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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1장 3-4절. 위로의 하나님. 요약설교
3절.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찬송하리로다
바울 사도의 이 찬송은 어려운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크신 긍휼을 생각하면서 외치는 찬송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 14-16절에서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외쳤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주님의 긍휼과 은혜에 대한 근본적인 감사와 다메섹의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행전 16장에서 빌립보 감옥에서도 비록 죄 없이 매 맞고 감옥에 갇혔으나, 낙심이나 원망하지 않고 힘찬 찬송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다니엘도 사자 굴에 던져졌을 때, 두려워서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원망하지를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태복음 5장 10-11절에서 주님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5장 12절에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환난과 시험을 당할 때, 뒤로 물러가서 멸망에 빠지지 말고, 오히려 찬양하고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0장 35절 이하에서는 환난 당하는 성도들을 향해서, (히10:35-39)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간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시요
원문에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ὁ Θεὸς καὶ Πατὴρ τοῦ Κυρίου ἡμῶν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the God and Father of the Lord of us Jesus Christ)
이것은 유대인들이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고 찬양했던 찬양문과 대조됩니다(Barrett).
즉,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알려진 것에 비해 신약성경에서는 '세상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묘사되었는데(갈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에 널리 사용된 독특하고 특징적인 기독교적 어법입니다.
베드로전서 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니라".
그러나, 이스라엘 조상들의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連續)되는 것이며, 조상들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본 문에는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아버지가 되시는가 하는 것이 규정되어 있는데(Backmann), 하나님은 이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2장 11절에는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셨다 "고 했습니다.
자비의 아버지시요
이 표현은 단순히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뜻 외에, '자비(οἰκτιρμός)가 하나님께로부터 유래되며, 하나님이 자비의 창조자요 근원이심을 의미합니다. (시 86:15; 미 7:18).
미가서 7:18-19에는,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19)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용서하시며, 허물을 일일이 지적하시는 것이 아니라, 넘기시며, 우리의 죄를 발로 밟아 없애시고, 우리의 죄악을 깊은 바다에 던지시고 ‘다시 건져 올리지 못함’이라는 푯말을 써 붙이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시편 103편 8-13절에는,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 하시리로다. (10)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셔서, 우리의 죄를 그대로 처벌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서 그 죄악을 멀리 옮겨버리시고,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위로’란 괴로움을 잊게 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삭은 어머니 사라의 죽음으로 괴로움을 당했으나, 아내 리브가를 맞이함으로 위로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창24:67.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모친 상사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요셉은 애굽에서 총리가 되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서, 그 동안 당한 모든 고난과 형제들에게 당한 괴로움을 잊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창41:51. 요셉이 그 장자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라.
그런데, 이 '위로'(παρακλήσεως)는 하나님의 내적 속성인 자비가 외적 행위로 구체화 된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위로는 단지 심리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환난으로부터 실제적으로 구해주시는 것을 나타냅니다(8-10절).
바울은 그 자신이 환난 가운데서 붙드시고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위로를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로마서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자비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시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5-16절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후서 6장 2절에는, "내가 은혜를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자비로운 하나님,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돕는 은혜를 받고, 찬양하며 기쁘게 주님을 섬기시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4절.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우리의 모든 환난
본서에서 바울은 아홉 차례나 ‘환난’(θλίψε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1:4, 8; 2:4; 4:17; 6:4; 7:4; 8:2,13 ).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환난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즉, 세상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그러나 우리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으므로 담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1) 본 절의 ‘위로하사’(παρακαλῶν)는 현재 분사형으로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여러 환난들을 당하지만, 이러한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끊임없는 위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2)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하심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약할수록 더욱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했습니다.
(3) 바울은 복음을 증언하다가 여러 차례 극심한 환난을 겪었으나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안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체험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유대인들에게 돌로 맞아 죽었으나, 하나님이 다시 살려 일으켜주셨습니다(행 14:19).
빌립보에서는, 이방인들에게 매 맞고 지하 깊은 감옥에 갇혔으나, 기도하고 찬송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출 받는 기적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행 16:19-26).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1)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환난 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고 위로하시는 중요한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① 첫째, 8-9절에 나와 있는 대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고, ② 둘째, 위로받은 자가 환난에 처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첫째,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1:8-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둘째, 우리가 환난을 당하는 것은 환난 중에 하나님의 위로를 우리가 먼저 체험함으로써, 우리와 동일한 환난을 당하는 성도를 우리가 위로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느니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은혜를 풍성히 주시는 목적은 그 은혜로써 불쌍한 이웃들을 돕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고린도후서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3) 그런데, 어떤 교인들은 환난 당하고 있는 성도에 대해서, “무슨 죄를 범했기에 그런 형벌을 받고 있는가? 어서 회개하게!”라고 책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그랬습니다.
“욥아, 네가 하나님 앞에 많은 죄를 지었구나. 죄 없이 이렇게 될 수가 없으니, 어서 회개하라. 회개해!”라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죄 때문이든 아니든, 일단 환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아도 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픈 상처에 고추가루를 뿌리는 식으로 정죄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더욱 잔인한 짓입니다.
어떤 학생은 대학 입시에 떨어져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와서, “그 봐라. 공부하라고 그렇게 말할 때, 공부는 안 하고, 맨날 휴대폰하고, 친구들하고 어울려 다니더니, 잘 떨어졌다. 이제 부모 말 안 들었으니, 한 번 혼 좀 나봐라. 이 못된 놈의 새끼!” 하면서, 야단합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인생을 포기하고 아예 나쁜 길로 가버립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오셔서, 울고 밥도 안 먹고 있는 아이에게, “애야,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니. 이것도 좋은 경험이니, 이 경험을 살려서, 다시 한번 해봐라. 나는 네가 잘할 줄로 믿는다. 자고로 큰 인물들은 순탄하게 성공한 사람이 없단다. 역경을 잘 극복할 줄 아는 사람이 결국은 성공하더라. 어서 일어나 밥도 먹고, 힘내라. 나랑 같이 입시학원을 알아보러 가자꾸나”라고 위로하고, 희망을 넣어줍니다.
이런 어머니의 위로가 성경적이고 옳은 태도지요.
어떤 분은 책에서 교회를 떠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아이들이 탈선하더니, 결국 남편과 이혼하고, 이렇게 병까지 들게 되었습니다. 전도사님 저는 어떻게 해요?”
그러자, 전도사님께서 “회개하세요.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 읽고, 열심히 봉사했으면, 그랬겠어요? 이제부터라도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 하도록 하세요. 알았어요?”라고 했습니다.
“그 때 만일 전도사님께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저를 안아주고 등이라도 토닥거려 주면서, 제 아픈 마음을 이해해주시기만 했더라면, 저는 절대로 교회를 떠나지 않았을 거예요”라고 기록한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육신의 아픔보다도, 죄인으로 정죄를 당하는 마음의 아픔이 더 아픈 법입니다.
어떤 그릇된 귀신론자들은 감기만 들어도,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하고, 귀신이 들려서 그렇다고 하는데, 성도에게 그렇게 마귀가 쉽게 달려드는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32장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눈동자 같이 지키신다”고 했으며, 요한일서 5장에는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지키시매,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요한복음 10장에는 “하나님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그 자녀들을 빼앗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는 걸핏하면 죄지어서 마귀가 병들게 하고, 자식이나 남편이 벌 받았다고 하는데, 이와같이 성도를 쉽게 정죄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물론 객관적으로 범죄 사실이 드러났거나, 범죄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되었을 때는, 먼저 조용히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회개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환난 당한 사람을 보거든, 정죄하고 회개하라고 책망하기 전에,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그를 위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성도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많이 체험하시고, 그래서 환난 중에서 고난 당하고 계신 성도님들을 많이 위로하시는 훌륭한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구약성경 룻기에는 아름다운 위로의 장면이 나옵니다.
나오미와 룻이 각각 남편을 잃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 때, 어쩌면 사람들이 이 두 과부에게 속 아픈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죄가 많은 여자들이면, 저렇게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었을까? 저런 여자는 다시 시집가도 또 남편을 잡아먹을 거야!”
이렇게 욕하면서, 그렇지 않아도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마음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아스라고 하는 사람은 참으로 좋은 위로자였습니다.
룻기 2장 12절에는, 보아스가 과부가 되어온 이방 여인 룻에게 "여호와께서 네 행한 (선한) 일을 보상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불쌍한 과부 룻은 이 위로의 말이 고마와서, 룻기 2장 13절에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시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고 위로의 말씀에 대해서 감사하고, 기뻐했습니다.
사람이 좋은 선물이나, 돈을 주는 것도 좋지만, 말로써 위로하여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말로써 사람의 마음을 화나게 하고, 마음에 상처를 주고, 낙심케 하고 심지어 죽게도 만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같은 말로써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소망과 용기를 주고, 기쁨과 생명을 주기도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말씀으로 죽을 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요 6:68)라고 했습니다.
(5) 원칙적으로 병으로 고생해본 사람이 병든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나도 성도님과 똑같은 병을 앓았는데, 하나님께 기도하여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니, 성도님께서도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남편을 잃어본 사람만이 남편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자매님, 나도 일찌기 남편을 잃고,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이렇게 혼자서 자식들을 키웠소. 내가 자매님 마음 다 압니다. 그러니, 죽을 생각 말고, 예수님 잘 믿고, 신앙으로 살아가세요. 그러면, 앞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들이 잘될 거예요.” (광주 동명교회 마리아 권사님)
사업에 실패해본 사람만이 부도난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형제님, 저도 큰 사업을 경영하면서 많은 직원들도 데라고 있었으나, 본의 아니게 자금줄이 막혀서 하루아침에 회사가 넘어가고, 거리로 내어 앉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앞길이 막막해서 죽을 것만 같았는데, 그제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게 되었어요. 그 전에는 사업상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 생할을 그저 주일 예배나 참석한 정도였고, 악세사리로 했지요. 그러나, 사업을 실패한 이후로 진실된 신앙을 갖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러니, 형제님, 형제님도 사업에 실패한 이번 일을 계기로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어보시고, 사업에서 느끼지 못했던 참된 성령님의 위로를 체험해보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마음을 같이 하여 위로해주는 것이 중요하지만, 진정한 위로자는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마음을 기름으로 유하게 하듯이 위로하는 참된 위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곁에서 위로하시는 분’(παράκλητος)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 가지 인생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에게 전화를 하든지 찾아가서, 자비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전하십시오!
그래서 낙심한 성도들이 위로받고, 새 힘을 얻어서, 다시 소생하고, 복된 신앙 생활하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