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충(바오로)은 1759년 전라도 진산군 장고치(현 충청남도 금산군 벌곡면 도산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해남 윤씨로 ‘윤선도’가 6대조이고 증조부는 ‘윤두서’입니다. 집안은 조상대대로 해남에서 살았는데 아버지 ‘윤경’은 해남을 떠나 외가인 안동권씨들이 많이 모여 살고있는 진산에 옮겨와 살았습니다. 윤지충의 고모 윤소온이 정약용의 부친인 정재원과 혼인하여 정약용을 낳았으므로 정약용은 윤지충의 고종사촌 동생이 됩니다. 아버지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대둔산 밑 조용한 마을에서 평범한 선비로 살았으나, 윤지충은 본디 총명한 데다 품행이 단정하여 일찍부터 학문에 정진한 끝에 1783년(정조 7년) 봄 진사시에 합격하게 됩니다.
그렇게 상경한 그는 고종사촌 동생인 정약용을 통해 천주학을 접한 뒤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열리는 '명례방공동체'에도 참여하게 되는데, 이후 성균관에 입학하려던 계획을 접고 《천주실의》와 《칠극》을 얻어 고향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렇게 천주교리를 독학하며 부족한 부분은 정약종의 도움을 받아 공부해 나가다가 1787년에 정약전을 대부로 하여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천주교인이 되었습니다. 1789년에는 북경에 가서 견진성사를 받고 귀국하였는데, 명례방사건(1785년)과 반회사건(1787년) 이후 천주교 서적 소각 등 천주교 신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낙향하여 조용히 지내게 됩니다. 이 시기에 어머니와 동생 윤지헌, 외종사촌 권상연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1790년 북경 교구장인 구베아 주교가 조선 천주교인들에게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의 외종사촌 권상연은 자신의 집안에 모시고 있던 신주를 불태워 땅에 묻고 제사를 더 이상 지내지 않았습니다. 당시 윤지충도 제사는 폐했으나 신주는 그대로 두었다고 합니다. 이 일로 주변 선비들의 비난이 쏟아졌으며 윤씨 가문의 종친들은 격노하게 되는데, 그는 이에 대해 항변하기를, ‘평민들이 신주를 모시지 않는 것을 나라에서 엄히 단속하지 않으며 살림이 어려운 선비가 제향을 못하는 것은 예법에 어긋하지 않으니, 교리를 지키기 위해 사대부로서 죄를 지었을지언정 나라에서 금한 일을 범한 것이 아니다’라며 자신의 소신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1791년 5월에는 그의 어머니 안동권씨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일은 무엇이든 하지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지역일대에 전염병이 돌아 관아에서 통행을 금지시키자 8월 그믐이 돼서야 겨우 장사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장례는 전통의식대로 진행하였으나 신주를 만들지 않았고 제사 또한 지내지 않았습니다. 한편, 전염병의 여파로 장례를 치르는 동안 조문객이 많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신주를 만들지도 않고 조문도 고의로 방해하며 천주교식으로 비밀리에 장례를 치루었다는 유언비어가 조문객들에 의해 조금씩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소문은 꼬리를 물고 점점 부풀려 퍼지기 시작했는데, 심지어 어머니의 시신을 어딘가에 버렸다는 해괴망칙한 괴소문까지 돌아다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흉흉한 소문은 한양에까지 퍼져나가며 조정 대신들간에 당파싸움의 빌미가 되면서 사건이 더욱 증폭되었는데, 결국 진산군수 ‘신사원’에게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여 진상을 조사하라는 어명이 떨어지게 됩니다. 체포령이 떨어지자 윤지충은 경기도 광주로, 권상연은 한산으로 도피하게 되는데, 진산군수가 윤지충의 숙부 ‘윤등’을 잡아들였다는 소식을 접한 윤지충은 그해 10월에 자수하였고 곧 권상연도 체포되었습니다.
진산군수 신사원은 이들에게 배교를 강요하며 모진고문을 가했으나 이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을 회유하는데 실패한 진산군수는 이들을 전주의 전라 감영으로 이송했고 전라감사 ‘정민시’의 심문에 윤지충은 모든 것을 토설한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천주교를 신봉함으로써 제 양반 칭호를 박탈당해야 한다 해도 저는 천주께 죄를 짓기는 원치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주를 모시지 않는 서민들이 그렇다고 하여 정부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또 가난하기 때문에 모든 제사를 규정대로 지내지 못하는 양반들도 엄한 책망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려하여 주십시오. 그러므로 제 낮은 생각으로는 신주를 모시지 않고 죽은 이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서도 제 집에서 천주교를 충실히 신봉하는 것은 결코 국법을 어기는 것이 아닌 듯합니다.“
전라 감영에서 갖은 문초와 혹독한 고문에도 두 사람이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자, 전라 감사는 조정에 장계를 올려 두 사람에 관해 보고하게 되는데, 조정에서 두 사람을 처형해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자 결국 정조는 처형을 윤허한 후 천주교도로 지목받은 이승훈과 권일신에게도 체포를 명하게 됩니다. 당시,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을 거부하는 일은 유학의 핵심인 '효'를 부정하는 행위로, 이는 곧 나라의 어버이 되는 왕에 대한 '충'을 부정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것은 유교사상으로 떠받쳐져 있는 조선의 지배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도전하는 것이었기에 천주교도들을 '나라를 원망하며 세상을 뒤엎고자 하는 무리'로 규정하며 역모사건 차원으로 엄하게 다스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두 사람이 사회도덕을 문란케 하고 사교를 신봉했다는 죄명으로 1791년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차례로 참수형에 처해졌습니다. 당시 윤지충은 32세, 권상연은 40세였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이승훈과 권일신 역시 구속되었는데, 이승훈은 이미 배교했다는 변론이 수용되어 석방되었으나 관직은 박탈당했으며, 권일신은 노모의 간청으로 배교하여 귀양지가 제주에서 예산으로 변경되었으나 유배지로 이송중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고말았습니다. 한편 진산군은 5년동안 현으로 강등되었고 초기에 느슨하게 대응했다는 이유로 진산군수 신사원은 유배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현재 전주 전동성당이 위치한 자리는 윤지충을 비롯한 권상연, 윤지헌, 유항검 등 많은 천주교인들이 순교한 자리입니다. 1908년 보두레 신부가 이들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서 전동성당을 건축했는데, 일제강점기에 도로를 개설하며 전주읍성의 풍남문 인근 성벽을 철거할 때 윤지충이 참수될 당시 피가 튀었던 돌을 가져와 주춧돌로 삼았다고 전해집니다. 전동성당은 명동성당, 대구성당과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건축물로 국가 기념물 사적 28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당 한쪽에는 윤지충의 순교 모습이 동상으로 제작되어 있습니다. 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에 대한 서품선언을 하면서윤지충을 124위 중 첫 번째 복자로 시복하였습니다.
2021년 9월 1일 천주교 전주교구의 발표에 따르면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윤지충의 동생으로 1801년 신유박해때 순교, 2014년에 시복)의 유해가 발굴되었다고 하는데, 같은해 3월에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는 초남 이성지의 바우배기에서 성역화 작업을 하던 중에 출토된 유해와 유물에 대해 그간 면밀히 검사한 결과 순교한 세분의 유해임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발굴 이후 출토물의 탄소연대측정법을 통해서도 묘소 조성 연대등이 세사람이 순교한 1791년과 시기적으로 부합한다는 사실을 파악했으며, 유해에 대해서는 성별검사, 치아와 골화도를 통한 연령검사 및 해부학적 조사, Y염책체 부계 확인검사(Y-STR) 등을 실시해 순교자들의 유해가 확실하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