휘한 영락교회 시온찬양대 은퇴음악회 포스터. 윤 장로는 ‘영락교회 시온찬양대’를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찬양대로 성장시켰다.어릴 때부터 음악을 사랑했다. 음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갔다. 음반이 귀하던 시절, 들을 수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다녔다. 연세대 음대를 졸업한 뒤 첫 직장이던 동인천중·고등학교 음악교사직은 무척 안정적이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교사를 그만두고 극동방송으로 이직을 결정했다. 음악 때문이었다. 월급이 반 토막 났지만 당시 방송국엔 로저와그너합창단과 같은 세계적인 합창단의 LP 명반이 셀 수 없이 많았다. 종일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가장으로서 아내 이명원 권사에게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조마조마하며 물어보자 “당신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세요”라며 큰 힘을 줬다. 극동방송에 취직한 뒤 합창 지휘자의 길도 활짝 열렸다. 결국 당시 이직은 주님이 내게 주신 인생의 기회였던 셈이다.
지휘자로서의 삶의 시작과 끝은 ‘교회음악’이었다. 60년 가까이 가곡과 전통음악, 찬양곡까지 분야를 넘나들며 지휘했지만 내가 가장 사랑한 음악은 교회음악이다. 처음 노래를 부른 곳도, 지휘를 시작한 곳도 교회였다. 지휘와 합창을 좋아하던 고등학생 윤학원이 연세대 음대에 진학한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1957년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인천 율목교회 찬양대 지휘자로 봉사를 시작했다. 작은 교회였지만 찬양대는 메시아 전곡을 부를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처럼 1950년대부터 교회에선 합창이 넘쳐났다. 한국 합창음악의 뿌리는 교회음악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영락교회 시온 찬양대가 있었다. 나는 1971년부터 2008년까지 이 찬양대를 지휘했다. 해외 출장을 제외하고 지방출장을 갔다가도 주일엔 어김없이 지휘봉을 잡았다. 찬양대를 지휘하는 일은 하나님과 한 약속이며 나의 재능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유일한 것이었다.
나와 시온 찬양대는 이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지만 첫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난 1971년 1월 1일 영락교회 신년예배에서 시온 찬양대원들 앞에 처음 섰다. 그 전에 같은 교회 대학생들이 모인 호산나 찬양대를 지휘했지만 시온 찬양대의 무게감은 엄청났다. 대부분의 대원이 당시 33세였던 나보다 나이가 많을 뿐 아니라 그중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유명 성악가도 여럿 있었다. 전임 지휘자 박재훈 목사는 화가 나면 지휘봉을 꺾어 버릴 정도로 카리스마가 강했다. 새파랗게 젊은 내가 그걸 흉내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찬양대의 시스템을 갖추고 새로운 곡을 도입하는 방향으로 접근하기로 다짐했다.
나의 시도는 적중했다. 워낙 훌륭한 찬양대였기 때문에 모든 음악적 시도가 100% 결실로 맺어졌다. 해를 거듭할수록 시온 찬양대는 나무랄 데 없이 좋은 찬양대로 성장했다. 이런 찬양대에서 38년 동안 지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감사다. 2008년 12월 13일 저녁 7시 영락교회 베다니홀에서 나의 인생을 바쳤던 시온 찬양대 지휘자에서 은퇴하는 마지막 음악회를 가졌다. 늘 그래왔듯이 지휘봉을 잡고 기도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 지금까지 절 이끌어 주신 것 감사합니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 [역경의 열매] 윤학원 <1> 음악이 좋아 교사 그만두고 극동방송으로 이직
* [역경의 열매] 윤학원 <2> 주님 음성 들은 아버지 "전쟁 난다, 남쪽으로…"
* [역경의 열매] 윤학원 <3> '레슨 동냥'으로 공고에서 연세대 음대 진학
* [역경의 열매] 윤학원 <4> 대학서 만난 아내… 신앙·성실함 믿고 청혼 받아줘
* [역경의 열매] 윤학원 <5> 대학생 때 동네 꼬마들 모아 연 연주회 대성공
* [역경의 열매] 윤학원 <6> 미국 유학·선명회합창단 지휘자 놓고 고민
* [역경의 열매] 윤학원 <7> 두 달간 해외 순회연주… 마지막 공연 뒤 쓰러져
* [역경의 열매] 윤학원 <8> "윤 선생님, 음대 교수로 발령 났습니다"
* [역경의 열매] 윤학원 <9> 내 인생의 악보는 성경… 잠들기 전 아내와 번갈아 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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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윤학원 <13> 청춘합창단 통해 '합창의 대중화' 꿈 새롭게 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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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윤학원 <15·끝> 손주들과 읽는 사랑章… 신앙·음악 속에서 행복
약력=△1938년 황해도 출생 △연세대 음대 △로얼주립대학교 대학원 △웨스트민스터콰이어대학교 △선명회어린이합창단 상임지휘자 △대우합창단 상임지휘자 △인천시립합창단 지휘자 △서울레이디스싱어즈 음악감독 △중앙대 음악대학 작곡과 교수·음대 학장 △영락교회 호산나·시온찬양대 지휘자 △자양교회 시온찬양대 지휘자
***[역경의 열매] 윤학원 <2> 주님 음성 들은 아버지 “전쟁 난다, 남쪽으로…”
덕분에 우리 가족 전쟁 초기 혼란 면해… 공고 갔으나 운명처럼 밴드부 들어가
인천공고 밴드부 시절의 윤학원 장로. 1954년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테너 색소폰 주자로 활동한다.연습용 지휘봉의 길이는 30㎝ 남짓이다. 연주회 때 사용하는 지휘봉은 이보다 조금 더 길다. 난 지휘봉에 인생을 걸었다. 음악과 함께해서 행복한 인생이었다. 온 가족이 음악을 하는 것도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다. 우리 때는 음악하면 피죽도 못 먹는다고 반대가 심했는데 여든 살이 될 때까지 음악으로 살며 자녀들 교육까지 시켰으니 이 또한 감사한 일이다.
나의 고향은 황해도 옹진의 온천리다. 집집마다 온천이 터져 나온다고 해서 온천리였다. 옹진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 일이다. 선생님이 풍금을 연주하며 한 명씩 노래를 시키셨다. 어릴 때는 부끄러움이 많았다. 쑥스러워서 몸을 배배 꼬며 나가 노래를 불렀는데 웬일인가.
“학원아. 너 노래 참 잘하는구나.” 그제야 내가 노래를 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후 선생님은 날 데리고 이 반, 저 반 다니면서 시범으로 노래를 부르게 하셨다. 나와 음악의 첫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나의 신앙은 아버지로부터 왔다. 아버지는 주무시다가 벌떡 일어나셔서 어둠 속에서도 기도하시던 신앙인이셨다. 1949년 어느 날, 아버지가 새벽부터 짐을 싸서 남쪽으로 가자고 하셨다. 그날 아버지는 “곧 전쟁이 난다. 새벽기도 중 분명히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셨다. 전쟁은 실제 일어났고 그나마 인천으로 피했던 우리 가족은 전쟁 초기의 혼란을 피할 수 있었다. 고향은 황해도지만 성장 공간은 인천이었다.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던 난 중학생 때 불량배들을 만난 일이 있었다. 당시 교회 중등부 회계를 맡고 있어 현금이 있다는 걸 불량배들이 알아낸 것이었다. 교회 돈을 내줄 수 없어 돈이 없다고 버티자 무자비한 주먹세례가 이어졌다. 가지고 있던 공금을 다 뺏기고 기어서 집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노발대발하시며 날 권투 도장으로 데려가셨다. 스스로를 지키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이게 또 웬일인가. 권투가 재미있었다. 음악가를 꿈꾸던 내 마음에 “아니다. 권투선수가 내 길이다”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소질이 있었는지 관장이 날 대회에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본격적인 스파링이 시작됐는데 그때 알았다. ‘권투선수로 성공하기엔 팔이 너무 짧다. 권투했다가는 평생 샌드백 신세 면할 수 없겠구나….’ 권투는 결국 취미로 끝났다.
하지만 권투를 배운 일은 훗날 지휘자로 성장해 가는 데 큰 자양분이 됐다. 지휘는 운동신경이 없으면 어려운 일이다. 중학생 때 배운 권투가 잠자고 있던 운동신경을 깨워줬다. 또 하루 평균 8시간씩 서서 손을 휘두르는 게 지휘의 기본인데 권투로 기본기를 다지지 않았다면 분명 힘들었을 것이다. 손을 쉼 없이 움직여야 하는 지휘자에게 권투보다 적합한 운동이 또 있을까 생각해 본다. 그날 불량배들을 만난 것도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면 미소가 지어진다.
나의 이력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이 ‘인천공업고등학교’다. 음악하면 굶어죽기 딱 좋다고 생각하셨던 아버지가 인천공고를 권하셨다. 결국 아버지 뜻에 따라 인천공고 응용화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음악가로서의 삶이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는 몰라도 입학과 동시에 밴드부에 들어가게 됐다. 밴드부에선 테너 색소폰을 불었다. 밴드부 활동은 음악과 나를 이어주는 생명줄이었다.
***[역경의 열매] 윤학원 <3> ‘레슨 동냥’으로 공고에서 연세대 음대 진학
자면서도 노래 흥얼 부친도 결국 허락… 가난한 형편 딛고 합격 밤새 감사기도
청년 시절 윤학원 장로의 모습. 교회 찬양대 연주회에 앞서 기념사진을 찍었다.아버지의 권유로 입학한 인천공고는 남자들의 세상이었다. 거칠었다. ‘더 이상 음악을 할 수 없겠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작은 희망이 있었다. 바로 밴드부였다. 열심히 활동했고 훗날 밴드부장까지 했다. 척박한 학교 환경이었지만 밴드부에선 늘 음악과 가까운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
나는 악기 연주보다는 노래에 관심이 많았다. 그만큼 노래를 사랑했고 기회만 닿으면 노래를 불렀다. 교회는 나에게 늘 무대를 선사했다. 잠을 자면서도 노래를 부르는 나를 보시던 부모님께서도 결국 더 이상 반대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노래가 그렇게 좋으면 한번 해 보라”고 하셨던 아버지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가난한 시절, 음대에 가겠다고 꿈꾼 것만으로도 죄스러웠다. 돈이 없어 아버지 가게에서 팔던 쌀이나 공산품으로 레슨비를 냈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노래로 음대에 가기엔 실력이 모자랐다. 변성기를 잘못 보낸 탓이 컸다. 그래서 선택한 분야가 작곡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17세 때 결정을 내렸다.
레슨 선생님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수소문 끝에 인천에 사시던 작곡가 최영섭 선생님을 찾아갔다. 최 선생님은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하신 권위자셨다. 난 그분을 닮고 싶어 걷는 모습까지 따라했다.
음대 진학을 준비하던 시절이 1950년대 중반이었다. 없는 게 더 많던 시절, 음대를 꿈꾸는 것이 쉽진 않았다. ‘레슨 동냥’이 시작됐다. 화성악에 조예가 깊었던 전주온 인천사범학교 음악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학교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고, 시창을 배우겠다고 노래 잘하던 교회 친구에게 부탁해 새벽기도 후 한 시간씩 도움을 받기도 했다.
1956년 겨울, 실기시험을 보기 위해 연세대 음대를 찾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음대는 백양로 우측,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언덕을 오르던 그날의 떨림이 늘 내게 도전으로 다가온다.
실기 교수님의 손엔 ‘코르위붕겐’(독일의 프란츠 뷜너 교수가 뮌헨국립음대 학생들의 합창 훈련을 위해 만든 교재)이 들려 있었다. 새벽기도 마치고 연습할 때 사용했던 교재였다. 마르고 닳도록 불러 달달 외울 정도로 완벽하게 공부한 책이었다. 어느 페이지를 부르라고 해도 자신 있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공업고등학교였어도 대학에 진학한 친구들이 많았다. 당시 교장 선생님이 대학 합격자들을 모두 초청해 축하연을 베풀어 주셨다. 아무래도 공고다 보니 대부분 친구들은 공대나 상대에 합격했다. 음대는 나 혼자였다. “공고에서 음대생이 나왔다”며 친구들도 신기해하며 축해해 줬다. 사실 우리 학교 역사상 음대 합격생은 처음이었다. 교장 선생님이 나와 악수하며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윤학원. 넌 우리 학교의 돌연변이야. 축하하네.”
녹록지 않은 환경 속에서 날 음악의 길로 인도해 주셨던 하나님께 밤새 감사기도를 드렸던 날이었다. 날 믿고 지지해 주셨던 아버지, 윤효진 장로께도 사랑한다고 전했던 날이었다. 대학생활은 행복했다. ‘연세대 음대 57학번 윤학원’. 이렇게 호명되는 게 얼마나 설레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나는 나운영 교수의 제자가 됐다. 나 교수는 1952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작곡했던 교회 음악가셨다.
***[역경의 열매] 윤학원 <4> 대학서 만난 아내… 신앙·성실함 믿고 청혼 받아줘
연대 기독학생합창단서 함께 활동… 화음에 매료돼 작곡 대신 지휘의 길로
이명원 권사(왼쪽)와 윤학원 장로가 대화를 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국민일보DB꿈에도 그리던 음대에 진학했다. 또 당대 가장 유명한 작곡가 중 한 명이던 나운영 교수의 제자가 됐다. 하지만 작곡보다 지휘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하나의 소리로 모아지는 화음의 세계에 매료된 것이었다. 노래가 좋아 음악의 길에 들어섰고 작곡으로 음대에 진학했지만 1학년 때부터 지휘할 수 있는 곳이면 나는 어디라도 달려갔다.
교회 찬양대 지휘자로 봉사하다 본격적인 합창 지휘를 한 것은 대학 3학년 때 연세대 기독학생합창단 지휘자로 서면서부터다. 이왕 시작한 일 제대로 하자고 결심하고 명동의 서울YWCA홀에서 발표회를 갖기로 했다. 음악 발표회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학생들이 기획부터 지휘까지 모든 과정을 맡아 준비하는 건 더 흔치 않았다.
음대 박태준 교수와 곽상수 교수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교수님들은 “학원아, 음대 지하실에 정리하지 못한 악보가 많으니 마음대로 가져다 써도 된다”고 하셨다. 행복했다. 수많은 악보를 펼칠 때마다 내 귀엔 합창이 들렸다. 마음속에서 울리는 합창은 늘 감동을 선사했다.
나는 바흐의 칸타타 106번을 연주하기로 했다. 이 곡은 ‘하나님의 세상이 최상의 세상이로다’는 부제를 가진 곡으로 바흐의 신앙고백이 녹아있다. 이 곡을 연습하면서 난 내가 지휘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합창을 통해 화음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신비로웠다. 목소리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지휘자 역할에 푹 빠져버렸다.
작곡과 학생이 지휘봉을 끼고 사니 당장 작곡과 교수님들이 노발대발하셨다. 나운영 교수님은 실망하셨다. 학점이 잘 나올 리 없었다. 전공과목 학점이 C였다. 하지만 이미 지휘자의 길을 걷기로 다짐한 내게 학점이 대수가 아니었다. 포기하지 않고 독학으로 지휘를 공부한 모습이 기특했는지 나 교수님도 졸업할 즈음엔 많은 격려를 해주셨다. 전공 공부도 열심히 해 졸업할 때는 A학점을 받았다.
기독교연합학생회는 내게 본격적인 성인 지휘를 경험하게 해 준 고마운 모임이었다. 게다가 지휘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곳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이곳에서 나는 평생의 반려자를 만났다.
기독교연합학생회에서 서기를 맡고 있던 성악과 후배가 있었다. 한 살 어렸던 후배는 58학번이었다. 발표회가 열리기 얼마 전, 팸플릿에 들어갈 단원 명단을 급히 찾던 날이었다. “어머나, 제가 명단을 집에 두고 왔어요….” 서기였던 그 학생이 말했다. 난 내일 가져와도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어느새 다녀오겠다며 일어서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교통편이 많지만 당시 신촌에서 정릉에 있는 집에 다녀온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 후배는 웃는 얼굴로 명단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날 이후 자꾸 눈길이 갔다. 쾌활하고 신앙심까지 좋았던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캠퍼스 커플이 됐다. 음악을 사랑하고 신앙생활도 함께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그사이 난 군에 입대했고 그는 졸업 발표회로 분주했다. 청혼은 그의 졸업식 날 했다. 내 인생 최고의 조력자인 이명원 권사와의 짧지만 아름다웠던 캠퍼스 러브 스토리가 이렇다.
결혼은 1963년 4월 22일에 했다. 신혼집은 내가 자랐고 부모님과 동생들이 살고 있던 인천에 잡았다. 나의 신앙과 성실함만을 보고 결혼해 준 아내에게 지면을 빌려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역경의 열매] 윤학원 <5> 대학생 때 동네 꼬마들 모아 연 연주회 대성공
인천문화원 어린이합창단 맡는 계기 돼… 어린이들과 합창할 때 가장 행복해
인천문화원 어린이합창단 출신으로 구성된 ‘인천문화원 소녀합창단’의 연주회 모습.‘윤학원’ 하면 많은 사람이 떠올리는 합창단들이 있다. 선명회합창단(현 월드비전합창단)과 대우합창단, 레이디스싱어즈, 윤학원 코랄, 영락교회 시온찬양대 등이다. 모든 합창단에 애정이 크지만 난 어린아이들과 합창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생소리로 소리만 빽빽 질러대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다듬어 화음을 만들어내는 일은 벅찬 감동을 준다.
어린이와 청소년 합창에 관심이 생긴 건 대학 때 발성법을 지도하셨던 곽상수 교수 덕분이다. 곽 교수는 소년합창단을 위한 발성법을 가르쳐 주셨다. 배우고 나니 적용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대학 4학년 때 일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인천 집으로 가던 길에 저녁이 다 됐는데도 동네 어귀를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점포방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맞벌이하는 집 아이들인데, 밤이 되어도 저렇게 길에서 논다고 하셨다. 쾌재를 불렀다.
아이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연습실은 살던 집이었다. 좁은 집에 초등학생 열댓 명을 모으다 보니 이것저것 신경 쓸 일이 많았다. 방문을 떼어 내 마루와 방을 연결했다. 천방지축인 아이들과 합창을 하기 위해선 먼저 친해져야 했다. 함께 놀아주고 아이스크림도 사주면서 ‘좋은 동네 형’이 됐다.
대학에서 배운 대로 합창 연습을 시작했다. 제각각 나오던 목소리가 점점 하나로 모아졌다. 배운 대로 되는 게 신기했고 아이들은 행복해했다. 난 인천 시내에 있는 신신예식장을 덜컥 대관했다. 아이들과 연주회를 하기 위해서였다. 포스터도 만들어 붙이고 맹연습에 돌입했다. 연주회는 대성공이었다. 아이들은 큰 보람을 느꼈고 맞벌이한다고 자녀교육을 등한시했던 부모들은 눈물바다였다. 연주회를 마치자 인천문화원 관계자가 나를 찾아왔다. ‘인천문화원 어린이합창단’을 만들면 계속 지도해 줄 수 있겠냐는 제안이었다. 고마웠다. 당연히 하겠다고 했다. 인천문화원 어린이합창단은 방송국에도 출연할 정도로 좋은 합창단으로 성장했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만든 인천문화원 합창단은 훗날 내가 선명회합창단을 지도할 때 결정적인 동인을 제공했다. 어린이합창단을 지도해본 노하우가 두고두고 합창 지휘자로 성장해 나가는 데 자양분이 되기도 했다.
당시 난 두 가지 교훈을 얻었다. 첫째는 사람만 모으면 합창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고 두 번째는 세상에서 가장 빨리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게 합창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경험으로 난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당부한다.
“여러분이 지휘할 곳은 도처에 널려 있어요. 어린이만 모으면 됩니다. 그럼 합창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지휘자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적극성과 열정이다. ‘대충 하면 어떻게 되겠지’와 같은 나태함으로는 절대 좋은 화음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이후 나는 가는 곳마다 합창단을 만들어 명물로 성장시켰다. 첫 직장인 동인천중고등학교에서도 까까머리 청소년들을 데리고 합창단을 만들었다. 1년 동안 연습시켜 전국합창대회에 참가해 1등을 차지했다. 미술에 조예가 깊어 미술부에 많은 투자를 하셨던 교장 선생님이 교사 조회시간에 이렇게 외치셨다. “윤 선생,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이야기하세요.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이날부터 동인천중고등학교 합창단은 학교와 지역의 자랑이 됐다.
***[역경의 열매] 윤학원 <6> 미국 유학·선명회합창단 지휘자 놓고 고민
음악교사서 PD로 이직해 월급 줄어 유학 보류… “아이들 가르치자” 결단
극동방송 피디 시절 윤학원 장로가 방송에 앞서 기도를 하고 있다.요즘은 음악을 듣는 것이 무척 수월하다. 유튜브로는 영상까지 볼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하지만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1960년대엔 LP판을 구경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불법 복제 레코드인 ‘빽판’이라도 구하면 다행이었다.
동인천중고등학교 음악교사로 한창 바쁘던 시절, 극동방송의 나진주 선교사가 PD로 일해 달라고 제안했다. 고민이 됐다. 신혼이었던 나로서는 월급이 절반으로 줄어드는 이직을 결정하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 마음을 흔든 건 극동방송에 있던 수천 장의 LP판이었다. 음반도 로버트 쇼나 로저 와그너가 지휘한 것부터 흑인영가나 민요, 르네상스, 바로크 음악까지 다양했다. 이미 첫 번째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아내에게 양해를 구했다. 아내는 “내가 피아노 레슨이라도 하겠다”며 힘을 실어줬다.
당시 극동방송은 인천 자유공원 언덕에 있었다. 서울로 이사 온 건 1967년이었다. 스튜디오에 앉으면 바다가 드넓게 펼쳐졌다. 이곳에 앉아 사계절의 변화를 바라보며 방송을 하는 것만으로도 환상적이었다. 무엇보다 마음껏 음악을 듣고 연구하면서 자연스럽게 공부까지 하게 됐다. 내게 극동방송은 일터이자 음악 도서관이었고 학교이기도 했다.
음악방송을 하면서 20∼30대가 참여하는 마드리갈합창단도 창단했다. 우린 1969년 국립극장에서 크리스마스 합창제를 열었다. 합창제를 마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명회합창단(현 월드비전 합창단)의 이인형 원장이 내가 성가대 지휘자로 봉사하던 공덕교회로 찾아왔다.
이 원장은 대뜸 “국립극장에서 기가 막히게 지휘를 잘했던 지휘자가 이 교회에 있다고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선명회합창단을 맡아 달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귀를 의심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세계무대에 나가는 합창단은 오직 선명회뿐이었다. 고작 서른두 살이었다. 부담스러운 자리였다. 게다가 미국의 한 음대로부터 입학허가서까지 받아 놓은 상태였다. 유학과 선명회합창단 사이에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무엇 하나 허투루 대할 수 없었다.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어느 날 아내가 유학을 보류하고 선명회합창단을 맡는 게 어떠냐고 진지하게 말했다. 여전히 가난했고 가족들과 함께 가지도 못하는 유학에 대해 아내도 나름 큰 고민을 한 것이었다. 그 부탁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대학 때 인천에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 합창단을 만들었던 시절의 행복함도 떠올랐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선명회합창단에는 합창을 사랑하는 아이들이 많다.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치자.’
1970년 선명회합창단 지휘자로 부임했다. 연습실 문을 열자 환호성이 터졌다. “새 선생님이 오셨다.” 눈물이 핑 돌았다. 선명회합창단은 듣던 대로 수준이 높았다. 이미 명성이 자자했지만 더 큰 욕심이 생겼다. 세계적인 수준으로 만들겠다는 소망이었다. 전업 지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극동방송과 강서구의 합창단 기숙사를 오가며 맹연습을 했다.
당시 선명회합창단은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로만 구성돼 있었다. 이들에게도 합창이 전부였던 셈이다. 나 또한 그랬다. 아이들과 함께 합창단 수준을 끌어올리는 기쁨이 컸다. 1년 동안 연습한 끝에 1971년 봄 첫 해외 연주 일정이 잡혔다. 아시아 순회 연주였다. 나에게는 첫 번째 해외 연주였다. 떨렸다.
***[역경의 열매] 윤학원 <7> 두 달간 해외 순회연주… 마지막 공연 뒤 쓰러져
멀미에 불면증…기도하고야 쪽잠 청해… BBC 세계합창대회서 최우수상 수상
윤학원 장로(오른쪽)와 선명회합창단원들이 2000년 연주회를 위해 프랑스 파리를 방문해 에펠탑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1971년 선명회합창단 해외연주회가 열린 곳은 대만이었다. 선명회합창단 지휘를 맡은 뒤 여는 첫 연주회이기도 했다. ‘첫 연주가 해외라니….’ 신경을 너무 써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대만에 도착해서부터 배가 아프고 경련으로 걷는 게 불편할 정도였다. 지금 돌아보면 ‘촌놈 콤플렉스’였다.
밤새 잠을 청하지 못하다 기도를 한 뒤에야 겨우 쪽잠을 청했다. 아침에 아이들을 만나 발성연습을 했다. 그러고는 “혹시 내가 쓰러지더라도 놀라지 말고 끝까지 노래하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이미 해외 연주 경험이 많은 아이들이 오히려 “걱정하지 마세요”라며 웃는 게 아닌가. 아이들이 선생이 되는 순간이었다. 훌륭한 단원들 덕분인지 연주는 훌륭했다. 그날 이후 두 달 동안 말레이시아와 베트남, 호주와 뉴질랜드까지 순회연주가 이어졌다. 하지만 난 멀미를 달고 살았다. 밤엔 불면증에 시달렸다. 멀미약과 수면제로 버티다 마지막 공연이 있던 뉴질랜드에서 앙코르 연주까지 마치고 무대 뒤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호주 다윈에서 열렸던 공연은 야외에서 진행됐다. 연주는 기분 좋게 시작됐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다. 비를 맞으면서도 단원들은 음정하나 틀리지 않고 노래했다. 준비한 모든 곡이 끝났다. 그 순간 어린 단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폭우에 관객도 모두 자리를 떠났을 것 같은데, 기특하게도 끝까지 노래했구나.’ 그 순간 등 뒤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1500여명의 관객도 비를 맞으며 노래를 들었던 것이었다.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뜨거운 것들이 얼굴 가득 흘러내렸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욥기의 말씀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미약하게 시작했던 선명회합창단 지휘는 무려 34년 동안 계속했다. 많은 합창단을 거쳤지만 선명회합창단만큼 내 인생이 녹아든 곳이 또 있을까.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화음을 통해 화합의 길을 엿봤다. 분쟁이 있는 곳에 합창이 특효약이라는 확신도 가지게 됐다.
해외 공연은 선명회합창단의 일상이었다. 그만큼 해외 공연이 잦았다. 단원들은 맹연습을 했다. 하지만 합창단에 연습만큼 중요한 건 새로운 곡을 찾는 일이었다. 곡을 찾고 선정하는 건 지휘자의 몫이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악보를 찾기 위해 청계천 중고서점을 뒤지는 게 취미가 됐다. 미국에 연주회를 가면 보통 200∼300개의 악보를 구해왔다. 이 중 실제 연습까지 하는 곡은 3∼4곡 수준이다. 그만큼 곡 선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어느 나라, 어떤 무대에 서도 ‘어린이들이 수준 높은 노래를 한다’는 평을 듣게 됐다.
선명회합창단은 1978년 영국 BBC가 주최한 ‘세계합창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한국의 합창단이 해외에서 상을 받은 것도 첫 번째 일이었다. 내 나이 마흔, 선명회합창단을 맡은 지 8년만의 쾌거였다. 그즈음 합창과 지휘를 더 체계적으로 배우고 싶어졌다. 선명회합창단에 올 때 준비하고 있던 미국 유학을 더 미룰 수는 없었다. 선명회합창단을 부지휘자에게 맡기고 미국 보스턴의 로웰대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한국 학생은 오직 나뿐이었다.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역경의 열매] 윤학원 <8> “윤 선생님, 음대 교수로 발령 났습니다”
마흔 넘어 보스턴 로웰대학교로 유학… 출강하며 합창단 만든 중앙대 임용돼
윤학원 장로(왼쪽)가 미국 로웰대 대학원 재학 시절 에드워드 길데이 교수와 악보를 보며 대화하고 있다.로웰대학교의 유일한 한국 사람은 옥인걸 교수였다. 옥 교수에게 성악을 배웠다. 지휘교수는 보스턴에서 명성을 날리던 헨델앤하이든 소사이어티 지휘자였던 에드워드 길데이였다. 공부는 즐거웠다. 여러 합창단에서 지휘하며 몸으로 익혔던 지휘법에 이론이 더해지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옥 교수는 항상 “성악은 배우는 데서 끝나면 안 된다. 독창회를 해야 한다. 준비하라”고 하셨다. 독창회를 열기엔 실력이 부족했지만 노래는 열심히 외웠다. 늘 노래하며 다니다 보니 학교에선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보스턴엔 교회가 많았다. 미국엔 교회가 많지만 유독 역사가 오래된 교회들이 적지 않았다.
매 주일 교회를 순회하며 미국의 교회음악을 듣고 배울 수 있었다. 틈만 나면 선명회합창단에 보낼 악보도 구하러 다녔다. 13박스에 달하는 악보를 수집한 뒤 한국에 보내기로 했다. 차가 없어 우체국까지 박스 한 개씩 옮겨가며 13개를 다 보냈는데 이게 웬일인가. 모두 반송된 게 아닌가. 알고 보니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쓰는 위치가 한국과 달랐다. 내 방에 있던 악보를 나한테 보낸 것이었다. 우체국을 열세 번이나 오가면서. 마흔 넘어 시작한 유학생활은 좌충우돌이 일상이었다.
선명회합창단 아이들이 그리웠다. 연을 끊지 않으면 그리움이 커질 것 같았다. 겨울방학이 시작되자마자 합창단 지휘자를 사임하겠다는 결심을 안고 귀국했다. 하지만 초롱초롱한 아이들 눈빛을 보자 몸이 녹아버렸다. 그만두겠다는 말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그러던 중 한국음악협회가 주최한 송년회에 갔다가 중앙대 음대 장영 교수가 “중앙대 학생들에게 합창 좀 가르쳐 주시죠”라고 제안해 왔다. 혼란스러웠다. 공부도 계속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에 남으면 선명회합창단을 계속 지도할 수도 있었다. 고민 끝에 중앙대 출강을 결정했다.
대학 강단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떨렸다. 하지만 학생들을 만나니 패배주의가 역력했다. 자신감도 없었다. 당시 중앙대 사범대학 음악교육과는 서라벌예대 음악교육과와 합병된 직후였다. 비주류라는 인식이 강했다. 아무리 칭찬하고 설득해도 한계가 분명해 보였다. 한창 도전과 패기로 가득 차야 할 젊은 날을 무기력하게 보내는 학생들을 보니 안타까웠다.
“내가 잘하는 걸 하자.” 그건 바로 합창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음대생으로만 합창단을 꾸릴 수 없어 이공대와 약대생 가운데 찬양대 활동을 하는 학생들까지 모아 ‘마스터코랄’을 만들었다. 합창단은 목표가 있어야 한다는 소신대로 ‘대학합창제’ 출전을 결정했다.
당시 대학합창제는 연세대 ‘콘서트콰이어’와 이화여대 ‘글리클럽’의 독무대였다. 신생팀인 마스터코랄이 겨루기 위해선 맹연습뿐이었다. 무대는 이화여고 유관순기념관이었다. 첫 연주회는 떨리기 마련이다. 서로를 격려해 가며 무대에 올라 연습한 대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자 환호와 박수소리에 귀가 찢어질 정도였다. 열등감을 내던지게 된 연주회였다.
이뿐 아니었다. 중앙대 마스터코랄의 실력이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전국순회연주며 해외연주에 이르기까지 줄줄이 일정이 잡혔다. 학생들과 구슬땀을 흘리던 1983년의 어느 날, 음악대학 학과장이던 채리숙 교수가 전화기가 터질 정도로 흥분해 소리치셨다. “윤 선생님, 우리 대학 교수로 발령 났습니다.” 내가 음대 교수가 됐다니….
***[역경의 열매] 윤학원 <9> 내 인생의 악보는 성경… 잠들기 전 아내와 번갈아 낭송
인생 아름답게 연주하려 주의 뜻 따라… 삶은 곧 하나님의 훈련이고 인도하심
합창단 연습 도중 단원들의 화음을 듣고 있는 윤학원 장로.‘내가 대학 교수가 되다니….’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놀랐다. 기도했다. 감사기도였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삶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조합됐다. 모든 여정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극동방송을 통해 최고의 악보와 수많은 LP음반을 듣게 하셨고 선명회합창단에선 세계무대를 경험하며 교회음악의 세계적 조류를 경험하게 하셨다. 난 그저 성실히 살았을 뿐인데 그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훈련이었다.
1983년 3월 중앙대에서 정교수로 맞은 첫 학기부터 작곡법과 화성학을 가르쳤다. 당연히 마스터코랄도 지도했다.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작곡과 안에 ‘합창 지휘 전공’도 개설했다. 나는 현장 경험이 풍부한 지휘자였다. 학교에선 지휘 테크닉을 가르쳤지만 학생들에게 실제 현장을 견학시키며 지휘자가 갖춰야 할 노하우를 전수했다. 그야말로 지휘자의 모든 것을 가르쳤다. 옷 입는 법부터 무대 매너와 무대를 걷는 법, 인사하는 법과 프로그램 짜는 것까지 ‘실전 지휘자 수업’을 진행했다. 대학 1학년 때는 이상한 옷차림으로 결석을 밥 먹듯 하던 학생들이 합창을 배우면서 졸업할 때는 지휘자로 변해가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대학 강단에서 늘 하던 말이 있다. “지금 하는 일을 성실히, 또 최선을 다해 감당하라. 능력이 뛰어나지 않아도 최선을 다하면 인정받는다.”
내 경험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늘 강조할 수 있었다. 난 재능이 뛰어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이 주신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기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신다고 확신한다. 기회를 잡는 건 각자의 몫이다. 기회는 내가 최선을 다해 대접할 때 비로소 그 얼굴을 보여준다.
음악계엔 최선을 다했던 이들이 유독 많다. 이탈리아의 첼리스트였던 토스카니니는 심한 근시로 연주할 때 악보를 볼 수 없었다. 토스카니니는 아예 악보를 외우는 방법을 택했다. 단점을 극복한 것이었다. 어느 날 그에게 엄청난 기회가 왔다. 중요한 연주회 날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갑자기 쓰러진 것이었다. 당장 지휘자를 구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토스카니니가 모든 악보를 외우고 있지 않은가. 그가 지휘봉을 잡았다. 연주회는 대성공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일약 세계적인 지휘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기회란 이런 것이다. 노력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만 살짝 얼굴을 보여주는 ‘기회’를 젊은이들도 잡을 수 있길 바란다. 인생은 되돌이표가 없다. 한번 흘러가면 그것으로 끝이다. 우리 모두는 지금도 악보의 마지막 소절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래서 신앙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내게 성경은 인생의 악보였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랬다. 인생을 아름답게 연주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이 지시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다. 작곡가가 지시한 악보와 지휘자를 무시한 채 단원들이 각기 노래한다면 합창이 될 리 없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가르침을 무시하곤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없다. 지금도 난 매일 저녁 아내와 잠자리에 들기 전 식탁에 앉아 성경을 두 절씩 번갈아 가며 읽는다. 내 인생의 악보를 살펴본 뒤 잠을 청하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윤학원 <10> 대우합창단 단원들과 갈등… 해체의 아픔 겪기도
큰 인기 누렸지만 “연습 가혹하다” 불만… 시간 지나 단원들도 사과하고 나도 반성
국내 유일의 프로 합창단이었던 대우합창단이 1980년대 중반 취입한 ‘우리 가곡 모음’ LP 음반.대우합창단은 1983년 10월 창단한 국내 유일의 프로 합창단이었다. 난 그곳의 상임지휘자로 활동했다.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만들어진 합창단엔 최고의 성악가들이 단원으로 활동했다. 대우도 최고였다.
문제는 합창이 어렵다는 점이었다. 개인의 실력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비브라토(목소리가 떨리게 하는 기교)가 심했다. 비브라토는 합창엔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모니를 망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악가들에게 비브라토를 없애라고 말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합창을 위해선 말해야 했다. 연일 충돌이 벌어졌다.
난 온화한 지휘자가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다. 좋은 말만으로는 합창이 되지 않는다. 연습하는 데 있어서 절대 물러서는 법도 없다. 단원들이 가혹하다고 생각했을 법도 하다. 갈등과 봉합이 반복되면서 대우합창단은 자리를 잡아갔다. 선명회합창단을 통해 ‘움직이는 합창’의 힘을 깨달았다.
대우합창단에도 적용했다. 1983년 12월 15일 국립극장에서 창단연주회를 가졌다. 평론가들은 가혹했다. “선명회합창단의 성인 버전이다”는 식의 비난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객석의 반응은 뜨거웠다. 좌석은 늘 매진됐고 암표상까지 등장했다. 대단한 인기였다. 1986년 일본 나가노에서 열린 ‘아시아 칸타트’, 198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제1회 세계합창심포지엄을 통해 세계적인 합창단으로 우뚝 섰다. 모두가 ‘다이우’를 연호했다. 창단 4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창단은 늘 적자를 면치 못했다. 사장단 회의 때마다 불만이 쏟아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급해졌다. 연습의 강도는 점차 세졌다. 늘 불만이 있던 단원들과의 갈등도 최고조에 달했다. 1988년은 인생 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해였다. 큰 연주회를 앞두고 한 여성 단원이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나타났다. 여성들의 경우 포니테일 스타일로 통일하는 게 관례였는데 이를 깬 것이었다. 항명이었다. 불같이 화를 냈다. 그 단원의 남편도 대우합창단에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윤학원 반대파’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집으로 투서가 날아들었고 예술의전당엔 나를 비난하는 대자보가 붙었다. 별다른 혐의는 없었다. 가혹하다는 게 대부분이었다. 김우중 회장이 단원을 만나 불만을 듣기도 했다. 큰 문제점을 찾지 못한 회장은 단원들에게 최후통첩을 했다.
“윤학원 지휘자를 따르면 봉급을 100% 인상할 것이고 그를 거부하면 합창단은 해체하겠습니다.” 급기야 날 반대하던 단원들이 내가 장로 장립 받던 1988년 11월, 영락교회에 나타났다. 그날은 임영수 목사님의 위임식도 있던 날이었다. 나 때문에 교회 잔치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결국 합창단은 해체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단원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됐다. 10여년이 지나 대우합창단 멤버들이 예술의전당에서 연주회를 가진 일이 있었다. 날 반대했던 단원들도 내게 사과했고 나도 단원들의 입장을 배려하지 못한 걸 반성했다. 물론 지금도 웃고 즐겁고 편하기만 해서는 좋은 음악이 안 된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래서 지금도 “지휘자 때문에 우리가 죽는다”는 말이 나오나보다.
***[역경의 열매] 윤학원 <11> 인천시립합창단 첫 연주회 제목 ‘예배’로 정해
파격적 대우 받고 프로 합창단 재도전… 종교색 허용 안 되지만 찬양 포기 못해
윤학원 장로가 인천시립합창단 연주회에서 지휘하고 있다. 이 합창단은 윤 장로가 두 번째로 맡은 프로 합창단이다.1988년 12월 대우합창단이 해체된 뒤 8개월 동안 깊은 실의에 빠졌었다. 하나님께만 의지하던 시간이었지만 너무 괴로워 기도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프로 합창단만 안 맡으면 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성격이었다. 아마추어 합창단을 만들기로 했다. 대상은 선명회합창단 출신 기독교인이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합창단이 바로 ‘서울레이디스싱어즈’였다. 젊은 여성으로만 구성된 레이디스싱어즈는 선명회합창단과 같은 컬러의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성인 합창단이었다. 인기가 대단했다.
1989년 3월 창단한 뒤 1993년부터 세계합창심포지엄에 초빙될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고 미국합창지휘자협회(ACDA) 컨벤션에도 단골로 초청받는 합창단으로 성장했다. 연습은 살인적인 일정으로 진행됐다. 해외 연주회를 앞두고 서울 강남구의 연습실에서 합숙훈련을 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라 잠시 휴식시간이 되면 20대 여성 단원들이 일제히 공중전화로 달려가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어느 날 그 옆을 지나다 얼핏 듣게 됐는데 일단 전화 연결이 되면 모두 “지휘자 때문에 짜증나 죽겠다”는 말들을 했다. 웃음이 났다. 하지만 단원들은 합창이 주는 기쁨을 알고 있었다. 날로 실력이 좋아졌다. 젊은 단원들이다 보니 생활 관리도 철저하게 했다. 난 심술궂은 할아버지 역할을 맡았다. 밤엔 정해진 시간이 되면 무조건 자야 했고 식사도 직접 챙겼다. 잘못 먹고 탈이 나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많은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잘 따라준 단원들 덕분에 레이디스싱어즈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 합창단으로 굳건히 자리를 잡아갔다.
1996년 어느 날 나에게 또 다른 도전이 주어졌다. 인천문화예술회관 관장이 우리 집엘 왔다. 다짜고짜 “선생님, 인천시립합창단 지휘를 맡아주십시오” 하는 게 아닌가. 다시는 프로 합창단을 지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나였다. 게다가 인천시립은 지휘자와 단원들의 갈등으로 해체된 일도 여러 차례였다. 대우합창단의 악몽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내도 반대했다. 그런데 도전정신이 문제였다. 합창에 대한 열정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지휘를 맡기로 했다.
대우는 파격적이었다. 직책도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였다. 난 ‘전임 작곡가’를 요구했다. 오디션을 통해 25명의 단원도 새로 뽑았다. 중앙대에는 6개월 안식년을 신청했다. 제대로 하기 위해서였다. 열정은 연습에서 출발한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주 5회의 연습이 시작됐다. 대우합창단에서의 경험을 자양분 삼았다. 최대한 부드러운 지휘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 것이었다. 이곳에서도 움직이는 합창을 시도했다. 낯설었기 때문에 반발도 컸다. 하지만 대부분 단원들은 지도를 잘 따라줬다. 인천시립합창단은 점점 정상궤도에 올라서기 시작했다.
첫 연주회 준비가 시작됐다. ‘타이틀을 뭐라고 할까.’ 기도하던 중 예배라는 뜻을 가진 ‘미사(MASS)’를 택했다. 타이틀은 ‘인천 MASS’였다. 원칙적으로 시립합창단에선 종교음악 연주가 허용되지 않지만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포기할 수 없었다.
***[역경의 열매] 윤학원 <12> ‘합창계의 올림픽’서 기립박수… 뿌듯함으로 벅차
단원 모두 기독교인… 기도와 열정 나눠 창작곡 ‘팔소성’ 등 3곡으로 무대 압도
인천시립합창단이 2009년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열린 미국합창지휘자협회 컨벤션에서 ‘팔소성’을 부르는 모습.첫 연주회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정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다만 단원들의 반응이 걱정됐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단원들이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 자연스럽게 무대에 오르기 전 기도도 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 의지하며 열정적으로 준비했던 첫 연주회는 성공적이었다.
인천시립합창단은 계속 새로운 곡을 만들었고 1년에 네 차례 정도 연주회를 열며 지속적으로 성장했다. 그러던 중 2009년 미국합창지휘자협회(ACDA) 컨벤션에 참가해 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ACDA는 합창계의 올림픽이다. 최고의 무대이자 특별한 연주회에 초청받은 것이다.
난 세 가지 원칙을 정했다. 한국적인데 세계화할 수 있는 노래여야 하고 현대적이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몇 개 안 되는 원칙이었지만 여기에 부합하는 곡을 작곡해야 하는 우효원 전임 작곡가는 괴로웠을 것이다. 일단 시조는 배제했다. 외국인에게 전달이 어렵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곡가와 회의 중 웃음소리로 음악을 만들어 보자는 다소 엉뚱한 결과에 도달했다. 엉뚱하긴 했지만 마음이 끌렸다. 웃음소리야말로 세계인이 모두 알아들을 수 있고 복잡한 해석도 필요 없지 않은가.
이렇게 해서 탄생한 곡이 바로 ‘팔소성(八笑聲)’이었다. 웃음이 이렇게 다양한지 우 작곡가가 들고 온 팔소성을 보고 알았다. ‘교소’는 살짝 수줍어하는 웃음이고 ‘치소’는 바보 같은 웃음, ‘염소’는 요염한 웃음이다. 이렇게 여덟 개의 웃음이 곡에 담겼다. 곡은 좋았지만 웃음을 표현해야 하는 단원들은 고역이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힘들었다. 연습하면서 곡은 점점 풍요로워졌다. 단원들은 1년 동안 조별연습과 일대일 연습을 통해 몸에 익혀갔다. ACDA 참가 전 국내에서 두 차례 실험 무대도 가졌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하다. 국내 무대에서의 실험으로 팔소성은 완벽한 곡으로 탈바꿈했다.
연주회는 2009년 3월 7일 미국 오클라호마시티 시빅센터 뮤직홀에서 열렸다. 3000석 좌석이 가득 찼다. 무대에 오르기 전 단원 48명과 마음을 모아 기도했다. 이때 우리가 가지고 간 음악은 아리랑을 편곡해 만든 ‘메나리’와 미국인들도 어렵다고 손사래 치는 ‘다윗이 그 소리를 들었을 때’, 그리고 ‘팔소성’이었다. 준비한 대로 신나게 불렀다. 연주가 끝나자 모든 관객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폭발적이었다. 객석의 흥분이 고스란히 무대로 전해졌다. 눈물이 흘렀다. 매코이 ACDA 회장이 흥분을 참지 못하고 무대로 뛰어올라왔다. “정말 대단했습니다. ACDA 50년 역사상 이렇게 기립박수가 터져 나온 건 처음입니다.” 많은 사람이 나와 단원들에게 아낌없는 칭찬을 줬다. 그동안의 수고를 한꺼번에 보상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튿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에 나갔더니 ACDA에 참가했던 다른 나라 합창단들이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마치 우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엄지를 들어 보였다.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자는 요청이 이어졌다. 난 무엇보다 한국 합창이 세계무대를 압도했다는 사실이 벅찼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선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한국 합창, 이제부터 시작이다’라는 생각과 함께.
***[역경의 열매] 윤학원 <13> 청춘합창단 통해 ‘합창의 대중화’ 꿈 새롭게 다져
KBS ‘남자의 자격’ 지휘자 멘토 맡아… 기교 없어도 마음 담은 노래는 늘 감동
윤학원 장로(오른쪽)가 청춘합창단을 지휘한 김태원씨에게 지휘법을 가르쳐주고 있다.미국 합창계는 한국 합창을 2009년을 기준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미국 합창지휘자협회(ACDA)가 인천시립합창단을 초청해 연주회를 개최한 이후 일어난 현상이다. 2010년부터 미국 대학 교수들이 ‘한국합창 견학’을 위해 방한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관광공사는 ACDA가 발간하는 ‘코랄저널’에 “어메이징한 인천시립합창단을 만나러 한국에 오세요”라는 광고를 싣기도 했다.
2010년 처음 방한했던 미국 컨커디어대 합창단은 이듬해 70여명을 데리고 다시 인천을 찾았다. 컨커디어대 합창단은 영국 BBC 등 세계적인 언론이 미국 최고의 대학 합창단으로 늘 호평하던 곳이었다. 워싱턴앤리대와 아이오와대 합창단도 우리를 찾았다. 늘 바쁜 일상을 살았지만 2009년 이후엔 정말이지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2011년 6월 초여름이 막 시작되던 어느 날이었다. KBS 방송국 작가로부터 연락이 왔다. ‘남자의 자격’ 방송작가였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남자의 자격 합창단을 하려는데, 멘토가 돼주십시오.” 직접 지휘를 하는 게 아니라 지휘자를 지도하는 멘토가 돼 달라는 요청이었다. 예능감이 없어 직접 지휘는 부담스러웠다. 멘토라면 자신이 있었다. “지휘자는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룹 부활의 리더인 가수 김태원씨입니다.”
서울 경희대에서 청춘합창단 멤버 오디션이 있던 날 김씨를 처음 만났다. ‘아니. 단원들과 눈을 맞춰야 하는데 선글라스를 쓰고 있으면 어쩌나, 내가 이분과 잘할 수 있을까.’ 그런데 대화를 나눠보니 고민이 사라졌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겸손한 태도와 따뜻한 말투가 보기와는 달리 친근했다.
오디션 참가자는 52세부터 90세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쉽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노래는 마음의 이야기 아닌가. 자신의 감정과 생각, 삶의 이야기를 노래로 표현하기 위해 다소 음정이 틀리고 박자를 놓치더라도 마음을 전하는 노래는 늘 감동을 주기 마련이다.
느낌이 좋았다. ‘김태원 지휘자’는 일주일에 한 차례 날 방문했다. 각오가 남달라 보였다. 정말 열심히 배웠다. 김씨가 작곡한 ‘사랑이란 이름을 더하여’란 곡은 훌륭했다. 우효원 작곡가가 합창곡으로 편곡한 걸 인천시립합창단이 먼저 녹음했다. 청춘 합창단은 이를 들으면서 맹연습을 했다.
“합창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예선을 며칠 앞둔 어느 날 강원도 평창에서 합숙훈련 중이던 청춘합창단에서 화음이 전혀 안 된다며 급히 도와달라는 요청이 왔다. 난 옆 사람의 소리를 들을 것을 주문했다. “첫 음이 맞으려면 호흡을 먼저 맞춰야 합니다.” “부딪치는 화성을 쓰려면 음량이 같아야 해요.”
이렇게 담금질한 청춘합창단은 2011년 8월 세종대에서 열린 예선을 가볍게 통과했다. 본선은 9월 4일 KBS홀에서 열렸다. 결과는 은상이었다. 합창경연대회를 마친 뒤 김태원 지휘자가 자신이 직접 만든 기타와 멋있는 연주용 구두를 선물했다. 언제 발 사이즈를 봤는지 신기하게도 꼭 맞았다. 좋은 사람들과 흥미로운 경험을 한 것도 결실인데 합창이 가진 힘을 체험한 건 내게 값진 기쁨을 선사했다. ‘합창의 대중화’라는 목표를 향해 새로운 꿈을 꿨다.
***[역경의 열매] 윤학원 <14> 마음을 모으는 합창… 남북이 함께할 수 있다면
여든에도 윤학원 코랄·찬양대 지휘… 주신 재능 최대한 나누는 게 내 사명
윤학원 장로가 2009년 홍콩에서 열린 월드유스콰이어 합창제에서 전 세계 청소년으로 구성된 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다.나는 1938년생으로 올해 여든이다. 중앙대 음대 교수를 은퇴한 게 어느새 10년 전 일이다. 남들은 은퇴하면 여행 다니고 손주들 재롱 보며 산다지만 난 여전히 바쁘다. 물론 손주들도 장성해 하나둘 대학에 입학하기 시작했으니 이젠 얼굴 보기도 힘들다. 요즘에는 제자들과 함께 윤학원 코랄을 꾸려가고 있다. 극동방송에서 시작해 선명회어린이합창단, 중앙대 교수, 대우합창단, 서울레이디스싱어즈, 인천시립합창단 등 음악으로 연결된 인생을 살았고 또 살아가고 있다.
어린이들의 목소리를 여전히 잊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을 다듬어 이들이 화음까지 만들어내는 과정이 무척 감동적이다. 생소리만 내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화음으로 모아지는 걸 듣는 기쁨이 크다. 그런 이유에서 CTS 소년소녀합창단도 지도하고 있다. 아이들을 만나고 이들과 함께 화음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살아온 인생과도 비슷하다. 도전하면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돌아보면 한순간도 나태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최대한 많이 나누는 일이 내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합창의 뿌리는 교회음악에 있다. 찬양대는 합창단의 출발점이다. 교수에서 은퇴하던 해에 교회에서도 은퇴를 해야 했다. 영락교회 시온찬양대는 내 인생이 녹아 있는 찬양대였다. 장로 은퇴와 동시에 지휘자도 그만둬야 한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세상 모든 일에는 정해진 때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찬양대 지휘만큼은 내려놓기 힘들었다. 은퇴 뒤에도 영락교회에서 찬양대 지휘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던 중 자양교회에서 찬양대를 지휘하고 있던 아들 윤의중 한세대 음대 교수가 찬양대를 사임해야 할 상황이 됐다. 그러자 자양교회 최대준 담임목사가 나를 기억하고 지휘자로 초청해 줬다. 물론 그때 자양교회 말고도 네 곳의 교회가 찬양대를 맡아 달라는 요청을 한 상태였다. 하지만 난 음악을 사랑하는 최 목사에게 마음이 끌렸다. 최 목사는 음악에 대한 사랑이 누구보다 컸고 찬양대 지휘를 해본 경험까지 있었던 음악 애호가였다. 게다가 아들이 봉사하던 곳이기도 했다. 그 교회 찬양대 이름이 시온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영락교회에서 은퇴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자양교회 시온찬양대 지휘자로 봉사하며 교회음악가로 살고 있다.
평창 동계올림픽으로 온 나라가 뜨겁다. 최근엔 북한 선수단도 올림픽에 참가하기로 하면서 열기가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요즘 기도할 때마다 마음에 드는 생각이 하나 있다. ‘언젠가 우리나라 합창단과 북한 합창단이 함께 노래를 부른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망이다.
합창이 무엇인가. 화음이 기본이 되는 예술이다. 나는 불화가 있는 교회일수록 합창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늘 조언해 왔다. 화음을 만드는 과정은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여정이다. 마음을 모으지 않으면 옆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옆 사람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 절대 음 높이를 맞출 수 없고 호흡을 가지런하게 모을 수도 없다. 지휘자의 지휘봉을 보고 첫 음을 동시에 내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과정을 잘 거친 찬양대는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한반도가 분단된 지도 60년이 훌쩍 지났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합창단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면, 그 감격적인 자리에서 지휘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기도하는 요즘이다.
***[역경의 열매] 윤학원 <15·끝> 손주들과 읽는 사랑章… 신앙·음악 속에서 행복
성실히 사는 신앙인 모습 보인 게 교육, 3대째 음악 전공… 화합과 사랑 강조해
윤학원 장로가 2012년 인천종합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열린 인천시립합창단 133회 정기연주회에서 지휘하고 있다.아내 이명원 권사는 연세대 음대 성악과 58학번이다. 난 1년 선배로 같은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했다. 우리가 만나게 된 것도 음악 때문이었다. 대학 3학년 때 기독학생연합합창단 지휘자와 서기로 만나 지금까지 화음을 맞추며 살고 있다.
우리 자녀들도 음악을 전공했다. 아들 윤의중 한세대 음대 교수도 합창지휘자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최근 국립합창단 예술감독이 된 윤 교수의 삶도 음악 안에 있다. 최근 딸 윤혜경 집사도 한세대 음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며느리 최유정도 오르간을 전공해 몇몇 대학 음대에 출강하고 있다. 사위 박기호 집사는 개인사업을 하는 비즈니스맨이지만 음악을 누구보다 사랑한다. 영락교회 시온찬양대 베이스 파트에서 오랫동안 봉사하고 있는 아마추어 실력파다.
손주들도 음악을 전공하고 또 사랑한다. 윤 교수의 아들 석원이는 미국 신시내티음대에서 지휘를 전공한 뒤 현재 카투사로 복무 중이다. 손녀 세라는 미국 버클리음대 성악과에 재학 중이다. 윤혜경 박사의 아들 박주영은 미국 워싱턴대에서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하다 휴학하고 현재는 공익근무요원으로 군 복무 중이다. 음악을 전공하진 않아도 누구보다 음악을 사랑하는 젊은이다.
돌아보면 우리 가정을 이끈 건 음악과 예수 그리스도였다. 모두 신앙 안에서 음악을 사랑하며 살 수 있다는 게 행복한 일이다. 나는 누구보다 바쁜 삶을 살았다. 아이들에게도 뭘 특별히 강조한 게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아내와 열심히 살았던 뒷모습을 보여줬다. 성실히 살아가는 신앙인의 일상을 보여줬다.
시간이 나면 아이들과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바로 사랑장(章)이다.
손주들과도 이 구절을 함께 읽는다. 고린도전서 13장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로 끝난다. 이 마지막 구절이 우리 가정의 가훈이다. 사랑은 화합을 전제로 한다. 그런 면에서 합창은 화합을 향한 지름길이다. 옆 사람의 소리를 주의 깊게 듣는 것이 합창의 시작이다. 이웃의 이야기를 잘 들으면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면 하나 될 수 있다.
여든이 됐다. 이제는 나도, 아내도 할아버지 할머니가 됐다. 물론 여전히 한국의 합창을 위해 활동하고 있지만 이제는 자녀들의 시대가 열린다. 젊은이들이 활약해야 할 때인 것이다. 하루하루 꿈을 향해 달려가던 젊은 시절은 이미 과거가 됐다. 젊은 시절부터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다. “인생은 도돌이표가 없다.”
젊은 사람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다. 내일보다는 지금 이 시간, 지금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조언을 하고 싶다. 또 가족이 얼마나 중요한지 한순간도 잊지 않았으면 한다. 항상 가족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으면 한다. 하나님은 외롭지 말라고, 함께 어울려 살라고 부부를 만드셨다. 이를 통해 가정의 신비로움도 보여주셨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모두 서로 사랑하고 화합하며 좋은 하모니를 만들어 가길 소망한다. 멋진 화음이 아름다운 합창을 만들 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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