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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기와 뱉어내기 Erasing and Expectorating
백원선의 작품을 보면 몇몇 세계미술사의 작가들과 표상과 정신에서 연결되어 있되 그것을 자기화하고 있는 탄탄한 조형의식을 느낄 수 있다. 휘슬러Whistler의 밤하늘의 보석과 같은 화면을 연상케 하는 뿌림-샘 프란시스 Sam Francis의 색면과 뿌림의 조화-마띠외 Matieu의 초월적이고 탄력있는 붓의 도약 등이다.
물론 이들과 백원선과의 직접적인 유대는 없다. 그리고 이들이 먼저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던 작가들이라 하여 그 영향관계가 도식화될 이유도 없다. 단지 그 형상과 표상이 주는 느낌에서, 그리고 날렵한 선들이 보여주는 행위의 암시에서 그 유사성을 추출할 수 있을 따름이다.
휘슬러가 표상의 극대화된 효과를 노려 화면에 물감을 뿌렸다면 백원선은 유심적唯心的인 흐름의 결과로 화면에 물감이 뿌려지는 것이요, 프란시스의 화면에서 색면과 뿌림이 계산된 우연과 숙련된 실수의 결과라면 백원선의 그것은 내면의 투쟁을 거치면서 발효되어 자기화한 흩뿌림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마띠외에게 중요했던 것이 행위의 기록성이었다면 백원선에게 행위는 초월적 명상과 문득 깨달음의 결과를 기록하는 것이었다는 차이일 것이다. 그런데도 표면적으로 이들의 작가들과 백원선의 작품에서 유사성이 느껴질 수 있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흩뿌림에서 비롯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화면에 물감을 뿌리는 행위는 뿌린다는 행위를 암시하기 위해서, 그 흔적을 통하여 행위의 동기를 보여주기 위하여, 그린다는 행위가 이룰 수 없는 우연의 성취를 위해서 뿌려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화면의 중층구조와 대비면이 연결을 통하여 일관성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휘슬러의 뿌리는 작업은 작품을 통해 유추해보건대 표상의 극대화한 효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말하자면 밤하늘의 별이거나 네온 등의 표현을 위해 그 많은 명멸하는 점들을 그림으로 그리는 대신 그 결과로서의 효과를 미리 도입하여 형상의 대신에 깔아 넣었던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은 그 작품 자체의 작품성보다도 우연이라는 측면이었다. 19세기의 미국 작가에게도 초현실주의의 우연작동Chance Operation에 의한 혹은 그러한 미학에 의한 작업을 한 작가가 있었으나 미국미술이 결코 유럽미술의 하향적인 영향권 아래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미국 미술사가들의 교묘한 배려가 이 작품의 해설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비하여 백원선의 뿌림은 전적으로 유심적唯心的인 것이다. 마치 뻣뻣한 유화 붓 대신 동양화의 무심필을 써서 만들어지는 흐느적거리는 점과 흐름이 말해주듯 우연적인 효과라는 물리적인 측면보다도 그 뿌림이 가져다 줄 심적인 흐름을 표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의도하지 않으면서도 자연발생적으로 그렇게 방향지워지는 자발적인 흐름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구지 표현하자면 선적禪的인 향수享受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디오에 잡힌 샘 프란시스의 작업과정은 매우 자동적이었다. 오토매틱Automatic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의 제작은 마치 보도步道 블럭Blocks을 까는 작업을 연상시켰다.
하나의 색면을 만들고 그 옆에 다시 하나의 색면을 맞추어 넣고 그 사이에 물감을 뿌리고 다시 색면위에 물감을 뿌려 이질적으로 괴리될 수 있을 화면사이의 긴장감을 이완시키는 일련의 작업은 비록 그러한 작업의 이름을 자동적 혹은 우연기술적이라 부르더라도 실제는 계산된 우연이요, 숙련된 실수였던 것이다.
백원선의 작업에서 샘 프란시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색채의 아라베스크Arabesque와 비슷한 느낌을 중 수도 있는 바 행위의 흔적으로서의 뿌림은 철저한 계산과 숙고의 과정을 통해 내면에서 충분히 성숙시켜 나타나는 어떤 발효의 과정을 생각케 한다.
외롭고 고통스러운 내면의 투쟁에서, 그리고 세상의 가치기준에서 자신만의 가치기준으로 이행하여 그 속에서 숙성되어 가시화하는 것이 백원선의 경쾌한 흩뿌림이고 색면의 병치인 것이다.
마띠외의 화면은 앙포르멜Informel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구체적인 형체가 없지만 그렇게 형체가 없다는 사실에서가 아니라 행위의 과정을 그 결과로서의 흔적과 함께 화면위에 보여줄 수 있는 기록성에 중요성이 있었다.
즉 당시까지 행위의 결과로서의 흔적만이 화면이거나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보여졌던 미술이라는 개념에 행위의 주체로서의 인간과 그 인간의 구체적인 제작행위가 유기적으로 화면에 고착-정착되는 것을 보여준다는 의미가 마티외를 앵포르멜Informel의 기수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양상과 일견 비슷한 흐름으로 보여질 수도 있는 백원선의 행위는 행위의 극도로 농축된 단면을 산뜻하게 화면의 한 시간대에 묶어 놓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이를테면 초월적인 명상의 결과이고,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頓悟 즉 문득 깨달음과 같은 경지일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기본적으로 한국인의 사유와 시선 및 중층구조에 대한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기도하는 심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은 제작을 할 때 호흡으로 기도한다. 호흡이란 바로 생명이고 그 생명을 바탕으로 하여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참모습이거나 하늘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에 기도를 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한국인에게 보이는 기도의 심정이라는 것이고 그것이 그림으로 나타날 때 그림에서의 서정적이고 맑고 투명한 느낌인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한국인 작가는 하나의 획-하나의 뿌림-하나의 선묘에 하나의 호흡을 부여한다. 그것은 호흡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획과 뿌림과 선묘로 구성되는 화면에서 한국인 작가가 보는 시선은 일반적으로 화면의 뒤쪽에 있다. 그 시선은 화면의 중층구조를 뚧고 그 뒤에 있는 어떤 세계를 향하고 있다. 색채도감의 세계가 아니라 무명에 물감을 들인 선조들의 세계이며 검은 이불에 빨간 깃을 댄 세계, 그리고 황토의 세계이니 그것은 5천년 우리의 원형原型이 숨 쉬는 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작품에서 물리적인 중층구조를 논하는 것은 외국의 작가들과는 다른 각도에서 비롯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외국의 작가들과 그 유사성을 비교할 때에도 그러한 배려가 따라야 할 것이다.
물리적으로 보면 양화의 화면은 보통 여러 층의 물감으로 이루어진다. 그 물감의 층을 지지하는 것은 바탕이다. 그러므로 바탕위에 여러 층의 물감으로 이루어진 것이 그림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때로 물감의 층은 그 자체로서 화면의 지지조직이 되기도 하고 표현수단이 되기도 하는 이중적인 존재로서 당연히 화면에서 작가가 이루고자 하는 것과 같은 궤도를 달리게 된다.
표상과 형상-의미와 형식-내용과 개념 등을 포함하여 종국에는 작가의 개성이 담기는 그림의 조형요소가 되는 것이며 이것을 물리적인 의미에서 중층구조라 일컫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에게 이러한 중층구조는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시경에 나오는 말처럼 소이위현혜素以爲絢兮라 즉 바탕이 하얀 위에 그림를 그린다 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그림 이전에 바탕이라는 사고방식에도 어느 정도 기인한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인 특유의 기도하는 심정이 바닥에 깔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백원선의 그림을 파고 들어가 보면 쉽게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이다.
백원선의 조형어법은 크게 몇가지로 나누어진다. 크게 깔아나가는 두터운 질감-옅게 그러면서도 진하게 바탕을 덮어나가는 번짐-심사숙고에 의해 위치가 정해진 제한된 화면의 부분에 충동적으로 뿌림-그리고 기존의 바탕이나 화면을 인정하면서 새로이 형성되는 색면이나 안료 층과의 완충공간을 만들어나가는
지움의 과정이다.
이러한 그의 조형어법에서 가장 핵심을 이루는 것은 바로 지움의 언어이다. 지운다는 것은 형상을 지우는 것이다. 형상이란 숙명과 같은 것이다. 미술가는 이러한 형상을 만드는 사람이되 사실은 지우는 사람이어야 한다.
백원선의 지워내기는 바로 형상을 만들되 그것을 지울 수 있는 작가 내면의 성숙을 잘 보여주는 예가 된다. 이러한 지우기는 때로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포름과 번지기에 의한 섬세한 색채의 늬앙스로서, 어떤 형상이나 장식적인 효과나 또는 서정적인 연상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는 화면으로서 백원선의 화면에 자리 잡는다.
그리하여 형상들은 착실할 바탕에서 만들어지면 질수록 그 형상 자체의 독자적인 세계를 보다 강조하고 보다 돋보이게 하고자 할 것이다. 이른바 가독성可讀性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부분의 형상이나 우연히 만들어진 고립된 형상에 매달리게 될 경우 깨질 수밖에 없는 화면의 조화를 그는 이러한 지우기의 방법을 통하여 해결하는 것이다.
형상은 색채와 분리되는 듯 다시 긴밀하게 연결된다. 바탕으로서 굳건히 다져진 색채의 위에 덧씌워진 색채를 지워내면서 하나의 돌발적인 사건처럼 감정의 개입없이 기록되어 흔적을 남기고 있는 형상과 하나의 유기적인 시각적 질서로서 연결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아마 백원선이 심취하고 있는 불교에서, 그리고 초월적인 화두에서 꼬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보살을 만나면 보살을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인다”
이러한 지우기는 먼저 파괴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반드시 응물적應物的인 즉 어떤 대상에 응하여 나타난다 라기 보다는 전이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백원선의 어법이 보여주는 의미이다.
차분하고 철저히 다져지고 만들어진 배경의 위에 의지와 의식을 펼쳐나가는 것이 익숙한 작가의 경우에 화면위의 행위와 그 흔적이란 때로 정형적인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관성일 수도 있지만 돌발적인 만남에 대한 어떤 두려움 같은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관성과 두려움의 사이에서 자신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파괴의 미학이며 그것이 단적으로 말하자면 작품의 세계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행위와 상징의 흔적이 의미로 전화顚化하는 과정은 의미부여의 형식을 통해서이다. 말하자면 어떤 상징도상을 그려 그것에 그래픽적인 의미를 부여할 때 그것이 보는 사람에게 표지판이나 이정표 등의 의미로 인지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과정이지만 백원선에게서는 이 질서의 파괴와 뱉어내기를 통하여
의미가 구축된다는 것이 전이의 뜻이다.
1. 행위와 상징의 함수관계는 그림에 있어서 안료를 다룬다는 행위와 그 행위의 결과로 나타나는 흔적 혹은 궤적에 의미를 부여하는 형식과의 관계로 환원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행위와 상징은 흔적과 의미로 대치되는 셈이다.
백원선에게 있어서 흔적은 철저히 바탕으로서의 착실한 질서를 파괴하는 것에서 비롯하고 서술적이고 설화적인 의미를 제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이 파괴의 의미라면 뱉어내기 또한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이들 파괴와 뱉어내기는 반드시 하나의 화면에서 승부하지 않는 세계를 표방한다.
여기서 말하는 뱉어내기란 내심에서 응축된 심상을 바깥세계를 향하여 펼쳐 보인다는 뜻을 지닌다. 그리하여 하나의 당돌한 조형으로 나타나는 것은 백원선이 그림이라는 수단을 다분히 자신의 분신이라는 의미를 넘어 자신만의 세계로 승화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2. 심상은 백원선에게 있어서 원초적인 영감의 근원이 된다. 그것은 단순히 형상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다듬는 것으로 나타나되 다시 그것은 꾸미지 않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여기서 다듬는다는 것은 일단 마음에서 뱉어낸 형상을 반드시 뱉어낸 그 화면에서 다듬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화면에서 다듬어진 형상을 바탕으로 하여 다시 다른 화면에서 뱉어낸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그것으로 만족하는 작은 마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도달해야하는 지점을 미래의 어떤 상황에 설정하고서 현재의 자신을 계속 추궁하여 그 쪽으로 향하게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16. 백원선의 작품에는 일정한 틀이 없다. 말하자면 검은 색과 회색의 색면이 주조로 되어 나타나는 화면에서도 반드시 검은 색은 작은 면적을 차지하고 회색이나 노랑색은 넓은 면을 가져야한다거나 어떤 곳에는 원이나 사각형이, 어떤 데서는 뿌린 안료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거나 등등의 제약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화면이 하나의 일관된 질서를 가진 것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백원선이 생각하고 있는 세계가 하나로 일관된 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백원선이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우리의 가락-그 중에서도 자진모리나 우리의 핏속에 녹아 들어 있는 신앙으로서의 불교-그 중에서도 도량석道場釋과 같은 분위기와 개념에서 비롯할망정 분명히 눈에 보이는 어떤 세계는 아닐 것이다.
그러한 배경은 분명 한국인 작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될 수 있으면서 백원선에게 보다 심화된 형태로 나타나는 하나의 상징적 표상이며 일러 줄곧 강조해왔던 바 기도하는 심정이라 말할 수 있다.
백원선은 가정주부로서의 의무를 위하여 자신을 폐쇄시킨 오랜 세월 후에 다시 화업으로 뛰어든 작가이다. 그토록 오랜 공백에서도 자신과의 싸움은 바로 화업으로 복귀하려는 싸움이었고 추상회화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공백이 없었던 다른 작가들보다 모자라게 되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다시 누드 등의 구상에서 비구상을 거쳐야 한다고 생각할 만큼 투철한 의식의 작가이다.
그리하여 자신과의 싸움, 화면과의 대치, 행위와 명상이 화면위에서 옹골차게 펼쳐지는 승부의 세계를 압도하고서 이토록 일관된 하나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1998-2019
#백원선 #白媛善 #Paek Wonsun
참고자료
정보제공 월간미술 2019.03.13.
백원선白媛善 Paek Wonsun 서양화가
74세 출생 1946년
분야회화/판화/평면 소속한국미술협회회원
2015 ~ 2019
미술세계 아카데미 교수
2013 ~ 2014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양화 분과 초대작가
2008 NIAS초대작가
2005 ~ 2009 신세계본점 문화아카데미 강의
2003 ~ 2007 쥴리아나 갤러리(국제아트페어전속작가
1997 ~ 2014 삼성프라자 문화아카데미 강의
1993 ~ 2004 중앙일보 중앙문화센터 강의
1988 ~ 2001 한국수채화협회 이사, 감사, 심사,(역임
전체 작품활동대표작품3건 논문1건
대표작품3건
2018년
zen-Rhizomes#1803hanji,ink,_collage,on_canvas,162x112cm
2018년
zen-Rhizomes#1815hanji,ink,_collage,on_canvas,194x130.3cm
2016년
zen- Rhizomesink Hanji collage, 72.7x60.6cm(each
이미지-
1998년 평문 집필 당시의 작품도판과 다를 수 있음
백원선
https://blog.naver.com/aalsk7773/220329020475
zen-Rhizomes 紙千年絹五百 / 백원선展 / 2018_0314 ▶ 2018_0327
블로그 규방칠우 이미지크기 500X494 JPG
https://blog.naver.com/lotuslhr/221214025486
'zen-Rhizomes' - 백원선 개인전 (12/13-1/10
블로그 AYA-Art Core Brown-Gallery 이미지크기 905X1280 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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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갤러리 백원선 초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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