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묵상의 글 모음
- 심는대로 거둔다 심는대로 거둔다
(갈6:7;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그리이스의 아테네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멋진 여행을 즐기기 위하여 배를 타고 여행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폭풍우가 불어 제쳐 배가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바닷가로 헤엄쳐 나가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아테네 여신에게 계속 호소하면서 자기를 살려준다면 자기의 재물을 아낌없이 바치겠노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난파된 배에 타고 있던 승객 중 한 사람이 헤엄쳐 지나가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아테네 여신에게만 만사를 떠맡기지 마시오, 당신의 두 팔도 사용해 보시구려."
이 이야기는 이솝의 우화 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신의 힘만 빌리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입니다. 노력하지 않고 요행을 바라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맙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행위입니다. 맹장염에 걸린 사람은 빨리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의술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약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감기환자가 약을 먹는다고 죄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할 일에 최선을 다 한 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공부하지 않은 학생이 좋은 점수를 바란다거나, 수고하지 않은 농부가 풍작을 기대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겨울 추위가 심한 해는 복에 잎이 더욱 푸르릅니다. 땀흘린 수고 후의 수확도 그만큼 더욱 귀합니다.
나태하게 살면서 풍요하기를 기도하는 신앙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기도는 나태한 그리스도인의 도피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매사에 성실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근면을 심고, 용서를 심고, 정직을 심읍시다.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구체적인 수고를 합시다. 그런 사람만이 이생과 내세에서 거둘 것이 있을 것입니다.
시간이 많은 사람이 받는 유혹
시편90:10;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어떤 시골 사람이 커다란 말벌을 산채로 잡는 법을 찾아냈습니다. 그는 길고 가느다란 유리병에 약간 달콤한 물을 넣어 둡니다. 그러면, 개으름뱅이 말벌이 지나가다가 그 달콤한 냄새를 맡고서 미끈 빠져들어 죽게 됩니다.
꿀벌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바쁜 꿀벌은 냄새를 맡기 위해 잠시 멈추었을 뿐 그 속에 빠져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꿀벌은 자기 스스로 만든 꿀이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한가로이 날아다니던 그 쓸모없는 말벌만 병 속으로 들어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생활을 짜임새 있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아무 계획없이 빈둥거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치밀하게 자기 시간을 활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길거리에서 특별한 이유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TV를 이리저리 틀며 저녁시간을 헤매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종류의 유혹은 시간이 많은 사람들을 먼저 넘어뜨립니다. 작은 꿀벌도 걸리지 않는 유혹에 커다란 말벌은 여지없이 걸려든 것과 같습니다. 사단이 틈 탈 만큼 한가해지지 마십시오. 다윗은 한가로이 성벽 위를 배회하다가 시험에 빠졌습니다. 사단은 한가로운 그리스도인을 낚아채는 일을 미루는 법이 없습니다.
오직 저 멀리 높은 목표를 세워놓고 흔들림 없이 뛰어가던 믿음의 선배 사도 바울을 본받읍시다. 그는 지난 날의 자랑이나 실패들은 잊어버리고 오직 앞을 바라보며 푯대를 향하여 부지런히 나아갔습니다. 그 푯대는 예수님이 주시는 상급이었습니다.
나태한 믿음을 던져버리고 더욱 더 열심히 한 해를, 그리고 오늘을 삽시다. 교회와 가정,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부지런한 그리스도인으로 삽시다. 흔들림 없는 믿음의 푯대를 세우고 내일을 준비하며 삽시다.
두 나라 속의 삶
"하나님이 열방을 피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시편47:8)
그리스도인은 두 나라에 속하여 있습니다. 이 세상에 속하여 있는 것이 분명한 만큼 또 다른 세계에 속하여 있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은 압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은"어두움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워졌다"고 하였습니다.(골1:14)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지위를 얻은 자들입니다. 이 변화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났던 변화와 동일하게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자기의 보좌우편에 앉히시던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이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전체 삶을 좌우하는 열쇠가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물러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니 더 이상 국가에 속하여 있지 않다'라고 말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국회의원을 선거하는 일에 그리스도인은 투표를 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세상일에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이 세상의 시민이며, 세속적인 영역에 속하여 있기 때문에 그는 땅에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선한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또 다른 나라의 시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두 나라에 속하여 있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우리들의 믿음이 참된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시금석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공중도덕이나 사회의 질서에도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성실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늘나라의 요구들을 압니다. 우리는 이 땅의 법률들을 가능한 한 준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경우가 올 때, "영원히 죽지 아니하며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다른 영역에 거하는 주님이신 그 왕을 결코 거스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며,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이사야40:31)
우주의 길이가 300억 광년 이상이나 되지만 하나님은 한 뼘으로 다 재실 수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주에는 적어도 1,000억개의 은하수가 존재하며, 그 각각은 약1,000억개의 별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들의 이름을 전부 아십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사40:26)그 엄청난 우주의 한 귀퉁이에 지구가 있고,그 지구의 한 모서리에 내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전 세계의 바다에는 340퀸틸리온(100만의 5제곱)갈론의 물이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 전부를 그분의 손바닥에 담고 계십니다.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로 담아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보았으랴"(사40;12)동해바다의 장엄함에 몸이 왜소해짐을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님께는 자그마한 연못도 되지 못합니다.
지구의 무게는 6섹틸리온(1,000의7제곱)미터 톤이지만 하나님께는 됫박에 담으실 수 있고 그에게는 단지 티끌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 경배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까? 당신이 하나님께 경배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더 위대해 지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분을 섬길 때 더 위대해집니다. 사실 하나님께 나는 꼭 필요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있어 하나님은 꼭 필요합니다. 하나님 없는 나의 인생은 물 없는 샘과 같아서 아무런 낙도 소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크신 하나님을 품에 안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 덕분에 위대해 집니다. 그리고 하나님 때문에 힘이 나고 언제나 싱싱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너무 서두르지 않습니까?
"지식없는 소원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하느니라"(잠언 19:2)
오늘 우리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서두름'이라고 볼 수 있다.지하철 안에는 서두름과 혼잡이 가득합니다. 횡단보도 앞에는 출발을 서두르는 차들이 앞다투어 붕붕 거리고 있습니다. 많은 건축물들이 시멘트가 마르기도 전에 다음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 신학도 들도 변칙 속성 코스를 찾아 다니고 있습니다. 몇년 안에, 몇십년해야 하는 일들을 끝장 내고 싶은 마음들이 있을 뿐입니다.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속성으로 처리되는 흔적이 역력합니다.
이러한 현상을 오늘의 교회가 닮아가고 있는 것같습니다. 오늘의 교인들이 닮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시간이 그를 재촉해도 자기의 때가 이를 때까지 기다리는 모습을 보십시오 군중 속에서 일하시며 제자를 가르치시고 개인을 만나시며 또 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너무 바쁘지 않습니까? 너무 서두르지 않나요? 사소한 일들에까지 시간을 뺏기고 있지는 않나요? 버려도 될 일들을 너무나 소중한 듯 붙잡고 있지 않나요? 바쁜 걸음을 멈추고 잠시 생각해 봅시다. 나는 왜 이다지도 바쁜가?무엇을 위하여 나는 이토록 서두르고 있는가?속도를 늦추고 주님과 만나는 시간을 만듭시다. 주안에서 참된 안식을 갖지 못할 때 우리의 마음도, 일도,인격도,건강도,파괴되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나무를 벌목하고 있었습니다.한 사람은 쉴틈 없이 땀을 뻘뻘 흘리며 계속하여 나무를 잘랐습니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은 간간이 쉬며 여유있게 일을 하였습니다. 저녁무렵 쉬지 않고 일하던 일꾼은 완전히 지쳐버린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자기 앞에서 쉬엄 쉬엄 일하던 상대방이 더 많은 일을 해낸 것을 보고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틈틈이 나무 그늘에 쉬며 힘을 복돋우었을 뿐만 아니라 쉬는 동안에 자기의 도끼날을 갈아서 나무를 베었기 때문입니다. 예리한 도끼날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영혼의 감각이 무디어지고 삶이 곤고해진 우리에게도 날을 갈아서 다시 찍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지혜가 필요하다
이 시대를 위하여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사무엘상12:23)
구약의 역사서 중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것은, 에스더서가 아닌가 합니다. 그 작은 책의 주인공 에스더는 유대 포로의 신분으로 왕비의 지위까지 높이 올라간 여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국적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습니다. 한편 왕의 총애를 받던 하만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왕의 모든 신하가 이 하만에게 절하였지만, 에스더의 사촌오빠 모르드개는 절하기를 거절합니다. 하만은 미칠 정도로 화를 내고, 거짓 고발과 상당한 뇌물로 유대인들을 모두 없애버리고자 왕의 허락을 받아 냅니다. 그때 왕비 에스더는 생사를 결단하고 왕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자신의 국적을 밝히는 위험을 감수하게 된 것입니다. 동족이 몰살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는 대신에 "죽으면 죽으리이다"고 결심을 하게 된 것입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의 이 유명한 고백은 삶을 포기한 왕비의 숙명적인 외침이 아니라 주권적인 하나님을 섬기는 한 여인의 확신에 찬 믿음의 선언이었습니다. 이 때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용기를 복돋아 주었습니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즉 "에스더야,하나님께서 역사상 중요한 순간에 자기 백성을 위한 구원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너를 그 주요한 자리에 있게 하셨단다. 네가 왕궁에 있게 된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일이란다"하는 뜻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때를 위함인지 누가 아느냐."이 말은 바로 나와 당신을 위한 질문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당신이 '궁중에 숨어 있기'를 바라는 그 자리가 바로 에스더의 자리와 유사한 것을 압니까? 당신의 가정에, 오늘이라는 이 시대에, 여기라는 한국의 현실 가운데 우리가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우리의 현실과 주변을 바라보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피하지 않는 의무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저 나 한 몸 편히 살고, 내 가족만 잘 먹고 잘 살면 그만이라는 졸부들의 사고방식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만족의 죄악을 끌어안고 울부짖던 이사야, 예레미야가 되어야 합니다. 밤이슬에 젖은 채 죄악의 도성을 굽어보며 기도하시던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사무엘이 고백했던 것과 같은 고백을 우리도 해야 합니다.
두개의 달력
인간이 발명한 여러 개의 달력이 있습니다. 음력을 사용하는 우리나라 고유의 달력이 있고, 유대인의 달력도 있으며, 널리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태양력도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은 로마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1582년에 제정한 '그레고리력'입니다. 아마도 새해가 시작되면 우리는 방마다 새 달력을 걸어놓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달력을 들춰보며 금년은 어떤 일들이 있을까 생각해 본 이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역시 달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달력은 "태초에"라고 부르는 정확히 명시되지 않은 어떤 시점에서 시작합니다. 또한 더 이상 시간이 필요없게 될 때 그 달력은 끝이 납니다.
라틴어로 '랠린더'라는 말은 옛 로마 사회의 관습에서 비롯됩니다. 돈을 갚아야 할 사람이 갚아야 할 때가 이르렀을 '그때'를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재림때 우리 모두가 그 심판대 앞에 서서 우리가 사는 동안에 행한 모든 일을 고해 청산하게 될 것입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달력의 창시자인 그레고리 교황의 이름의 뜻이 "잘 살피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금년 한해도 하나님이 살피고 있다는 의식을 잊지 맙시다.
365일 중 하루도 숨겨진 날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삽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주님의 재림 때에 바르게 준비하고 열심히 기다리는 태도가 될 것입니다.
어떤 부인이 병원에서 '6개월 동안의 시한부 생명'이라는 선고를 받았답니다. 이 부인은 남은 짧은 기간을 최선을 다해 살기로 하고, 보는 이에게마다 사랑을 베풀고, 시간을 아껴 주께 봉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6개월이 다 지날 때쯤, 그 의사의 진단이 오진이었음이 밝혀졌답니다. 그 부인은 자신의 지난 6개월을 감사하며, 평생을 그렇게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자, 여러분! 금년이 내 생의 마지막 해라는 의식으로 주 앞에서 최선의 삶을 삽시다.
피아노와 포르테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깨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29:12)
음악에서 피아노는 '여리게, 부드럽게'를, 포르테는 '세게,강하게'를 의미하는 악상 기호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피아노보다 포르테를 좋아합니다. 보다 세고 빠르고 강한 것이 더 나을 것이라는 막연한 상식이 20세기 말의 현대인들을 그렇게 만든 것 같습니다.
강력한 정치는 모 정당의 슬로건이었고, 강력 고속 엔진은 어느 자동차 회사의 소원이었습니다. 심지어 이 포르테 선호 현상은 소화제 광고에서까지 팽배합니다.
지휘봉을 크고 힘차게 휘두르고 난후 "포르테는 강하다는 뜻입니다."라고 액센트까지 주어가면서 설명하는 국내 유명 지휘자의 말은 포르테는 분명 피아노보다 우월한 것이며 좋은 것임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에서도 포르테가 정말 좋은 것일까요? 성경은 오히려 '약한데서 온전하여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를 통하여 불로써 응답하신 하나님은 강하신 하나님이셨지만, 자기를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협박에 도망친 그 엘리야를 호렙산에서 만나신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일어났지만, 또 엄청난 지진과 뜨거운 불이 일어 났지만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 후에 오직 세미한 소리(아마 피아노시모 정도였을 것입니다)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고운 모양도, 풍체도,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아무 것도 없는 나사렛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약해빠진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삶을 그가 다 이루었을 때 하나님은 예수를 그리스도와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피아노의 방법을 취하셨은즉, 그의 형상을 따라 회복된 우리도 그 길을 따르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오히려 그 길은 더욱 어려운 길이기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이렇게 간절해지는 것입니다. 실제 성악을 전공하는 이나 악기를 다루는 이들의 말을 들어보면 포르테보다 피아노를 연주하기가 더 힘들고 어렵다고 합니다. 나의 연약함을 슬퍼하지 맙시다. 오히려 이 연약함을 즐겨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합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이와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함이라"(살전2:4)
한우화에 의하면 어느 날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끌고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가다가 길에서 만난 한 사람이 둘이서 타고 갈 수 있는 당나귀를 옆에 두고 걸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와 아들이 나귀 등에 탔습니다. 그런데 멀리 가지 않아 두 번째로 만난 사람은 나귀를 타고 있는 그 두 사람을 비난했습니다. 그 이유는 나귀에게 너무나 무거울 뿐만 아니라 비 인간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들이 나귀에서 내렸습니다. 조금 더 가다가 세 번째 만난 사람은 아버지는 나귀를 타고 아들을 걷게 한다는 것은 지각이 부족하다고 아버지를 꾸짖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가 내리고 대신 아들이 나귀등에 탔습니다. 곧 이어 네 번째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아들이 자기보다 더 나이 많은 아버지를 위할 줄도 모른다고 아들을 책망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두 사람이 당나귀를 짊어지고 지친 걸음으로 터벅 터벅 걷게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는 교훈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남의 의견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하면 불 필요한 죄의식과 좌절감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비록 다른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궁극적으로 책임을 추궁할 분은 이런 사람들이 아니고 '하나님'입니다.
바울 사도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좋은 본보기입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희롱이나 비웃음으로 말하는 것에 상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잘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살고 싶습니다. 천만인의 박수보다 하나님 한 분의 칭찬을 사모합시다.
하나님과 인생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그도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도서3;11)
사람이 땀을 흘려 일한 후에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하면 누구나 절망감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당연한 것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1절) 우리는 항상 어떤 일이든 계획을 세우고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추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계획과 성취는 별개이며, 더욱이 성취되었다 할찌라도 그것이 곧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음을 일깨워 주십니다.
첫째로, 우리의 노고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10절). 인생은 노고를 통해서 범죄한 인간의 본질을 깨닫게 되며, 나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창3:7참조). 둘째로,인간이 아무리 계획을 잘 세운다 할지라도 그 성취는 하나님의 계획표에 의해 좌우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제각기 알맞은 때에 아름답게 되도록 지으셨습니다. 아름답다는 표현도 꽃이 활짝 핀 상태처럼 어떤 일이 가장 만족스러운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도 사람의 잘 짜여진 계획과 최선의 피땀어린 수고로써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한 때가 되어야만 이루어집니다(11절). 셋째로, 인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이루는 어떤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본성을 지녔음을 의미합니다(11절). 아무리 좋아 보이는 일이나 사물을 성취하고 소유했다 하더라도 그 기쁨은 오래 가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인격과 함께 성장하지 못하는 것을 계속해서 즐거워 할 수 없습니다. 넷째로, 하나님은 자기가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11절). 너무 거룩하신 하나님과 너무 타락한 인간은 같은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기에는 인간이 주제넘은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는 수고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그 수고 자체를 즐거워하면서 매일 매일 최선을 다하고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는 선한 일꾼들로 굳건히 섭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직 모든 것이 주의 뜻에 달렸음을 되풀이해서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가장 본질적인 일
"그러므로 너희는 나의 증인이요 나는 하나님이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이사야43:12)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28:18-20)을 우리는 '주님의 지상명령' 혹은 '선교명령'이라 부릅니다. 본래 명령이란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켜야 할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마음의 주(主)로 모셨고, 그는 우리를 보혈로 값주고 사셨으므로 그의 것이 되었으며 이제는 그의 명령에 대해서는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명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하여야 할 여러가지 의무를 명령하셨습니다. 구제하는 일, 봉사하는 일, 사회를 개혁하여 억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일,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일 등 수가 한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해야 할 일들 가운데 '우선권'을 찾아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농번기가 다가왔고 비도 왔습니다. 한 농부가 일꾼을 10명이나 얻어 다음 날 감자밭에 잡초를 뽑아 북돋우며, 논도 갈고 모를 심으려고 여러 가지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농부의 외아들이 그날 밤에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자, 이제 일꾼들과 농부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대답은 명확합니다. 모두가 잃은 아들을 찾으러 나가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 성도의 꿈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고양이의 꿈이 항상 생쥐에게 있듯이 오늘날 우리도 많은 선한 일을 하다가 최선의 일을 잊어버리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만일 예수의 이름이 아니고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만일 예수의 이름이 아니고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우리는 이 지상명령을 우선적인 사명으로 간주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천하 인간이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본질입니다(행4:12). 어떤 이는 자기가 전도의 은사를 받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물론 다른 이보다 더 전도를 잘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선교 명령은 은사에 우선합니다. 은사의 유무와 상관없이 이 일을 해야 합니다. 밀러(Donald Miller)교수가 "기독교의 선교는 그리스도 복음의 본질 그 자체 안에 함축되어 있다"고 언급한 것도 선교가 기독교 본질의 기본적이며 우선적임을 강조한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당신은 요즘 이 일을 위해 주어진 기회들을 얼마나 사용하십니까?
신발 속의 모래알
아주 먼 거리를 걸어온 사람에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이 무엇이냐고 신문기자들이 질문을 했습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물없는 광야를 홀로 외롭게 걷는 것이었습니까?" 이 질문에 그는 머리를 가로 저었습니다.
"그러면 가파른 산길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었나요?" 역시 그는 머리를 가로 저었습니다.
"그렇다면 발을 헛딛어 진흙길에 빠졌던 때었습니까? 아니면 엄습하는 추위였습니까?"
그 보도여행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내 신발 속에 숨어들어간 모래였습니다." 이 대답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었습니다.
자, 요즈음 당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이 시간도 마음의 무거운 고통을 느끼고 있지는 않습니까? 심령의 억눌림을 받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환경입니까? 혹은 다른 사람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내 생활 속에 숨어 들어온 '자그마한 죄'때문입니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내가 숨기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미처 알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내가 다 해볼 수 있다는 고집, 혹은 나만이 아는 숨겨진 어떤 죄…그런 것들은 아주 사소한 것 같아도 나를 지치고 넘어지게 하는 가장 무서운 것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내 영혼의 생기를 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즉시'빼내야 합니다. 어떻게요? 예수님께 진실하고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그의 보혈로 나를 씻어주시고 내 맘 깊은 곳으로부터 기쁨과 생기를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 가져오지 않아도 될 만큼 작은 죄악은 없습니다. 또 주님께 가져올 수 없을 만큼 큰 죄도 없습니다.
새롭게, 더 새롭게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옵소서"(시편51편:10)
"탕자처럼 방황하다가 애타게 기다리는...오 주님 나 이제 갑니다-"
복음 성가를 부르노라면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그 뜻을 알고 목청높여 부르는지 아니면 부르는 저들이 탕자에 속하는 것일까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23)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가운데 유치부 아이들은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들도 예외조항이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근 팔십 평생을 신앙생활과 목회를 하시다 은퇴하신 분도 기도하면서 자기가 죄인임을 목이 메어 고백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60회 생신을 맞을 즈음에서 부랑자 무의탁 노인들을 위해 사역하던 전도사님의 고백도 성자처럼 살았을 법한데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어찌된 일입니까?
우리 생각에는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더해감에 따라 죄가 없음으로 만족한 삶을 살아갈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말로 판단해 보건대, 적어도 그 자신은 주님 안에서 성장해 갈수록, 그는 더욱 더 큰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A.D.59년에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전15:9)
A.D.64년에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엡3:8)
A.D.65년에는,"죄인 중에 네가 괴수니라"(딤전1:15)
처음에 그는 자신을 '사도들'중에 가장 작은 사도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는 모든 '성도'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고 말했습니다. 더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자신을 모든 '죄인' 중에서도 최악의 인물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동행하면 할수록 자기에게서 더 많은 죄를 발견했던 것입니다.그가 죄를 더 많이 범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죄를 더 깊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두운 불빛에 보지 못했던 옷의 누추함이, 밝은 태양빛 밑에서 완연히 드러나듯이, 그가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더 가까이 갈 때에, 그는 더 명백하게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기의 삶을 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죄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은,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과 비례합니다.
내 입술의 찬송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시편134:2,3)
가사도 은혜스러운 어떤 찬송이나 밝고 아르다운 복음송을 첫소리로 듣게 되면, 고맙게도 그 노래가 온종일 내 '입가의 노래'가 되어 줍니다.
성도의 삶에 있어서 찬송은 놀라운 활력소가 됩니다. 그 가사를 조용히 곱씹어보면, 놀랍도록 소중한 의미들이 있어 우리를 격려합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그의 힘이 기진할 때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부르며 확신을 되찾았습니다.
찬송을 부릅시다. 부르되 힘차게 부릅시다. 잠들기 전에 찬송가 테이프를 녹음기에 넣어두고 눈 뜨면 그것을 틀기로 합시다.혹은 극동방송이나 기독교방송에 다이얼을 맞춰 놓았다가 틀 수도 있습니다. 이 조그만 수고가 우리의 영적인 생활의 밝기에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내 찬송'을 결정하자는 것입니다. 막연히 그저 1절만 아는 찬송이 아니라, 4절까지 완전히 알 뿐만 아니라 내 입에 무의식 중에라도 불리워지는 찬송을 말합니다.
아무개 하면 아! "~찬송이지" 이 정도로 될 수 있는 것 말입니다. 캄캄한 밤에 멀리서 들려오는데 4절까지 불리워지던 찬송가가 얼마나 은혜스럽던지요!
참된 부요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누가복음12:33)
역사의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크게 둘로 나누실 것입니다. 오른편에는 양이라고 불리우는 칭찬과 상급을 받는 무리들이 있고, 왼편에는 저주와 책망을 들을 염소라고 불리우는 무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눔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오른편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칭찬받고 의인이라고 불리우는 이유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주께서는, 자신이 배고프고 목마를 때, 또 가난하고 병들었을 때 주님을 돌보아 주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음식이나 옷을 드린 적이 없었기에 더욱 궁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란 누구일까요? 키가 작은 사람일까요? 나이가 어린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그저 보잘것 없이 여겨지는 사람, 대수롭지 않은 사람이 바로 지극히 작은 자입니다. 내가 아무리 도와도 내게 그 보답조차도 할 수 없는 사람, 내가 온 힘을 다 쏟아 주어도 감사하다는 표시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 일을 주님께서는 가장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억만금을 가지고도 쓸 줄 모르는 사람은 결코 부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비록 사글세 방에서 살아도 이웃에게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부자입니다.우리는 이러한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이런 선행을 하게 마련입니다. 누군가를 돕고 마음을 나누어 주는 것은 참된 믿음의 징표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사치와 향락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너무도 많은 슬픈 사람, 외로운 사람,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서 스스로 자기 몸을 가눌 수 없는 장애자나 정신박약아들은 제일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 단지 돈이 있어 누구를 돕는 차원이 아니라, 비록 나도 어렵지만 예수님이 내게 주신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구제하기를 힘씁시다.
황금률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태복음7:12)
사람마다 문제를 안고 삽니다. 다만 그 문제의 종류가 다를 뿐입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자기의 문제를 현재 겪고 있는 자신의 처지,즉 원하지 않는 고통스러운 현 상황을 문제로 삼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문제는 현재 처한 상황을 초래한 '원인'이 문제인 것입니다. 이 근본문제가 해결되면 상황은 개선되게 마련입니다.진짜 문제는 문제의 원인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교인은 비록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원인을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는 발전하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7:7-12은 산상수훈 가운데서 결론적인 삶의 황금률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기도할 것을, 그리고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데 황금같이 가장 귀한 규범이 이 말씀에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말씀을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하셨습니다.(마7:12)
황금은 가장 비싼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만큼 지키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황금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팔복으로 수록된 산상수훈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조건, 특권과 보상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헌법을 의미합니다. 이제 예수님을 결론으로 그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소망이며,그 나라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자(마22:40)에게, 곧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나라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악한 속성으로 타락한 인간은 자기 힘으로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거나, 대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만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실천할 힘을 얻게 됩니다. 기도하십시오! 인간 아버지도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줄줄 알거든, 하물며 거룩한 아버지 하나님이 제일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거든 이 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누가복음9:25)
구약 성경의 전도서를 기록한 저자는 쾌락이나 물질이나 소유나 위대한 지식이 결코 영원한 만족을 가져오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이라도 영생을 위해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영적인 극빈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험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확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쾌락이나, 돈이나, 명성 이상의 것들을 필요로 합니다.
최근 미국의 한 지방에서 자살을 기도했던 열한 명의 유명인들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야구 선수였고, 여섯 명은 연예인들이며, 두 사람은 많은 재산을 상속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존경을 많이 받아 온 학자와 그의 아내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좋은 지위와 명예. 그리고 부가 있었지만 그런 것들이 그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을 닮아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하고 바르게 살아갈 때에만 인생의 참다운 의를 느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영생을 선물로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고 무덤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셨다는 성경의 말씀은 비록 우리가 완전치 못하여 죄가 있다 하더라도 용서를 받는다는 사실을 확인해 줍니다.
우리는 영원한 목표를 두고 살아야 합니다. 바로 발밑이 아닌 더 먼 곳을 바라봐야 합니다. 예비된 천국을 마음에 그리며 준비하며 삽시다. 본향을 향하여 끊임없이 걸어가는 순례자의 삶을 사십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인생의 깊은 평화와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인생의 불안전한 염려와 욕심으로부터 놓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신령한 삶
로마서8:9-10
그리스도인을 세가지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류는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즉 죄에 붙은 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바울은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행함은 없노라"는 말씀으로 그들을 묘사했습니다(롬7:18). 양심의 가책은 받으나 그 요구를 충족시켜 주며 살지 아니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둘째 부류는 규칙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법칙에 매여 살며 의무와 체면, 습관에 따라서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 삶입니다. 남에게 유익도 손해도 주지 않는, 혼자 크게 잘못없이 살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는 믿지 않으나 양심적으로 산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 부류에 속합니다. 셋째 부류는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정죄함이 없는 참 해방된 자유인, 이는 죄에서 해방된 사람, 즉 육에 속한 것과 법에 속한 것에서 벗어난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영으로 더불어 사는 사람, 이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원수됨에서 친구로 변하여 완성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항상 기뻐하며 마음에 평강을 가지고 사랑으로 충만한 생활을 합니다. 반면 타인에게는 인내와 친절과 인자와 절제의 영향을 주며, 하나님께 대하여는 절대적 신앙성을 보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늘 신실함을 나타냅니다. 육에 속한 사람이 감정적이고, 법에 속한 사람이 지적인 원리의 지배를 받는다면, 성령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더불어 정서적 안정과 만족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가슴의 뜨거운 사랑의 열정으로 인하여 더 높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기를 희망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심이 잘한 일이라고 칭찬하시는 하나님의 만족이 우리에게 축복이 되어져야 합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8:9-10)
어떻게 살 것인가?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마태6:31-32)
성도들의 매일매일의 삶이 세상에서 사는 것인지, 아니면 믿는다는 울타리 - 제한된 영역 - 안에서 사는 것인지 분명한 선을 긋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잘 믿는 다는 것이 요즘 세상에서 어렵다는 것은 삶의 기준의 변화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삶은 나그네와 같은 것인데, 고향을 떠나 타향에 적응하기를 꾀하는 생활방식은 이방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본적 권리와 최소한의 의무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지만 땅으로부터 공중에 떠서 먹지 않고 입지 않고 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먹기 위하여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먹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행을 위한 삶이 아니라 생활을 윤택하게 하기 위한 여행이라야 고생도 낙이 되는 것입니다. 죽지 못해 사는 삶을 통하여 무슨 값진 일이 나오겠으며, 어떤 보람된 순간을 기대하겠습니까?
삶을 좀먹는 가장 큰 원인은 '염려'라는 독소입니다. 베드로의 삶은 염려의 연속선이었으나 성령의 다루심을 받은 후,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라 권면하기까지 되었습니다(벧전5:7). 이는 베드로가 평생을 통하여 얻은 삶의 진리였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의 이름 앞에는 "티테디오스(Titedios)"라는 이름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이 말은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아는 참으로 염려에서 해방된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주요한 목적은 무엇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되느냐'하는 존재의 문제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는가에 행복의 척도를 두어야 합니다. 의식주 문제의 걱정은 믿음의 결여에서 생긴 것이며 아버지와 관계없는 외인이었기에 생긴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표가 분명하다면 나를 위해 어떻게 물질을 쓸 것인가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물질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걱정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집떠난 아들이 타향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는 충실한 행동을 함으로 그 아버지를 사랑하는 증거를 보이듯이 말입니다.
마지막 날에 내가 얼마나 빌었나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를 드렸는가 하는 것, 즉 가치있는 하나님의 사역에 얼마나 참여하였는가 하는 것이 삶의 평가기준이 될 것입니다.
보리밭 밟기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로마서9:21)"
예수님 당시에 열심당원?들은 폭력을 사용하더라도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설립하려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정치적인 통치자로 와서 원수를 진멸하고 그 옛날 다윗이 누렸던 나라를 회복시키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가리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농부가 씨를 뿌리고 추수를 기다리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나라의 성격은 남을 넘어뜨리고 일어서는 나라가 아닙니다. 사람이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씨뿌린 농부의 인내, 이것이 열매를 얻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옛말에 '조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급한 농부가 벼이삭을 강제로 뽑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사에는 때가 있습니다. 학생에게도 때가 있고 농부에게도 때가 있습니다. 씨 뿌리는 때와 추수하는 때가 있습니다. 농촌에서는 가을 보리를 심습니다. 조그마한 싹이 채 크기도 전에 눈보라 속에 묻혀 농부의 마음을 조리게 합니다. 얼어 들뜬 땅을 밟아줄 때 열매를 걷을 것같지 않은 중에도 희망을 가짐은 열매를 추수할 꿈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작은 선에도 즉각적인 큰 복을 기다리고 있으며, 작은 억울함에도 종말적 재앙을 바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강도가 잡혔다고 신문에 보도되면 재판 절차도 없이 즉결집행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 땅의 수재에는 안타까워하면서도 북쪽은 몽땅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라고 주문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대답이 즉시 실행이 안 된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불신자에게서 일어나는 증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는 무리에게서 일어납니다. 기독교 무용론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씨를 뿌린 농부가 추수 때를 기다리듯이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우리 하나님께서 그 알곡의 살을 찌우시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내 노력과 생각, 다수의 폭력이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없습니다. 눈 덮인 보리밭을 바라보는 농부의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흰눈 속에서 열매를 향한 힘찬 생명의 맥박은 고동치고 있습니다. 열심히 밟아 주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동반자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사무엘상18:1)
옷은 낡은 것이 새 것만 못하나 사람은 오래 사귀어 온 사람이 새 사람보다 낫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다윗과 요나단의 얘기를 보게 됩니다.
청년 다윗은 골리앗의 목을 베고 위기의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 사건은 다윗의 일생에 가장 큰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개 목동에서 한 종족의 군대 장관으로 변신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성경은 다윗과 요나단의 마음이 연락되고, 그로 말미암아 두 사람이 우정어린 언약을 맺고 하나됨을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우정어린 모습과 다윗에게 주어진 명예가 어우러져 지혜로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사울과 백성으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명예(군대의 장)가 합당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자,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골리앗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러나 우리 삶의 주인이 되어버린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을 우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있다면 곧 우상이고 골리앗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이 신앙으로 골리앗을 이긴 것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는 결코 승리에 도취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제부터 가야할 천로역정이 멀고도 험합니다. 정녕 나그네 인생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나그네 길에 가장 필요한 위로와 힘이 되는 것은 친구입니다. 바로 요나단과 같은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요나단은 믿음의 친구였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단순한 승리에 찬사를 보낸 자가 아니었고 다윗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손길을 깨달은 자였습니다. 그는 결코 인간적인 우열을 가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요나단은 자기의 것을 나누는 자였습니다. 그는 먼저 자기의 생각과 뜻을 나누었고, 자기의 신분을 나누었습니다. 또한 자기의 미래와 생명을 나누었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골리앗과의 싸움이 부르심의 시작이었다면, 요나단과의 만남은 하나님의 뜻을 배우기 위한 산 교육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늘 보고 배워야 할 믿음의 친구가 필요합니다. 또한 내가 보고 배운 하나님의 사랑어린 인격적인 삶을 나누어 줄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루는 자와 받는 자로서의 산 교육장이 교회임을 힘써 알아야 하겠습니다.
- 목 차 -
- 시간이 많은 사람이 받는 유혹
- 두 나라 속의 삶
- 하나님을 섬기는 일
- 너무 서두르지 않습니까?
- 이 시대를 위하여
- 두 개의 달력
- 피아노와 포르테
- 하나님을 기쁘시게
- 하나님과 인생
- 가장 본질적인 일
- 신발 속의 모래알
- 새롭게, 더 새롭게
- 내 입술의 찬송
- 참된 부요
- 황금률
- 천하보다 귀한 것
- 신령한 삶
- 어떻게 살 것인가
- 보리밭 밟기
- 믿음의 동반자
- 보물을 하늘에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부탁드리기 이전에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 분의 크심과 위대하심을 아는 것은 바로 우리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뜬 후에 처음 듣는 소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루의 첫 의식으로 우리 머리 속에 자리를 잡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연히 어떤 가요를 듣게 되었을 때, 그 노래가 하루종일 우리의 입가에 맴돌게 됩니다. 무의식 주에 그 노래를 중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입은 말하는 기계가 아니라 아름다운 마음을 표현하는 생명체여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첫댓글 살롬~ 전도사님 귀한 글 감사드려요. 방학 잘보내고 계시죠
기쁜 방학 되시길........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