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jntimes.kr/news/articleView.html?idxno=11261
인터뷰…나주문화의 산증인 나천수 씨를 만나다
- 칠순 나천수 씨 ‘역주 겸산유고’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 받아&표해록의 저자 최부(崔溥) 선생 생가터에 살며 옛 문헌 속 나주의 모습 살려내
「나주목 향토문화 및 민속유물의 재발견」이라는 슬로건으로 1986년도에 나주에 ‘천년 목사골’이라는 별칭을 달아준 인물, 1990년도에 전국 최초 성향공원을 조성하였으며, 완사천 복원, 나주향토문화관 건립, 나주 4대문 옛 터에 빗돌을 세우고, 남고문 복원 발주, 나주문화예술회관의 터를 잡고 설계를 발주했던 사람...
그가 지난달 24일 전남대학교에서 올해 71세 늦깎이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나천수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주문화의 산증인 나천수 씨를 만나본다.
최부 생가터 지킴이 나천수
나 씨는 표해록의 저자인 금남 최부(崔溥)가 살았던 금계동 옛터에 살고 있다.
나 씨는 나주시청에서 근무하다가 1992년도에 전남도청의 국제업무 담당계장으로 발령 나 국제교류와 수출업무를 담당하면서도 향토사 발굴을 취미삼아 계속해왔다.
그러던 중, 1993년도에 중국 절강성 정부를 방문하여 전남도와 절강성간 국제교류 문호를 튼 장본인이다.
나주시와 절강성 여요시와의 교류하도록 다리를 놓아 주고, 성정부에 표해록 문헌을 보내 최부 선생의 일행이 상륙했던 임회현에 마침내 최부 선생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도록 ‘보이지 않은 손’ 역할을 하여 2002년도에 비를 세우도록 뒷심이 되어주었다는 사실도 아는 사람만 아는 사실이다.
향토문화 발굴의 관문은 바로 한자로 써진 옛 문헌을 해독하지 않으면, 남이 이미 번역해 놓은 자료만 활용하는 한계에 막히게 되어, 정년퇴직 후에 재야에서 독학으로 4년을 고문번역 연습을 하고, 대학원에서 4년 동안에 학위를 획득하는 제반 절차를 모두 통과하여 마침내 『역주 겸산 유고』 논문으로 학위를 받게 된 것이라 하였다.
옛 문헌을 번역하다
나 씨는 우리나라 선대가 쓴 한자기록의 문헌은 중국어가 아닌 우리글이라 하였다. 그가 1993년도에 표해록을 원본을 복사하여 중국에 가지고 가, 중국 복단대학교 사학과를 나온 절강성 외사판공실 부주임에게 주었으나, 비록 한자로 써 있지만, 쉽게 해석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우리 선대가 쓴 고문헌은 한자는 똑 같지만 언어의 표현이 우리글이기에 중국 사람이 알지 못한 것이라 나 씨는 말하고 있다.
거의 모든 우리나라의 역사기록, 향토사 기록이 한자로 되어 있다. 그래서 ‘그 누군가’는 이를 배워 한글세대를 위해 소리글인 한글로 번역해 놓아야 한글세대가 우리 역사를 알 수 있기에 나 씨는 바로 ‘그 누군가’가 자신이 되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옛 나주인들이 남긴 문헌을 통해 역사적 가치를 살펴보자.
정석진(鄭錫珍, 1851-1896)의 문집인 난파유고(蘭坡遺稿)에는 동학군이 나주를 침공할 때 수성을 하였던 상황을 기록하였는데, 나주읍성 위에 흙으로 작은 토벽(土壁)을 쌓아 몸을 엄폐하면서 적들과 대항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를 판삽(版?)으로 표현하였다.
나해봉(羅海鳳, 1584-1638)의 남간문집(南磵文集)에는 판축(版築)으로 표현하였다. 판삽(版?)이나 판축(版築)은 판자와 판자 사이에 흙을 넣고 공이로 다지는 공법으로 토벽을 만들어 성 밖에서 적들이 화살로 공격할 때 몸을 숨기는 엄폐용으로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학경(羅學敬, 1801-1875)의 금촌유고(錦村遺稿)에는 오늘날 목사 내아 앞에 수죽헌(水竹軒)이 있음을 알 수 있는 시가 있다.
시의 제목은 “삼가 성주 김병우의 수죽헌(水竹軒) 운을 차운하다”로 제1수에는 ‘제금당(製錦堂) 앞에 수죽지(水竹池)는/ 물속에 노는 물고기가 활발하니 살도록 놓아주는 것이 마땅하네’라 한 것으로 보아, 오늘날 목사내아가 제금헌(制琴軒)인데, 그 앞에 대나무 연못가에 소위 수죽헌(水竹軒)이 있어 물속에 물고기를 보고 시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제2수에는 금성관 동쪽 객사인 벽오헌에 오늘날 발굴 된 연못의 물고기를 보고 지은 시인데 다음과 같다.
달밤에 벽오헌(碧梧軒) 곁에서 물고기를 보는데
금빛 유리 그림자가 정함과 거침[精?]를 혼탁하게 하네
혹 물고기가 뛰어 오르거나 잠기는 것도 본성을 따르는 것이지만
봄물의 작은 연못에서 노니 도리어 큰 연못을 잊어버렸네
나해구(羅海龜, 1581-1660)의 석호집선(石壕集選)에 보면 나주 석현마을(오늘날 계간사 위치) 동쪽으로 흐르는 영산강 지천을 장성천이라 부르는데, 인조 당시에는 석호천(石壕川)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김선(金璇, 1568-1642)의 시서유고(市西遺稿)에 보면 김선이 나해구를 추억하며 지은 시에 ‘농어가 헤엄치는 여울 북쪽 석현 마을은 그윽한데/ 작은 다리로 들어가는 길 입구에 향기로운 풀이 있는 모래섬이라네’라 하였다.
농어는 바닷물고기이니, 그 당시 밀물이 되면 바닷물이 석호천 위로 올라 왔음을 짐작케 하는 시이다.
영산강물이 과연 어디까지 밀물로 역류해 갔는지는 금성읍지의 여황에서 짐작해 낼 수 있다. 여황은 과거 나주목 속현에 해당하니, 나주 땅이었지만 오늘날은 행정구역이 광주 광산구 본양동에 해당한다.
여황(艅?)이란 글 뜻은 ‘큰 배’란 뜻이다. ‘큰 배 또는 오나라의 큰 배’란 뜻의 여황이 지명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영산강은 과거(신라, 고려시대) 중국으로 오가는 남방통로였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언급되었는데, 신라 때는 영암이, 고려 때는 회진이 국제항구 기능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밀물 때에는 여황까지 올라가 배를 댄듯하다.
그리고 육로로 고려의 수도인 개경으로 가서 사신의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기간이 빨라야 6개월 정도였으니, 당시 사람들은 황해 바다를 건너온 큰 배를 보고, 이를 여황이라 부르게 되니, 결국 지명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짐작된다.
여러 차례 사신들이 배를 정박하였기에 지명이 되었을 것으로 보는데, 오늘날에 상상도 되지 않는다. 이처럼 집안으로 전해오는 옛 개인문집도 찾아 번역해 놓고 보면 주옥같은 옛 정보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글로 만나는 겸산 이병수 선생
이병수(李炳壽, 1855-1941)의 겸산유고(謙山遺稿)는 총 20권 10책으로 구성되었는데, 제목으로 분류해보면 약986개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 개인 쓴 사찬(私撰)의 글이지만 관찬(官撰)의 기록처럼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하겠다.
시가 185제목에 281수가 수록되고, 서간문은 29편, 서문은 51편, 기문은 156편, 상량문은 48편, 축문이 27편, 비문, 묘갈명, 묘표가 230편, 행장, 행록이 96편, 발문이 48편, 전문이 14편, 잡저가 54편, 마지막에 금성정의록 갑·?을·병편이 수록되어 있다. 거의 모두 당시 사람과의 관계를 기록한 것이니, 사료적 가치가 없겠는가?
적어도 구한말의 대문호 겸산 이병수를 기리는 상징물이 있어야, 혈연을 빙자하여, 눈도 즐겁고, 입맛도 즐거운 관광상품이 될 것이고, 그래야 전국의 양성이씨들이 나주를 성지순례하듯 방문 할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바탕으로 미래의 관광 상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오늘의 사람들이 할 일 아니겠는가!
때마침 나주는 4대문(동점문, 서성문, 남고문, 북망문)을 복원하고, 금성관과 나주목사 내아를 중심으로 전통치소 발굴 복원 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나주 지역의 옛 문화유산이 지상부는 없어졌지만 대략 지하 1미터 내외의 깊이에는 옛 터의 흔적이 모두 남아 있어, 고문헌의 기록을 찾아 관광 소프트웨어가 되는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낸 약350여명의 역대 나주목사 이야기, 동학농민 봉기 때에 서성문의 슬픈 이야기 등을 ‘스토리텔링’으로 각색해 내고, 상징물로 복원해 낸다면, 전통치소라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결합하여 나주를 찾는 관광인구가 더욱 불어날 것이라 나 씨는 주장하고 있다.
/ 대담·정리 김양순 기자
jntimes@jntimes.kr
▲칠순의 문학박사 나천수 씨
▲무려 366쪽에 이르는 ‘역주 겸산유고(謙山遺稿)’에는 한말 나주의 선비 이병수(李炳壽, 1855-1941) 선생의 주옥같은 글들이 한글로 번역돼 있다.
첫댓글 부끄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