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주 금성대군 신단(榮州 錦城大君 神壇. 사적. 경북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2767번길 5)
금성대군신단은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된 유적으로 18세기에 탕평정치의 움직임이 활성화됨에 따라 국왕에 대한 의리가 다시금 강조되는 정치적 분위기와 깊은 관련이 있으며, 당대 왕조의 인신(人神)을 위한 제단의 사례는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문화재로 평가된다.(출처 : 문화재청)
금성단(錦城壇)은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무참히 화를 입은 금성대군(錦城大君)과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을 비롯한 순절의사들을 제사 드리는 곳이다.
금성대군은 세종 임금의 여섯 째 아들이자, 단종의 숙부이다. 평소 수양대군을 경계하던 금성대군은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수양대군에 의해 모반(謀叛)의 누명을 쓰고 유배길에 오른다.
유배지 순흥에서 부사 이보흠을 만나게 되고, 그와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게 된다. 그러나 거사가 무르익어 갈 무렵 관노의 밀고에 의해 관군의 습격을 받게되고, 순흥 고을은 순식간에 불더미에 피바다를 이루었으며, 순흥부는 폐부되기에 이른다.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1719년(숙종 45)에 순흥인 이기륭이 단소를 설치했으며, 1742년 (영조 18) 경상감사 심성희에 의해 현재의 모습을 되찾아 봄.가을로 향사를 지내고 있다.(출처 : 영주시청)
조선 전기 경상도 순흥도호부관련항목 보기에서 단종복위운동을 전개한 금성대군과 참여한 선비들의 절의 정신.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순흥 지역에서는 안향(安珦)을 필두로 많은 학자와 관료들이 배출되어, 실로 인재의 도량으로 일컬을 만하였다. 하지만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조카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하고 세조(世祖)로 즉위하게 되면서, 순흥 지역은 단종복위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로 인해 오랫동안 수난을 당하게 된다.
단종복위운동의 핵심 인물은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도호부사 이보흠(李甫欽)이었다.
당시 순흥에 위리안치(圍籬安置)[유배된 죄인의 집 둘레에 가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던 일]되어 있던 금성대군과 순흥도호부사 이보흠은 순흥 지역의 선비들과 단종복위운동을 꾀하였으나, 관노의 밀고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 일로 금성대군, 이보흠, 나아가 단종까지 목숨을 잃었고, 순흥도호부는 폐부가 되어 인근 지역에 분속되었다. 비록 실패로 돌아가고 이로 인해 큰 수난을 당했지만, 단종에 대해 금성대군과 순흥 지역 선비들이 실행한 절의 정신은 ‘선비의 고장 영주’의 정체성을 대변해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영주 지역에는 옛 단종복위운동과 관련된 옛 순흥 사람들의 유적으로서 사적 제491호로 지정된 영주 금성대군 신단(榮州錦城大君神壇)을 비롯하여 금성대군 위리안치지(錦城大君圍籬安置址), 압각수(鴨脚樹) 등이 남아 있어, 선비 정신을 계승하는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단종의 이름은 이홍위(李弘暐)이다. 할아버지는 조선 4대 임금 세종(世宗), 아버지는 5대 문종(文宗), 어머니는 화산부원군 권전(權專)의 딸인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였다.
1441년(세종 23) 출생하여 1448년(세종 30) 왕세손, 1451년(문종 1)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선정을 펼친 세종의 장손이었기에 순탄한 왕위 계승이 예상되었으나 1452년(문종 2) 5월 14일 아버지 문종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단종은 12세의 어린 나이로 조선의 6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다가 세상을 떠나, 왕실에서는 단종을 후원해 줄 만한 내명부의 어른이 없었다. 이에 문종은 대신인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에게 단종의 후원을 부탁하였다.
내명부의 후원을 받지 못하는 어린 국왕의 권위는 강할 수가 없었다. 반면,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과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 등 당시 종친들의 위세는 더욱 강해져 갔다. 그 가운데 수양대군은 야심이 큰 인물이었다.
1453년(단종 1) 음력 10월 10일 수양대군은 숨겨 놓았던 자신의 야심을 드러내었다.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난 것이다.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이 황보인·김종서 등과 결탁하여 모반을 꾀한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수양대군은 단종의 측근 및 두둔 세력들을 축출하였고, 정치적으로 단종을 압박하였다. 결국, 견디지 못한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선양하고, 상왕(上王)으로 추대되었다.
수양대군이 이렇게 세조로 즉위하자, 많은 절의 인사들이 이를 왕위 찬탈로 규정하고 반발하였다.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그해 함경도에서 이징옥(李澄玉)이 난을 일으켰으며, 1456년(세조 2)에는 이른바 사육신(死六臣)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였다. 그리고 1457년에는 순흥도호부에서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러한 복위 운동은 모두 실패로 끝이 났다.
사육신 사건으로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고,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순흥에서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나자 세조는 단종을 더는 그대로 두지 않았다.
『세조실록(世祖實錄)』에는 금성대군의 사사 소식을 들은 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에 세조가 사약을 내렸다는 이야기와 자객이 교살했다는 이야기가 설화와 야사를 통해 전하고 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숙부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의 일생은 소설 『단종애사(端宗哀史)』의 제목 그대로 애통한 역사라 할 수 있다.
금성대군의 이름은 이유(李瑜), 호는 승은정(承恩亭),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1426년(세종 8)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의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님으로는 문종·수양대군[세조]·안평대군·임영대군(臨瀛大君)·광평대군(廣平大君)이 있었으며, 동생으로는 평원대군(平原大君)과 영응대군(永膺大君)이 있었다.
1433년(세종 15)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1436년 광평대군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1437년 참찬 최사강(崔士康)의 딸과 혼인하였고, 이해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이방번(李芳蕃)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금성대군은 단종을 끝까지 보위할 것을 맹세하였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이 권력을 잡게 되고, 왕위 찬탈의 야심을 드러내는 와중에도 금성대군은 끝까지 단종을 지지하였다.
세종이 문종과 함께 궁궐 밖을 나갈 때, 세손이었던 단종을 금성대군 집에 머무르게 했다는 일화처럼, 단종은 여러 숙부 가운데 금성대군과의 관계가 가장 친밀했으며,
금성대군도 그런 조카의 보호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친형이었던 수양대군과 대립은 불가피해졌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잡은 수양대군은 정적들을 하나둘씩 제거해 나갔다. 친동생 금성대군도 그 대상 중 하나였다.
금성대군은 수양대군의 즉위가 실현되기 직전에도 단종에 대한 충절을 버리지 않았다. 이에 수양대군과 그 일파는 금성대군이 집에서 종친들과 몰래 사연(射宴)[활쏘기 시합]을 하고, 혜빈양씨(惠嬪楊氏)·상궁박씨(尙宮朴氏) 등과 서로 결탁했다는 이유로 1455년(단종 3) 삭녕[경기 연천군 및 강원 철원군 일부지역의 옛 이름]으로 유배시켜 버렸다.
이때 혜빈양씨는 청풍, 상국박씨는 청양, 한남군 이어(李𤥽)는 금산(錦山), 영풍군 이천(李瑔)은 예안, 영양위(寧陽尉) 정종(鄭悰)은 영월로 각각 유배되었다. 수양대군은 권력 안정을 위해 무고로써 걸림돌이 되는 종친들과 왕실 사람들을 제거해 나갔던 것이다. 이 일로 유배된 금성대군은 8일 뒤 광주(廣州)로 이배되었다.
단종은 더 이상 숙부 수양대군의 압박을 견디기 힘들어졌다.
1455년 음력 11월 단종은 숙부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겨 살았다. 하지만 왕위를 찬탈한 세조 정권에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1456년 음력 6월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로 대표되는 집현전 출신의 사육신, 여러 무신, 단종의 외척들이 상왕이 된 단종을 복위시키려 도모하였다. 하지만 단종 복위 모의는 김질(金礩)의 고변으로 실행되기도 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이른바 사육신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주모자인 자신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친자식까지 모두 교형에 처해졌다.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가게 된다. 금성대군도 화를 피하지 못하였다.
1455년 단종이 금성대군의 집에 머물렀었다는 이유로 당시 순흥도호부로 위리안치되었다.
순흥도호부에 위리안치된 금성대군은 문종의 총애를 받던 이보흠이 순흥도호부사로 부임하자, 1457년 그와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도모하게 된다.
금성대군과 이보흠은 순흥도호부의 향리와 군사 및 사람들을 모으고, 격문을 작성하여 경상도 사림들의 동참을 권고하였다. 하지만 1457년 6월 27일 안동의 관노 이동(李同)이 판충추원시 이징석(李澄石)을 통해, 금성대군이 순흥에서 몰래 군소배(群小輩)[소인(小人)들의 무리]와 결탁하여 불궤(不軌)[국가의 법을 어기어 모반을 꾀함]한 짓을 도모한다며, 명주 띠[紬帶]를 바치고 고발하면서 단종복위운동은 거사하기도 전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일로 이보흠은 교살되었으며, 금성대군은 1457년 음력 10월 21일 32세의 나이로 세조가 내린 사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강원도 영월에 있던 단종도 금성대군의 사사 소식을 듣고, 얼마 뒤 세상을 떠나게 된다.
고대부터 지역 문화의 꽃을 피우고, 유구한 역사를 간직했던 순흥 지역은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으로 하루아침에 역도의 고장이 되고 말았다.
금성대군과 이보흠의 거사 때, 순흥 지역의 많은 선비가 동참했기 때문이었다. 세조는 이러한 순흥 지역 선비들에게 격노하였다. 『세조실록』에는 이때 세조의 조치를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일찍이 전지(傳旨)를 받들어 순흥부를 혁파하였다. … “순흥의 이민(吏民)들이 이유[금성대군]가 반란을 일으키려는 음모를 따랐으니 … 그 고을만을 혁파하는 것으로는 족히 악을 징계할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그 토지와 인민을 모두 풍기군에 붙이고, 그 창고와 관사를 파괴할 것이며, 그 기지를 허물어 버려야 합니다. 또 호장·기관·장교로서 우두머리 되는 자는 관아의 일을 참여하여 맡아 보면서도, 이유가 잡인들과 몰래 내통할 적에 게을리하고 살피지 아니하였으니, 드디어 흉모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더욱더 엄하게 징계하여야 마땅합니다. 청컨대 전 가족을 강원도 잔역(殘驛)의 아전으로 붙이어서 하늘의 법을 엄하게 하소서.” 이 사건으로 순흥도호부는 혁파되고, 그 영역은 인근 군현에 분산되었으며, 아전들의 가족은 흩어져 살게 되었다.
순흥은 유학의 발상지로 학문을 숭상하고, 충의를 지키는 선비 정신이 충만한 곳이었다. 이러한 순흥의 정신을 잘 보여 주는 사건이 바로 단종복위운동과 순흥도호부 혁파일 것이다.
임금에 대한 충절, 단종 개인에 대한 연민, 의리를 실행하고자 하는 순흥 지역의 절의 정신은 성리학의 요람으로 불리는 순흥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폐부라는 큰 아픔을 겪었음에도 이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단종과 금성대군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모습을 지속해서 이어갔다.
압각수라고 불리는 금성대군 위리안치지 근처의 은행나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금성대군이 사사되고, 순흥도호부가 혁파되자, 압각수 역시 말라 죽어 순흥의 백성들은 비통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이때 어떤 노인이 지나가다가 말하기를 “흥주(興州)[순흥] 고을이 혁파되어, 은행나무가 죽었으니 은행나무가 살아나면 흥주가 회복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말에 감개한 순흥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전송해 왔는데, 1681년(숙종 7) 봄에 비로소 은행나무에 새 가지가 나고 잎이 퍼지더니 과연 1683년 순흥도호부가 복설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언젠가 순흥도호부가 복설되고, 금성대군이 복권될 것을 믿는 순흥 사람들의 믿음이 실현된 것이다. 또, 1719년(숙종 45)에는 순흥도호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숙종의 허락을 받아, 금성대군의 유허지에 금성대군 신단을 설치하여, 금성대군의 충절을 추모하게 되었다.
금성대군 신단은 금성대군과 순흥도호부사 이보흠뿐만 아니라, 단종복위운동으로 죽임을 당한 많은 절의 인사의 행적을 기리는 장소이다. 한편, 영주시 단산면 단곡리 두레골 상당에는 금성대군의 혈석을 모셔 놓고 해마다 정월 대보름을 기하여 성황제를 지내고 있는데, 현재까지도 주민들의 자발적인 합의체에 의해 동제가 시행되고 있다. 이는 민속 내지 무속의 차원을 넘어, 절의의 실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밖에도 금성대군 위리안치지가 금성대군 신단 인근에 있다. 이처럼 순흥 지역 곳곳에는 금성대군 및 단종 복위와 관련된 유적들이 남아 있다. 이러한 유적들의 존재는 단종복위운동 이후에도 순흥 지역 선비들이 절의 정신을 지속해 이어갔기 때문이다.
영주 지역을 선비의 고장이라 일컫는 것은 단순히 학자가 많이 배출되었고, 유교 문화 유적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단종복위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절의 정신을 몸소 실천해 온 순흥 지역 선비들의 행적에서 우리는 선비 정신의 요체를 찾을 수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
조선 전기 영주 지역에서 금성대군과 이보흠이 주도한 단종 복위를 위한 운동.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은 1457년(세조 3) 순흥도호부에 위리안치(圍籬安置:예전에, 죄인을 귀양살이하는 곳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일을 이르던 말) 된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도호부사 이보흠(李甫欽)이 향민들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였으나 관노의 고발로 실패한 사건이다.
단종복위운동으로 말미암아 금성대군, 이보흠, 단종이 죽음을 맞이하였다. 또한, 단종복위운동의 주 무대였던 순흥도호부는 혁파되고, 순흥도호부의 영역은 인근 군현으로 분산되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으로 권력을 장악한 수양대군(首陽大君)은 1455년 결국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이에 이징옥(李澄玉)의 난, 사육신사건(死六臣事件) 등 세조에 대한 반발이 조정 안팎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금성대군과 순흥도호부사 이보흠이 중심이 된 단종복위운동도 이러한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금성대군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여섯 번째 아들도 태어났다.
1437년(세종 19)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이방번(李芳蕃)의 제사를 모시기 위해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단종이 즉위하자 어린 임금을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계유정난을 통해 권력을 장악한 수양대군 일파에 의해 삭녕으로 유배되었다가 광주(廣州)로 이배되었다.
1456년(세조 2) 사육신사건으로 경상도 순흥도호부에 위리안치 된다.
이보흠은 1429년(세종 11)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사창법」 시행을 건의하여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54년에는 기주관으로서 『세종실록(世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457년 순흥도호부사로 부임하였다.
순흥에 위리안치되었던 금성대군과 새로 부임한 순흥도호부사 이보흠은 왕위 찬탈이라는 격동기 순흥에서 단종 복위를 위한 거사를 준비하게 된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따르면 1457년(세조 3) 금성대군과 이보흠은 만나기만 하면 강개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금성대군이 산호 갓끈을 이보흠에게 주고 거사를 꾀하여 비밀리에 남쪽 인사들과 결탁하여 단종을 복위시킬 계획을 하였다.
하루는 주변 사람을 물리고 이보흠을 불러서 격문을 작성하게 하였는데,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명령하니, 누가 감히 쫓지 않으랴”라는 한 구절만 전해진다.
그들은 순흥의 군사와 남쪽의 모의에 참여한 자를 발하여 노산(魯山. 단종)을 맞아서 계립령을 넘어 순흥에 옮겨 모시고 영남을 호령하여 조령과 죽령의 두 길을 막고서 복위할 계책을 세웠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세조실록(世祖實錄)』을 보면 1457년 6월 27일 안동의 관노 이동(李同)이 판중추원사 이징석(李澄石)을 통해 금성대군이 순흥도호부에서 몰래 군소배와 결탁하여 불궤한 짓을 도모한다며, 명주 띠[주대(紬帶)]를 바치며 고변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단종복위운동에 대해 조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세조는 이증(李璔), 한명회(韓明澮)에게 증거를 살펴보게 하고 윤자(尹慈)를 순흥에 보내 관련된 사람을 국문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보흠은 역모자로 고발되지 않고 오히려 세조에게 직접 계를 올려 금성대군이 역모를 꾀하였다고 보고하였다는 점이다. 이 기록을 보면 이보흠은 변절자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여러 기록을 비교해 보면 모순되는 점이 발견된다. 당시 기록은 세조와 관련된 사람들이 남긴 것이므로 이보흠에 대한 면밀한 사료 비판이 요구된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처음에는 금성대군과 여기에 협조한 순흥도호부 지역 향리 및 사족들만 문초를 당했으나, 여러 신하의 탄핵으로 이보흠도 체포되었고, 문초 끝에 이보흠의 공모가 드러났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처음 관노가 한양에 고변하려고 하자 이보흠이 사람을 시켜 먼저 고변을 했고, 이어 말을 타고 직접 한양으로 올라가 고변해서 자수한 것으로 죄를 면하려고 했지만, 결국 격문을 초안한 것 때문에 체포된 것이라고 하였다.
금성대군과 이보흠은 단종복위운동의 주동자로 대신들과 종친들의 주청에 의해 처형당하였다.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 역시 유배지에 생을 마감하였다.
단종복위운동의 중심 무대였던 순흥도호부도 폐부(廢府)되고 그 영역은 인근 영천군과 풍기군 등지에 분속되었다.
200여 년이 지난 1681년(숙종 7) 단종이 신원되면서 대군(大君)에 추봉되었으며, 1698년(숙종 24) 임금으로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이라 하였다.
혁파되었던 순흥도호부 역시 1683년(숙종 9) 복설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속에 1719년(숙종 45) 순흥도호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숙종의 허락을 받아 그 유허지에 금성대군 신단을 설치하였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순흥도호부 관련 유물 가운데 관인官印은 청동주물로 만들어진 것으로 크기는 가로 세로가 6㎝이며 순흥부인順興府印이라고 양각되어 있다 .
순흥도호부 유물(順興都護府 遺物.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순흥도호부 관련 유물 가운데 관인(官印)은 청동주물로 만들어진 것으로 크기는 6㎝×6㎝이며 ‘순흥부인(順興府印)’이라고 양각되어 있다. 유물의 상태나 크기로 보아 순흥부가 복치(復置)된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순흥도호부 관련 2점의 현판(懸板)은 일부 파손되기는 하였으나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제작 시기는 조선초기일 가능성이 있다.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초기 관아의 현판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점과 조선시대의 관인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들 유물의 가치가 인정되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압각수라고 불리는 금성대군 위리안치지 근처의 은행나무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금성대군이 사사되고, 순흥도호부가 혁파되자, 압각수 역시 말라 죽어 순흥의 백성들은 비통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이때 어떤 노인이 지나가다가 말하기를 “흥주(興州)[순흥] 고을이 혁파되어, 은행나무가 죽었으니 은행나무가 살아나면 흥주가 회복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말에 감개한 순흥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전송해 왔는데, 1681년(숙종 7) 봄에 비로소 은행나무에 새 가지가 나고 잎이 퍼지더니 과연 1683년 순흥도호부가 복설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언젠가 순흥도호부가 복설되고, 금성대군이 복권될 것을 믿는 순흥 사람들의 믿음이 실현된 것이다. 또, 1719년(숙종 45)에는 순흥도호부사 이명희(李命熙)가 숙종의 허락을 받아, 금성대군의 유허지에 금성대군 신단을 설치하여, 금성대군의 충절을 추모하게 되었다.
첫댓글 순흥도호부 지역에 단종복위운동의 참화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은 소수서원과 인근 부석사와 함께 더욱 발전이 되어
순흥면이 영주시와 함께 큰 고을이 되었을 것입니다.
선조들의 일편 단심의 그 일념으로 오늘날에도 경상도 북부지방은 절개 곧은 고장으로
그 빛이 찬란합니다.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