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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빚은 빛이다> / 이훈(2009)
빚은 빛이다 / 나희덕
아무도 따가지 않은
꽃사과야,
너도 나처럼 빚 갚으며 살고 있구나.
햇살과 바람에 붉은 살 도로 내주며
겨우내 매달려 시들어가는구나.
월급 타서 빚 갚고
퇴직금 타서 빚 갚고
그러고도 빚이 남아 있다는 게
오늘은 웬일인지 마음 놓인다
빚도 오래 두고 갚다보면
빛이 된다는 걸
우리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수 있는 건
빚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걸
너는 알겠지.
사과가 되지 못한 꽃사과야.
그러고도 못다 갚으면
제 마른 육신을 남겨두고 가면 되지.
저기 좀 봐, 꽃사과야.
하늘에 빚진 새가 날아가고 있지.
언덕에 빚진 눈이
조금씩 조금씩 녹아가고 있어.
이 시를 올리면서 내 독후감을 얘기하겠다고 한 지가 꽤 돼 버렸다. 그동안 밀린 숙제로 늘 머리에 남아 있는데도 게을러서 손대지 못하고 말았다. 면목이 없다. 빚을 갚는 심정으로 몇 마디 하자.
먼저, ‘꽃사과’의 뜻부터 따져 보자. “사과가 되지 못한 꽃사과”는 “아무도 따가지 않”는다. 사과는 맛있게 먹을 수 있고 따라서 돈이 되니까 사람들이 따 가는데 꽃사과는 쓸모(효용성)가 없다. 그런데 꽃사과는 정원이나 공원에 관상수로 심는다. 그러니까 꽃이 지니는 아름다움의 의미를 완전히 결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미를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이들은 보통 미를 효용성과 대립시킨다. 유미주의자들은 쓸데없어야 아름답다고 주장한다. 효용성만을 기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속물을 향한 미학적인 저항인 셈이다. 그러니까 꽃사과는 효용성의 측면에서는 쓸데없지만 아름다운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꽃사과의 아름다움을 지적하지 않아도 이 시를 읽는 데 큰 지장은 없다.
얘기가 조금 다른 데로 흐르는데, 이명박 정부가 벌이는 이른바 ‘4대강 살리기 사업’을 비판하면서 이 아름다움도 중요한 주제로 부각시켰으면 좋겠다. 낮은 데를 따라 구불구불하게 흐르는 강의 아름다움을 보존하여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라는 점을 깨달았으면 하는 것이다. 이 사업 계획(https://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359332.html https://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361987.html)이 너무도 허술하고 천박하여 저런 정도의 생각밖에 못 하는 사람에게 굳이 아름다움까지 거론하여야 하느냐 하는 냉소적인, 어떻게 보면 연민의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이제는 우리도 경제적인 이익을 초월하여 자연의 심미적 가치를 지향할 때도 됐다고 강조하고 싶어진다. 사람은 자연과 더불어 있어야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
그런데 꽃사과가 참으로 아름답고 빛나는 것은 빚을 갚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꽃을 피우고, 비록 먹을 수 없기는 하지만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햇살과 바람 덕분이었다.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렇게 꽃사과는 세상에 빚을 졌으니까 이제는 자기 살을 도로 햇살과 바람에 내주어서 바짝 마른 채로 매달려 있다. 나는 이 대목에서 테레사 수녀님을 얼른 떠올렸다. 수녀님의, 주름살과 뼈만 남은 순수한 얼굴(영혼)의 빛나는 아름다움이 쭈글쭈글하게 시든 꽃사과와 겹쳤던 것이다. 세상의 고통에 빚졌다며 자신의 것을 다 내놔 갚으려 한 무욕의 상징이다. 그러니 빚은 빛이 아니겠는가! 유신론자든 무신론자든 관계없이 거리를 지나다가 수녀님과 마주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지며 내가 내 이상의 존재로 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젖어든 적이 있을 것이다. 수녀님이 자신을 빚쟁이라고 의식하는 데서 오는 영향이 아닐까?
우리는 이렇게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 새는 하늘이 없으면 날지 못한다. 눈도 언덕이 없으면 쌓일 수 없다. 그러니 새는 하늘, 눈은 언덕에 빚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존재의 사슬(연쇄)을 이어 간다.
‘참된 나’는 남과 함께 더불어 살아갈 때, 즉 ‘우리’가 될 때라야만 진면목이 드러난다. 내 등 뒤에는 수많은 타인들이 존재하고 있다. 내 몸뚱이는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이요, 음식은 농부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다.(배병삼, <생태의 눈으로 <<논어>> 읽기>, <<녹색평론>> 106호, 2009년 5-6월호, 112쪽.)
이런 연관성은 나와 내 밖의 세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하루 종일 걷다 보면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이 서로 기대고 있으며 그 각각이 정말로 소중하다는 것을 실감하는 때가 있다. 그래서 도보 여행기에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몸과 마음은 통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오늘 마친다고 생각하니 몸이 알아채서 이제까지 아무 이상이 없었던 넓적다리의 근육이 몹시 땡겼습니다. 아파서야 있는 줄 압니다. 그러니 어디가 불편하면 알아 달라고 호소하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 여겨야 합니다. 절뚝거리지 않고서는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몸에게 그걸 못 참느냐고 화를 냅니다. 무슨 문학적 수사로 읽지 말기 바랍니다. 걷다 보면 내 몸의 기관들은 저마다 독자적인 주인으로서 행세하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어느 하나만 잘못되거나 이른바 태업을 벌여도 움직일 수 없게 되니 다 저마다 주인공이지요! 이렇다면 ‘나’라는 존재는 뭔지 모르지만, 다리나 허리와 같은 구성원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좀 어려워지는데, 쉽게 말하면, 다리나 발은 '나'를 구성하는 종속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몸 구석구석이 소중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는 점을 강조하려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얘기를 한다고 이해하기 바랍니다. (이훈, <섬진강 도보여행>, https://cafe.daum.net/ihun/jIQm/105)
그러므로 자꾸 빚을 갚고 나를 내주어 가볍고 마르게 만들어야 한다. 무거운 욕망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겨우내 가지에 매달리고, 하늘을 날 수 있다.
우리는 죽으면서 아무것과도 함께하지 못한다. 썩어 없어져 흙으로 돌아갈 내 몸 하나만 남길 뿐이다. 그럴 거면서도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린다. 남을 괴롭히기까지 하면서.... 아니, 이 시의 맥락을 그대로 따라가면 욕심을 부리는 일 자체가 빚진 것을 무시하고 괴롭히는 몹쓸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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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전에 쓴 내 글 읽어 드리겠다.
오늘(2003. 1. 3.) 아침 <<한겨레>>에서 좋은 글을 만났다. 읽고 같이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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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처럼 한 해가 또 떠나갔다. 늘상 그랬듯 나는 보낼 준비가 채 안 됐는데 2002년은 저 혼자 잘도 갔다. ‘잘 가라고 하죠, 뭐’라는 전자우편을 몇몇 지인들에게 보내곤 잠시 ‘인생이란 …’ 하고 한숨을 쉬었다. 늘 하던 짓이다. 2003년이란 새 손님도 늘 그랬듯 낯설다. 사귀기까지는 또 한동안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덩달아 내 삶도 더 많이 낯설어진다. 익숙한 듯하다가도 문득 중요한 순간이 되면 끝내 낯설어지곤 하는 삶.
더 젊었을 땐 새해가 되면 많은 것들을 원하고 빌었다. 심지어 ‘좋은 일만 일어나게 해주세요’라며 억지를 부린 적도 있다. 남보다 잘나고 앞서기 위해 안달을 부릴 때의 일이다. 그러나 차츰 나이를 먹어가면서 좋은 일이 이뤄지길 빌기보단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길 더 바라게 된다. 아마도 한 해 두 해 삶의 경험들이 쌓이면서 삶에서 개인의 의지가 차지하는 부분이 생각보다 초라하다는 것을 절감하기 때문인 것 같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시대에 좀 생뚱맞은가. 성공과 성취에 대한 욕망을 충동질하고 그 욕망을 자양분으로 한 의지를 최고의 가치로 상찬해 마지않는 자본주의 사회의 윤리면에서 보자면 반체제적으로까지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 삶의 경험에 정직한 한 나는 이런 입장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다. 한 개인의 삶은 우선 어떤 나라에 태어나느냐, 그 중에서도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나느냐에 따라 결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부모가 반팔자라는 속담은 최근 한 대통령 후보의 표현이 맞다면 ‘장관 아들 장관되고, 재벌 아들 재벌된다’로 격상됐다. 일종의 사회적 복제인 셈이다.
내가 이룬 작은 성취들은 얼마만큼이 나의 몫일까? 부모 덕도 어떤 연줄의 도움도 없이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노무현씨도 ‘뛰어난 머리’는 부모운에 빚진 것이 아닐까? 게다가 인터넷 시대의 도래와 시민의식의 성숙 등 시대적 변화가 없었다면, 곧, 그가 천시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구보다 치열한 의지로, 원칙과 정의감으로 헌신하며 살았지만 덜컥 암에 걸려, 혹은 고문 후유증으로, 혹은 시대를 잘못 만나 쓸쓸하게 사라져간 사람들이 많다. 몇 안 되는 소위 ‘입지전적 성공’에만 조명을 하는, 이 성공 지향적 경쟁사회가 다수인 그들을 무시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정말 나인가 중요한 종교적 철학적 물음이기도 하다. 불교에서는 나에 대한 집착이 미망임을 가르치고 있고,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주체의 불확실성과 ‘구성되는’ 수동성을 지적한다. 심기일전해 새로운 의지를 다지게 마련인 새해 첫머리에 우리의 삶이 의지보다 운수 혹은 사회구조 소관 아니냐는, 다소 맥빠지는 얘기를 불쑥 던져본 것은 공연한 심술이 아니다. 나의 성공이나 성취가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는 말을 한번 해보고 싶어서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 내 덕에 혹은 내 탓에 내가 되어 있는 것일까 특히 장관2세 재벌2세들, 돈이든 권력이든 능력이든 외모든 운수가 좋아 유리한 조건을 가져 우리 사회 평균보다 많은 것을 누리는 계층에서 이 질문을 화두로 삼아봤으면 한다. 나부터 그런 질문을 해보면 아무래도 내 몫보다는 ‘빚진 몫’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지난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세계를 놀라게 한 붉은 악마 응원과 한국 축구대표팀의 4강 진출은 우리 기업들의 이미지를 크게 높였다. 이걸 기업들이 재수가 좋았다고만 생각해선 안 된다. 국민들에게 그만큼 빚지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지 않을까 개인이든 기업이든 어떤 단체든 이런 채무의식에 민감해질 때 복지사회의 가능성은 그만큼 더 커지는 게 아닐까 싶다.
얼마 전 홍콩 여행길에서 캐나다인 노부부를 우연히 만난 일이 있다. 둘 다 은퇴한 대학 교수인데 1년 쯤 뒤 아프리카로 이사갈 계획이라고 했다. 에이즈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는 활동을 하기 위해서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지역을 석달 동안 여행 중이라는 그들은 자신들이 너무 많이 가졌고 ‘너무 버릇이 없어졌다’며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내 것이 결국은 내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 바로 철이 드는 것인 모양이다.(김신명숙, 「내 몫과 빚진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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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험으로서도 맞는 말이다. 서정주는 국화꽃 한 송이도 피려면 오랜 준비와 수많은 타자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사람의 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얼른 보기에는 우리의 자유 의지대로 욕망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곰곰이 잘 따져 보면 우리 외부에 그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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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행동을 보면 모두 원인이 있다. 자유 의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이가 다마고치나 포켓 몬스터를 갖고 싶어할 때, 자신의 자발성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남들이 갖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그 욕망은 타자의 욕망, 혹은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이고 자유=자기 원인이 아닌 것이다.(가라타니 고진, 송태욱 옮김, <<윤리 21>>, 사회평론, 2001, 5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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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모든 것은 관계를 맺고 있다. 심지어는 이미 죽은 것과 미래의 타자와도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빚이 있다. 따라서 세상의 일에 책임을 나누어 져야 한다.
환경 문제를 생각하면서도 이런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지구는 우리뿐만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생명의 터전이다. 현재의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한 전지구적인 위기 상황을 피할 수 없다는 경고가 들려오고 있다. 우리 당대는 그런대로 그냥 지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래 세대에게는 그렇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장의 편리를 위하여 자연을 함부로 할 수는 없다.
세상의 일에 모두 원인이 있으며 서로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역설적으로 참다운 자유가 생긴다. 이때 자유는 내 주위의 것을 염려하는 마음, 도스토예프스키 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과 모든 것에 대해 죄가 있는 거”(도스토예프스키, 박형규 옮김, <<카라마조프씨네 형제들>>(중), 학원사, 1984, 24쪽.)라고 여기고, 미래의 타자에게 지는 책임을 의식하는 태도이기도 하다.(이훈, <우리는 서로에게 빚을 지고 있다>)
첫댓글 저도 예전엔 꽃사과를 관상용으로만 심는지 알았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과수원에서는 수분수로 중요하게 쓰이더라고요. 꽃사과의 꽃이 다른 사과의 과실을 튼실하게 해 주고 수확도 늘려주는 데 쓰이는 거죠.그래서 과수원에는 꽃사과를 심는다고 합니다. 농부들이 시를 읽으면 조금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겠네요. 시도 글도 잘 읽었습니다.
아, 쓸 데가 많군요! 이제야 알았어요.
<학생이 읽은 나희덕 시 <빚은 빛이다>>를 먼저 읽고 이 글을 봐야 합니다. 저기에 학생들이 내놓은 소감을 놓고 몇 마디 지적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