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2), 다섯 번째 교회, 사데 교회, * 개신교 종교개혁의 한계(계 3,4-6)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는데 그것은 개신교가 우리에게 합당한 교회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와 공개된 성경은 가는 곳마다 국립교회를 세웠을 뿐이다.
예를 들면 루터파는 허다한 나라에서 국립 교회를 세웠고, 후에 영국의 성공회(Anglican Church)도 역시 국립 교회인 것이다. 로마로부터 교회의 성질은 변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열린 성경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개신교는 아직 교회가 어떠해야 함을 보지 못했다.
종교개혁 당시에도 교회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루터는 교회를 개혁한 것이 아니다. 루터 자신도 말하기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에 그치지 말고 많은 것을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루터 이후의 개혁자들은 여기에서 멈추고 말았다. 루터는 멈추지 않았으나 그들은 거기에서 멈췄고, 오히려 치열한 이념과 이단 논쟁, 그리고 분당과 분열로 마침내 교단주의로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오히려 교회는 조금도 고쳐지지 않았고 더욱 악화되었다.
여기서 최근 눈을 끄는 어느 일간 신문의 기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개신교를 탄생시킨 종교개혁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 세습, 새로운 교권주의, 불공정한 선거, 질 낮은 신학교육과 질 낮은 목사들 등등, 얼룩진 교회만을 위한 교회는 종교개혁 500주년(2017년)을 앞두고 환골탈태해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 95개조 격문을 비텐베르크 성당에 게시한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받아, 한국교회 개혁을 위한 95개 선언을 올해 제시할 것이며, 특히 한국교회는 마르틴 루터가 지적한 과거 서방교회의 과오들을, 오히려 오늘날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절실한 반성이 필요한 시기”라고 쓰고 있다.
종교개혁은 교회를 초대 교회의 상태로 돌아가게 한 것이 아니고, 다만 세계교회를 국립교회로 돌아가게 변하게 했을 분이다. 두아디라(티아티라) 교회는 교회를 세상에 집어넣어 정죄를 받았고, 사데(사르디스)교회는 교회를 국가에 집어넣어 똑같이 이 정죄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이다. 종교개혁은 살았으나 많은 것들이 여전히 죽어 있다.
개신교 안에서는 국가가 주도하는 루터파나 성공회 교회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의견과 교리의 차이에 따라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과 같은 많은 교파와 교단이 생긴 것이다. 한국에서만 거의 수백개의 교단과 교파가 생겼다고 한다. 국가의 한계가 아닌 교리의 한계에 기준을 두고 세운 모든 것이 바로 교파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자기 교단을 방어하기 위한 이단 시비를 낳게 하였고, 교단 간 교류를 차단하고 갈등을 증폭시켰다. 개신교에는 두 종류의 교회가 있으니, 그 한 종류는 국립교회이고, 또 한 종류는 사립교회이다. 오늘날 영국, 독일 등에서 완전히 국가와 교회가 연합된 것을 볼 수 있다. 로마에는 세계교회(가톨릭)가 있으나, 영국, 독일 등에는 국립교회가 있다.
국립교회는 국가의 왕과 수장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황의 말을 듣지 않고, 사람들로 자기 말을 듣게 하며 정치에서 왕 노릇할 뿐만 아니라 종교에서도 왕 노릇하므로 국립교회가 발생한 것이다. 애석하고 놀라운 것은 개신교 초기의 개혁자들은 근본적으로 성경에 나타난 교회가 어떠한 것인가를 묻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성경으로 돌아가서 국립교회와 사립교회가 성경의 기준으로 볼 때 옳은 것인가, 옳지 않는 것인가를 보지 않았다는 말이다. 국립교회가 생긴 후 사립교회가 태어났다. 사립교회의 설립은 하나의 교리를 주장하는 것으로서 그들의 교리가 다른 사람들의 것들과 나뉘어 나오게 된 것이다.
곧 세례를 깨달아 침례교를 세우고, 마르틴 루터의 후예들은 루터교회를 세웠고, 칼빈의 후예들은 장로교회를 세웠다. 저마다 교파를 만들어서 그 자리에 안주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서 종교개혁의 정신은 사라졌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교단이라는 높은 장벽에 막혀서 고립되어 버리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각 교파마다 진리를 조금씩 나누어 갖고 있는데, 장로 교인들은 감리교회가 갖고 있는 진리를 배울 수 없게 되었고, 감리 교인들은 장로교회나 다른 교파가 가지고 있는 진리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오늘날 세계에는 개신교의 많은 교파가 있다. 거의 이천 개에 가까운 교파가 있다고 하며, 그 중에 상당수의 교파는 이단 또는 사이비로 규정된다고 한다.
그래서 중세기 천년 동안 훼손된 하느님의 말씀이 온전한 빛으로 회복될 수 없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사람들이 만든 벽에 막혀서 나누어지지 않는 상황을 크게 책망하셨다. 루카11,52절은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 교사들이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말씀에 대한 지식의 열쇠)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고 말한다.
말씀에 대한 지식이 백성들에게 나누어지는 것을 막았던 유대교회 지도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책망하셨던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의 진리를 깨달아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교파의 제도에 의해서 교회를 세운 것이다.
이 두 종류의 개신교는 국립적, 혹은 사립적인 것에 불과했으므로 주님께서는 그 둘이 다 처음의 뜻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이 구절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더욱 아쉬운 점은, 그들이 믿음과 순종의 조화를 분명하게 밝혀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 “믿기만 하면 죄를 붙잡고 살아도 괜찮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 돈과 세상을 사랑하면서 넓을 길을 걸어도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라는 식의 이상한 값싼 구원의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사데 교회를 책망하신 이유는, 사데 교회(개신교회)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더 밝은 빛 가운데로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3,2절은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라고 말한다.
“너는 일깨워”, 이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과 공개된 성경으로부터 얻은 생명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사데 교회의 전 역사 가운데 이러한 것들이 미약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 안에 이미 성경이 열려졌지만, 여전히 사람이 만든 교리가 절대의 힘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은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고 말씀하셨다.
계3,3절은 “그러므로 네(사데 교회)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종교개혁운동의 선구자들이 어떤 고난과 희생을 통해서 구원의 도를 회복하려고 했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라는 말이다. 에페소 교회에게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고 책망하셨던 예수님께서 사데 교회에게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난 때를 기억하고 회개하라고 호소하시는 것이다.
만일 종교개혁자들의 후예인 개신교회가 정신 차리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도적같이 임해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개신교는 하나의 컵과 같다. 사람들은 이곳에 부흥이 일어나 생수가 있다면 이곳으로 오고, 또 하나님의 영이 저곳에서 운행된다고 하면 저곳으로 간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하나의 컵을 이용하여 생수가 흘러가지 않도록 지키려는 것이다.
은총을 지키는 것은 좋지만 오직 한 컵의 은총밖에는 없다는 것이 단점이다. 제 1대에는 충만하다. 제 2대에서는 반만 남는다. 제 3대, … 제 5대에 이르면 물이 없어지고 빈 컵만 남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종파끼리 누구의 컵이 좋은가로 다투기 시작하지만, 모든 컵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또 하나의 반응을 하시게 되고 이것이 또 하나의 사데 교회인 것이다.
부흥의 역사는 모두 이와 같다. 하나님의 은총이 올 때 사람들은 은총을 지킬 하나의 조직을 설립한다. 결국 그 단체는 존재하게 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내용은 잃어버린다. 그러나 그 잔은 깨지지 않는다. 열심 있는 사람들이 계속 그 잔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원칙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웨슬리의 제자는 영원히 웨슬리를 따르지 못하며, 칼빈의 제자도 영원히 칼빈을 따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선지자 학교에서는 선지자가 나오지 못한다. 대선지자는 모두 하나님에 의해 광야에서 선택된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이 임재하고 싶은 사람에게 임재한다. 교회의 머리는 그분이시고 우리가 아니다. 사람은 언제나 그 생수의 고귀한 것을 생각하고 하나의 조직을 구성하여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결국에는 말라 없어지게 된다.
결국 말라 없어진 후 하나님은 광야에서 생수를 주시는 것이다. 개신교의 모든 역사는 사데 교회로 대표된다. 그러나 회복한 후 또 다시 회복하는 모든 역사는 회복의 역사이다. 문제는 지금 어떻게 받고 어떻게 듣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느냐에 있는 것이다.
사도2,42절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두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사도들이 떡을 떼며 기도하는 것을 계속했다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제를 계속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의 교통(교제)이 곧 사도들과의 교통이요 그리스도의 진리가 곧 사도들의 진리이다.
오직 사도들과의 교통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교통이요 사도들의 가르침만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그 외의 교통을 만들어 낼 수 없고 그 외의 진리도 만들 수 없다. 두아디라(로마가톨릭교회) 교회의 잘못된 점은 바로 자기 자신이 가르침을 만들어 냄으로써 이세벨이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이 만들어 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에게 받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21세기에 와서 무엇이든지 다 발명해 낼 수 있게 되었지만, 가르침만은 결코 발명해 낼 수 없다. 영 안에서 발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가르침을 발명해 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살펴보고, 굳게 지키고, 동시에 회개해야 한다.
묵시3,3하절에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고 말한다. “임한다”는 그리스어는 “Epi”이다. 이것은 곧 내가 네 몸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네 곁에 이른다는 것이다. 곧 네 밖에 이른다는 것이다. “도적 같이 이르리니”는 곧 “Epi”의 뜻을 갖는다.
우리가 여기에 있을 때 그는 우리 옆을 지나가 버리신다. 주님은 이 글자를 참 기묘하게 쓰셨다. 이것은 “내가 너를 지나쳐도 너는 알지 못하리라”로 번역되는 것이다. 참으로 놀랍고 놀랍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