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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쌤
톡톡 튀는 캐릭터와 적재적소에 나오는 유머 덕분에 순식간에 읽었어요. 고쌤의 장점이 백분 발휘된 글이에요. 시어머니는 남편은 ‘니’라고 부르지 말라면서, 며느리는 ‘니’라고 부르네요. “새아가” 같이 스쳐 지나갔던 단어들도 그 의미를 곱씹게 돼요. 호칭이라는 일상적인 소재로 익숙했던 가부장제의 문화를 낯설게 보게 하는 좋은 글입니다. 저는 시어머니의 변화가 인상적인데요. 필자가 시대에서 “딸같이” 행동할 때 처음에는 어떤 반응이었는지 궁금해요. 또 “스스로 변하고자” 노력한다고 했는데, 어떤 행동을 보고 그 노력을 느꼈을까요. 변화의 계기가 있었을까요. 아니면 시어머니 자체가 유연한 성격이었는지 궁금했어요. 내게 굴욕감을 주려는 사람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마지막 문단이 마음에 와 닿아요. 어떻게 부르고, 무엇을 질문하는가. 작은 말 하나에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는 걸 배웁니다.
은유 - 11년차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예상외로!) 좋다고 했는데, 다음 단락에서 “시가족들”은 내게 관심이 없다는 내용이 나오니까 모순돼요. 어머니도 시가족이니까요. 시가족이 구체적으로 누굴 말하는지,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다는 게 무슨 뜻인지 조금 구체적으로 풀어주세요.
오늑
“내가 관계를 맺어야만 나의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 걸까?” 이성애자는 연애 경험이 전무해도 이성애자라고 하면 쉽게 믿으면서, 왜 동성애자나 양성애자, 범성애자는 의심하는 걸까요. 저도 동반자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가 다양해지면 좋겠어요. 법적 결혼을 선택하지 않은 이성애 부부에게 어떤 편견의 시선이 따르는지 이 글을 통해 알게 됐어요. 그런데 “배우자, 반려자, 반려인” 세 단어를 통일하지 않았던 사례가 그 예로 적절한지 모르겠어요. 모두 성별을 특정하는 단어가 아니라서요. ‘남편’이란 단어를 안 쓰는 것과 이 호칭들을 통일하지 않는 건 다른 문제로 보여요. 책에 남편이라고 적지 않았다고만 해도 의미 전달이 충분하겠어요. 전 “작가들도 다양한 선택지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라는 마지막 문장이 아쉬워요. 어떤 호칭으로 부르냐는 결국 자기 욕망을 드러내는 일이라서요. 이 문장은 빼면 더 좋겠어요.
(“나는 그를 만나고 나서 나는 단순히 이성애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그를 만난 게 성 정체성 인식의 계기(인과관계)처럼 읽히는데 문맥상 그를 만난 이후(시점의 문제)에 알게 됐다는 뜻으로 읽히거든요. 정확하게 수정해주세요.)
나오미
제주의 거친 바람을 맞으며, 어머니의 확고한 신념과 부딪히며 꾸려온 농사.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키고자 예초기 사용에 도전하는데요. 될 듯 말 듯 하던 예초기가 윙윙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장면에서 저도 쾌감을 느꼈어요. 이젠 어깨가 아파 짊어질 엄두가 나지 않지만, “거뜬히 기계의 무게를 받았던 뿌듯하고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충분하다”는 필자. “여자가 혼자 농사 지으니 힘들겠다” 안타까워하는 소리가 편견일 뿐이라는 걸 삶으로 보여주네요. 중간에 “잠시 누군가 가까이 있어 혼자가 아니라 든든했다”란 문장이 있는데요. 여기서 “누군가”가 예초기인 것 같은데, 전 처음에는 사람인 줄 알고 한참 헤맸어요. 누군가에 처음부터 따옴표를 넣든, 예초기라고 표현하든 독자가 헷갈리지 않게 하면 좋겠어요. 세 번째 문단이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서 잘 읽히지 않네요. 농사짓는 이야기라는 큰 맥락과도 선뜻 연결되지 않고요. 전 어머니와 다르게, 내 방식으로 성취해온 농사의 자부심을 이 글의 주제로 보여요. 그 주제에 집중해 어머니와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풀어내면 좋겠어요. “오십이 되어 명함 없이 농사를 시작했다”는 문장이 인상적이에요. 첫 문단은 바람 이야기가 중심이라서요. 농사 이야기인 두 번째 문단부터 시작하면 좋겠어요.
홍주
“남자밖에 없어서 칙칙했는데, 여자 신입이 와서 부서 분위기가 밝아졌다”라니. 표면적으로는 남성을 깎아내리는 말 같지만, 여성을 대상화하는 말이네요. 여성이 직장에서 겪는 차별을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써내려간 글입니다. 필자가 “소소한 반항의 물결”이 되고자 회사 생활 대본을 새로 쓰는 장면이 인상적이에요. 그 결심 이후의 이야기가 설명적이라 아쉬운데요. “남성을 주연으로 만들기 위한 감정노동”은 무엇이었는데 하지 않았는지. “상사들의 질 떨어지는 농담”은 어떤 것이었는데 웃어 주지 않았는지. “사무적으로 답”하는 건 어떤 태도인지. 장면으로 보여주면 읽는 사람도 비슷한 상황에서 참고가 되겠어요. 태도 변화 이후 업무에 더 집중하게 되고, 그들도 더는 요구하지 않았다는 게 놀랍네요. 이후 맡게 된 “상상 못할 큰 프로젝트”는 무엇일까요? 구체적으로 표현해 주세요. 마지막 문장도 좋았는데요. “2호선 출근 지하철, 오늘도 나는 기꺼이 예의 없는 여자 후배가 되려 한다.” ‘여자 후배’는 그들이 보는 나이니까, 나는 그 표현을 긍정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작은따옴표를 넣어주면 좋겠어요. “웃음기 하나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찬”이란 문장은 빼면 좋겠고요. (중간에 나오는 ‘공대 아름이’는 무슨 뜻일까요?)
상온
“그만큼 중요한 일인가?” 문제를 제기할 때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내적 갈등을 잘 표현한 글입니다. 상대가 음료를 손에 들기 난감한 상황인데도 비닐은 없다는 말로 일관하는 직원의 모습이 참 답답한데요. “퉁명스럽고 무례하다”라는 설명보다는 점원의 행동이나 표정, 말투를 구체적으로 묘사하면 좋겠어요. 독자들도 그 상황의 부당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요. 혹 다른 손님과 다르게 대한 건지도 궁금했어요. “당신의 행동은 옳지 않습니다!” 첫 문장이 어조가 강하고, 관념적인 이야기로 이어져서요. 사례가 나오는 두 번째 문단부터 시작하면 좋겠어요. 이 글은 필자가 용기를 내는 과정을 그린 거라 키오스크 사례가 오히려 시선이 분산시키는 것 같아요. 카페 사례를 풀어가는 과정에 집중하면 좋겠어요. 고객의 소리에 올린 글을 인용해서 좋았는데요. 전하고자 하는 핵심 문장만 두세 개 넣어 주세요. “카페 안에 들어선 장애인과 동행을 배려하지 못한다면”이라고 했는데, 폭넓게 생각하면 틀린 표현은 아닌데 정확한 표현도 아닌 거 같아요. 어쨌든 카페에 동행해 음료를 마시고 나간 거니까요. 같은 상황이라면 손에 짐을 많이 든 사람도 난감했을 거 같아요. ‘배려’라는 표현도 마음에 걸려요. 통행권은 배려받을 일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니까요. “휠체어를 밀기 위해 양손이 필요한 점은 자명합니다” 정도만으로도 문제 제기는 충분해 보여요. 이 글에서 중요한 건 필자가 “문제 제기”를 하는 경험을 해본 거니까요. “이번 시도가 쓸모없다 해도 이 일을 기억하겠다”는 필자의 다짐이 좋았어요.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변화를 위한 실천에 퐁당 뛰어든 모습이 멋지네요.
은유 - “불만을 입밖에 내고 조리있게 정리해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이니 적확한 말이 떠오를 리 만무했다.” 이 문장 자꾸 표현해봐야 하는 필요성을 잘 보여줍니다.
작은나무
쉴 새 없이 밑줄을 그으며 읽었어요. “쉽게 치부했으나 한 끼 식사에 들어가는 노동은 상당했다.”, “누군가 말하기 전에는 그 노동에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되는 남편의 삶이 한편으론 부러웠다.” “화목한 가정은 화목한 식탁에서 유래한다는 환상에 젖어” 등등. 경험해보지 않으면 한 줄도 쓸 수 없는 표현들이에요. 밥을 푸려고 봤는데 밥솥이 비어 있는 장면에서, 구체적으로 살림 지시를 내려달라고 남편이 말하는 장면에서 한숨을 푹 내쉬었네요. 너무 당연시 여겨와서 뭐가 문제인지부터 상대를 설득해야 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그마저도 노동이 되어 포기해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저는 질문을 자신에게 돌리는 결말이 좋았어요. 저 역시 화목한 식탁에 집착하던 사람이라 이 글을 읽고 환상에 균열이 갔습니다. 필자가 가진 화목한 식탁에 관한 환상은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궁금하네요. 저도 한 번 그 환상이 왜 생긴 건지 생각해 봐야겠어요.
은유 - “나는 왜 그 많은 반찬가게와 밀키트를 외면하고 불앞에서 기꺼이 서 있기를 택했을까.” 이 질문이 좋아요, 식탁 환상과 이어서 풀어주면 될듯해요.
혜원
“잠을 깬 엄마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숨이 막히는데도 엄마를 밀어낼 수 없어 가쁜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눈에 선하네요. 이 장면이 필자와 엄마 사이에 얽힌 폭력의 역사와 애증의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처럼 다가와요. 전 “그 여름밤 엄마는 나를 사랑했을까”가 제목이어도 좋겠어요. 한 문장 한 문장 눌러쓴 것 같아요. 혜원이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둔 주제이기 때문이겠죠.세 번째 문단에 엄마로 끝나는 문장이 반복되는데요. 명사로 끝나는 문장은 두세 번만 반복해 주세요. 강조를 계속하면 강요하는 느낌이 들고, 읽고 나서 장면보다는 엄마라는 단어만 남아서요. 주로 어린 시절 사례가 비만인 딸을 통제하려는 장면이 많은데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해요. “취업 직후 나는 엄마에게 복수를 시작했다”라고 했는데 취업 직후였던 계기가 있는지 궁금했어요. “그 여름밤 엄마는 나를 사랑했을까. 그날도 나 때문에 불행했을까.” 필자가 자신에게 던지는 마지막 질문의 울림이 커요. 전 여기서 끝나면 좋겠어요. 딸이라서 미워하면서도, 딸이라서 모든 감정을 쏟아낼 수 있다는 엄마. 비슷한 경험을 해서인지 마음이 아팠어요. 혜원님의 직면을 응원해요.
은유 - 눈물과 화에 절여진 짱아찌가 되어 살던 나, 가슴아픈데 너무 와닿는 표현입니다.
글월
계란 20판을 실은 오토바이가 어떻게 과속방지턱을 오를까,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읽었어요. 배달 노동에 대한 묘사가 생생해서 간접 경험을 하는 듯했어요. 한겨울 꽁꽁 언 몸을 오뎅과 소주를 먹으며 녹이는 장면도 생생하고요. 이 글은 사법시험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던 필자가 배달 노동을 시작하며 불면의 밤과 작별하게 된 이야기인데요. 중심 사례가 시장에서 노동한 이야기인데, 중반까지 사법고시 이야기가 나와요. 앞부분 사법고시 이야기는 한 문단으로 줄여 주세요. “불안이 자취를 감추고” 잠을 잘 자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요? 중요한 전환인데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네요. 예를 들어 “고된 몸 노동을 하면서 오지 않은 미래를 불안해하기보다는 지금 여기에 몰입하게 되었다”든지. 불안이 왜 해소됐다고 생각하는지, 필자만의 해석이 나오면 좋겠어요. 그 전환이 이 글의 주제이니까요.
아무튼
파라오의 분노가 아니라 파라오의 자유네요. 갑자기 이집트 여행을 계획하고 홀로 떠나다니. 읽는 것만으로도 제 가슴이 뻥 뚫려요. “몇 번의 클릭만으로” 구할 수 있는 항공권인데 일상에서는 떠나기 왜 이리 힘든지. “파라오의 분노”는 어떤 놀이기구일까요? 이집트 여행을 결심하게 한 신비로운 세계가 어떤 풍경이었는지 궁금해요. 떠남의 중요한 계기라 알려주면 좋겠어요. 이집트 남성들이 성희롱한 것은 “살갗을 내놓은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성차별적인 문화가 전반에 깔려 있기 때문으로 보여요. 자칫 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릴 수 있는 표현이라 고민해보면 좋겠네요. 또 여행의 해방감을 이야기하는 글인데 이 사례가 왜 들어갔는지 궁금해요. 그런 차별적 경험에도 이방인이라는 위치가 주는 자유가 더 컸다든지. 뭔가 해석이 있으면 좋겠어요. 그 후 “자유의 일주일”을 몇 번이나 가졌는지, 어떤 나라들을 갔었는지 궁금해요. 독자는 ‘데러라 리비’를 모를 가능성이 커서요. (은유-지금 몇 살인지 알려주고) 잠정휴무인 여행을 재개하는 시기가 오십 세인 이유를 구체적으로 적어주면 어떨까 해요. 그러면 무엇을 놓아야 그때처럼 훌쩍 떠날 수 있는지가 보일 수도 있겠어요.
인디고
“언니의 말은 내 앞으로 온 초대장 같았다.” 나를 초대하고 환대해준 ‘언니’의 떠남을 계기로 필자는 마음속에 알 수 없는 허전함을 느끼는데요. 저도 별로 가깝지 않은 사람이었는데도 그 사람이 떠나고 나서 허전함을 진하게 느낀 적이 있어요. 둘 다 육아로 바빠 친해질 여유는 없었지만, 투정부리는 아이로 진땀 빼고 있을 때 어깨에 걸친 가방을 들어 주는” 모습에서 동지애 같은 게 느껴져요. “상실은 그만큼 나에게 소중한, 커다란, 무언가가 있었다는 흔적이기도 하다.”는 깨달음이 좋았는데요. 마지막에 글이 일반론으로 빠져서 아쉬워요. 언니의 이야기가 중심 서사이니, 그럼 ‘언니’는 나에게 어떤 흔적이었는지, 왜 소중한 무엇이었는지 짚어주면 좋겠어요. 필자가 13년을 살던 동네를 떠났던 계기도 이야기해주세요.
아임
“좋은 애인을 찾지 말고, 좋은 ‘사람’을 찾으면 되는구나 깨달았다.” 단어 하나만 바꿨을 뿐인데 시야가 확 열리네요. “같이 살려면 먼저 자기가 어떤 습관을 가진 사람인지 알아야 하니까 서른세 살까지는 각자 알아서 산다.”, “혼자 있고 싶은 날엔 인형을 세워놓든 뭔가 표시를 하는 건 어떨까, 의논만 해도 재밌었다.” 같이 사는 과정을 함께 그리며 의논하는 과정도 인상적이에요. 삶의 형태는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다는 걸 잘 보여주는 글입니다. 특히 모여 살면 집안일의 분자는 작아지고 분모는 커진다는 비유가 설득력 있네요! 몇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서른네 살에 모여 산다면, 그때까지 몇 년 남은 걸까요. 필자의 나이가 나오지 않네요. 여성이라고 모두 성평등을 추구하지는 않을 텐데, 강민언니를 특별히 떠올린 이유도 궁금해요. 단지 “같이 살면 재밌겠다” 장담해서만은 아닐 거 같아요. 페미니즘이 필자에게 중요한 파트너의 기준이니까요. “내가 필요한 건 내가 선택한 가족이었다. 그 사람이 꼭 사랑하는 사람일 필요는 없었고, 그 방식이 결혼일 필요도 없었다.” 이 깨달음이 소중합니다. 많은 사람이 읽으면 좋겠어요.
종이
엄마와 딸의 입장이 팽팽하네요. 독립을 했지만, 자꾸 찾아와 살림에 간섭하는 엄마. 많은 사람들이 겪는 일일 거 같아요. 저는 독립 전 같이 살 때는 이런 갈등이 없었는지 궁금했어요. 엄마의 오랜 습에서 나온 행동이 아닐까 싶어서요. 이 글을 읽으니 “부모도 자식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는 시기가 온다”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나요. 독립, 자립이 혼자 하면 되는 일이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하네요. 저는 결론이 모호하게 다가왔는데요. 이번 이사에서 엄마가 얼마나 관여한 건지 불분명했고, 그래서 이제 간섭을 안하겠다 선언을 하신 건지, 또 다짐일 뿐인 건지가 모호했어요. 이 관계가 변하지 않는다면 변하지 않는 그대로, 변하고 있다면 변하는 것 무엇인지 지금의 상황을 보여주고, 필자의 고민이나 생각을 적으면 좋겠어요. 첫 문단에 독립하게 된 사연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자세해요. “부모님이 새로 분양받은 아파트가 회사와 멀어 얼떨결에 독립했다.”처럼 자의가 아니었다는 걸 표현하는 한 문장으로도 충분합니다.
내일
돌아가신 친구 어머니의 옷을 함께 정리하는 모습이 참 따뜻하네요. 정리가 끝난 후 후련함에 마주 보고 웃는 장면도 좋았어요. 죽음 이후 유품 정리에 대한 이슈가 저에게도 컸는데, 현실적으로 다가오네요. 중간에 옷 정리 원칙이 나오는데요. 1번은 그냥 버리지 않고 옷을 살펴보고 선별한다는 의미겠죠? 옷을 정리한다면 당연히 꺼내 살펴볼 거라 생각해서 왜 원칙인가 한참 생각했어요. 이 글은 친구가 두려워하던 유품정리를 직면하며 겪은 감정의 변화를 잘 표현했는데요. 이 변화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가 남긴 옷들은 사실 별개의 영역임을 온몸으로 느꼈다”이라고 했는데, 어머니의 옷이 친구에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연상시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싶어서요. 오히려 들여다보기 두려웠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옷 정리를 통해 직면한 게 아닐까요. 무엇이든 직면하고 나면 가벼워지잖아요. 이 문장이 옷 정리의 의미를 보여주는 주제 문장이라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좋겠어요.
나무늘보
결혼과 독립은 새로운 생활을 맞이하는 설렘이기도 하지만 낯선 행성으로의 이주이기도 하네요. 신혼집에 적응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필자의 글을 읽고서야 결혼 생활 역시 ‘적응해야 하는 낯선 삶’이라는 걸 배웁니다. 엄마와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의 생경함은 저도 겪었던 일이라 생생하게 다가왔어요. 물리적 공간부터 불리는 이름과 관계까지, 많은 것이 뒤바뀌는 과정이 결혼이네요. 사례가 생생하고 장면이 그려져서 좋았는데요. 결론이 추상적이에요. “새로운 익숙함이 이질적이지 않도록 내 방식을 변주하고 있다”라고 했는데, “새로운 익숙함”은 무엇인지, “내 방식을 변주하고 있”는 건 어떻게 하는 건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면 좋겠어요.
고르곤졸라
저도 서울 안에 비슷한 동네에서 살아서 공감하며 읽었어요. 직각이라 할 만큼 높은 언덕, 콜라 한 병 사려고 해도 10분은 걸어나가야 하는 동네. “서울에 이런 동네가 다 있냐”할 만큼 예스러운 정서와 풍경을 지닌 곳. 그런 곳까지 끊임없이 부수고 개발한다니. 언젠가는 이 풍경마저 사라지겠죠. 지명을 쓰지 않은 이유가 있을까요? 자세하게는 아니더라도 대략적인 구나 동은 명시해주면 좋겠어요. 첫 문장은 글이 갈 방향을 짐작하게 하면 좋아서요. “언제 이렇게 큰 건물이 ‘또’ 들어섰대?”로 시작해도 좋겠어요. 두 번째 문단부터 시작해도 좋을 거 같고요. “아직 허물지 못한 이 낡은 동네를 더는 허물고 싶지 않다. 조금 걷더라도 더 걷고 싶은 이곳에서 조금 오래 살아도 될 것 같다.” 중요한 문장인데, 표현이 어색해요. “이 낡은 동네가 더는 허물리지 않으면 좋겠다. 조금 더 걷더라도 계속 걷고 싶은 이곳에서 오래 살고 싶다.” 허무는 주체는 내가 아니니까 허물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으로 표현하고, 오래 살고 싶은 건 내 마음이니까 ‘~같다’처럼 모호하게 말고, 정확하게 표현해주세요. 읽는 내내 동네 길을 같이 걷는 듯 즐거웠어요.
은유 - “한여름 오렌지색 능소화가 피어나길 기다리고 있다.” 좋은 마무립니다.
여름밤
수도 생활을 그만둔 후 감정을 꽉 틀어막았던 필자. 임용고시, 프러포즈, 동생의 병 같이 중대한 사건들이 일어나도 쭉 써왔던 “일기가 백지로 남았다”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부서지는 나뭇가지처럼 감정이 말라버린 필자를 자극한 건 요가원에서의 명상 시간인데요. 수도원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필자가 대중가요를 트는 요가원에 다니는 장면이 참 아이러니해서 웃음이 나오네요. 제목 그대로 “그만둔 후”의 필자 마음을 섬세하게 묘사한 글인데요. 결정적으로 그만둔 이유가 나오지 않네요. 수도원에서 나는 왜 “폭풍 뒤의 폐허”가 됐을까요. “그 삶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 이유는 무엇이고, “수도생활에 실패하여 그만둔 것”이라고 느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애초에 수도회에 들어가기로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중요한 계기들이 나오지 않으니 그만둔 후 필자가 느끼는 감정들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음에도 독자에게는 모호하게 다가와요. 독자는 해소되지 않는 질문이 쌓이면 글 자체에 몰입하기가 어려워서요. 글의 주제가 “그만둔 후”의 이야기이니 수도회에서 경험을 다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만, 그만둔 계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언급하면 좋겠어요.
카뮈
“대학생쯤 됐으면 이제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알아야겠지?”란 교수님의 말에 필자가 반문하는 부분이 좋았어요. “똑같은 곳에서 똑같은 공부를 하고 똑같은 성공을” 추구하는 것만 배웠는데, “법적 어른이 됐으니 알아서 하고 싶은 걸 찾아라”라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황망할까요. 공교육이 얼마나 무책임한지 잘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도 필자는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나의 욕망”을 들여다보는데요. 엄마와 P의 욕망을 욕망했다고 했는데, 저는 두 욕망이 다르게 다가왔어요. 전자(엄마)는 투사(자기복제)이지만, 후자(P)은 단순 복제가 아니라 필자를 자극해 변하게 영향을 준 것 같아요. 누구에게도 영향받지 않는 ‘순수한 나’는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라고 생각해요. 두 욕망이 ‘진짜’ 나의 욕망인지 질문하기보다는, 두 욕망이 내게 준 영향과 그 차이를 들여다보면 어떨까 해요. (1번 글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 2번부터 시작하면 좋겠네요.)
첫댓글 시어머니의 변화에 대해 썼다가 넘 길어져서 뺐어요. 그건 또 한 편의 글감이라 ㅎㅎ 요즘 에세이들은 한 편의 길이가 참 짧던데, 그 정도 분량에 할 말을 어떻게 다 집어넣는지! 시어머니와 형님은 이제 가족의 영역에 반쯤 들여놓은 상태라 딱 뭐라 말하기가 힘드네요. 상황에 따라 달라가지고 ㅎㅎ 글을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쓰면서 분량은 조절하는 법은 너무도 어렵습니다.
다정하고 구체적인 피드백 늘 감사드립니다!
'독자는 해소되지 않는 질문이 쌓이면 글 자체에 몰입하기가 어려워서요.'
마음껏 솔직해지고 싶어 필명까지 지었음에도 쉽지 않네요ㅠㅠㅎㅎ 도리의 다정하고도 명확한 피드백을 반영하고 싶어 이번 글을 그 이유에 대해 써보고 있어요. 내어놓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과정자체를 피드백에 대한 피드백으로 알려드리고 싶어 댓글이라도 남겨봅니다. 정성스러운 피드백 항상 감사해요!
저의 직면을 응원해주셔서 감사해요. 일주일에 모두 읽어내고 리뷰하기 버겁고 어려우실텐데 도리님, 은유님 부디 몸도 마음도 잘 챙기시길 기도할게요. 과제를 하나씩 해나갈수록 마음 저 아래에 있던 저도 몰랐던 동굴들을 만나게 되는 것 같아요. 아플까봐 파낼 용기도 못내던 것들을 바라볼 용기도 조금씩 생기고요. 차수를 거듭하면서 쌓이는 도리, 은유의 리뷰 덕에 제 글을 다양한 방향에서 보게되는 것 같습니다. 메타포라를 하면서 얻은 가장 큰 성과는 제 글을 다시 바라보고 퇴고할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는 거에요. 리뷰들에서 제시해주신 방향과 궁금한 점들을 꼭 보완해서 언젠가 세상에 내놓고 싶네요. 감사합니다 :)
머릿속에는 아는 내용인데 애매한 문장들이 이렇게 드러나는군요
구체적으로 집어주셔서 감사합니다!